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유품
역사는 반복된다.
“깨갱, 켁”
“커왕.”
개들이 갑자기 흩어지며 깨갱거렸다.
눈앞이 하얗게 퍼져나가던 무솔의 귀에 개의 신음 뒤로 알 수 없는 큰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개들 사이로 구르며 죽음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다고 느꼈는데 어디선가 들려 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아직 살아 있나 라는 생각으로 눈을 떠 고개를 들었다.
바위 옆에서 엄청나게 큰 곰이 언제 나타났는지 날카로운 발톱으로 개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일백오십 관(약0.5톤)이나 되어 보이는 큰 곰이 개들을 향해 가슴을 치면서 달려들었다.
처음에 갑자기 나타난 곰에게 당황한 개들이 무지막지한 곰 앞발에 나 뒹굴었으나, 조금 후 정신을 차리고 일제히 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개들의 눈에 무솔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곰과의 사투였다.
곰과 개들의 싸움은 피 튀기는 혈전이었다.
넘어진 상태에서 두 손을 짚고 뒤로 기어가 잣나무 뒤로 숨어 멍하니 곰과 개들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짐승들의 처절한 소리 사이로 추적자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곰과 개들 싸움에 정신이 팔여 추적자들을 잊고 있었다.
곰과 개들의 싸움을 한 번 쳐다본 뒤 상수리나무 뒤 짐들을 챙겨 다시 산 위로 달렸다.
개들이 함께 곰을 공격했지만, 칠 척(약2.1미터)이 넘는 곰의 공격에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탕!”
갑자기 온 산을 울리는 천둥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깨에 피를 흘리며 산골짜기로 도망가는 곰의 모습이 보였다.
추적자들이 개들을 불렀지만,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듯 미친 듯이 짖어 대며, 곰을 쫓았다.
곰과 개들의 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추적자들을 살폈다.
개들을 포기한 추적자들이 위를 훑으며 무솔을 찾았다.
철포를 던 사내가 나무 뒤 무솔을 발견하고는 철포를 겨누었다.
얼른 엎드리고는 바닥을 기어 나무숲으로 숨었다.
다시 천둥소리가 메아리쳤다.
다행히 무솔이 숨었던 나무에서 탁하고 소리가 났다.
나무에 철포 자국을 보고는 활을 들었다.
철포를 쏜 사내가 뒤에 따라오는 병사들을 재촉하고 돌아서다 날아 온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놀란 추적자들이 황급히 나무와 바위 뒤에 숨었다.
쓰러진 사내의 철포를 주우려 나무 뒤에서 나온 사내도 가슴에 꽂힌 화살을 보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것을 본 나머지 한 명은 작은 바위 뒤에 머리를 처박고 내다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멀리 억새밭으로 많은 병사가 황급히 쫓아 오는 모습이 보였다.
*
추적자들과의 거리가 다시 벌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어둠이 내려오는 산기슭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니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먹은 것이 없는 데다가 개들과 싸우며 없는 기운까지 썼고, 또 추적자들을 피해 달리다 보니 몸에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걷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기진맥진 힘없이 바위 옆에 기대고는 몰려오는 피곤함에 그냥 잠이 들고 싶었다.
쫓아 올 추적자들, 아니 동생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감겨 있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몇 번을 다짐했지만, 마음만 그럴 뿐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은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추적자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추적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붉은 노을이 진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는데 배가 꼬르륵거렸다.
며칠을 먹지 못하고 버틴 배가 심하게 꿈틀댔다.
허기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산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열매를 따 먹었다.
독이 든 열매일 수도 있었지만 허기진 아귀 귀신은 허겁지겁 가리지 않고 열매들을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입 속으로 쑤셔 넣었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시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개들과 싸울 때 물린 곳에 피가 엉겨 있었다.
주위에서 약초가 될 만한 풀들을 찾아 돌로 짓이겼다.
풀 냄새가 푸릇하게 코를 자극했다.
봇짐 일부를 찢어 낸 헝겊에 다진 약초를 넣고 상처 난 팔에 감았다.
해가 바닷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동쪽은 아직도 산과 산이 파도처럼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괜히 산으로 왔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빨리 추적자가 쫓아 올 줄 알았으면 차라리 도시로 가는 것이 훨씬 위험이 덜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쪽 바다를 지나 서쪽 바다를 쳐다보았다.
바다 위 붉은 해가 뭉게구름을 물들이고 있었다.
거뭇거뭇 그림자가 산 아래에서 올라왔다.
