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뒤엎기
아직도 자기가 해낸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잡은 창과 검이 이리도 익숙하다니 희한한 일이다.
다섯 명의 병사를 상대로 이겼다.
하나씩 상대했다지만 이긴 건 이긴 거다.
그렇게 페인이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사이.
숨어서 지켜보던 동생들이 튀어나왔다.
“형!
“큰오빠!”
저 멀리서 동생들이 달려온다.
아마도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다.
“하여간 말은 드럽게 안 들어먹어요.”
말은 그래도 페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깃들어 있다.
마을과 가족을 지켰다는 뿌듯함이다.
그는 오늘 다섯 명의 적에게 승리했다.
***
모든 병사가 죽었다.
영주가 보낸 5명의 병사를 페인이 쓰러트렸다.
마을을 유린하던 자들이 사라지자 숨어있던 주민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의 풍경은 처참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는 지옥이 강림한 탓이다.
저항할 수 없는 강대한 힘으로 마을을 초토화시키던 영주의 병사들.
그 탓에 마을 곳곳이 불타고 폐허로 변했다.
“페인이 그놈들을 전부 죽였다고?”
“맙소사, 이게 꿈이야 생시야?”
죽다 살아난 주민들은 놀라운 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무식한 이들답게 뭣도 모르고 기뻐했다.
“만세! 만세! 페인 만세!”
“장하다 페인! 네가 기어코 해냈구나!”
“나는 평소부터 페인이 더럽게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저 개자식이 인성은 파탄 났지만 언젠가 사람 하나 담글 줄 알았지!”
······칭찬 아닌 칭찬을 떠들면서 주민들이 환호성을 터뜨린다.
그러다 처참하게 망가진 마을의 상태에 환호성이 잦아들었다.
기쁨이 가신 자리에는 차가운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이나 반파된 마을의 상태도 큰 문제인 것은 맞다.
당장 없는 살림에 줄어든 인원으로 재건은 힘들다.
집이며 밭을 다시 만드느라 한 세월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앞선 문제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
바로 농노가 영주가 보낸 사람을 죽였다는 대사건 말이다.
“영주님의 가신을 죽여버리다니!”
“우린 다 죽을 거야, 토벌대가 와서 다 죽을 거라고······!”
말단 병사들이 으스댈 수 있던 것은 영주의 권위 덕분이다.
요 몇 년 간 길어진 전쟁으로 영주의 권위가 낮아졌지만 그래도 귀족이다.
그런 영주가 보낸 사람을 죄다 죽였다.
이는 영주의 권위를 무시한 걸 넘어 똥칠을 한 거다.
영주가 바보도 아니고 이걸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다.
토벌대가 오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다.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는 농노마을이야 순식간에 쓸려버릴 터.
겪어보지 못한 사태에 다들 당황하고 있다.
단 한 사람.
사건의 당사자는 여유로웠지만 말이다.
‘내게도 재능이 있었다.’
페인은 전투의 여운을 되새겼다.
급박한 와중이었기에 대충 넘어갔지만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낡아빠진 식칼을 만져본 것이 날붙이를 만져본 경험의 전부다.
그랬던 페인이 창을 잡았다고 순식간에 병사들을 찔러 죽인 건 괴상한 일이었다.
그것도 평범하게 이긴 것이 아니다.
대등한 싸움도 아닌 일방적인 승리였다.
단박에 몰아쳐서 치명적인 약점을 노린, 그야말로 고수의 일격!
페인은 자신이 아무것도 없이 낯선 세상에 떨어졌다고 여겼다.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신을 욕한 횟수만 해도 수천 번은 될 거다.
그런데 뒤늦게야 자신에게도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런 건 좀 빨리 알려달라고.’
페인은 신을 욕했다.
이미 욕했었지만, 추가로 더 욕했다.
그래도 재능이 있음을 알았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 재능만 있으면 농노 탈출은 금방일 거다.
“아, 조졌네.”
문득 깨달은 사실에 인상이 팍하고 찡그려진다.
생각해보니 영주가 보낸 병사를 몰살시켰다.
보는 눈도 많아서 감춘다고 감춰지는 일도 아니다.
