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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55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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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4.02.10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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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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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글자
21쪽

14화 - 3

DUMMY

“휴우.”


체육시간이다. 나는 하릴없이 운동장이 잘 보이는 계단에 앉아 아이들을 구경하고 있다. 왜, 그런 애들 있잖아. 체육시간마다 하라는 체육활동은 안 하고 자리 잡고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는 애들. 공기를 마신다거나, 존재하고 있는 게 체육시간 동안 하는 것의 전부인, 공허한 영혼들.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사람마다 다 기질이 다르니, 운동이 싫을 수도 있지.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운동 좋아하는 남자애들 중에도 그런 애들이 많았는데 하물며 여고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한 1/3 정도 되는 애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앉아만 있다. 조회대 옆 큰 계단 터에.


문제가 있다면 나도 거기 앉아 있다는 것이다. 여고의 체육시간은 너무도 단조롭다. 친구들과 함께 있다면 신나게 축구를 했을 텐데. 지금의 나는, 이렇게 앉아만 있다. 내가 무얼 하겠는가.


“꺄하하하!”

“아앗! 너무하잖아!”

“미안 미안.”


뭐지, 저 여자애들. 하이틴 드라마라도 찍고 있는 건가. 분명 반에서 말뚝박기라도 하며 놀 것 같은 기세의 애들이었는데, 체육시간이 되니 저러고 발랄하고 우아하게 피구를 하고 있다. 서로 간의 가식적인 웃음과 가식 또한 일품이다. 참, 무슨 접대 피구도 아니고. 게다가 피구라고 하는 것도, 남자인 내 입장에서 보면 헛웃음만 나오는 정도다. 남자애들이었으면 피구왕 통키 부럽지 않게 불꽃 슛을 쏘고 그럴 텐데.


“…….”


힐끔 여자애들을 둘러본다. 멍하니 숨만 쉬고 있는 남자 중학교 때의 남자애들과는 달리 아예 판을 차리고 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보고 있거나 하는 애들이 많다. 물론 숨만 쉬고 있는 애들도 많지만. 리유 역시 그런 잉여 패거리 중 한 명이다.


“피구 안 해?”

“응, 애들하고 안 친해서.”

“아하하. 되게 발랄하게 말한다?”

“응응. 히히, 어쩌겠어 내가.”

“허허……”


리유에게 말하니 리유는 방긋 웃으며 굉장히 밝게 말한다. 밝게 말할 만한 내용이 아닌데. 그래도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마냥 좋아라 하는 리유다. 희세는 피구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중심에서 빛나며 즐기고 있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희세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살짝 얼굴이 상기돼 공을 던지는 모습은 꼭 여전사를 보는 것 같이 듬직하고 매력 있다. 성빈이 역시 열심히 공을 막고 있다. 뭐, 희세만큼 운동신경이 있지 않고 도리어 운동을 못 하는 편이라 금방 떨어져서 반대편 라인으로 풀이 죽어 걸어가지만.


“…….”


힐끔 성미와 눈이 마주쳤다. 성미는 운동을 잘 하는 편도 못 하는 편도 아니기에, 그럭저럭 활약하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한순간 경멸하는 듯한 눈빛이 되었다가 눈을 앞 쪽으로 돌린다. 아, 망했어. 겨우겨우 달래서 애들 있는 곳으로 왔을 때부터 이런 냉전 상태다. ‘뭐야 뭐야, 변태 씨가 무슨 짓 했어?’, ‘왜 울어! 어디 다쳤어?!’ 같은 말을 하며 여자애들은 성미를 에워쌌다. 동시에 나를 향해 도끼눈을 치뜨고 맹수가 이를 드러내는 것 같은 기세를 보여준다. 뭐라 변명해야 할지 난감한데 성미가 ‘체육창고에서 넘어져서, 너무 아파서 울었어.’ 하고 괴상한 변명을 해서 다행히 살아남았다. 성미가 배려해줘서 다행이야, 하지만 냉전 상태인 건 어쩔 수가 없나보다. 크윽…… 진짜 변명이 아니라 내 잘못이 아니잖아!


“…….”