해가 붉은 그림자를 남기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다 너무도 아름다워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산속은 너무도 조용했다.
몇 마리 남은 개들은 곰을 쫓아간 뒤라 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추적자들이 남아 있었다.
개가 없었기에 추적자들이 추적해 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긴장감이 풀리고 열매로 인해 배가 부르자 또다시 잠이 몰려왔다.
추위로 몸을 오돌오돌 떨었다.
스르륵 내려앉는 눈꺼풀을 겨우 치뜨고는 주변을 살폈다.
산 능선 아래 낙엽이 쌓여 있는 바위틈이 보였다.
몰려오는 잠을 이기며, 낙엽을 파헤쳐 바위틈으로 들어갔다.
바위틈 입구에 혹시 모를 날짐승들이 공격을 막기 위해 주어 온 나무로 입구를 막았다.
낙엽 속으로 몸을 밀어 넣자마자 스르륵 눈이 감겼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추적자들이 벌써···.”
깜짝 놀라 잠을 깨고는 추적자들의 소리에 당황하며 눈을 힘겹게 뜨고 급히 활을 찾았다.
다시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고개를 들어 소리를 찾았다.
입구를 막은 나무 틈으로 소리를 따라가자 눈앞에 있는 떡갈나무 가지에 새 둥지가 있었다.
어스름한 나뭇가지 사이로 어미 새가 둥지로 날아들자 새끼 새들이 어미 새에게 지저대고 있었다.
서너 마리의 새끼들이 먼저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입을 쫙 벌리고 지저댔다.
어둠이 오고 있었지만, 어미 새가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물어다 주고 있었다.
두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하늘에 별들이 조금씩 빛을 발했다.
“놔! 내가 더 많이 먹을 거야.”
어린 해솔이가 어머니가 외가에 가서 가져온 떡 바구니를 자신의 품으로 가져갔다.
이에 질세라 예솔이도 떡 바구니를 잡고 버텼다.
“다 같이 나눠 먹으면 되는데 왜 그러니? 해솔아, 같이 나눠 먹자. 응.”
“시러, 나 혼자 다 머걸 거야.”
“우리 해솔이 욕심쟁이구나. 다음에 더 많이 가져다줄 테니깐 형이랑 누나랑 나눠 먹자. 자, 얼른···.”
어미 새와 새끼 새들의 모습을 보며 옛날 행복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내 머나먼 타국에 어머니와 동생들을 구하러 왔으나 자신의 실수로 어머니는 죽고 동생들은 더 먼 곳으로 가 버렸다.
추적자들을 피해 산속에서 잠이 들고 있는 자기의 모습이 처량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 속에 자꾸만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버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요? 네, 아버지! 너무 힘들고 괴로워요.’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에 밤 부엉이 소리가 산골짜기를 맴돌았다.
찬 밤기운으로 가득한 바람이 불어와 무솔이 덮고 있던 낙엽을 조금씩 쓸어 갔다.
멀리 산짐승 소리가 들려왔지만, 피곤으로 지친 무솔의 귀에는 자장가가 되었다.
나무 틈 사이로 송송 들어 온 아침 햇살이 무솔의 볼을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며 꿈에서 깼다.
꿈속에서 아버지가 나타나 어머니랑 손을 잡고 아득한 곳으로 갔다.
계속 쫓아가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렀지만 한 번 돌아보시고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어머니를 용서하시고 같이 저승에 데리고 가셨나 보다. 저승에서라도 행복하세요. 어머니, 아버지.”
눈을 비비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품속이 따뜻함을 느끼며, 품고 있던 봇짐을 풀었다.
그곳에 어머니가 주신 물건이 있었다.
금과 은 몇 장, 그리고 옥가락지와 옥비녀, 옥팔찌가 들어 있었다.
옆에 접혀 있는 종이 두 장 눈에 들어왔다.
한 장은 구루시마 성주의 직인이 찍힌 통행증이었다.
나머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익숙한 글씨가 보였다.
글을 읽어 가는 동안 두 손이 떨렸다.
아버지에 대해 미안함과 동생들을 잘 부탁한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편지의 글씨가 번졌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둔 채로 흐느꼈다.
처음부터 어머니는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한 것 같았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 나머지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옥가락지 두 개와 옥비녀, 그리고 옥팔찌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미치나오의 부인이 되면서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들을 손에서 빼서 깊은 곳에 보관했다.
장가를 가게 되면 부인 될 사람에게 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주신 것처럼.
물건을 꺼내 손에 쥐어 보았다.
어머니의 체온이 느껴져 그리움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