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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동인

왕도깨비 (부제-닌자가 된 조선무사)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한림팔기장
작품등록일 :
2022.04.13 12:33
최근연재일 :
2022.08.02 09:00
연재수 :
1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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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5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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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64,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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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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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벌을 찾는 꽃

역사는 반복된다.




DUMMY

쥰세이가 새로 만들어 준 단궁도 있어서 짧은 화살을 많이 챙겼다.


대나무칼도 다시 장인에게 부탁하여 한쪽 날을 세웠다.


이빨이 몇 군데 빠졌지만, 대장장이가 감탄할 정도로 단단한 칼이었다.


두 개의 날이 선 수리검도 성 밖 마을에 부탁하여 챙겼다.


수리검에 사용할 독은 특별히 센에게 부탁했다.


‘멀리 가다 보니 챙겨야 할 짐도 많군. 그런데 조선은 어떤 나라일까?'


장지문 밖을 쳐다보며 아른한 조선의 모습을 상상했다.


'태합 말로는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을 앞세운다고 했는데, 기간이 얼마나 걸릴까? 여기서 나고야성까지 약 보름이 걸린다고 하니, 타국인 조선까지는 또 얼마나 걸릴까?’


료우타의 입에서 한 숨소리가 절로 나왔다.


“료우타님 뭐 하세요?”


“어, 유키히메님.”


마음이 복잡하여 심란한 생각들로 휩싸여 있는데 유키가 환하게 웃으며, 료우타의 방으로 들어왔다.


“누가 보면, 화낼 텐데 어쩐 일입니까?”


“누가 화를 내요. 제가 공주인데, 여기 성에서 제가 못 갈 곳이 있나요. 아! 타이요우님 말이군요. 풋.”


“······."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뭐 좋아서 만나 주는 줄 아나 봐. 료우타님이 절 외면하니까 몇 번 만나 준 거지. 흥.”


“그러지 마십시오. 타이요우는 정말 유키히메님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번 명나라 정벌에도 무공으로 공을 세워 인정받고 싶어서 가는 겁니다.”


“내가 언제 전공을 세우라고 했나? 치, 그래도 전 료우타님이 좋아요. 절 받아 주지 않으면···, 두고 보세요. 꼭 받아들이게 될걸요.”


갑자기 카오루 부인의 얼굴이 떠올라 당황한 료우타가 유키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유키는 나와 마님의 관계를 정말 모를까? 알면서 이러는 것이 아닐까? 어차피 우리는 맺어질 수 없는 신분이 아닌가?’


“료우타님은 멋지고 잘 생기셨어요. 이번 전쟁에서 꼭 영웅이 되어서 돌아오세요. 제가 신사에 가서 많이 빌게요.”


“감사합니다. 다른 동료와 성주님의 무사함도 빌어 주세요.”


유키가 뭐가 좋은지 료우타 앞에서 고주알미주알 타이요우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어머니와 다케오의 관계에 대해 흉을 아무렇지 않게 보았다.


‘유키도 알고 있구나! 그녀는 나를 다케오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 마루를 지나 료우타가 있는 방으로 오는 소리가 들렸다.


“료우타, 있나?”


료우타가 대답도 하기 전에 타이요우가 장지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키가 료우타의 방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가 얼른 웃었다.


“료우타, 미안한데 단궁 남는 거 있나? 섬에서 올 때 깜빡하고 단궁을 나 두고 왔지 뭐야.”


“아! 네, 제가 연습용으로 하나 가지고 있으니, 새로 가져온 이것을 쓰세요.”


료우타가 새 단궁을 타이요우에게 주었다.


“유키히메님, 그만 나갑시다. 내가 할 이야기가 있어요.”


유키도 할 이야기가 있는지 일어나 료우타를 힐긋 보고는 타이요우와 함께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


나고야성으로 출발 이틀 전,


오후에 성주가 전쟁에 참여하는 가신들과 무사들의 가족들을 초대하여 다과를 베풀었다.


아랫단에 구모베에와 타이요우, 료우타가 나란히 앉았고 그 뒤로 다른 동료들이 앉았다.


