17화. 얼굴연식은 대학생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부터 3년 후엔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 1년도 안되어 서울 큰삼촌 댁에 모셔진 할머니마저 치매로 집을 나서, 길을 읽고 동사로 돌아가신다고 했다.
나는 그 이후로 반 알콜중독자가 되어 한동안 폐인 생활을 한다고 했다.
미래의 나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울하다!
교실 책상에 앉아 어제 제로가 한 말을 곱씹으며 뻑뻑해진 두 눈을 비비고 있을 떄였다. 갑자기 교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교실문을 들어서는 도만을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도만의 왼팔이 깁스를 한 채로 팔걸이에 걸쳐있었다.
"왜그래?" 내가 다친 팔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중에......" 도만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종혁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야, 뭐야!?" 종혁의 놀란 물음이었다. 그러는 사이 또 우민이 막 교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 자식들... 알았어!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자."
도만이 일어서 나가며 다가오는 우민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토요일에... 양철호 녀석이 기다리고 있더라고. 여기 청과물시장 아래, 왜 그 일제 때, 일본인들이 살았다고 폐가가 된 그 건물.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그 길로 지나다닌다는 것을 알고 길목을 지키고 서 있더라고......"
"그래서?" 우민이 재촉했다.
"뭐 그래서야, 그 폐가로 들어가 한 판 붙었지! 처음엔 내가 밀어붙였는데, 몇 대 맞더니 녀석이 어디서 났는지 각목을 집어 들더라고. 그리고 보시다시피......"
"그 뒤로는 뭐 없었고?" 우민이 다시 물었다.
"뭐... 깝치지 말고 살라던가... 뭐, 그런 시덥지 않은 소리를 혼자 하더니 가버리더라."
"어제 종민이 만났는데, 그 녀석 종민이 하고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2학년 때까지 검도부였다고 하더라." 종혁이 말했다.
"아씨! 그걸 이제 말해 뭐해?" 도만이었다.
"알았으면?... 그나저나 심상치 않다. 걔들 원래 학생들은 안 건드는 게 상식 같은 거였는데......" 우민의 침통한 표정에 잠시 다들 숙연해졌다.
양철호를 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왠지 이들 앞에서 추궁당하는 느낌이 들어, 자리가 불편해졌다.
"어쨌든 이만해서 다행이고, 걔 말한 거 보니 더 이상 진따 붙을 것 같지는 않네. 그나저나 너 이래서 오늘 모임 괜찮겠어?" 우민이 결론을 짓고 있었다.
"괜찮아! 조금 금간 것 정돈데......"
"좋아! 그럼 오늘 여섯 시 우체국 앞 어때?"
"그래!" 도만과 종혁이 대답하자, 대답이 없는 내 쪽을 셋이 바라봤다.
'젠장!'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6시 우체국.
통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철묵은 티나지 않게 살폈다. 평소 입지 않던 청남방에 청쟈켓, 브라운 계열의 면바지가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철묵이었다.
뒤늦게 오늘이 우민의 생일이라는 것을 들었다.
늦게 도착한 정읍중학교에 다니는 김종민이 합류하여 다섯 명이 우민의 삼촌이 하신다는 호프집에 들어갔다.
호프집은 시내 한 가운데 위치한 유명세가 있는 곳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알 만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황색의 조명들이 알맞은 조도로 전체적인 원목 구조와 어울려 따뜻함을 주고 있었고, 밖에서는 알 수 없었던 공간감이 내부로 들어서자 상당히 넓다는 느낌을 주었다.
'녀석들... 역시 물이 다르다는 건가?'
철묵은 자신이 어울리는 시기파와는 다른 클라스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들은 기껏해야 부모님이 안 계시는 틈을 타, 친구 집에 모여 술을 마시거나, 그도 아니면 안 보이는 공터나 학교 으슥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너희 대학생인거야... 잠깐! 얼굴 연식은 누가봐도 대학생인데! 하하하!"
삼촌의 말에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풋! 피식!-하고 따라 웃기 시작했다.
"옙! 삼촌이 그렇다면 그런거죠." 종민이 넉살 좋게 대답했다.
"좋아! 우민이 너, 너희 엄마한테는 절대 비밀이야. 니 엄마가 알면 나 죽이려 할 거다!"
"알았어요! 그만하시고 목 좀 축이게 해주세요."
"알았다. 인석아."
...... .
"철묵이 너는 왜 이렇게 말이 없냐?" 종민이었다.
"원래 그래. 스타일이야." 도만이 감싸듯 철묵이 대꾸할 새 없이 커버를 쳤다.
"어! 그래 철묵이 너는 학교 어디로 정했냐?"
술이 몇 잔 돌고, 양철호와 도만의 이야기를 필두로 그간의 만나지 못했던 기간 동안 일어났던 자신들의 주변의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동안 내내, 철묵은 침묵 속에서 제로가 말한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밀려드는 우울감을 떨쳐내려 애썼다.
철묵은 생각에서 깨어나 잠시 얼굴이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는 친구들을 보았다.
'너희도 너희 미래를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고 속으로 물으며.
"아직... 너희는?"
"나도 아직. 우민이는 전주로, 도만은 호고, 종민이는... 너 어디지?"
"젠장! 나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무조건 전주로 가라는데,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그 실력이 되냐고!?" 종민이 한탄을 했다.
"후훗! 그럼 솔직하게 말해. 저는 그 실력이 아닙니다, 하고. 풋!"
