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자들의 무덤
디트럭스는 자신의 앞에서 이왕자를 욕하는 페인의 언행에 식은땀을 흘렸다.
잘못했다간 기껏 살아남았는데 분노한 페인에게 살해당할 것 같았다.
그런 디트럭스의 생각과 달리 페인은 딱히 죽일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잘 됐다, 마침 명분이 필요했는데 알아서 안겨주는군!’
페인은 이왕자가 자신을 공격한 것을 명분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혼자서는 계승전쟁에 뛰어들 명분이 부족했기에 삼왕자를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의 밑에서 종군하게 되면 공적이 희석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치 않은 일도 해야만 하기에 앙비뉴 자작에게 향하면서도 이 점이 계속 걸렸다.
근데 이왕자의 삽질 덕분에 움직이기 편해졌다.
‘명분이 생겼다.’
얼마 전까지 그가 계승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외인이었다면.
지금은 그곳에 한 발을 걸친 상태로 변해서 그렇다.
‘여기에 삼왕자까지 이용하면 더 좋겠는데.’
그렇다곤 해도 여전히 페인 혼자서 움직이기는 좀 힘들다.
삼왕자라는 방패막이가 있어야 귀찮은 일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거다.
‘방패막이가 되어줄 거 같기는 한데. 아직 확정은 아니니까.’
어쨌든 결과만 놓고 보면 이번 습격은 페인에게 이득으로 다가왔다.
당장 물리적인 이득만 해도 이왕자의 군세에게 빼앗은 물자가 한 가득이다.
“솔직하게 말했으니 살려주겠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아진 페인이 너그러이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에 디트럭스는 연신 감사의 인사를 그에게 올렸다.
그렇게 페인의 군세는 전리품을 두둑하게 얻었다.
병사들도 공적에 따라서 전리품을 분배받자 사기가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미 씹창이 나버린 나라답게 페인의 앞에는 또다시 도적무리가 나타났다.
“꼼짝 마라!”
“가진 거 다 내놔!”
“······나라 꼴 잘 돌아간다.”
아무래도 참교육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검이 아닌 몽둥이를 든 페인이 앞으로 나선다.
잠시 후 흙길에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 살려어-!!!”
뻐억! 뻐억!!
무언가를 두들겨 패는 찰진 타격음.
뒤이어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주변 숲을 흔들었다.
***
당연하지만 New 도적들은 역으로 개같이 털렸다.
앞서 마주쳤던 가짜 도적들과는 다른 진짜배기 도적 말이다.
“쯧, 거지들이었군.”
“피죽을 먹는 것만 간신히 면했나 봅니다.”
“이래서야 전리품이고 뭐고 없겠네.”
거지나 다름없는 오리지널 도적들의 주머니 사정은 페인의 병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남의 재산을 노릴 거면 최소한 무장이라도 제대로 갖춰야 할 것이 아닌가?
근데 이 예의 없는 도적놈들은 녹슨 칼에 몽둥이, 얼기설기 엮은 나무갑옷이 전부였다.
그나마 몸은 건강해서 노예로 쓸 만은 했다.
“전부 붙잡아서 데려간다.”
“예! 영주님!”
페인은 이들을 다른 영지에 팔아먹고자 했다.
사람 목숨이 가벼운 세상이지만 어디나 일손은 필요한 법이다.
신체 건강한 성인남성은 병사든 농노든 쓸모가 많았기에 모조리 붙잡았다.
그보다 페인은 영지에서 대놓고 돌아다니는 도적들의 모습에 의문을 가졌다.
“이쪽 영지는 관리가 잘 안 되는 것 같군.”
“계승전쟁이 길어지면서 치안이 악화되었는지라······. 송구합니다.”
에스터드의 변명에 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지. 원래부터도 제대로 관리를 못 하는데, 이 상황에서 제대로 되겠어?’
남의 영지가 개판이 나건 페인이 알 바 아니다.
페인이 이상하게 여긴 점은 나름 신경 써서 안내한 길에서도 도적이 들끓는다는 것이다.