섬사람들은 특별히 대우받았다.


감히 초대는커녕 아시가루 취급을 받아야 할 자신들이었지만 성과 섬의 관계로 인해 성주의 잔치에 참여를 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자신을 향하는 것 같은 시선에 고개를 돌린 료우타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카오루 부인이 성주 옆에서 다과를 즐기며, 료우타를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야릇한 미소를 보냈다.


지난번의 일로 수치심과 창피함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성주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성주가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 주며, 앞으로의 노고를 격려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성에 남은 동생인 대리 성주를 비롯하여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엄중히 성을 다스릴 것을 명했다.


카오루 부인이 성주의 말에 반응하면서도 료우타를 주시하고 있었다.


부인의 눈길을 의식하느라 성주의 말도 음식들도 어떻게 먹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봐! 안 마시고 뭐 해?”


옆에 앉아 있던 타이요우가 료우타를 툭 쳤다.


“아, 네. 마, 마십니다.”


타이요우의 목소리에 구모베에가 쳐다봤다.


얼른 술잔을 들어 보이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바다로 뻗어 간 키노강의 강줄기를 따라 붉은 노을이 드리워지자 성주가 일어나 옆에 있던 측실을 데리고 내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개의치 않고 술을 한 잔 마신 카오루 부인이 료우타를 힐끗 보고는 일어나 유키를 데리고 혼마루 앞 정원에 있는 다리를 건너서 작은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유키와 얼마 동안 이야기하다 유키를 들여보내고는 시녀에게 무엇인가 지시했다.


성주와 카오루 부인이 일어난 뒤 대리성주와 부교들, 그리고 상급무사들이 부인들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10여 명이 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료우타도 특별히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도 이제 들어가야겠네.”


구모베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향했다.


거의 다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료우타 홀로 잔을 기울였다.


아직도 차가운 바람이 문틈으로 들어와 쌀쌀했지만, 모두가 떠난 빈자리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같은 날에 라나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이봐, 술을 많이 마셨다고 얼굴이 벌건가.”


타이요우가 어디에 갔다가 왔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술이 가득 찬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키고는 료우타를 향해 톡 쏘았다.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술을 연거푸 마신 타이요우!


갑자기 거친 말들을 쏟아 냈다.


“너, 너! 칸베에 부관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그러는 게 아니야. 건방지게 말이야. 나보다 나이도 더 어린 게, ······.”


“인제 그만 마시고 주무셔야죠? 타이요우님.”


“이봐, 내 말 잘 들어. 내가 술에 취해서 하는 말 아냐. 네가 오기 전 라나랑 내가 얼마나 친하게 지냈는데, ······네가 오고 난 뒤 변했어. 라나도 촌장님도."


앙칼진 목소리를 하고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다 너 때문이야. 모든 게 다 섬의 일도 그렇고, 칸베에 부관님도 그렇고····.”


“······.”


“그래, 모든 게······. 좋아. 어디 해 보자고······. 내가 너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부숴 버리겠어.”


그가 술이 한 잔 되었는지, 잘 돌아가지 않는 혀를 꼬아 가며, 료우타를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술에 취한 것 같으면서도 그의 눈이 부라렸다.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술에 취한 타이요우를 상대하다가는 더 피곤할 것 같아 꾹 참은 료우타가 시종을 불렀다.


“타이요우님이 많이 취하셨나 봐요. 부탁 좀 해요.”


시종에게 그를 부탁하고는 반쯤 남아 있는 술잔을 비우고 일어나 경비동 뒤 성벽 위로 올라갔다.


타이요우가 욕하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멀리 키노강이 어둠 속에서 달빛을 빛내고 있었다.


한때 그녀와 성벽을 거닐던 생각이 났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며 걷다 보니 동쪽 끝 성루 아래까지 왔다.


성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때렸다.


전쟁터로 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웠다.


아니 전쟁보다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더 그를 괴롭게 했다.


시린 별이 바람에 흔들렸다.


“라나님!”


전쟁, 죽음!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죽음의 세계로 다가가는 자신이 오늘따라 싫어졌다.