운동을 하지 않는, 계단에 앉아 있는 애들 중에 힐끔 채영이를 쳐다봤다. 채영이는 조용히 독서를 하고 있다. 할 일도 없기에, 빤히 채영이를 바라보니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더니 살짝 볼이 발그레 해져서 내 시선을 피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몸을 내 쪽 반대로 향하게 하는 것은 보너스다. 크윽, 이것 역시 피눈물 나는 오해가 있는 일인데…… 난 억울하다고!!


“변태 씨! 뭐해, 변태 씨도 하자!”

“아아…… 그래도 될까. 밸런스 붕괴 될 텐데.”

“헤에, 자신만만한데! 그 정돈 돼야지, 남자새끼가! 덤벼!”

“아하하. 그럼 어디…….”


멍하니 그렇게 산소를 소비하고 있는데 활기찬 목소리가 불현 듯 내 앞에서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굉장히 신나 보이는, 축구 유니폼 차림의 정희. 다른 여자애들의 분홍색 얌전한 체육복과 대비되는 남성적인 유니폼이다. 정희라면 충분히 어울리지만.

체육시간이야말로 정희의 진가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시간이다. 운동만큼은 희세와 버금가는, 아니 어떤 면에서는 희세를 능가하는 정희다.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잘도 노닌다. 남녀공학이었다면 남자애들과 축구도 같이 했을 것 같은 패기다. 여자애들끼리 대충 하는 피구임에도 어찌나 정열적으로 뛰어다녔는지 목덜미가 땀으로 젖어 있다. 짧은 숏컷의 머리칼도 땀에 젖어, 꼭 영화에 나오는 여전사 컨셉 여배우 같다. 희세가 꾸며진 가공의 여전사 같은 느낌이라면 정희는 정말 적장의 목을 따올 것 같은, 한 마리 야생마 같은 건강미 넘치는 느낌이다.

땀에 젖어 활기차게 웃고 있는 정희는 묘한 매력을 물씬 발산한다. 가만히 앉아만 있던 나도 일으킬 정도로. 사실, 성미 때문에 껄끄러워서 운동 안 하고 있었던 건데 정희가 권유한다면 충분히 참가할 만한 명분이 생긴다. 다른 여자애들 눈치를 살피니 그리 껄끄러워 하는 눈빛이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격적으로 피구에 참여하게 됐다.


“크핫!”

“죽어랏! 필살 파이어 블라스터 폭풍 슈팅!”

“뭔 개소리야! 그아아앗!”

“꺄하하하하! 제법인데!”


나는 경기에 끼어들며 이런 해이한 마음가짐으로 참여했다. ‘어차피 여자애들이 하는 피구 경기니까, 대충 어울려주듯 해야겠다’ 라고. 여자라고 무시하는 게 아니다. 여자라고 차별하는 게 아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차이’ 이니까. 내가 정말 진심으로 풀 파워로 공을 던진다면, 열혈파에 체격 조건도 나와 비슷하고 근성 또한 남자애와 다를 바 없는 정희라면 충분히 받을 수 있겠지만, 다른 여자애들은 자칫 잘못하면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남자애들끼리도 농구 하다 다치거나 축구 하다 고자가 되거나(?) 하는 경우는 충분히 많이 있는 일이다. 강인한 남자애들끼리 경기를 해도 그렇게 다치는데 하물며 여자애들이야 더 말할 게 있겠는가. 체급이 다른 경기가 돼 버리잖아.

하지만 정희와 함께 맞서게 되니 열혈 피구 만화 못지않게 불꽃 튀는 대결이 돼 버렸다. 정희는 나를 데리고 와선 ‘너랑 싸워야 하니까 너는 반대편으로 가’ 하고 말한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정희의 상대편으로 들어갔다. 그 팀은 안타깝게도 희세가 중심에서 이끌고 있던 팀이다. 천만다행인 건 성미는 반대편이라는 것. 껄끄러웠는데 다행이잖아? 희세는 특유의 틱틱대는 말투로 ‘재수 없어, 방해나 되지 마. 변태 새끼.’ 하고 말한다. 오늘 이런저런 변태 관련 일들이 많았기에, 평소에도 별 의미 없이 내뱉는 희세의 ‘변태새끼’ 라는 말이 유난히 가시가 되어 가슴에 박히는 기분이다. 뭐, 괜찮아. 괜찮아. 난 변태가 아닌 걸.