고르고 고른 길도 이 정도면 다른 곳은 얼마나 심각할지 상상도 안 된다.
이런 페인의 의문은 라벤더가 친절히 풀어주었다.
“왕자들이 일부러 조장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물려받을 나라를 일부러 그렇게 만든다고?”
“어차피 고통 받는 것은 백성들이 아니겠습니까? 귀족들이야 사병이건 뭐건 보호를 받겠지요.”
“미친놈들이군.”
그런 자들이 일국의 계승후보라는 사실에 페인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들과 비교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삼왕자가 양반으로 보였다.
그렇게 페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중앙을 향해서 나아갔다.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중세귀족들의 매콤한 마인드가 곳곳에서 보였던 것은 비밀도 아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 마을이 얼마나 많은지 페인이 불쌍해서 식량을 나눠줬을 정도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주, 죽기 직전이었는데 이런 귀한 먹을 것을······!”
“쯧. 빈속에 갑자기 음식이 들어가면 탈이 나니 죽을 끓여서 조금씩 먹어라.”
“알겠습니다!”
이것이 지켜질 리는 없지만 그래도 말을 하고 나니까 페인은 속이 후련했다.
한편으로는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라 꼴 참 잘 돌아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낫겠는데.”
“하하하······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위험천만한 발언에 라벤더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것을 무시했다.
페인이 참 여러모로 마음에 들긴 하지만 저런 소리를 할 때마다 땀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마냥 부정하기에는 딱히 틀린 말도 아니군.’
라벤더는 불타버린 마을이나 울면서 곳곳을 배회하는 난민들을 보았다.
그런 자들과 마주칠 때면 페인의 말이 정답처럼 들리기도 했다.
당장 페인의 밑에는 굶주리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식량사정이 불안하긴 해도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힘을 냈다.
라벤더는 새삼 페인을 계속 따라가고 싶어졌다.
비기도 없이 자신을 꺾었던 신묘한 무기술!
주먹만 들어도 메뚜기처럼 흩어지는 무지렁이들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바치는 것도 모두 신기했다.
그렇게 페인과 라벤더는 에스터드의 안내를 받으면서 앙비뉴 자작에게로 향하였다.
여정이 길어질수록 군세가 끌고 가는 포로의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났다.
***
“으흐흐흑!”
“주둥이 닫아라.”
“······!”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어 오른 포로가 찔끔 눈물을 흘린다.
페인은 그런 포로를 향해서 으르렁거렸다.
놀란 도적은 아이언너클에 맞아 죽은 동료의 모습이 떠올라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빨이 부러지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어도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젠 하다하다 용병까지 지랄이군.’
페인은 그런 포로의 태도에 손에 낀 아이언너클을 뺐다.
주변에는 보급품을 노리고 덤볐던 용병들의 사체가 있었다.
겁대가리도 없이 덤볐던 놈들은 채 달아나지도 못했다.
라벤더가 이끄는 기병부대가 퇴로를 차단하자 절반은 죽고, 절반은 포로가 되어버렸다.
“도적놈들보다 몸상태도 좋은 게 몸값이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은화 한 닢은 나올 것 같은데?”
윌슨과 휘하 기병들은 붙잡은 용병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노예도 다 같은 노예가 아니라고, 용병 출신 노예는 값이 상당히 높았다.
싸울 줄도 아는 데다 못 먹고 살아온 일반 평민이나 도적들보다 체격이 건장해서 힘도 잘 쓴다.
유사시에 사병으로 써먹기 딱 좋았기에 노예시장의 인기 품목 중 하나였다.
돈이 궁한 페인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에크로츠 왕국은 노예제가 합법이라서 딱히 문제되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곳에서 노예제가 불법인 곳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
‘이러면 굳이 약탈을 할 필요가 없겠는데?’
도적이 많이 돌아다닌 사실에 처음에는 짜증도 났다.
근데 생각보다 노예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태도가 확 달라졌다.
중간에 마주친 상인들도 페인이 붙잡은 노예를 만족스럽게 구입하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렇게 되니 병사들의 눈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더! 더 많이 쳐들어오란 말이다!”