고개를 흔들며 모든 것을 부정하려 애쓰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름 모를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북쪽으로 날아가며, 서로 의지하듯 일정한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저 새들도 서로 의지하며, 힘이 되어 주는 동료가 있구나. 힘든 여정이지만 자기들의 고향으로 가기에 역경 속에서도 서로 격려하며 가는 것이겠지.’


어둠 속 멀리 새무리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쳐다보았다.


'고향이라······.'


멀리 어둠 속으로 날아가며 별빛을 훔치는 철새들을 보다 갑자기 지난날의 기억이 떠올라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때 오사카에서 만난 여인이 날 아는 것 같았는데. 바빠서 잊어버렸어. 이런 바보.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무 뭐라고 했는데.”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아득히 높게 빛나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웠다.


사카이에서 만난 무사들, 그들이 말한 성주를 떠 올려 보려 했다.


한참을 머릿속의 기억을 짜내 보았지만, 겉만 맴돌 뿐이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와 경호동 건물로 들어가려 하는데 문 입구에 누군가 서 있었다.


시녀가 료우타를 확인하고는 카오루 부인이 찾는다고 했다.


시녀가 되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언제 모여들었는지 별들이 수놓은 천수각을 올려다보고는 그대로 숙소로 들어갔다.


방으로 와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려 잠시 명상하다 이불 속으로 몸을 넣었다.


툇마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깜박 잠이 든 료우타가 갑작스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얼마 동안 잠이 들었는지 주변을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바깥으로 귀를 쫑긋 세워서 소리에 집중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말을 타고 언덕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림자를 만났다.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 없이 서 있다가 뒤돌아 사라져 버렸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료우타가 있는 방의 근처 가까운 뒷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잠깐의 발소리에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침입자라면 발소리를 죽일 텐데 저 발소리는 그냥 조금 가벼울 뿐이다.


누가 이 야밤에 건물에 들어 온 것일까?


지난번처럼 유키 일까? 아니면 다른 방의 손님일까?’


어둠 속으로 긴장의 끈을 잡고 있을 때, 그의 방 장지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누운 채 어둠 속에서 누구인지 알기 위해 얼굴을 살폈다.


장지문에 드리운 그림자가 아름다웠다.


어둠에 가려 알 수가 없었지만, 풍성한 옷소매와 긴 머리, 향내로 보아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적진을 침투할 때보다 더 긴장이 몰려왔으며, 온몸이 경직되어 갔다.


여인이 가만히 누워 있는 료우타를 보더니 문을 닫고는 다가와 이불속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유키가 아니다. 그럼······!’


카오루 부인이었다.


시녀를 보냈지만,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주변을 살피며,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몰래 그의 방으로 숨어든 것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꼼짝 못 하고 있는데, 카오루 부인의 손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을 막으려 하였지만, 이미 그의 몸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과감했다.


창피했다.


몸속으로 재빠르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에, 아니 카오루 부인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안 순간부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방비라고나 할까?


그런 그를 그녀가 공략하고 있다.


닌자라면 여자를 돌같이 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마님, 고정하십시오. 성주님도 계시는데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겨우 말을 꺼냈지만, 말에 힘이 없었다.


술기운 때문일까?


“쉿!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풋.”


“윽!”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도, 반항을 할 수도 없었다.


어느새 그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입술이 료우타의 입술에 포개어졌다.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혀가 꽉 다문 입술을 벌리려 했다.


그녀의 한 손에 쥐어진 그놈은 제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아니 당당해졌다. 너무도 빨리.


갑자기 라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녀를 밀쳤다.


“그, 그만하십시오. 저는 마님의 욕, 욕정을 푸는 대상이 아닙니다.”


방 한구석으로 밀쳐진 그녀가 거친 그의 말에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를 보며 놀랬다.


말을 내뱉고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네가 감히 나에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어, 어차피, ······전쟁터에서 죽을 목숨입니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런 관계는 원치 않습니다.”


“호호호,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내가 몸보신을 하면 되겠네.”