가벼운 마음으로 좀 건방지게 말하면 여자애들과 놀아주려(?) 시작한 피구. 하지만 그것은 곧 일군의 한 장수와 적장이 창을 맞대는 단기 대결이 된 지 오래이다. 이쪽 편의 나와 상대편의 정희. 희세마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 돼 감히 둘 사이의 대결에 다리를 얹지 못한다.

정희는 정말 대단하다. 여느 남자애 못지않은 완력에 강인한 체력, 엄청난 순발력 등 도저히 여자애라고는 믿기지 않을 피지컬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피구를 하기 전부터 땀이 나도록 피구를 하고 있었음에도 전혀 지치는 기색 없이 풀파워로 공을 던진다. 나는 축구나 농구는 잘 해도 피구는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는 해본 적이 없기에,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공 던져서 적당히 맞추려 할 뿐이지. 하지만 던지는 족족 정희는 굉장한 속도로 움직여 공을 잡아챈다. 그리곤 어떤 남자애도 부럽지 않을 강한 힘을 실어 공을 던진다. 그 공 역시 내가 다 잡아냈다. 허나 손이 얼얼하다. 정말, 대단하구나.


“하핫, 제법이야.”

“……나는 네가 더 신기해.”

“계속 해야지! 야아아앗!”

“크흣.”


정희는 씨익 웃으며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는다. 나는 진심으로 정희와 싸우고 있는 심정을 말했다. 이에 정희는 호쾌하게 웃으며 공을 꽈악 쥔다. 다시금 강하게 공을 던진다.


나와 정희는 계속해서 땀과 열정을 쏟아내며 피구를 계속했다. 처음엔 나도 정희의 기세에 놀라며 열심히 경기에 임하려다가도, ‘이깟 피구가 뭐라고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 경기를 하다 보니 그런 잡생각도 다 사라졌다. 정희가 여자애든, 남자애든, 그런 것도 모두 잊었다. 그냥 내 앞에 있는 애를 쓰러뜨리고 싶다. 저 애에게 공을 맞춰 탈락시키고 싶다. 아주 원론적이고 단순한 승부욕에 사로잡혔다. 그건 정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경기장엔 나와 정희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집중을 많이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나와 정희밖에 안 남았다. 가끔 공을 피하거나 해서 튄 불똥이 다른 여자애들에게 향해 모두 탈락하게 됐거든. 해서 정말, 일군의 장수들이 일기토를 하듯, 상대편의 병사(?)들은 모두 반대편 자리 가장자리에 나란히 서 있고 나와 정희의 1대 1 대결이 계속된다. 공을 던질 때마다 땀방울이 반짝 허공에 떠 빛이 난다. 아, 멋지다. 이런 대결, 얼마만인가. 남중에 다닐 때에도 이런 가슴 벅차고 상쾌한 대결은 별로 해보지 못한 것 같아. 나는 점차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아지랑이 같이 느릿느릿한 기운마저 보이는 것 같고, 세상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다. 이게 무아의 경지일까. 호적수와의 대결을 통한 무아의 경지. 잠깐, 이거 끝나면 나 초절정 되는 거야?!


“으핫!”

“야압!”

“으허억!”


공을 한 번이라도 놓치면 굉장히 불리해진다. 나나 정희나, 적진 한 가운데서 싸우고 있는 꼴이기에, 공을 놓치면 바로 농락당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공을 놓쳤다. 잠시 정신 집중을 잘 못하여 미처 공을 잡지 못하고 피하게 됐다. 그리고 공은 정희 편 수비수들에게 넘어갔다. 여자애들 특유의 연약하고 장난 같은 공이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던진다면 충분히 위협적이다. 아프고 위협적이고를 떠나 피구라는 게임은 그냥 공이 닿기만 해도 지는 거니까.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겨우 공을 피했다. 간신히, 성미와 눈이 마주쳐 어색해진 틈을 타 성미가 대충 던진 공을 잡았다. 그 사이에 정희는 열심히 숨을 고르며 체력을 보충하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씨익 웃는다. 아아, 정말 괴물 같은 여자애일세. 여자애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야. 아니, 충분히 남자애들하고 격한 운동해도 될 것 같은 애야.


