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초대장
페인은 기득권의 유력층을 위해 연회를 열었다.
쓸데없는 곳에 돈을 낭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것만큼은 페인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일이 아니면 얼굴 볼 일이 없으니까.’
이 시대의 연회는 단순히 노는 장소가 아니다.
오가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서로 얼굴도 보고, 속에 담아둔 이야기도 꺼낸다.
그러다 보면 누구에게 뭐가 필요하고 어디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일종의 정보교환이며 교류를 하며 상호보완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단단히 굳히는 것이다.
그러니 싫어도 익숙해져야만 했다.
연회를 안 하는 자는 따돌림을 당하고 그것은 곧 도태됨을 의미하니까.
“그래도 피곤한 건 어쩔 수 없구만.”
털썩!
페인은 거칠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으로는 예복의 옷깃을 풀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예복은 화려한 모습과 달리 불편하기 그지없는 옷이다.
갑옷은 살려고 입는 것이지만 이건 그냥 폼으로 걸치는 거라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형님도 피곤하긴 하시군요?”
“나도 사람이다. 인간들이 그렇게 밀려드는데 피곤한 게 당연하지.”
“다들 형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지요.”
페인의 호소에도 페일은 그저 기쁘기만 했다.
다들 자신이 존경하는 형을 보려고 오는 거다.
페인에게 잘 보이려는 몸부림임을 아니 그들의 아부가 흡족하게 보였다.
페인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연회를 연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다 자신이 누구고, 나 이런 사람이니 알아서 머리 박으라는 의미다.
게다가 연회를 열면 이득도 있었다.
일단 한 명씩 대접하는 것보다 싸게 먹혔다.
‘그것 외에도 얻은 게 적지 않지.’
주인인 페인이 연회를 베풀어줬다.
그럼 손님도 예의상 뭔가를 들고 오기 마련이다.
실제로 손님들은 각자 한 보따리씩 선물을 거하게 가져왔다.
양피지며 옷감, 포도주, 고기, 치즈 등 창고가 가득 찰 정도로 말이다.
“근데 이상한 점이 있다.”
“무엇이 말입니까?”
“이거, 칼이랑 방패. 무구가 선물로 들어오는 비율이 너무 높다.”
페인은 의자 옆에 세워둔 방패를 툭툭 손으로 두들겼다.
그것은 이번에 선물로 받은 라운드실드였다.
질 좋은 나무에다 테두리를 철과 청동으로 마무리한 일품.
기사의 돌격도 한 번쯤은 막아줄 정도로 튼튼했기에 페인도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연회를 즐기러 온 귀족이 선물로 줄 만한 물건은 아니다.
선물이란 게 보통은 그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서 가져온다.
무구는 아무래도 조금 폭력적으로 느껴져서 꺼려지는 면이 있어서 이리 생각한 것이다.
“아마 형님께서는 영주이되 기사이기도 하셔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너무 심려하지 마시지요.”
“기사라······.”
페일의 말에 페인은 입맛을 다셨다.
스스로가 기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그는 이미 훌륭한 기사였다.
백성을 살피는 강자가 악독한 영주를 무찔렀다.
모든 무구의 사용에 능숙하고 말 탄 기사도 땅에 발을 딛고서 이길 정도로 강했다.
이러니 그 누가 그를 기사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보여준 게 그런 쪽이니 무구를 좋아한다 여기는 것은 의문보다는 자랑스러워할 일이었다.
“아참, 리암과 아일라에게도 선물이 들어왔습니다만. 어찌할까요?”
“애들 건 건드리지 말고 잘 챙겨줘라. 너도 챙길 수 있을 때 챙기고.”
‘쟤들도 언젠간 독립해야 하는데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줘야지.’
중세시대는 독립을 상당히 빠르게 한다.
빠르면 15살쯤에도 하고, 늦어도 20살 전에는 이루어진다.
만약 독립하지 않으면?
가문을 위해서 일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쫓겨나는 것이고, 그것을 누구도 이상하지 여기지 않는다.
그만큼 각박한 세상이고 빌어먹게 살기 힘들었다.
