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라이터의 불을 지핀다, 탁탁,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헤어진 그녀와의 하룻밤들을 떠올리게 해서 조금 음란하게 느껴진다고 남자는 생각해본다. 그는 지금 혼자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있다. 크리스마스 전날, 눈도 오지 않는 추운 밤에 사람들은 서로를 부대끼고 걸어다닌다. 평소에는 인적이 드문 고가도로마저 그렇다. 달리는 자동차들의 스포트라이트, 주황색 불빛을 반짝이는 가로등, 서로를 의지하고 긴 다리를 걸어가는 연인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난간 너머 짙은 남색 물결을 본다. 불은 파란색일때 가장 뜨겁다고 하지, 그럼 바다는 검은 색일때 가장 차가울까?
남자는 지금 세시간째 홀로 한강대교에 서있다.
아침에 그녀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았을 때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피곤이 가시지 않았던 까닭도 있었다. 지난 밤, 서로 기운 빠져 침대에 누워있을 때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으로 그녀는 그에게 속삭였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꿈결 같은 단어들이었다. 그를 아련한 꿈에 빠져들게 하고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게 만드는 그런 행복한 말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그가 느꼈던 기분은, 같은 꿈이어도 악몽과 같았다.
그는 세시간이 넘게 난간에 위태롭게 기대어있는 지금까지도 이별의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난 건 조그만 클럽에서였다. 거기서 그녀는 기타를 치며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그 열정적인 모습에 반해서 노래를 부르고 내려온 그녀에게 말을 걸고 말았다. 그 후로 많은 일이 있었는데,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서는 즐거운 일들뿐이었다. 작지만 포근한 아파트를 마련하고, 거기서 동거하며 서로가 서로의 음식을 먹어주고, 이른 새벽에 옆집에 들리지 않게 조그만 목소리로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부르던 기억들.
그녀는 그에게 언제나 미래였다. 그리고 그에겐 이제 미래가 없다. 그는 차가운 밤바람에 외투를 조이며, 지금껏 그녀와 나누어던 메시지들을 핸드폰으로 하나 하나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삭제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한 번 전화해보려다가, 말았다. 대신 우울한 기운을 달래려 평소 즐겨읽던 소설을 핸드폰으로 읽어보기 시작했다. 불은 파란색일때 가장 뜨겁다고 하는데, 저 짙은 빛깔의 강물은 지금 그토록 차가울까? 이별통보처럼 그에게 차갑게 엉겨붙을 저 물결들에 대해서, 남자는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씨발, 내가 왜 그런 년 때문에 죽어야하지?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찬란하게 다가온 죽음의 이미지가 기울어지는 그의 몸을 붙잡았다. 그는 젊었고, 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살고 싶었다. 앞으로에 대한 희망이 차고 넘치는 가운데, 벌써 삶을 포기하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든 이 불같은 감정에 기대어 차가운 우울함을 벗어나고자 했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다시 세상으로 향하려던 그때, 그러나 그는 휴대폰에서 우연처럼 나타난, 앞으로의 일들은 존재할 수 없다는 선고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다음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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