“으햐아아앗!”

“!!“


이 긴 소모전을 끝내기 위해, 난 기발한 책략을 생각했다. 그런 거지, 체스에서 이기기 위해 왕을 먼저 움직이는, 무모하고 병신 같은 계략. 지금까진 몸을 사려왔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끝내야 할 때. 나는 링의 끝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정희는 움찔 놀란다. 설마 달려와서 냅다 공을 던질 거라곤 생각이 들지 않았겠지. 내가 달리며 공을 던지는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 달리며 붙은 속력에, 최대 파워로 던지는 이 공! 그것은 마치 중세 기사의 랜스 차지의 위력과도 버금가지! 좀 과장이 심한가. 어쨌든! 내가 낼 수 있는 최고 파워의 공을 정희에게 던졌다. 정말 열정으로 따지면 공 주위에서 불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던지면서 문득 살짝 걱정이 들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풀파워 공을 혹시라도 정희가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받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나는 순식간에 ‘겨우 피구 따위 이기려고 여자애에게 전력으로 공을 던진 나쁜 새끼’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고, 전교에 소문이 나겠지. ‘찌질이’, ‘등신’, ‘변태’ 등의 불명예스런 호칭들은 덤이겠지. 잠깐, 공 세게 던진 건데 어째서 변태까지 붙는 건데?!


걱정과는 다르게 정희는 아주 안정적으로 공을 받는다. 손이 따가운지 조금 얼굴을 찡그리긴 하지만 무난하게 공을 잡았다. 정희의 얼굴에는 씨익 미소가, 내 얼굴은 흙빛으로 바뀌었다. 희비가 교차하는구나. 필사의 필살기를 썼는데도 전혀 먹히질 않다니. 마치 만화에서 바바바방 때리고 ‘해치웠나?!’ 했는데 적이 자욱한 먼지를 가르고 ‘훗, 겨우 이건가. 간지럽군.’ 하는 느낌이다.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질겨. 정희랑은 척 지면 안 되겠다. 내 쪽에서 먼저 백기를 들 것 같아.


“네가 그렇게 한다면……!”

“젠장…….”


정희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하며 링 끝으로 간다. 내 얼굴엔 낭패의 빛이 돌았다. 똑같은 수로 맞서겠다는 정희의 의지이다. 현실은 게임 같은 게 아닌지라, 내가 쓸 수 있는 건 상대편도 어지간하면 쓸 수 있다. 다리 달려 있고 운동 신경 좋은 정희이니 못할 게 없다. 도리어 나를 능가하는 순발력과 민첩성으로 더욱 날랜 공을 선사할 수도 있다. 기본적인 힘은 남자인 나보다는 훨씬 떨어지겠지만. 못 받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정희, 생각보다 힘이 엄청나다. 꽤나 손 아프다구.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공을 받을 준비를 했다. 이제 피할 수 없는 법. 그대로 맞부딪힌다……! 새삼 비장하기까지 하다. 문득 ‘왜 피구에 이 정도까지 하고 있는 거지, 난.’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건 기분 탓이겠지. 정희는 선 바로 앞에서 내 쪽을 보더니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한다.


“흐아아아아앗! 슈퍼 일렉트로닉 자이로 쉐도우ㅂ…… 으악!”

“??!?”


정희는 약간 초등학생처럼 정체불명의 주문을 외우며 공을 던지려 했다. 아까도 그랬으니 그건 별 이견이 없지만, 내가 놀란 건 정희가 자리에서 뛰어 올랐기 때문이다. 달리는 속도에 뛰어오르는 탄력까지 더한다면……! 무슨 메테오 스트라이크 같은 괴물이 되는 건가! 하지만 어째, 정희의 표정이 예사롭지가 않다. 뛰어 오른 게 본인 의지가 아닌 것 같은 느낌. 뛰어 오른 순간 당황스러운 정희의 표정이 딱 보였기에 그렇게 느꼈다.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정희는 그대로 내 쪽으로 날아온다. 나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정희를 볼 뿐이다.