그래서 페인은 동생들에게 향하는 선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저게 다 자기들 밑천이 되어줄 텐데 굳이 저런 것까지 챙길 정도로 페인이 인정머리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감동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똑똑-.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긴다.
이어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주님,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들어와라.”
그러자 안으로 사람이 들어온다.
덜컹.
문이 열리자 갑옷을 입은 정예병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자는 페인의 호위병인 트레이서였다.
트레이서는 이처럼 페인의 심부름 역할도 맡았기에 소식을 들고 올 때도 있었다.
지금도 트레이서는 페인에게 중요한 소식을 가져왔다.
“앙비뉴 자작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앙비뉴 자작이? 대체 왜?”
앙비뉴 자작은 주변에서 알아주는 명문이다.
전에 대가리를 깬 두 명의 귀족과 달리 수대에 이어서 가문을 지켜 내온 자들.
그러한 자들은 같은 작위라도 지닌바 힘이 다르다.
이른 바 역사가 지닌 힘이다.
그런 자의 사신이라.
페인이라도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였다.
“영주님을 뵙고자 한다고 밝혔습니다만, 자세한 건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합니다.”
“······곧 갈 테니 기다리라고 전해라.”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트레이서는 조심스레 방문을 나섰다.
끼익-, 탁.
문이 닫히고 실내에는 다시 페인과 페일 두 사람만이 남았다.
소식을 듣고 말없이 고민하던 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깃을 여몄다.
“페일, 따라와라. 자작이 보냈다는 사신을 봐야겠다.”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접견실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고풍스러운 복장의 인물이 있었다.
***
페인은 연회를 열어서 귀족들을 접하였다.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들의 관심사와 평소 먹는 것들도 알게 됐다.
이만하면 귀족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알기는 개뿔, 쥐뿔도 몰랐구만.’
페인은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였다.
그는 귀족을 만나봤다.
하지만 귀족이라고 다 격이 높은 것은 아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품격이 있었다.
남들과는 다르다는 우월감.
티를 내지 않아도 귀한 핏줄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강철의 의지를 지니신 군주를 뵙습니다. 본인은 보르쉬의 지배자 앙비뉴 자작님을 모시는 에스터드 피켄이라는 자입니다.”
“······만나서 반갑군.”
눈앞에 서있는 자가 귀족은 아니다.
하지만 고풍스러운 말투하며 손짓 하나조차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자가 바로 앙비뉴 자작이 사신으로 보낸 사용인이다.
페인은 앙비뉴 자작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그는 이제야 갓 기득권에 발을 들인 풋내기다.
그런 자신에게 범상치 않은 자를 심부름꾼으로 보낸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
이런 페인의 의문을 눈치 챈 듯 자작의 사신 에스터드가 한 장의 서신을 건넸다.
바스락-
페인은 종이를 만지는 순간 품질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가 전생에서 사용했던 종이의 질감과 크게 차이 나지 않을 정도다.
‘굉장히 비싸겠는데.’
이 세상은 중세수준의 문명답게 종이의 질도 형편없었다.
하얀색의 종이는 그야말로 고급 중의 고급품으로 귀족들도 쉬이 사용하지 못한다.
근데 그런 걸 한낱 영주에게 보내는 편지로 사용할 정도면 대단히 부유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서신에 사용하는 작은 종이로도 권위를 보여주는 거다.
이른바 디테일이라고 할까.
쓸데없어 보이지만, 이러한 사소한 게 하나씩 모이면 그게 권위가 되는 거다.
“페일, 종이칼을 가져와라.”
“명을 받듭니다.”
페인은 그것을 바로 열지 않았다.
이런 편지는 뜯는 것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사신이 보는 앞에서 대충 뜯었다간 그것을 보낸 자를 무시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잠시 후 페일이 편지지를 자르는 용도의 조그마한 칼을 가져왔다.
페인은 능숙한 솜씨로 칼을 잡고 편지를 뜯었다.
사락-.
편지지는 마치 자로 잰 듯 깔끔하게 벗겨졌다.
그것을 본 에스터드의 눈빛이 아까와는 조금 달라졌다.