그녀가 부드러우면서도 묘한 말을 하며 다가왔다.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눈도 마음도 멍해졌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바지 위를 더듬거렸다.


“난 너와 즐기고 싶어. 지난번에도 함께 즐겼잖아. 봐! 이 녀석도 원하고 있잖아!”


그녀가 료우타의 아랫도리를 잡으며, 욕정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멍하니 있다 당황하여 다시 그녀를 밀쳤다.


“그, 그것은 저, 저의 의지와는 무관합니다. 자꾸 이러시면, 소리 지르겠습니다.”


“그래? 어디 소리 질러 봐. 달려오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내가 목을 베어 버릴 테다. 아마, 왔다가 모두 뒤를 보겠지.”


그녀가 목소리에 위엄을 실어 협박했다.


“사, 사람은 욕정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욕정에 눈이 멀게 되면, 그 생명 또한 짧아지게 됩니다. 마님의 그 무모한 욕정으로 인해 유망한 젊은 청년이 쫓겨났습니다. 그에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사슴처럼 간절한 눈으로 불같은 성정을 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창문 틈으로 겨울이 가시지 않은 찬 바람이 불어왔다.


“봐, 내 몸이 뜨거워지고 있어.”


그녀가 그의 손을 자기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얼떨결에 가슴을 만지게 되자 당황한 그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났다.


“정 저를 욕보이시고자 하신다면······, 죽음으로 답하겠습니다.”


벌떡 일어나 방구석에 놓인 꾸러미에서 단도를 꺼내 쥐고는 결연에 찬 얼굴로 카오루 부인을 응시했다.


그의 황당한 행동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네 놈이 감히······."


분에 못이긴 그녀 심한 욕지거리를 했다.


아니, 부드러운 말로 달랬다.


냉랭한 반응에 다시 화를 냈다.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좋다. 오늘은 아쉽지만, 물러가겠다. 다음에도 이러면, 그때는 너뿐만 아니라 라나의 신상에도 해가 미칠 것이다.”


분노의 눈길로 쳐다보던 그녀가 거친 말을 쏟아 내고는 문을 열고 마루를 쿵쿵거리며 멀어져 갔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안도의 숨을 내쉬다 앞날 걱정에 한숨을 쉬었다.


분명 카오루 부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조선으로 가면 그만이지만 혹여나 교토에 남아 있을 라나에게 그 화가 미칠까 걱정되었다.


성주도 없기에 그녀를 보호해 줄 울타리가 없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라나의 얼굴이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는 행동을 한 것이다.


후회의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 전쟁터로 나가 죽으나, 마님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면 라나님은······. 이렇게 된 거 죽여 버릴까?’


이런저런 생각에 쉬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애써 자신을 위로도 해 보고, 카오루 부인을 어떻게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잠을 청했지만, 온전히 밤을 뒤척이며, 지샜다.


홀로 남을 라나의 앞날 걱정에 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어젯밤의 일이 걱정되어 잠을 설치다가 행정청의 근무 시간이 되어 칸베에 부관이 출근하자마자 달려갔다.


교토와 오사카에 일이 있어 들렀다가 나고야성으로 가겠다고 보고했다.


아카쿠마를 타고 키노강을 따라 올라갔다.


무슨 날벼락이 일어나기 전, 성을 떠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고 도망가듯 성을 빠져나왔다.



이또코보산의 사이가 두목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료우타가 찾아오자 반갑게 맞아 주었다.


“형님, 조선으로 갑니다.”


료우타가 사이가를 형님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번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벌에 참여하는 것인가?”


“네, 다카도라 성주를 따라가는데, 마지막이 될 수 있어서 이렇게 형님과 술 한잔하러 왔습니다.”


사이가와 여러 이야기를 하며 술잔이 여럿 비워졌다.


“동생, 나도 가고 싶네. 자네를 따라 조선으로 가도록 해주게.”


“네? 아니 그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을 자진해서 간다고요? 에이, 그러지 마십시오. 지금 병사들과 무사들뿐만 아니라 다이묘들도 죽음의 땅으로 가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저 난리들인데 자진해서 가겠다니요.”