영주에게 그는 미래가 기대되는 우수한 부하가 아닌 토벌대상이 되었다.
마치 취직하고 싶은 회사에 빨간 줄이 그어진 기분!
문득 페인은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내려다봤다.
웬 병사놈이 머리를 세게 때려서 아직도 기절 중이다.
그런 어머니를 본 페인은 결심을 내렸다.
‘애초에 그딴 놈 밑에는 들어갈 생각도 없었어.’
영주놈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
그것도 모자라 어머니까지 매 맞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애써 먹고 살만큼 키운 마을도 완전 아작이 났다.
영주가 원한을 가지건 말건 이제는 상관없다.
페인이 가진 분노가 훨씬 더 커졌으니까.
‘영주 씹새끼.’
속으로 모든 일의 원흉을 씹어댄다.
그리고 앞으로 어떡할지 고민했다.
‘영주를 죽인다.’
가능성은 낮았다.
자신은 농노고 영주는 귀족이니까.
인생의 시작지점부터가 다른데 그게 쉽겠는가?
가진 자산부터 시작해서 인맥까지, 사소한 것 하나조차 페인이 불리했다.
그럼에도 페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쉬운 일이었으면 애초에 일이 이렇게는 안 됐을 거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면 개새끼를 죽이고 죽는다.’
성공하면 영주, 실패해봤자 반역자 아닌가?
그저 그뿐인 일이었다.
***
영주를 상대로 반역을 한다.
일개 농노가 떠올릴 만한 생각이 아니다.
근데 잘 생각해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일단 그 빌어먹을 하오인지 하렌인지 하는 영주는 변변찮은 놈이다.
별 능력도 없는 게 귀족이랍시고 꺼드럭거리면서 여기저기에 찝쩍댔다.
이번 영지전도 별것 아닌 말다툼에서 시작됐다고 하니 정말로 하찮았다.
‘벌써 5년이나 싸우고 있어서 그런지 영지 꼴이 말이 아니야.’
긴 전쟁으로 영지 전역이 피폐해졌다.
영주는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귀족과 가신들도 궁핍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영지 꼬라지가 이 모양인데 영주의 권위가 굳건할 리가 없다.
병사들에 의한 약탈도 사실상 통제에 실패했기에 생긴 방관이다.
병사들이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그들은 약탈품 중 가장 귀한 것들은 확실히 영주에게 바쳤다.
그러면서 영주의 귀에 소식이 닿지 않게끔 주변에 뇌물을 뿌렸다.
공범이 된 자들은 영주의 귀를 살살 홀려서 그런 말을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공범이다.
그 누구도 의무를 다하거나 힘없는 자를 지켜주지 않는다.
그럼 살아남거나 성공하려고 저들의 틈에 끼어들까?
그건 싫었다.
그딴 지랄은 전생에서 충분히 겪었다.
“싹 다 조진다.”
더는 참지 않는다.
페인은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자들을 족치기로 마음먹었다.
***
새삼스럽지만 페인은 신분제를 싫어한다.
현대에서 살았었던 자라면 모두가 그럴 거다.
이곳은 굶어 죽는 사람이 태반이다.
한데 잘나신 푸른 피들은 호의호식하며 배때기를 불리는 중이었다.
거기까지야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근데 운 좋게 태어난 걸 가지고 뭐라도 된다는 것처럼 남을 핍박해도 되는가?
‘개 같은 거.’
이런 생활밖에 모르는 자들은 참고 넘어갈 거다.
하지만 문명인이었던 페인으로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죽는데 그걸 참고만 있나?
그래서 병사들을 죽였다.
영주의 보복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제 욕심에 전쟁을 일으켜놓고 5년이 지나도록 이기지도 못한 영주?
‘병신새끼.’
영주는 욕심은 많은데 능력이 부족했다.
옆 영지에게 뺨 맞고 그걸 보충하겠다고 영지민들을 쥐어짜냈다.
그래놓고 또 사치는 포기 못하는지 상인에게 돈을 빌렸다.
소문으로 들은 거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아 맞을 것이다.
세간에서는 상인에게 돈을 빌렸다는 소문도 있다.
