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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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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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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4.02.0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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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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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글자
19쪽

13화 - 4

DUMMY

“으음……”


세상이 온통 하얗다. 우주공간을 유영하듯 나는 양 팔을 벌리고 즐거이 그 흰 공간을 헤매고 있다. 하지만 그 짧은 즐거움은 사라지고, 곧 깨질 듯한 두통이 느껴진다. 안 돼, 나가고 싶지 않아. 여기서 좀 더 놀고 싶단 말야. 으으……


눈을 뜨니 어째 세상이 하얗다. 으음. 조금 정신이 없는데. 생각도 잘 안 돌아간다. 시야가 돌아오기 전에 문득 느껴지는 건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아득한 고통. 머릿속이 아픈 건 아니고, 뒤통수의 겉면이 아픈 느낌이다. 가만히 눈을 뜨니 시야가 점점 돌아온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익숙한 천장. 내 방인데. 지붕 구석의 검은 물곰팡이 점들이 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멍하니 천장을 보다 주위를 살폈다. 내 방은 내 방인데. 무슨 상황인지 잘 인식이 안 된다. 내가 왜 방에 있지. 나는 누구지. 왜 여기 있지. 음…….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러니까…… 오늘 일요일이지? 그래, 차근차근히 생각해보자. 일요일이어서, 할 게 없었고, 성빈이에 대한 생각하다가─


“아으…….”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일을 떠올렸다. 그냥 잊고 있어도 됐을 텐데. 성빈이에 대한 생각하다 마음 속 음란마귀가 깨어나 무엇인가 하려다 선생님한테 들켰잖아. 엄청난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절망했지. 그리고 찜찜함을 느끼고 샤워를 하러 갔지. 응, 선생님한테 제대로 허락도 받았고, 종이까지 붙이고 샤워 하던 중에……


“아으으으…….”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둘 걸. 그냥 없는 그대로가 나았을 것 같은데. 어쩐 영문인지는 몰라도, 샤워하는 중에 성빈이가 나타났다. 너무 깜짝 놀라서, 성빈이에게 사정을 설명하려 했는데 뒤에 있는 비누를 밟고 멋지게 미끄러졌지. 뒤통수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는 걸 느끼곤 그대로 정신을 잃었는데. 그리고선 내 방이라. 대충은 짐작이 가는군.


“엇.”

“……깼네.”


몸을 살짝 들어 주위를 살피려는데 갑작스럽게 여자애 목소리가 들린다. 깜짝이야! 여기 내 방인데! 옆을 보니 성빈이가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병간호라도 해주는 것처럼. 아아, 간호해 주는 게 맞나.


“아…… 그…….”

“…….”


나는 공연히 성빈이를 쳐다보고 얼굴을 붉혔다. 여러 가지 성빈이에 대한 생각이 한순간에 머릿속에 떠올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아까는 성빈이에 대한 야한 생각 하다 일을 저지르려다 선생님한테 걸리고, 그 다음엔 하필이면 성빈이에게 들켜서 넘어져 기절하고…… 그런데 성빈이가 옆에서 병간호를 해주고 있으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을까. 성빈이 역시 마찬가지로 부끄러운지 볼이 발그레 해졌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 어어?! 잠깐만. 나, 알몸인 상태로 기절했었잖아. 샤워하던 도중에 미끄러져 넘어진 거니까. 근데 여기 와 있다는 건…… 누군가 옮겼다는 소리잖아! 여긴 여고 기숙사고, 우리 학교에 남자라곤 나밖에 없다. 특히 주말이라면 더더욱. 구급대원을 불렀을 리도 없고, 애초에 구급대원을 불러 옮겼다면 내 방이 아니라 병원 침실에 누워 있었겠지. 그렇다는 건……! 나는 살짝 경악하는 표정이 돼 성빈이를 쳐다봤다. 성빈이 역시 살짝 표정이 굳으며 내 시선을 피한다. 눈으로 대화할 수 있는 걸까. 내 생각을 읽은 것일까, 성빈이는.

