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가치
말대꾸를 한 디트럭스는 페인에게 한 소리 듣고 의기소침해졌다.
‘아직도 자기가 귀족인 줄 아는 건가?’
포로가 된 이상 디트럭스는 몸값을 지불하기 전까지는 그저 포로일 뿐이다.
페인은 도적으로 위장해서 공격한 디트럭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귀족 대우를 바라는 주제에 귀족적이지도 않지.’
살려둔 것은 그가 살려준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 아니었으면 디트럭스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앙비뉴 자작은 이러한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디트럭스가 삼왕자의 사람도 아닌데 지켜줄 의리는 없었으니까.
디트럭스는 이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구석으로 처박혔다.
볼일을 다 본 페인은 아까 못 다한 대화를 재개하였다.
“보시다시피 포로의 숫자가 꽤 많소. 얼마까지 주실 수 있는지 궁금하오만.”
“그건 지금부터 협상을 해봐야 알겠구려.”
페인의 말에 앙비뉴 자작의 눈동자가 빛났다.
마침 앙비뉴 자작은 대량의 인력이 필요했다.
일왕자와 이왕자와 맞서기 위해서는 그만큼 덩치를 불려만 했다.
아무 곳에서나 사람을 끌어오면 문제가 되겠지만, 페인이 데려온 포로들은 그 부분도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이 일왕자나 이왕자의 세력원인가!’
의기소침해진 디트럭스도 그렇고, 포로 대부분이 일왕자나 이왕자의 세력원이다.
혹은 도적이나 용병처럼 건드려도 괜찮은 놈들이라 걱정이 없었다.
처음에는 적의 공세라고 착각하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앙비뉴 자작이었다.
하나 먹어도 뒤탈이 없는 인력을 팔아주겠다는 페인의 말에 급 호감이 생겼다.
“이건 서로 좋은 거래가 될 것 같구려.”
“나 또한 그리 생각하오.”
하하하!
일이 잘 풀릴 거란 예감에 페인과 앙비뉴 자작이 웃음을 짓는다.
그런 와중에 디트럭스는 작은 목소리로 작게나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저기······저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디트럭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포로1’이 되어버린 디트럭스는 눈치를 보다가 다시 구석으로 가서 처박혔다.
***
흥정은 페인의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사실 페인은 이쪽 세상의 노예 가격 따위 잘 알지 못한다.
실제로 노예 거래는 솔직한 말로 주먹구구식이다.
파는 놈 맘, 사는 놈 맘, 전쟁이나 추수 전에는 가격이 껑충 뛴다.
사기를 치거나 당하는 등 여러 찐빠가 발생해버리니 도통 평균값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은화 두 닢이 평균적인 시세였다.
사람의 몸값으로는 굉장히 저렴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농노가 네 달을 뼈 빠지게 벌어야 하는 수익을 단숨에 벌어들이는 셈이었다.
그런 돈이 1명분도 아니고 무려 수백 명 분이나 된다.
마을 하나만 털어도 수중에 떨어지는 돈이 상당하니 노예장사가 사라질 일은 없었다.
앙비뉴 자작은 그 점을 고려해서 페인에게 가격을 제시했다.
“포로 한 명당 은화 세 닢을 쳐주겠네.”
“생각보다 더 쳐주시는 것 같소만?”
“은화 한 닢은 개인적인 감사표시라고 생각해두게. 설마 호의를 거절할 텐가?”
“고맙게 받겠소.”
“시원해서 좋군!”
거래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앙비뉴 자작이 돈을 후려치지 않았다.
‘깔끔하군.’
보통 이런 일은 아랫사람이 먼저 말하게끔 되어있지만.
초대한 손님이 필요한 일손을 제공해주었기에 앙비뉴 자작도 호의적으로 나왔다.
문제는 평민 징집병이나 어중이떠중이 포로가 아닌 귀족이다.
디트럭스는 차남이긴 해도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몸값을 남달리 책정할 필요가 있었다.
“저 디트럭스라는 놈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오만.”
“흠. 이건 당사자에게 물어봐야겠구려. 디트럭스 경? 이리로 좀 오시게.”
“바로 갑니다!”
디트럭스는 체면 불구하고 잽싸게 그들의 곁으로 달려왔다.
“제 가문에서는 금화 열 닢, 아니, 이십 닢을 낼 수 있습니다!”