말이 소문이지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정말 사람새끼가 아니다.
비단 하렌 영주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세계의 귀족이란 자들이 모두 그렇다.
“아주 개새끼가 따로 없어요.”
“형, 누구 말하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하렌 영주지. 무능한 놈이 영주랍시고 꺼드럭대는 게 아주 꼴사납다니까.”
페인은 동생들에게도 교육을 착실히 시켰다.
원래 이런 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시켜야 하는 법이다.
셋째와 넷째를 앉히고 교육하던 페인은 다시금 다짐했다.
‘앉아서 죽을 생각은 없다.’
가만히 있으면 영주의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할 터.
그 전에 영주의 모가지를 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힘들고 어려울 것이다.
고작 농노 따위가 해내기엔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한다.’
페인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입을 쩍 벌렸다.
“내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네만. 자네 미쳤는가?”
촌장 욤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암만 생각해도 제정신으로 할 말이 아니다.
평생을 부림 받으며 살아온 그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미쳤지 그럼.”
“뭐? 너너······.”
“제정신이면 이런 소릴 하겠습니까?”
“!!!”
페인이 촌장과 눈을 마주친다.
그의 눈은 맑았지만 분노와 증오로 활활 불타올랐다.
본래 페인도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러나 평생 밑바닥을 전전하다 칼빵을 맞고 죽었다.
다시 태어나니 이제는 그보다도 못한 최하층민이 되었다.
어찌저찌 발버둥을 쳐서 먹고 살만해지니 이젠 귀족이란 것들이 지랄이다.
아버지는 시체도 못 찾았고, 어머니는 의사불명인 상태.
벼랑 끝에 몰리자 그의 앞을 막던 댐이 붕괴했다.
현대에서 철저히 교육 받은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쪽 세상의 ‘신분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인내하고, 또 인내해서 남는 게 죽음이라면.
죽기 전에 죽이겠다는 것이 현재 페인의 마인드였다.
“그, 그래도 참아야지 않겠나?”
“그래, 페인! 자네는 너무 흥분했어.”
“잠시 머리를 식히고 다시 생각을-!”
“뭔가 착각들을 하는 것 같은데.”
페인이 그들의 말을 중간에 자른다.
욤과 마을주민들은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진 페인의 모습에 몸이 굳었다.
“저놈들은 이미 죽었다. 나한테 덤탱이 씌운다고 해서 영주가 너희를 봐줄까?”
페인 혼자 벌인 일이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영주가 보기에는 이들 또한 공범이었다.
암만 그 혼자 저지른 일이라 주장해봤자 증거가 없다.
증인으로 내세울 제3자도 없고, 병사들은 이미 모두 죽었다.
범인 한 명만 특정하기 힘든 상황에서 영주는 어떤 선택을 취할까?
“내가 영주면 당신들부터 죽인다. 앞뒤 가릴 거 없이 쉽고 편하니까.”
냉정한 어투로 페인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영주는 이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농노는 재산에 불과하다.
가축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가축 하나가 역병에 걸렸는데 어떤 놈이 걸렸는지 모른다?
답은 간단하다.
‘전부 죽여서 묻어버린다.’
다른 가축들이 나쁜 물에 들기 전에 모두 없앤다.
현대에서도 가축들에게 병이 돌면 죽여서 땅에 파묻었다.
그제야 무슨 소린지 이해한 마을주민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딴 짓을 하던 자들도 깜짝 놀란 기색이다.
“나, 나는, 난 죽이지 않았어!”
“그걸 누가 증명해주지?”
“우리가 봤잖아! 페인 네가 저지른 일이라고 말하면 된다고!”
“하지만 병사들이 죽는 것을 방관했지. 그럼 왜 말리지 않았냐고 목이 매달리겠네.”
“!?”
“뭐?”
“시발!”
사람들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게 바로 현실이다.
내가 아니라 해봤자 힘 있는 자가 억지를 부리면 그것은 진실이 된다.
그야말로 개 같은 세상이다.
페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밥상을 뒤엎기로 결정했다.
- 작가의말
월요일~토요일 오후 6시에 연재!
가시기 전에 추천과 선작 한 번씩만 꾸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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