나는 엄청나게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까 선생님한테 들킨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창피하다. 선생님은 그래도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으시다. 내 물건(?)을 봤을 때 선생님의 의연한 태도로 그나마 덜 창피할 수 있었다. 아니, 내 친누나보다도 나이가 많으니, 막내 이모보다 조금 어린 정도니 충분히 감안할 수 있다. 젊은 여성에게 들킨 것이니 창피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보다 한참 어른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성빈이는 다르잖아!! 나랑 같은 나이! 같은 기숙사! 같은 반! 같은 자리를 쓰는 여자애라고!! 으아아아아!!

선생님한테 들켰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창피하고 몇 배는 더 자살하고 싶어졌다. 아니, 아니지. 사람은 그렇게 쉽게 목숨을 끊어선 안 돼. 앞으로 더 힘든 일들이 많을 텐데, 이 정도 가지고 자살하면 쓰나. 하지만 창피하고 어디든 숨어버리고 싶은 건 마찬가지다. 아무리 마음을 좋게 먹으려 해도, 창피한 건 창피한 거다.


“그…… 어…… 미안.”

“……응?”


요즈음 들어서, 여자애들한테 미안할 일이 상당히 많아진 것 같다. 말만 열면 미안하다는 말만 나오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언짢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나도 창피해 죽겠다. 나도 억울하다. 나는 분명 경고문도 제대로 붙였고, 규정에 따라 목욕을 했을 뿐인데. 하지만 뭐, 내가 피해를 끼친 건 확실하니까. 적어도 성빈이가 내가 쓰러진 꼴을 보고 어떠한 조치를 취해줘서 여기 와 있는 거겠지. 경찰을 불렀다던가, 선생님을 불렀다던가 했겠지. 그런 일을 해 줘서 고맙기도 하고, 무엇보다 흉한 내 알몸을 여과 없이 봐 버렸기에, 그게 미안한 것이다. 굉장히 싫었겠지, 아무래도. 나야 좋았지만. 아아, 뭐! 좋을 수도 있잖아! 어디서 여고생 알몸을 봐! 성빈이는 얼굴을 붉히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나는 난감해서 감히 성빈이를 잘 쳐다보지 못하다 용기를 내서 성빈이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그… 당황하게 해서, 아까 샤워장에서…….”

“아…… 응, 괜찮아.”


성빈이는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리는 나의 말에 마찬가지로 수줍어하며 대답한다. 이 어색한 분위기. 힐끗 성빈이를 보니 성빈이는 내 쪽을 쳐다보고는 있는데 나는 안 보고 이불 쪽을 보고 있다. 시선을 마주하기 어색한 모양이다.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


“미, 미안한 건 내가 미안해. 문 앞에 종이 못 보고…… 그게! 떨어져 있었어, 바닥에!”

“아… 그래. 어쩐지. 그거 붙여 놨는데 덥썩 들어와서 좀 놀라긴 했는데.”

“……미안.”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하지.”


어째 서로가 사과하는 상태가 됐다. 그래도 서로 미안해하고 있는 걸 인지하니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하지만 미안해하며 서로 눈이 마주치자 또 서로 부끄러워서 눈을 피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등 쪽이 간질간질한 느낌. 가슴 쪽도 이상한 느낌이다. 이런 것도 청춘이라고 해야 할까. 근데 그런 것 치곤 너무 충격적인 사건에 너무 부끄럽지만.


“……근데 나, 왜 여기 있어?”

“아, 모르겠구나. 그러니까……”


왠지 이런 장면,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은데. 학기 초에, 창피하게도 위스키 초콜릿 먹고 취해서 쓰러졌을 때. 그 때도, 성빈이를 희롱(?)하고 쓰러져 기억을 못 했는데. 이번에도 비슷하구나. 하지만 이번 건, 기억 못하는 건 아니고 쓰러진 뒤로 어찌됐는지를 모르는 거니까. 성빈이는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쓰러져서, 선생님 불렀어. 선생님하고 같이 병원 갔는데, 다행이 뇌진탕이나 그런 건 없고 머리 조금 찢어진 것밖에 없어서 꿰매고 왔어.”

“오…… 다행이네. 나 죽을 뻔 했구나.”

“응, 진짜 다행이야. 샤워장에 쓰러졌는데 머리에서 피 철철 나서 얼마나 무서웠는데.”

“고마워, 진짜. 생명의 은인이네.”

“……에에, 아니야.”