“·········.”


료우타의 목소리가 커졌다.


"제발!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도 피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피하고 싶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사이가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물론, 동생 말이 맞지만, 여기서 산적질 하는 것보다 무장으로 태어나 전쟁터에서 죽는 게 더 명예롭지 않을까? 부탁하네. 다카도라에게 잘 말해서 나도 데리고 가 주게?”


“아이고 형님, 코카와 군사들과 전쟁하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그 성주에게 몸을 의탁한다는 게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사이가가 옛일을 생각하는지 멍하니 술잔만 바라보고 있다.


지난날 오다 노부나가군에게 패하고 산으로 숨어들었다.


흩어진 부하들을 모아 몰래 침투해 그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마을들을 습격하기도 하며 버텼다.


그러다 코카와 성주로 온 다카도라에게 밀리고 밀리다 그나마 있던 부하들을 잃고 이코보산으로 숨어든 지 벌써 몇 년.


“동생, 내가 다른 사정이 있으니, 꼭 소개 좀 해주게.”


사이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더 이상 웃지도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따라 주는 술잔을 기울이다 시간이 꽤 흐른 것도 몰랐다.


아쉬움을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쟁터로 함께 갈 동료 다섯 명과 함께 아마미고개로 내려와 나고야성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하고는 사이가 무리와 헤어졌다.


사이가의 품에는 료우타가 칸베에 부관에게 써 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아카쿠마를 달려 사카이로 들어가는 첫 관문을 지나 시내로 들어갔다가 무슨 생각인지 말고삐를 바닷길 방향으로 당겼다.


왼쪽으로 출렁이는 파도 따라 붉은 구름이 떠 다였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가다 말의 고삐를 당겨 상점가로 향했다.


사카이와 오사카 일대를 조금은 여유 있게 돌아다녔다.


나고야로 가는 말과 병사들 그리고 배가 오사카항에 수없이 정박한 모습에 기가 질리기도 했지만, 여러 상점을 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조금 사들였다.


오마찌 상점으로 돌아와 스스무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며칠 동안 교토나 오사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 날 교토로 달려갔다.


말 위에서 북쪽으로 달리는 료우타의 얼굴에 웃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교토 어느 여각에 여장을 풀고 밤이 되길 기다렸다.


주인이 들어와 잠자리를 함께할 여인이 필요한지를 묻자 얼른 손을 저으며 웃었다.


전쟁을 앞두고 세상이 뒤숭숭했다.


이런 때 잘못 여자를 들였다가는 탈탈 털리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몸을 파는 여자 중 쿠노이치가 섞여 있어 조심해야 했다.


창을 여니 도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귀밑머리를 날렸다.


‘어제보다 달이 밝구나. 달빛이······. 이제 슬슬 나가 볼까?’


오가와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갔다.


순찰병들의 눈을 피해 어둠을 돌아, 다카도라 성주의 저택에 도착하니 벌써 자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담벼락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다 속도를 내 담을 뛰어넘었다.


그녀가 잠들어 있을 별채의 처마 밑으로 숨어들었다.


덧문을 열고 마루에 구름같이 내려앉아 기다시피 했다.


시녀의 방을 지나 그녀의 방 앞에 다다랐다.


장지문 문고리를 살며시 잡았다.


찬 냉기와 함께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 머뭇거렸다.


문고리를 붙들고 잠시 차가운 여운에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인의 향내가 코를 살짝 자극해 오자 진정되던 가슴이 마구 뜀박질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어둠 속에서 눈을 익혔다.


다다미 바닥을 기어서 그녀의 머리맡으로 가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근거리며 자는 얼굴을 보자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묘한 긴장감에 온몸이 짜릿했다.


살며시 심호흡하고는 복면을 벗고 그녀 가까이 다가가 체취를 느꼈다.


언제 다시 맡을지 모를 그녀의 냄새, 다시는 맡지 못할 수도 있는 그녀의 체취를 오래도록 기억하려는지 두 눈을 감고 음미하듯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혹 그녀가 깰까 조심하면서도 그녀의 향내에 취해 가는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머리를 들고 그녀가 누워 있는 이불 옆으로 가 나란히 누웠다.