“노예! 더 많은 노예에에!!!”
처음 습격을 받았을 때만 해도 죽거나 다칠까봐 두려워했었다.
그랬던 놈들이 어느새 도적사냥에 혈안이 된 광전사로 변해버렸다.
돈도 벌고 병사 훈련도 된다.
앙비뉴 자작에게 바칠 공물도 이걸로 해결이 가능했다.
딱히 피해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도적이 많은 걸 꺼릴 이유도 없는 일.
그러나 즐거워하던 기분은 딱 거기까지였다.
화르륵-!
마을 하나가 불타고 있다.
매캐한 고기 태우는 냄새에 페인과 병사들의 안색이 굳었다.
***
페인은 불타는 마을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일단 앙비뉴 자작에게 초대를 받은 입장이다.
그의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앙비뉴 자작도 사정을 알아봐준 페인에게 고마워할 터.
훗날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페인의 군세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으, 끔찍하군!”
“저길 봐. 어린애까지 목이 매달렸어.”
“웩. 어떤 개자식들의 짓이야?”
정확히는 반쯤 불탄 상태였다.
나머지 반은 잿더미였다.
곳곳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끔찍한 광경에 병사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페인을 따라다니면서 사람도 죽여보았지만 이건 다른 종류의 역겨움이었다.
몇몇 비위가 약한 자들이 고개를 돌린다.
집에 있을 아내와 아이가 떠올랐는지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미친 새끼들!”
누군가의 중얼거림처럼 이건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중세가 미개하다고 하지만 이건 사람의 도리를 벗어낫다.
‘이것이 계승전쟁의 여파인가.’
페인은 참담한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볼프강 때도 그렇지만 이 시대의 지배계층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했다.
한낱 영주조차 기강을 세운답시고 자기 마을을 불태우는데 왕자는 어떨까.
하나의 왕위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는 왕자들은 자기 세력이 아니면 죽이고, 불태웠다.
그 결과가 바로 눈앞의 잿더미가 된 마을이다.
***
불타버린 마을을 바라보던 페인이 에스터드에게 물었다.
고용주가 될 자도 이런 수준이라면 같이 할 필요가 없었다.
“에스터드. 앙비뉴 자작도 이런 짓을 벌이나?”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적어도 아랫사람을 건드리진 않습니다. 물론 삼왕자 전하도 마찬가지십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마음에 드는 대답에 페인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불씨도 거의 꺼진 탓에 연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흉물스러워진 마을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신을 수습하라.”
“예, 영주님.”
페인의 지시에 윌슨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병사들이 힘들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병사들이 시신의 수습을 시작하는 사이 라벤더가 페인에게 다가왔다.
그는 페인이 얼굴도 모르는 자들을 위해 수고를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겁니까?”
“반대로 묻지. 왜 해주면 안 되나?”
“그건······음.”
라벤더는 페인의 대답을 곱씹었다.
페인도 굳이 뒷말을 잇지는 않았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애민정신이 투철하다.’
라벤더는 그리 생각한다만.
페인이 보기엔 이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릴 때야 내 가족 하나 건사하기 힘들었다만.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실행하지 않는 짓을 페인은 태연하게 해냈다.
불현듯 라벤더의 시선이 시신을 수습 중인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생판 남인 마을주민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구슬땀을 흘렸다.
힘들고 역겨운 일.
절로 구토가 치미는 더러운 일이지만 그들의 안색은 아까보다 훨씬 밝았다.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낫다라······.’
라벤더는 페인이 장난처럼 했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너무 황망한 말인지라 못 들은 척 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누군가는 왕이 되어야만 한다.
나라가 중심을 잡으려면 위에서 머리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그것이 꼭 왕자들일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 들었다.
페인의 군세는 시신의 수습을 끝내고 다시 여정을 떠났다.
마을에 세워진 이름 모를 무덤들은 떠나는 이방인들을 소리 없이 배웅해주고 있었다.
- 작가의말
내일도 오후 6시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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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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