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답을 알고 있다
부글부글부글-!
물통의 물속에서 기포가 올라온다.
그 안에는 얼굴을 처박은 에스터드가 있었다.
에스터드의 양쪽에는 팔과 머리를 짓누르는 남자들이 있었다.
페인은 팔짱을 낀 채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끌어올려.”
“예.”
무덤덤한 그의 지시에 사내, 트레이서가 대답한다.
트레이서는 에스터드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물통에서 끄집어냈다.
“커허어어억!”
에스터드는 혼란에 빠졌다.
분명 낮에 만났을 때만 해도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정말 괜찮았던 게 맞나?’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걸리는 점이 없었다.
명문가의 귀족이 신생 귀족을 초대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페인에게도 좋으면 좋은 일이지 원한을 가질 일은 전혀 없었다는 것.
그러나 현실은 물고문을 당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페인이 왜 이러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기도 전에 페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물에 담가라.!”
“예!”
“자, 잠시만!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부그르르륵!!”
명령이 떨어지자 에스터드의 얼굴이 다시 물통으로 처박혔다.
우악스러운 사내들의 손길을 편하게 살아온 귀족인 에스터드가 견딜 리가 없었다.
물속에 처박히면서도 에스터드는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알지 못했다.
페인은 발버둥치는 에스터드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단순히 호의만으로 초대했을 리가 없어.’
페인은 중세인을 믿지 않는다.
앙비뉴 자작의 초대를 수상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자기 이득에 혈안이 되어있는 귀족이 친하게 지내자고 초대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앙비뉴 자작은 페인보다 한참이나 격이 높은 귀족이다.
그런 사람이 평민 하수인도 아니고 귀티 흐르는 귀족 사신을 보냈다.
이쪽 세상 사람들은 이러면 감동해서 냉큼 달려갈지 모른다.
그러나 페인은 달랐다.
너무 정중한 태도에서 위화감이 느껴진 것이다.
‘내 감이라고 하는 게 무시할 게 못돼.’
다른 자가 보면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 하겠다만.
감이 말해준다고 해야 할까.
시간이 지날수록 페인 자신의 감각은 점차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감각에 따르면 무언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기에 미친 짓임을 알고도 미친 짓을 벌이고 있었다.
뭐, 다른 자라면 감각이 말해줘도 뒤를 생각해서 이런 짓을 벌이지 않겠다만.
그는 그였다.
‘갈 때 가더라도 뭔지는 알고 가야 한다. 뒷수습이야······어찌 되겠지.’
이제 지켜야 할 것도, 되고 싶은 목표도 생겼기에 개죽음은 사양이다.
그렇기에 페인은 앙비뉴 자작의 뜻을 알고 있는 에스터드를 족쳤다.
‘그래도 너무 심하게 대해선 안 되겠지.’
고문을 가하더라도 티가 나지 않게 해야 하는 법.
물고문은 그런 면에서 효율이 좋은 수법이다.
“어그르르륵!”
에스터드는 물통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가 물통에서 벗어난 것은 약 10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
“끌어내.”
페인의 지시에 사내들이 에스터드를 물통에서 끌어올린다.
정신이 희미해져가던 에스터드는 얼굴을 뒤덮던 물이 사라지자 급히 숨을 들이켰다.
“푸하!”
에스터드는 비 맞은 쥐새끼 꼴로 숨을 헐떡였다.
그는 방금 전에 자신이 저승길로 향하는 강물에 발을 걸쳤음을 깨닫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페인은 이제 질문을 건네도 괜찮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처음부터 물었다면 대답하지 않았겠지만 심신이 지친 뒤에는 굳은 심지도 약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이제 말할 생각이 드는가?”
“무엇이 궁금하신지 몰라도 뭐든 다 답하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군.”
예상대로 에스터드는 순종적으로 변해 있었다.
첫 만남에서 보여준 빳빳하면서도 귀족적인 태도가 깨끗하게 사라진 것이다.
이제야 눈높이가 맞아졌다고 생각한 페인은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페인이 원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어째서 앙비뉴 자작이 날 초대한 거지?”
냉정한 페인의 목소리에 에스터드의 등골이 서늘해진다.