성빈이는 내 말에 차분하게 웃는다. 자애롭기까지 한 그 미소에 나는 더욱 경건한 마음이 됐다. 성빈이는 정말 착하구나. 괜히 아까 오전에 성빈이에 대한 야한 생각을 했던 게 못내 죄책감이 든다. 아니, 딱히 이상한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 그냥 수영복 입은 것 정도만 상상했지! 근데 딱 비슷하게 속옷만 입고 눈앞에 딱 나타나서 엄청 당황했고! 신이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기 시작한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뭐, 그렇지.


“……어?”

“응?”


나는 문득 무엇인가 생각나 짧게 ‘어’ 하고 말했다. 성빈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본다. 무언가 궁금한 ‘어’니까 그러겠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조금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다. 나는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성빈이는 선생님한테 말씀드렸고, 선생님 차로 옮겨 병원까지 가서 잘 꿰매서 다시 돌아왔다. 근데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려 입고 있는 옷을 보고서. 옷이 입혀져 있잖아. 그것도, 샤워하기 전 옷 그대로. 잠깐만. 알몸이었는데, 그대로 병원으로 데려갔을 리는 없고. 옷을 입혀서 데려갔겠지. 그럼 옷을 누가…… 헉!


“그…… 옷 말이야. 누가 입혀준 거야?”

“어? 어, 그게…… 선생님이.”

“으헉. 에에?!!”


성빈이는 내 질문에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고. 선생님이 옷을 입혀줬다고?! 창피해 죽겠어! 잠깐만! 그럼 2층에서 선생님 차까지 나른 건 누군데! 선생님 혼자 날랐을 리는 없잖아! 한 번 돌기 시작한 머리는 그 쪽으로 계속 돌기 시작한다. 나는 황급히 성빈이에게 물었다.


“그, 그럼 선생님 차까지 누가 날랐어?”

“어…… 선생님하고 나.”

“……으아아!”


성빈이는 방금 전 대답보다 더욱 망설이다 대답한다. 나는 엄청난 창피함과 부끄러움에 절로 고개가 푹 숙여졌다. 이게 무슨 꼴이냐.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 여성한테 알몸을 보인데다 옷까지 입혀지다니. 거기에 성빈이가 내 몸을 본 것도 모자라 같이 들고 옮기기까지…… 자살하고 싶다. 얼른 4층 열람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어. 정말 그런 심정이야. 너무 부끄러워 소녀처럼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성빈이 앞에서 이러고 싶진 않지만, 지금 맘 같아선 ‘으아아아!’ 하며 온 몸을 침대에 부비고 날뛰며 소리 지르고 싶다. 그런다고 보여진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한참을 울부짖고 고개를 들어 가만히 성빈이를 보니 성빈이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 측은하다는 눈빛. 아아, 그렇게 동정하는 눈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더 비참해지니까.


“이제 괜찮지? 이만 가볼게.”

“아… 나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 거야? 고마워.”

“응. 멀쩡해서 다행이다. 가 볼게.”

“어. 어.”


성빈이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역시 침대에서 나와 일어섰다. 성빈이는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으라고 하지만 나는 이 정도는 멀쩡하다고 자신감을 부리며 말했다. 성빈이가 나가고, 나는 잠시 방에 서 있었다. ‘끄하씨!!’ 하며 침대로 몸을 날렸다. 아항러우으하앍뛣쪦뼟툹. 정신적 고통에 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뒹굴뒹굴하다가 거즈를 붙여 놓은 뒤통수를 꾸욱 눌러 육체의 고통까지 추가된다. 이렇게 영원히 고통 받을 것만 같아…….



“휴우…….”


일요일이 저물어간다. 기분이 우울하다. 오후 내내 하는 것도 없이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고, 금요일에 빌려왔던 만화책이나 보며 시간을 보냈다. 꼭 일요일을 헛되이 보내서 기분이 우울한 것은 아니다. 새하얗게 불태운, 오전의 여러 일들 때문에 그런 것이지.