‘쿠당탕!!’

“으아앗!”

“끄아아악!”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정희는 의도하고 뛰어 오른 게 아니라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뛴 것이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정희는 그대로 내 쪽으로 와 나를 쓰러뜨렸고, 나와 정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정희가 뛰어오며 낸 먼지와 내가 쓰러지며 난 먼지로 잠시 피구를 하던 공간은 먼지로 가득해졌다.


“…….”

“…….”


여자애들은 콜록거리며 먼지를 제거한다. 나는 등에 돌 같은 게 느껴져 몹시 고통스러운 기분이다. 거기다 정희의 무게와 충격까지 가해져 더욱 고통이 배가된다. 키도 크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정희인 만큼, 다른 여자애들하고는 무게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정희를 놀리려는 게 아니라, 원래 근육이 지방보다 무거운 법이니까. 아까 본의 아니게 채영이를 내 몸 위에 놓게 됐을 때보다 월등히 무겁다. 아니, 이건 그냥 남자앤데?!

나는 먼지와 흙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머리까지 모래가 들어간 느낌이 들어 속으로 ‘아…… 거지같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뭔가 모르게 굉장히 기분 나쁜, 하지만 몹시 익숙한 공기가 느껴진다. 음, 그러니까 이건…… 어쨌든 기분 나빠! 하고 얼른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주위의 여자애들이 얼어붙은 것 같은 느낌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왜, 어째서? 얼른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굉장히 가깝게 나와 마주보고 있는 정희. 붉게 익은 얼굴에서 땀이 흘러 내 얼굴로 떨어진다. 화악 하고 정희의 체취가 물씬 느껴진다. 우와, 땀 냄새가 뭔가…… 기분 이상하게 만드는데. 여자애 땀 냄새라니. 아니, 내가 변태인 게 아니라, 화악 냄새가 나는 걸 어떻게. 게다가 무슨 달달한 냄새나 딸기향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찐덕한 느낌 그대로의 땀 냄새야. 난 변태가 아닌걸.

문제는 자세. 에─ 그러니까 이거를, 전문 용어로 기승위? 여성상위? 아, 오늘 이 자세 많이 취해보네. 아니 그게 아니라! 정희는 무릎은 땅에 닿고, 엉덩이는 내 몸 쪽에 걸치게 있다. 엉덩이가 내 영 좋지 않은 부위에 닿아 굉장히 남사스럽다. 거기에 정희는 달려오던 탄력이 남아 내 쪽으로 거의 밀착하다시피 쓰러져 있다. 본능적으로 달려오던 정희를 막고자 하는 내 몹쓸 양 손은 정확하게 정희의 가슴을 탁 만지고 있다. 아아, 어쩐지. 눈을 감고 있던 순간에도 손 쪽에서는 굉장히 행복한 감각이 느껴지더만. 이거였나. 정희는 분명 가슴이 작은 편이긴 하지만, 그건 체구에 비해 작다는 것이다. 결코 리유 정도의 납작 가슴은 아니고, 오히려 절대적인 사이즈만 놓고 본다면 성빈이를 능가하는 편이다. 거기에 운동으로 단련된 탄탄한 몸에…… 잠깐, 뭘 그렇게 상세하게 느끼고 있는 건데?! 진짜 매너남은 매너손도 하고 그러는데 왜 나는 이렇게 분석적이고 명확한 손을 가지고 있는 건데!!

정희도 나도 너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서로 멍하니 쳐다만 봤다. 무엇보다 나도 이렇게 가까이 여자애랑 몸을 바싹 밀착한 체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미, 미안…….”

“아, 아니, 내가 더 미안…….”