본래라면 억울하다, 이런 짓은 서로에게 좋지 못하다는 등 능숙하게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깊게 이어갈 여력이 없었다.
물고문으로 몸도 마음도 기력이 쫙 빠져버렸기에 물음에 빨리 답하고 쉬고 싶었다.
“계승전쟁! 계승전쟁 때문입니다!”
“계승전쟁이 무엇이냐?”
“······? 혹시 계승전쟁을 모르십니까?”
페인이 계승전쟁을 모르는 눈치에 에스터드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게 페인은 얼마 전까지도 농노로 살아왔다.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벅찬 그가 왕자들이 왕위를 두고 싸우는 거에 관심을 가져서 어디에 써먹겠나?
어쨌든 왕위계승을 전제로 한 내전이란 소리다.
앙비뉴 자작은 그중 한 왕자를 지지했다.
자신이 미는 왕자가 이기길 바라는 자에게 페인의 무력은 탐스러웠을 터.
그렇다면 조각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무력으로 영지 두 곳을 점령한 페인, 왕자의 승리를 위해 무력 확보가 시급한 앙비뉴 자작.
갓 기득권에 발을 들인 페인에게 귀족 사신을 보내는 것이 이제야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간추린 이야기만으로 사정을 모두 알 수는 없는 일.
“계승전쟁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다만.”
“제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승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페인의 요구에 에스터드가 급히 대답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촛불이 아른거리는 어둑한 실내에서 한쪽은 살기 위해 열변을.
한쪽은 냉정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
계승전쟁.
그것은 국왕 마르실로 8세의 와병으로 시작된 전쟁이다.
마르실로 8세는 후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몸져누웠다.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불명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요점은 왕정국가에서 왕좌가 10년이나 비어버렸다는 것.
왕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후계는 정해지지 않았다.
딴 생각을 안 품는 게 더 이상하고 왕자들은 서로에게 칼을 겨눴다.
‘일왕자 페트로와 이왕자 루이라.’
페인은 이 나라 왕자들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일왕자 페트로는 장자계승의 원칙을 명분으로 자신이 후계자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장자인 페트로 왕자가 가장 명분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장남을 지지해줄 왕이 저 모양이니 그건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이에 루이 왕자님께서는 크게 반발하셨습니다.”
“그래서 대공 자리를 꿰찼다는 말인가?”
“내전이 벌어진 계기가 사실상 그 시점이죠.”
본래 후계자에게는 ‘마고 대공’이라는 작위가 주어진다.
근데 그것을 차남인 루이 왕자가 낼름 꿰차버리자 난리가 났다.
신하들 사이에서도 격렬하게 토론이 오고 갔다.
누가 옳고 그르냐를 시작으로 혈통에 관한 문제, 사생활 문제, 능력, 품성, 힘, 재산, 인맥.
온갖 것들이 어지럽게 얽히면서 개판이 만들어졌다.
더는 말로 해결이 안 될 지경에 이르자 결국 칼을 빼든 페트로 왕자.
이를 시작으로 계승전쟁의 막이 올랐고 그것이 약 5년 전의 일이었다.
10년 전부터 시작된 계승전쟁은 그렇게 5년 전에 본격적으로 다툼이 벌어졌다.
하렌 영주와 같은 자들은 혼란을 이용했다.
힘 있는 자들의 관심이 계승전쟁으로 쏠린 틈을 타 제 잇속을 채우려고 이웃 영지를 노린 것이다.
그 결과야 뭐, 다들 알다시피 대가리 댕강 행이지만.
몇몇 운 좋은 자들은 재산과 땅을 늘리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럼 나는 그 꼽사리에 당했다는 말이로군.’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된 페인은 화를 꾹 참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심문이지 혼자 열을 내는 게 아니다.
그는 에스터드에게 보다 세밀한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앙비뉴 자작이 날 찾는 정확한 이유가 뭐냐?”
“삼왕자 키예프 공작께서는 인재가 필요하십니다. 앙비뉴 자작께선 그분의 심복이니 인재를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자기들 대신 싸우다 죽어줄 놈이 필요하다는 말이군.”
“그건······.”
삼왕자를 헐뜯는 말에 에스터드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들의 옆에는 물이 담긴 물통이 있다.