“금화 이십 닢인가. 자네 가문에 그만한 여유가 있었던가?”
“있습니다, 자작님!”
“그렇다고 하는구려. 어찌하시겠소, 페인 경?”
남일처럼 말하는 앙비뉴 자작의 말에 디트럭스는 입술이 바싹 탔다.
여기서 협상이 실패하면 자신이 어디로 팔려갈지 알 수 없다.
몸값을 몸으로 때우라고 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몸이 오싹해졌다.
저 미친 전투광인과 함께 몸으로 때우라니!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페인은 귀족이라고 대우해주는 인간이 아니다.
그건 그간의 여정에서 충분히 확인했다.
공을 세우려고 전장으로 나왔지만 그 또한 목숨이 아까운 젊은 청년일 뿐.
남은 삶이라도 건실히 보내려면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페인과 얼굴도 마주치지 않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애타게 자신을 바라보는 디트럭스의 시선에 페인은 잠시 고민했다.
“딱 2배만 더 내면 지난 일의 원한은 잊어주겠다.”
고작 2배로 저 악마 같은 자에게서 풀려날 수 있다니!
눈을 반짝였던 디트럭스였으나 이내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
“그, 돈이 부족합니다만······.”
“돈이 아닌 것도 받는다.”
“그러시면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가진 마을에 대한 조세권을 드리지요.”
“조세권. 얼마일지도 제대로 측정도 안 돼있을 돈 말인가? 혹시 다른 것도 없나?”
‘대단한 수완이로군.’
돈이 부족했는지 디트럭스가 다른 것으로 대신 가능하냐고 묻는다.
페인은 그 말에 능숙하게 대답하며 거래를 조율했다.
‘그 나잇대의 수완이라고는 믿기지가 않는군.’
앙비뉴 자작은 그런 페인의 능숙함에 혀를 내둘렀다.
보통 페인의 연령대에서는 지식으로만 알지 실제로 그것을 잘 적용하지 못한다.
이건 아예 타고나거나 세월이 해결해주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하물며 페인은 얼마 전에부터야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근데 하는 짓은 마치 50살은 먹은 것처럼 구니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몸값 흥정도 별거 아니군.’
사실 페인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 다 작성했습니다, 페인 경!”
“흠. 좋아, 문제없군. 지급이 확인되면 너는 자유다.”
“감사합니다!”
당연한 거래였음에도 오히려 감사인사를 받는다.
그런 페인의 노련함에 앙비뉴 자작은 섬뜩함마저 느꼈다.
***
‘이 정도면 나름 만족할 만하네.’
두둑해진 주머니에 페인의 마음은 절로 흡족해졌다.
영주놈들 대가리를 쳐내고도 만져보지 못한 거금이기에 더욱 그랬다.
숫자가 좀 줄어든 점이 걸리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모든 포로를 다 판 것도 아니고, 일할 자들이야 많았다.
“저희는 페인 님의 밑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부디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포로 중 일부는 페인의 밑에 남기를 원하였다.
그동안 페인이 얼마나 잘 싸우고 덩치를 잘 불리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일확천금의 기회야!’
‘이렇게 잘 싸우는 분의 밑이라면 개죽음은 안 당할 것 같다.’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 봤자 할 일도 없으니까.’
‘페인 님의 병사가 된다면 옆집 제니도 날 다시 돌아봐주겠지?’
성공할 자를 모시게 되면 자신 또한 성공으로 이어진다.
성공에 목마른 이 시대에서 포로가 자신을 잡은 자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의외로 흔했다.
여기에 자진해서 찾아온 놈들도 많았다.
중간에 들르는 마을마다 어디서 들은 건지 어린애며 청년까지 다양하게 왔다.
페인은 그중 입맛에 맞게 괜찮은 자만 골라서 받았다.
이런 식으로 지나가는 마을마다 자원을 받으니 페인은 침략자임에도 인기가 많았다.
농사일이 일자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상에서 병사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페인은 천 명 중 절반가량만 남기고 나머지 오백은 앙비뉴 자작에게 팔아넘겼다.
‘신분을 높이려면 더 많은 공적을 쌓아야 한다.’
페인은 더욱더 강한 군을 육성하고자 마음먹었다.
규모가 큰 전투일수록 공적을 크게 인정해준다.
병력의 규모가 적으면 남의 깃발 아래로 들어가게 되니 반드시 그만의 군대가 필요했다.