새근거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정답게 규칙적으로 들렸다.


두 눈을 감고 그녀와의 꿈같은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럴수록 애타는 마음이 간절하게 올라왔다.


쿠노이치였던 그녀!


누군가 들어 온 것을 모르는지 가만히 잠들어 있었다.


료우타의 잠행술에 사카야마, 아니 간스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난번에 카오루 부인과의 수치스러운 일로 무작정 교토로 와 이곳에 숨어들었던 그를 말없이 뒤에서 안아준 그녀가 생각이 났다.


메말라 가는 자신을 감싸준 그녀의 손길이 따뜻했다.


그녀의 포근하고 따뜻한 품에 울컥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 조용히 속으로 울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


감았던 눈을 떠 따뜻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이 가만히 포개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잠을 자듯 눈을 감고 있었다.


“저 때문에 잠이 깨신 거군요.”


“그냥 이대로 있어 주세요. 손이 참 따뜻합니다.”


어둠이 짙은 방안에 아직 겨울의 끝을 붙잡기라도 하듯 차가운 바람이 돌았지만, 점점 크게 들려오는 맥박 소리와 가슴 한편에서 들고일어나는 욕망이 방안을 온기로 채워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온몸이 긴장감으로 떨었다.


포개어진 손으로 전해지는 묘한 감정이 자기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며, 서로 멀리 있어야 할 현실 속에서 냉정해야 할 이성이 건널 수 없는 강 저편에서부터 두 남녀의 뜨거운 피의 역류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포개어진 손을 넘어 한 이불이 되고 입술이, 몸이 하나 되어, 달빛이 별빛이 되어 밤을 지새웠다.



이른 새벽,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 그녀와 작별 인사를 했다.


되돌아온 현실 속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얼른 저택을 빠져나가야 하지만, 그녀를 품은 그가, 아니 안긴 그녀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자꾸만 품속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시녀의 기침 소리가 들려서야 겨우 둘은 서로를 놓아 주었다.


그녀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돌아서는 료우타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길을 돌려 멀리 사라져 가는 료우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안타까움으로 어두워졌다.


우연히 자신 앞에 나타난 남자, 가슴 가득 들어앉은 그, 모습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만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두고는,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담 위에서 그녀의 방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담장 아래로 내려왔다.