‘호오. 제법이군요.’
그는 아닌 척하면서도 페인의 행동을 살펴봤다.
페인은 앙비뉴 자작이 최근 가장 눈여겨보는 인물 중 하나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남의 영지를 빼앗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려오는 이야기를 보면 영지 운영이 상당히 매끄럽다.
앙비뉴 자작은 페인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심복인 에스터드를 보낸 것이다.
그 탓에 에스터드는 페인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관찰했다.
그 결과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자고로 사람의 격이란 사소한 것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법이지요.’
페인이 편지를 여는 동작은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고풍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내용물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정확히 편지를 봉인한 인장만을 떼어내는 것.
편지를 여는 사소한 동작조차도 기품이 묻어나왔다.
저런 건 유서 깊은 가문에서 오랫동안 살아와야지만 몸에 배는 습관이다.
에스터드가 눈여겨 본 것은 그러한 부분이었다.
어디서 지어낸 것 같은 가문명과는 다르게 페인에게는 기품이 묻어나왔다.
‘어쩌면 소문이 진짜일 수도 있겠군요.’
페인에 대한 소문은 그도 들어서 알고 있다.
소문의 ‘몰락한 왕족’ 출신이라는 건 딱히 비밀도 아니니까.
이렇듯 에스터드가 흥미를 갖고 페인을 살펴보는 동안.
당사자는 서신의 내용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
페인은 편지봉투를 뜯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유려한 필체로 쓰인 편지가 한 장 있었다.
편지봉투는 페일에게 건네주고 내용물만 읽는다.
글씨를 읽어가던 페인은 불현듯 인상을 찌푸렸다.
‘더럽게도 날려 썼네.’
편지에는 배운 자 특유의 알아보기 힘든 지렁이 글씨가 가득했다.
이곳 귀족 가문들은 기이하게 싸인처럼 날려 쓰는 글씨를 미덕으로 여겼다.
이 글씨체를 자기들도 못 알아보는 경우가 있어서 따로 해석해주는 자가 있을 정도다.
다행히 앙비뉴 자작의 필체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페인은 날려 쓴 생김새의 글씨를 읽어갔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이를 악물고 익힌 글이었기에 모른다고 하기 싫었다.
“음······.”
글씨를 읽어가던 페인의 얼굴이 진중해진다.
서신에는 여러 말들이 적혀 있었다.
돌려 말하는 말들이 많았지만 짧게 줄이면 이러했다.
[······하여 나 보르쉬 자작 앙비뉴 피코르테노는 그대와 친분을 나누고 싶기에 이곳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요약하면 ‘친해지고 싶으니 얼굴 좀 보자’는 뜻이다.
페인은 어째서 앙비뉴 자작이 귀족을 사신으로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앙비뉴 자작은 페인과 친해지고 싶어한다.
그런 마음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어떤 자를 심부름꾼으로 보내냐는 것이다.
적대하는 자에게는 강인한 인상과 무력을 가진 자를 보낸다.
별볼일 없거나 내치고 싶은 자에게는 허드렛일이나 맡는 경비병이나 하인을 보내기도 하고.
이처럼 모시고 싶은 사람에겐 자신이 아끼는 충복을 보내는 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페인은 에스터드가 보는 앞에서 서신을 곱게 접었다.
그리고는 페일에게서 봉투를 다시 받고서 그 안에 넣고 자신의 품안으로 갈무리를 했다.
이에 에스터드가 다시 눈동자를 빛낸다.
서신을 소중하게 보관한다는 것은 뜻을 가납하겠다는 무언의 답변이어서다.
“자작 각하의 의중은 잘 알았다. 금방 답을 내줄 터이니 그때까지 이곳에서 편히 지내도록 하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앙비뉴 자작의 사신은 트레이서의 안내를 받으며 물러났다.
페인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뒤를 쳐다봤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페일에게 명령을 내렸다.
“페일, 네 위로 내 아래로 애들 전부 모아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이언소드의 문장기가 세워지고 처음 열리는 회의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중요하다는 뜻이었기에 사람들은 서둘러 회의실로 모였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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