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공간 : 타임 스내쳐스 5
“좋아. 이제 보이네.”
시윤이 눈을 떴다. 어두워졌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온몸이 문신으로 뒤덮인 알렉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빙고.”
얼굴에 피칠갑을 한 시윤이 씩 웃었다.
짧은 새 다크서클이 내려앉았고 입술은 푸르게 변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대, 대체 어떻게···!”
시각과 청각이 모두 차단된 사이, 의존할 것은 촉각.
시윤은 사방팔방에서 몸을 베어내는 고통의 감각에 집중했다.
“온 기운을 촉각에 몰빵했지.”
“ㅁ···미친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알렉스의 말은 반쯤 정답이었다.
기운을 집중하면 감각이 몇 배, 몇십 배는 확장된다.
그리고 시윤에게 남은 감각이라곤, 고통 밖에 없었다.
거진 도박이었던 셈이다.
“쿨럭!”
극대화된 고통이 내상을 끌고 들어왔지만, 시윤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알렉스 섀도우워커가 몇 번을 빼내어보려 안간힘을 썼으나, 이제 기운을 손에 집중하고 있는 시윤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못 빼.”
온 힘을 손에 싣자, 특유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오기 시작했다.
반대편 손에 쥔 검을 들어 대각선으로 그어내렸다.
“그아아악!”
허공에 검날이 대각선으로 그어지며, 알렉스의 팔이 분수처럼 피를 뿜었다.
시윤은 잘려나간 팔 한짝을 들고 있다가 바닥에 던졌다.
“이제 시작이다, 이 새끼야.”
“크으윽!! 실패작 주제에···! ‘그분’의 의지조차 물려받지 못한 주제에!”
“뭔 소리야.”
시윤은 숨을 몰아쉬며 다시 검을 잡았다.
삐빅! 소리와 함께 출혈이 멎어가고 있었다.
어지러웠던 시야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간다. 한번 잘 버텨봐.”
그길로 시윤의 모습이 알렉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방에 검기가 튀었다.
시윤이 내려치고, 옆으로 베자 알렉스가 피했다.
종종 날아드는 그림자의 파편이 시윤의 몸 곳곳에 상처를 냈지만, 도무지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강력할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알렉스는 그림자 속으로 피하려 했으나 이제는 번번이 시윤의 손에 붙들렸다.
팔이 없어진 탓인지, 놈은 그림자를 자유자재로 쓰지 못했고, 기운도 흩어져가고 있는 듯했다.
쿵! 시윤이 기운을 크게 둘러 검을 휘두르자, 알렉스는 피흘리는 팔을 꽉 잡은 채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큭큭큭···”
그리고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왜 웃어?”
“하하하하!!!”
시윤은 알렉스의 웃음을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했다.
웃는 이유를 짐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웃는 이유는 두 가지다.
포기했거나, 다른 뭔가가 있거나.
“이제 알겠다. 네놈···.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몰라도, ‘그분’의 의지를 이어받지 못한 거야. 이 가련한 편린아.”
“···편린.”
시윤이 그 단어에 눈을 움찔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편린’이 대체 뭐냐?”
어느새 놈은 지혈을 끝마친 듯했다.
더이상 피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다 놈을 해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들었지만, 시윤은 판단을 달리했다.
정보 파악이 우선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다니. ···그분께선 어찌 이런 놈에게 깃든 것인가.”
“대답이나 해.”
휘익! 시윤은 검에 묻은 피를 한 차례 털어내고는 다시 알렉스 섀도우워커를 겨누었다.
“똑바로 대답 안 하면 남은 팔도 떨어질 줄 알아.”
“하하! 무섭구만.”
알렉스는 시윤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짓고서는 말을 이었다.
“편린. 너도, 나도 가지고 있지. 어느날 갑자기 뇌 안에 생겨난 이상한 ‘기억’이야. 너도 봤을텐데?”
트래시마스터. 헤라클레스. 그리고 태초의 여신.
몇 가지 짐작가는 바가 있던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분’의 기억이야.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 태초의 조물주. 억겁의 시간을 지나, 이제 돌아올 준비를 마치셨지.”
“그 사람의 기억이 내 머리에 어떻게 들어오는 건데!?”
“뻔한 거 아냐?” 알렉스는 코웃음을 쳤다. “선택받은 거지. 그분의 의지를 시행할 ‘사도’로.”