담장에 기대 잠시 그녀를 또 올리며 조금씩 밝아져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난 밤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 여각에 맡겨 두었던 아카쿠마를 찾아 올라타고 사카이로 달려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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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깨비 (부제-닌자가 된 조선무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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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조선의 바다 1 22.06.18 50 0 10쪽
79 통신사를 따라 일본으로 2 22.06.17 52 0 10쪽
78 통신사를 따라 일본으로 1 22.06.17 55 0 9쪽
77 풍전등화 2 22.06.16 55 0 9쪽
76 풍전등화 1 22.06.16 54 0 10쪽
75 비싼 목숨 값 22.06.15 56 0 10쪽
74 산적 무리들 3 22.06.15 54 0 14쪽
73 산적 무리들 2 22.06.14 50 0 14쪽
72 산적 무리들 1 22.06.14 55 0 12쪽
71 어머니의 유품 22.06.13 51 0 10쪽
70 도망자 22.06.13 57 0 11쪽
69 미치나오를 죽이다 22.06.12 54 0 10쪽
68 어머니의 죽음 22.06.12 57 0 10쪽
67 출생의 비밀 22.06.11 77 0 10쪽
66 함께 살자 22.06.11 50 0 10쪽
65 무너진 계획 22.06.10 52 0 10쪽
64 여동생 22.06.10 55 0 10쪽
63 카에데 부인 22.06.09 51 0 13쪽
62 가시마성 2 22.06.08 57 0 10쪽
61 가시마성 1 22.06.08 59 0 11쪽
60 조선 도공들 2 22.06.07 59 0 11쪽
59 조선 도공들 1 22.06.07 54 0 12쪽
58 왕년의 해적들 2 22.06.06 55 0 9쪽
57 왕년의 해적들 1 22.06.06 73 0 13쪽
56 구루시마의 의심 22.06.05 54 0 11쪽
55 료우타의 검술 22.06.05 55 0 10쪽
54 숨은 실력자 타이요우 22.06.04 55 0 9쪽
53 조선 침략의 전초 기지 22.06.04 59 2 13쪽
52 기억에 없는 기억들 2 22.06.03 55 0 9쪽
51 기억에 없는 기억들 1 22.06.03 64 0 12쪽
50 남만인 배 글로벌호 2 22.06.02 57 0 11쪽
49 남만인 배 글로벌호 1 22.06.02 64 0 12쪽
48 과거에서 온 추적자들 22.06.01 68 0 13쪽
47 스스무의 회상 22.05.31 72 0 13쪽
46 하이난 3 22.05.30 67 0 16쪽
45 하이난 2 22.05.29 102 0 22쪽
44 하이난 1 22.05.28 64 0 20쪽
43 꽃을 찾는 벌 22.05.27 73 0 22쪽
» 벌을 찾는 꽃 22.05.26 72 0 25쪽
41 적(敵)은 혼노지에 있다 5 22.05.25 75 0 18쪽
40 적(敵)은 혼노지에 있다 4 22.05.24 68 0 17쪽
39 적(敵)은 혼노지에 있다 3 22.05.23 77 0 19쪽
38 적(敵)은 혼노지에 있다 2 22.05.22 71 0 19쪽
37 적(敵)은 혼노지에 있다 1 22.05.21 70 0 22쪽
36 순정 2 22.05.20 73 0 22쪽
35 순정 1 22.05.19 79 0 22쪽
34 토끼 사냥 22.05.18 84 0 25쪽
33 오마찌 칸의 죽음 22.05.17 75 0 20쪽
32 불타는 오마찌 별채 22.05.16 83 0 19쪽
31 고가 닌자 마리지천 22.05.15 102 0 25쪽
30 함정 22.05.14 83 0 27쪽
29 암살자를 막아라 2 22.05.13 86 0 26쪽
28 암살자를 막아라 1 22.05.12 85 0 25쪽
27 적진 속으로 22.05.11 91 0 23쪽
26 죠유지와의 재대결 22.05.10 87 0 25쪽
25 카오루 부인 22.05.09 104 0 22쪽
24 히데츠구의 의심 22.05.08 115 0 24쪽
23 이가분지 2 22.05.07 95 0 16쪽
22 이가 분지 1 +2 22.05.06 97 1 19쪽
21 반항아와의 만남 +2 22.05.05 93 2 19쪽
20 여인들 +2 22.05.04 93 1 21쪽
19 산적 사이가 +2 22.05.03 85 1 25쪽
18 이가 닌자 간스케와 고에몬 +3 22.05.02 89 2 26쪽
17 기억의 저편에서 온 자들 +1 22.05.01 104 1 21쪽
16 유곽 아이루 +2 22.04.30 92 1 22쪽
15 닌자검 +2 22.04.29 95 1 22쪽
14 닌자되다 6 +1 22.04.28 100 1 26쪽
13 닌자되다 5 +2 22.04.27 104 2 25쪽
12 닌자되다 4 +2 22.04.26 110 1 24쪽
11 닌자되다 3 +2 22.04.25 123 1 25쪽
10 닌자되다 2 +2 22.04.23 121 1 23쪽
9 닌자되다 1 +4 22.04.22 159 1 25쪽
8 올빼미섬 7 +2 22.04.21 208 1 30쪽
7 올빼미섬 6 22.04.20 216 1 25쪽
6 올빼미섬 5 +2 22.04.19 200 1 28쪽
5 올빼미섬 4 +2 22.04.18 216 1 28쪽
4 올빼미섬 3 22.04.16 236 2 29쪽
3 올빼미섬 2 +3 22.04.15 284 1 27쪽
2 올빼미섬 1 +4 22.04.14 433 3 29쪽
1 안개 속 검은 그림자 +8 22.04.13 1,060 3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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