"웃을 때 아니다. 나 심각해! 아버지 전주에 집까지 사 놓으셨어."
"응? 정말!?"
"아버지도 내 실력이 못 미치는 줄 알아. 그런데도 어떻하든 보내시겠다는 거야."
"잘 됐다! 나 전주가면 너희 집에 얹혀살아야 되겠다."
"우리 아버지야 대찬성이실걸. 그게 너라면!"
"엉!?"
"저번에는 너 좀 데려오라더라.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널 내 과외선생 시키시겠다고......"
"크큭! 크크크... 야! 웃기지 좀 마! 새꺄!"
"이 자식들이! 정말이라니까!" 종민을 뺀 나머지 네명이 배꼽을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우민 삼촌의 호프집에서 나온 게 아홉 시 쯤이었다.
몇몇이 2차를 가자고 제안을 했다.
철묵도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이 우울한 기분과 꽉 채워진 머릿속을 비워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어! 근데 쟤 황지숙 아냐?" 종민이 어딘가를 보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누구? 아~! 문나이트 x밥 됐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종민과 종혁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새끼건달인 몇몇과 한 여자가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가죽쟈켓과 청치마를 입은 여자 애는 얼굴이 수수해 보였지만, 날씬한 몸매에 키가 170센티는 돼 보여, 같이 있는 새끼건달들과도 비슷해 보였다.
"근데 쟤 공부 꽤 잘하지 않았냐?" 우민이 물었다.
"지금도 잘 해. 학년에서 순위 안에 든다더라." 종혁이 말했다.
"그런데 왜 저러고 다니는 거야!?" 우민이 못마땅한 투로 다시 말했다.
그 순간 시선을 느꼈음인지 여자 애가 우민과 일행 쪽을 봤다. 그리고 알아보았는지 손을 들어보였다.
"야 뭐해 가자?" 도만이 종혁이 여자애에게 화답하기 위해 손을 들려는 팔을 붙잡으며 돌아섰다.
철묵은 여자애의 낮빛이 어둡게 변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오랜 동안 자신의 뇌리에 각인될 거라는 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한 철묵이었다.
2차로 간 호프집은 역전 사거리에 있는 규모가 작은 가게였다.
일행이 들어서자 여사장으로 보이는 40대의 여성이 반갑게 맞았다. 자주 이용했던 모양새였다.
"너희 여기 자주 왔나보네?" 철묵이 모두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응. 여기 우리 단골집. 처음엔 대학생이라고 속였는데 이제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아." 도만의 말이었다.
"그럼 우리 중학생인 걸 안다는 말이야?"
"야! 쉿! 거기까지는 모르지... 그냥 대학생은 아닐거라 생각하겠지만......" 도만이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조용히 말했다.
"뭐 어때! 우린 술 마실 수 있어서 좋고, 사장님이야 술 팔아서 좋으면 됐지. 안 그래?" 우민이 나직한 소리로 정리를 했다.
술이 한 잔씩 돌고 나자, 누가랄 것 없이 담배도 테이블에 꺼내놓고 피우기 시작했다.
아주 자연스러웠고, 그런 점에서 철묵은 오랜만에 자유로움을 느꼈다.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술, 담배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마도 처음인 듯싶었다.
"야~! 철묵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술이 세다!" 종혁의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이 한 잔 비울 때, 철묵은 두 잔씩 비웠기 때문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술이라면 이들보다 자신이 먼저 시작했을 것이라 철묵은 생각했다. 게다가 혼자서 홀짝인 술이며, 시기파 애들과 어울리며 마신 술로 따지면, 지금이야 단골집까지 떡하니 만들고 마시겠지만, 자신에게는 따라오질 못할 샌님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철묵은 평소보다 많이 마셨고, 취기가 많이 오르기도 했다.
철묵은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게 싫어 화제를 바꿨다.
"우민 너는 왜 전주로 가려는 거야?"
"음... 딱히 이유라면 없어. 단지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이나 학과에 진학을 위해선 그곳이 유리할 거란 판단이지. 뭐, 그게 이유가 되겠네." 우민의 대답이었다.
취기가 오른 철묵이 평소답지 않게 다시 물었다.
"... 그러니까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유리함이라는 게... 그게 도대체 뭐냐구?" 철묵의 나지막한 소리지만 왠지 힘이 느껴지는 소리에 모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 글세... 물어보니까 하는 얘기다만... 아니, 이제와서 하는 얘기다만... 우리 중에 누가 그 누굴위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우민이 정색을 하며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철묵이 또렷이 우민을 노려보며 물었다.
"난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정의롭게 살고 싶은데, 그냥 그게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뤄지는 게 아닌 걸 알았을 뿐 야. 법이란 게 적어도 약자의 편에서 약자를 대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세상은 약자에게 너무도 가혹하고 , 법은 그런 약자를 보호하지 않아. 오히려 강자의 논리를... 입장을 대변할 뿐이지. 나는... 그 걸 본 것 같아. 나는 법관이 되고 싶어. 법에 기대 기생하는 부류가 아닌, 나 만의 법으로 정의를 세우고 싶어!"
우민이 평소답지 않게 흥분하고 있었다.
철묵은 꽤 많은 술을 마셨다. 모두와 헤어지기까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엔 갈지자를 그리며 비틀거렸다. 집에 도착해서는 아예 기다시피 하여 방으로 들어가 뻗어버렸다.
-1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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