“···대체 그 의지가 뭐냐? 배신자 처단? 그것 때문에 모든 시공을 소멸시키려는 거야?”
“배신? 크하하하하!! 그래. 그것도 있지. 그분의 분노는 감히 재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의지는 그런 옹졸한 이유가 아니다.”
그 이외에도 몇몇 기억들이 있었다.
분명 그때 느낀 감정은 옹졸하다 치부하기에 너무나 거대했다.
그런데 배신이 이유가 아니었다?
“이건 그거야. 말하자면···.그래. ‘청소’지.”
청소.라는 말을 들은 시윤의 눈이 움찔했다.
“위대한 조각상을 조각하며 깎여나간 자재의 파편들. 그것이 네놈들이 지키고자 하는 시공의 실체다.”
“···그게 무슨. 겨우 그런 이유로!”
“상관 없어. 어차피 실패한 시공이다.”
“실패하지 않았다.”
“허상이야.”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집에 가득 찬 쓰레기를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 이유지.”
“소멸되는 시공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가루가루 아주 아작이 나서 무(無)가 되지.”
“···알고 있단 말이지?”
“쓰레기를 치우는 것일 뿐.”
“···.”
더 할 말은 없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야기해봐야 소용 없···젠장!!!!!”
시윤이 급히 검을 들었다.
어느새 알렉스의 팔에 그림자가 들러붙어 팔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기운이 회복된 듯 보였다.
그 팔에 모인 그림자가 포신처럼 길쭉해지더니, 시윤을 향해 겨누어졌다.
주변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그 포신으로 빨려들어갔다.
시윤의 그림자도 마찬가지였다.
공간은 어느새 새하얗게 변했다.
명암이라곤 한톨조차 찾아볼 수 없는, 순백의 세상이었다.
“내게 시간을 준 것이 네놈의 패인이다!!!!”
기이잉···.
들어본 적 없는 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림자가 캐논포처럼 쏘아져나왔다.
기운이 곳곳을 덮자 끝없이 깊은 어둠의 구멍이 생겨났다.
“하하하하하하!!!! 나의 그림자는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완전한 암흑! ”
암흑으로 물들어가는 공간을 바라보며 알렉스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끝이다, 실패작! 너를 죽여 그 편린을 내가 취한다!”
빠지직.
그때, 그림자 속에서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꽈득..까드득..!
마치 유리가 깨지듯 잘게 금이 가고 있었다.
“···금···?”
한참 힘을 쏟아붓던 알렉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림자에 금이 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금간 자리가 더욱 짙은 암흑으로.
그리고 작게 새겨진 금이 조금씩 더욱 거대하게 변해갔다.
“월야행(月夜行).”
“ㅁ···뭐!?”
균열 속에서 작은,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믿기 힘든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사이, 그림자가 더욱 잘게 부서지더니 거대한 금 사이로 모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어라? 이게 이러면 안···안 되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새도 없었다.
알렉스가 뿜어내는 그림자의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있었다.
그 금간 자리. 아니, 그 어둠 속으로.
“어찌하여 고작 실패한 편린 주제에 그런 힘을!”
“틀렸어.”
사라지는 그림자 뒤로 진시윤의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기운을 온몸에 두르고 검을 꼭 쥔 모습.
특히, 두 눈 속 동공이 마치 검정색 불길로 타오르는 듯했다.
“내가 사는 시공도, 그곳에서 만난 모두. 그 사람 하나하나.”
“그 힘을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이냐!”
부욱!
동시에 알렉스의 몸에서 두꺼운 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명심해. 이곳에 쓰레기는 없어.”
“이, 이게 무슨!!”
“그러니 이제 꺼져.”
샤아아악!!
그림자가 모두 빨려들어갔다. 기운이 사라질수록, 알렉스의 몸도 옅어지고 있었다.
“편린이···!! 내 기운이!!!! 아아아악!!!”
그리고 마지막 한 줌 기운이 모두 사라질 때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검게 빛나는 돌조각 하나가 남아 있었다.
“저건···.”
시윤의 눈에도 익숙한 모양이었다.
스스로 희미하게 기운을 뿜어내는 돌조각.
트래시 마스터의 방에서 보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시윤이 가진 기운이 돌에 공명하는 듯했다.
“몸에서 나온 건가···?”
그렇게 돌을 집어드는 순간이었다.
## ···. ##
몸 속 붉은 메시지가, 왠지 웃음을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작가의말
조팔봉입니다. 추천과 선호작은 많은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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