에스터드는 방금 전까지 저곳에 머리를 처박았었다.
뽀글뽀글 올라가는 기포와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 무력했던 당시의 기억.
‘죄송합니다, 왕자전하! 제가 임무에 실패했나이다!’
불충임을 앎에도 그가 침묵을 지키는 이유였다.
자존심 챙기겠다고 한 마디 잘못 놀리면 물고문행인데 입을 열기 쉬울 리가 없었다.
페인도 딱히 그것을 경멸하거나 비꼬지 않았다.
막말로 페인도 어머니가 병사에게 당하지만 않았으면 들고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목숨을 걸고 뭔가를 하는 것은 큰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페인은 머릿속으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했다.
앙비뉴 자작은 대신 싸워줄 자가 필요해서 페인을 초대했다.
‘일부러 귀족 사신을 보낸 이유도 그렇지.’
용병노릇을 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의도가 좋지 않았다.
사실을 미리 알고 가는 거랑 모르고 간 상태에서 목숨 걸고 싸워야 게 같겠는가?
심지어 일단 초대를 받고 가면 제안을 거부하기도 쉽지 않다.
족히 누대에 걸쳐서 전해져오는 명문가 자작이다.
그것도 왕위계승중인 왕자의 심복.
그런 자의 제안을 거부했다가 어떤 불상사를 당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왕위계승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두고 싸우는 거니 지기라도 하면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
페인처럼 뒷배도 없는 자는 그럴 확률이 더 높았다.
이윽고 페인은 결단을 내렸다.
어떻게 행동할지 방향을 결정한 것이다.
“자작 각하의 초청, 받아들이지.”
“······! 현명하신 결정입니다, 영주님!”
“영주님, 진짜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런 페인의 결정이 의외였는지 호위인 트레이서는 물론 에스터드마저 크게 놀란다.
그들은 페인이 초대를 거부할 줄 알았다.
하지만 페인에게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왕위계승의 결과는 왕국 전역으로 퍼질 거다. 그때 아무것도 안 한 놈들은 죄다 나가떨어지겠지.’
현대에서조차 인맥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물며 자기 고향에서 평생을 살고 죽는 이가 태반인 중세에서는 더욱더 심했다.
인맥. 페인에게는 인맥이 필요했다.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려면 인맥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문제는 일왕자와 이왕자는 이미 세력이 탄탄하다는 것이다.
페인이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별로 없으니 그들에게 합류해도 큰 활약은 어렵고 하더라도 인정받기 힘들다.
반면 삼왕자는 딱히 언급이 없는 것을 보니 세력이 가장 떨어지는 것일 터.
‘내 상황과 딱 맞아떨어진다.’
무력이 필요한 삼왕자와 공적을 세우고 그것을 보증해줄 인맥이 필요한 페인.
이해관계가 맞으니 손을 못 잡을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페인은 삼왕자.
정확히는 앙비뉴 자작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길잡이는 당연하게도 에스터드가 맡기로 했다.
***
“그런 이유로 나는 삼왕자의 심복인 앙비뉴 자작을 찾아가려고 한다.”
페인은 가족에게는 말을 하고 가려고 했다.
기존의 영지전과는 다르게 남의 땅에 가서 싸우는 일이다.
당연히 더 위험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 말하는 것은 당연했다.
“큰오빠, 거기 꼭 가야 해?”
“어. 내가 보기에 이 전쟁, 못 피할 것 같다. 피하지 못할 거라면 여파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가서 막아야지.”
그런 페인의 말에 심성이 고운 아일라가 그를 말렸다.
페인은 그런 아일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따지고 보면 하렌 그 씹새끼 영주가 무리하게 전쟁을 벌인 것도 계승전쟁의 여파다.
서로 누구를 밀고 있느냐에 따라서 사이가 좋아지고, 악화되기를 반복한다.
이런 때일수록 힘이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하렌 영주의 결단은 개폭망으로 끝났지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페인은 이 선택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아일라도 그것을 알았다.
“그럼 조심해야 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페인을 건드릴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도 날 건드릴 수 없다.’
페인은 앙비뉴 자작을 찾아가서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여행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작가의말
내일도 오후 6시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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