사소한 일 가지고 그렇게 다 죽을 것처럼 죽자고 매달리는 성격은 아니다. 뒤끝이 있는 편도 아니고, 별 것 아닌 일이면 그냥 쿨하게 잊는 편이다. 하지만 이건. 쉽사리 잊으려 해도 잊기 힘든 거잖아. 후우. 이제 성빈이를 무슨 낯으로 보지. 짝꿍인데. 매일매일 마주치는데. 성빈이가 나 볼 때마다 그거 생각할 거 아니야! 내가 성빈이 볼 때마다 속옷차림으로 깜짝 놀라서 얼굴을 발그래 붉히던 성빈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처럼! ……아닌가. 아니 그래도!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한테도 성빈이의 알몸은 충격이었지만 성빈이에겐 더욱 큰 충격이었겠지. 충격이라기보단 안구 테러였겠지만. 하아.


‘띠리링.’

“?”


하릴없이 휴대폰의 액정을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문자가 오는 소리가 난다. 눌러볼 것도 없이 바로 한 줄로 뜬다. 성빈이. 「저녁 같이 먹을래?」 하는 문자다. 두근. 단순한 글자만으로 이루어진 문자인데도, 꼭 성빈이가 말하는 것처럼 자동으로 음성지원이 된다. 그리고 자동으로 아까의 일이 떠올라 부끄러운 기분이 됐다.

음…… 이거, 좋은 거 아닌가? 애초에 여자애가 밥을 먼저 먹자고 하는 건 굉장히 기회라고. 내가 먼저 말하지 못할망정 여자애가 먼저 말했는데! 거절하는 건 남자의 도리가 아니지. 설마 성빈이도 나한테 관심이……? 아니아니, 그럴 리가. 내가 가장 싫어하고 하지 않으려 하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착각. 착각 속에서 여자애들이 별 생각 없이 한 말이나 호의에 ‘헤헷 저 애 나 좋아하는 듯’ 하고 착각했다가 나중에 괜히 혼자 설레고 혼자 고백했다 서로 난감해지면 얼마나 안 좋겠는가. 얼마나 무안하고 비참하겠는가. 딱히 중학교 때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니 있었어! 여자애 좋아했었는데! 걔도 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은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지……. 덕분에 꽤나 친했던 몇 안 되는 여자애였는데, 굉장히 어색해져서 사이가 안 좋아졌다. 단순히 고백만 한 건데도. 뭐, 그건 예전 일이니까.

근데, 창피하지 않을까. 여자애가 남자애한테 밥 먹자고 먼저 말하는 게 창피할까 하는 게 아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런 꼴을 봤는데, 나는 지금 성빈이 생각하는 것만으로 얼굴이 빨개지는데. 내가 더 소녀 감수성이 된 건가. 아니면, 정말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까맣게 잊어버린 건가. 모르겠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다. 안 그래도 배도 고파오던 참이고, 같이 밥 먹을 사람은 없으니 동네 슈퍼에서 간단히 컵라면이나 먹으려 했는데. 그렇게 하면 이 작은 방에서 홀로 쓸쓸히 라면이나 홀홀 먹겠지. 그럴 바엔 성빈이랑 번듯하게 밖에서 밥을 먹는 게 훨씬 낫잖아. 얼른 「응, 먹자!! ㅎㅎ」라고 보냈다. 보낸 지 얼마 안 돼 바로 「그럼 내려가서 노크할게」하는 문자가 온다. 음, 옷을 갈아 입어야 겠구만. 여자애랑 밥 먹으러 가는데 이런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을 순 없지.


‘똑똑.’

“응!”

“갈까?”

“응, 그래.”


노크 소리에 준비하고 있던 나는 문을 살며시 열었다. 성빈이가 산뜻한 색감의 옷을 입고 방긋 웃으며 말한다. 나도 마주 웃으며 대답하고 방을 나왔다. 둘이서 걷는다.


같이 걸어가며 곁눈질로 성빈이를 쳐다봤다. 성빈이는 평소대로의 무난한 표정이다. 성빈이부터 아까의 일을 의식하지 않으니 나도 그리 생각나지 않는다. 저녁은 평소 먹던 적절한 분식집으로 가게 됐다.


“…….”

“응? 뭐 묻었어?”


가만히 성빈이를 쳐다보니 성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둘이서 먹으니까, 마주보게 앉고 있거든. 빤히 쳐다보니 조금 어색한 모양이다. 나는 잔잔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예뻐서.”

“에에…… 헤헤. 인사치레?”