정희는 운동으로 빨갛게 익은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한 마디 한다. 나 역시 굉장히 창피해져서 얼른 손을 떼고 말했다. 주위 여자애들은 마치 조각상처럼 굳어 나와 정희를 쳐다보고 있다. 그 쳐다보는 시선이 더 창피하다. 잠시 그 자세 그대로 있다가 서로 너무 창피하다. 무엇보다 나는 특정 부위가 점점 패권주의로 주변국에 피해를 주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 그런 거 있잖아! 무협 소설에서, 기를 발하는 수준이 어느 경지를 넘어서서 굳이 육체가 닿지 않아도 타격을 가하거나 혈도를 점할 수 있는! 그런 거! 그래, 발기(發氣)!!


“이, 일어날게…… 으핫!”

“으헉!”

“에에, 미안…… 으흥!”

“으하앗!”


정희는 평소의 호쾌하고 남자애 같은 성격은 어디 가고 굉장히 수줍어하며 허둥댄다. 아무렴, 아무리 그래도 여자앤데 덥썩 남자애가 가슴을 만졌으니 부끄러울 만도 하다. 정희는 당황해서 일어나려다 팔이 미끄러져 못 일어난다. 일어나려던 엉덩이가 그대로 내 심볼을 적지 않은 충격을 가해 나는 등골까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고통이 아니다. 아니, 그럼 쾌감?! 더 변태 같잖아! 정희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더욱 당황하고 더욱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일어나려다 다시 한 번 미끄러지며 한 번 더 내 중요부위에 충격을 가해준다. 아, 이제 끝났어. 어떻게든 저지하려 했는데, 완벽하게…… 음, 내 생각엔 좀 자극적인 것 같군, 안 그래? 아니 정희는 왜 못 일어나는 건데! 그렇게 운동신경 좋은 애가! 거기다 왜 미끄러지면서 묘한 신음소리까지 내는데! 멀리서 본다면 틀림없이 야동으로 오해할 장면이다.

지금은 내가 남자인 게 너무 부끄럽다. 정희 역시 엄청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겨우 일어나서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부끄러워할 틈도 없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지금처럼 편한 자세로 누워 있으면 완벽하게 성장한 그것(??)이 너무도 당당하게 제 고개를 내밀기에, 얼른 자리에 앉은 것이다.


“…….”

“…….”


여자애들은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정희는 평소 정희답지 않게 굉장히 부끄러워하며 애들 사이로 숨어 버린다. 키가 170이 넘어 숨어봤자 별 의미는 없지만. 나는 모래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온통 모래투성이다. 모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당당하게 일어설 수도 없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는 일어났다. 여자애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으로 모인다. 이거 무슨 ‘세계인의 보고 있습니다 ○○을 자제해 주십시오 캠페인’도 아니고. 시선을 들어 슥 여자애들을 쳐다보니 모두 시선을 돌리며 나를 외면한다. 끝이야…… 모든 게 끝났어…… 그야말로 변태의 표상이 돼 버렸다. 그러니까 이런 걸, ‘인증’ 이라고 하는 거겠지? 변태 인증. 그것도 본의 아니게. 나는 작게 한 마디 했다.


“혼자 있게 해 줘…….”


내 말은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작가의말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즐거이 놀고 있습니다. 글을 못 쓰는 건 조금 찔리지만, 아주 오래간만에 노는 것이니 그것도 그것대로 괜찮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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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13화 - 2 +25 14.02.05 2,104 57 20쪽
51 13화. 전화위복 - 1 +21 14.02.04 2,698 53 17쪽
50 12화 - 4 +16 14.02.03 3,155 55 21쪽
49 12화 - 3 +24 14.02.02 2,586 73 22쪽
48 12화 - 2 +16 14.02.01 2,497 76 17쪽
47 12화. 데이트? 소풍? - 1 +23 14.02.01 3,041 65 18쪽
46 11화 - 4 +11 14.01.31 2,606 57 19쪽
45 11화 - 3 +21 14.01.31 2,711 69 17쪽
44 11화 - 2 +9 14.01.30 2,538 56 17쪽
43 11화. 시험 - 1 +7 14.01.30 3,003 106 19쪽
42 10화 - 4 +11 14.01.29 2,901 70 23쪽
41 10화 - 3 +11 14.01.29 2,760 56 22쪽
40 10화 - 2 +7 14.01.28 3,739 8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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