잘 싸우기만 하는 기사보다는 잘 싸우는 기사가 거느린 군세가 더 그럴 듯해 보이는 법이니까.
포로에 관한 협상이 모두 끝났다.
시급했던 문제를 끝마친 페인은 이제 본론으로 넘어갔다.
“공을 세웠을 때 받을 수 있는 보상을 약속받고 싶소.”
“보상이라, 어떤 것을 원하는가?”
“왕자 전하의 이름으로 된 공식적인 작위를 원하오. 단승 말고 계승으로.”
그런 페인의 말에 앙비뉴 자작의 얼굴이 굳었다.
무거운 주제에 앙비뉴 자작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본다.
페인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그것을 마주보았다.
이내 앙비뉴 자작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
“계승 작위를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네. 사실 지금도 거의 반쯤 어거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지. 그런 와중에 갑자기 인정이라. 단승은 어찌되어도, 계승은 역시 힘들어. 자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앙비뉴 자작은 페인에게 현실적인 문제를 알려주었다.
기존의 작위를 계승하는 거면 모를까, 새로운 작위를 내려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
현재 페인이 속한 에크로츠 왕국은 계승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왕이 후계자를 임명하기 전에 혼수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작위는 왕이 내려주는 것이지.’
페인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작위를 개나 소나 남발하면 아무도 그걸 인정하지 않고 따르지 않을 거다.
해서 작위는 되도록 왕이 내려주는 것이 국룰이다.
왕이 아니어도 다른 귀족들이 인정을 해줘야 하는데, 내전 중이라 그건 불가능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인정을 받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왕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공적을 세우면 높은 작위를 받아도 인정받을 것이다.
그렇기에 페인은 앙비뉴 자작에게 이런 제안을 건넸다.
“왕자들의 목을 따오면 공작도 가능하겠소?”
“헉!”
“와, 왕자님들의 목을······?”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왕자의 목을 따오겠다는 폭탄발언에 조용히 거래를 지켜보던 하인과 호위들이 숨을 멈춘다.
당연히 앙비뉴 자작도 깜짝 놀라서 소리쳤는데.
정작 얘기를 꺼낸 페인은 차분하기만 했다.
‘전쟁 났는데 어쩔 거야? 목 따야지. 무른 자식들.’
***
왕자의 목을 따버린다.
이건 보통 미친 소리가 아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어찌 왕자를 죽인단 말인가?
본래 계승전쟁은 전쟁이되 전쟁이 아니었다.
뭔 개소리냐고 하겠지만 높으신 분들에게는 그랬다.
이 세상의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다고 하면 거의 대부분이 아랫놈들이었다.
농민, 평민, 상인, 광대, 병사 등.
귀족이 되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푸른 피의 고귀하신 분들은 어떠한가?
그들도 사람이니 똑같이 목숨을 잃을까?
‘절대 안 죽지.’
죽기는커녕 평소처럼 잘 먹고 잘 싼다.
이 새끼들은 전쟁 중에도 사치를 멈추지 않으며 전쟁 중인 상대와도 친분을 나눴다.
돌아가는 방식이 이 따위니 전쟁에서 져도 귀족이 죽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기사나 가신들이야 죽을 때도 있지만 그들 또한 부유한 계층이다.
평민들과 비교하면 가신들도 잘 사는 건 맞았기에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그럼 왜 이런 거지같은 문화가 생겼을까?
‘끼리끼리 해처먹으니까 그렇지.’
귀족들은 혼인동맹 등을 통해서 서로 피를 섞는다.
혹은 교류를 오가면서 끈끈한 커넥션을 만들어둔다.
이런 부분은 지구나 이곳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생을 자기 땅에 붙어서 사는 사람들이 다른 왕국에도 친인척이 존재할 정도니 말 다했다.
심지어 왕족들은 이보다 더 심했다.
각국 왕가의 혈통에 서로의 피가 안 섞인 경우가 드물다.
이런 놈들이 위에서 다 해먹는다.
페인 같은 후발주자가 그곳에 끼어드는 것은 바늘구멍을 비집고 들어가는 격이다.
그래서 페인은 그 틈을 넓게 벌리고자 했다.
‘자리가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야.’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바늘구멍처럼 좁으면 강제로 찢어발기면 된다.
억지로 넓혀도 길은 길인 법이고, 성공에 목마른 페인은 부작용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 작가의말
내일도 오후 6시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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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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