“아니, 진짜 예뻐서.”

“흐흥. 고마워.”


이거 괜찮네. 한 가지 배웠어. 여자애랑 눈 맞아서 아무 할 말도 없을 때, 그냥 별 의미 없이 예쁘다고 하면 되게 좋아하는구나. 성빈이 정도 외모면 딱히 ‘예쁘다’는 말을 적게 들었을 리도 없을 텐데. 하긴, 자기 예쁘다고 하는데 싫어할 여자애가 있을까. 딱히 할 얘기는 없지만 얘깃거리가 없다고 아까 그 얘기를 꺼내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겨우 그 쪽 화제를 꺼내지 않고 어색하지 않게 잘 얘기하고 있는데 미쳤다고 그 얘기해서 다시 어색해질 필요가 있겠어. 변태냐, 무슨 취향이야.


“저…… 아까 그 일 말야.”

“어, 어!”


어이어이, 갑자기 왜 네 쪽에서 먼저 그 얘기를 꺼내는 건데! 애써 이 쪽에선 그 쪽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나도 부끄러운데 성빈이라고 부끄럽지 않으랴. 성빈이는 약간 얼굴이 발그레 해져서 말한다. 나 역시 창피해져서 억지로 쾌활한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나, 나는 괜찮으니까……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줘.”

“으, 응…….”

“그, 선생님한테는, 샤워장 들어왔을 때 네가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으니까…… 응, 마주본 건 아무도 모를 거야.”

“어…….”


성빈이는 말하면서 눈에 보일 정도로 점점 얼굴이 더 빨개진다. 아아, 아무래도 역시 의식되겠지. 여자애인데. 남자인 나조차도 이렇게나 창피한데. 그래도, 어떻게 성빈이가 잘 둘러댄 것 같아 오해가 생길만한 일은 없을 것 같다. 나와 성빈이 둘만 아는 비밀이니까. 비밀이라─ 그것도 비밀이라고 할 수 있나. 푸흡, 하고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건 둘만의 비밀이네.”

“……응.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야.”

“어어. 나도 창피해 죽겠으니까.”

“……헤헷, 웅도 너 얼굴 빨개졌어.”

“너는 안 그런 줄 알아? 너는 완전 빨개졌는데.”

“아, 아니야! 이건 그냥…… 더워서 그런 거야!”


나와 성빈이 둘 다 얼굴이 빨개져서 서로 놀리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돼 참 좋다. 비밀이라. 그런 거 있잖아? 비밀이라는 고리가 하나 생겨서 더 친밀해진 것 같은, 그런 느낌. 기분 탓이겠지만.


“그래도, 엄청 놀라긴 했어. 성미랑 같이 씻기로 했는데, 들어가니까 네가 있어서……”

“나는 오죽했겠어! 틀림없이 종이도 붙였는데 갑자기 문 열려서! 어휴.”

“……헤헤, 창피하네.”

“응…….”


성빈이의 말에 나 역시 어색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말했다. 잠시 또 분위기가 어색해지려 했지만 성빈이의 웃음에 그런 것도 사라졌다. 아, 다행이네. 성빈이가 착해서, 꽤나 큰일이지만 쿨하게 넘어가서 이상한 분위기가 되지 않았어. 사이가 틀어지거나 할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잖아? 여자애들은 한창 감수성 민감할 때니까, 억울한 건 나지만─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와, 속옷차림의 성빈이 둘 중에 누가 더 창피했겠나. 뭐, 난 이득 본 기분이긴 하지만─ 성빈이는 여자애니까, 상처 받았다면 상처 받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략 넘어가 준 느낌이니까.

얼굴이 발그레해서 방긋 웃고 있는 성빈이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착하니까 더 예뻐 보이네. 적당히 저녁을 먹고 같이 기숙사로 돌아왔다. 조금, 전화위복 같은 느낌? 한 때는 어떻게 되는 줄 알았지만, 묘한 비밀공유(?) 사이가 돼서 더욱 친밀해진 기분이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참, 스펙터클한 하루였다.


작가의말

요즈음은 몹시 게을러져 글을 통 쓰지 않아서, 비축분을 드디어 다 소모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조만간 글이 없어서 연재를 못 하는 최악의 경우가...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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