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잔챙이들 (1)
봉순은 강수가 보내준 2백만 원을 생각하니 힘이 났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강수는 쓰레기처럼 살겠다고 봉순에게 말했었다. 그러나 날파리를 잡아 현상금을 받고, 그것을 봉순에게 보냈다는 것은 쓰레기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강수도 봉순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봉순은 핫초코 두 잔을 사서 진하게 선팅된 승합차로 가져갔다.
“이거 마셔요. 식사도 제때 못할 텐데, 당 떨어져요.”
봉순의 반지하방 주위에서 잠복하고 있던 박경위와 김경사가 당황하면서 핫초코를 받아들었다.
“헛수고하는 거 아시죠?”
“차봉순, 너 장강수 덮어주다가 인생 조진다는 거 잊지 마라.”
박경위가 의심의 목소리로 말했다.
“박경위님하고 나는 악어와 악어새 관계라는 거 잊지 않으셨죠? 박경위님이 나한테 뒷돈 받은 거 까발려지면 옷 벗어야 해요.”
봉순은 위협적으로 말하고 나서 찡긋 웃었다.
***
록산이 박경위와 봉순의 대화를 도청하고 있을 때 마상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회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록산은 천회장이 보낸 롤스로이스를 타고 별장으로 향했다. 아방궁처럼 화려하고 위압적인 별장이었다.
록산은 별장을 보는 순간 양부모와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짓밟힌 과거가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록산은 마상무의 안내로 밀실로 들어갔다.
“마상무, 자네는 록산의 실력을 알고 있나?”
“······.”
”록산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전직 경찰 열 명을 고용해도 못 찾았던 강실장, 그 잡놈을 48시간 만에 베르사유에서 잡아서 무릎을 꿇린 실력자야.”
천회장은 록산을 칭찬하면서도 록산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록산은 천회장의 의도를 알고도 남았다. 넘버36을 수거하지 못해서 질책하는 것이다.
천회장은 소파에 깊이 묻고 있던 몸을 일으켜 장식장에서 위스키를 꺼내 록산에게 따라주었다.
“가루이자와 1960년산이야. 한화로 8억이 넘는 고가의 위스키지. 입 속에 몇 방울 떨어뜨려서 천천히 음미해 봐.”
한 병에 8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의 위스키는 록산의 혀를 적신 후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달콤하지만 은은하게 독했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록산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맛이라는 생각을 하며 남은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었다.
“가루이자와 위스키는 생산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물건이야. 그래서 그 값을 이제는 매길 수도 없어.”
천회장은 소파에 앉으며 말을 계속했다.
“록산,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과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의 차이가 뭔지 알고 있나?”
“······.”
“희소성이야. 가루이자와 위스키처럼 넘버36도 희소성이 큰 물건인데······ 넘버36을 상처 없이 수거하라고 한 내 지시 무시하고 난리를 쳤더군.”
“죄송합니다.”
록산의 입은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었지만, 그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록산의 속마음을 간파한 천회장의 눈 밑이 실룩거렸다. 천회장은 8억 원 가루이자와 위스키병을 들더니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퍽!
위스키병은 산산조각이 났고, 8억 원 가루이자와는 흘러내려 카펫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록산은 카펫에 남은 흔적을 쳐다보다가 천회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회장의 눈빛이 섬뜩했다.
“록산, 넘버36은 이딴 위스키처럼 함부로 망가뜨려서 되는 물건이 아니야. 알겠어? 내 물건 넘버36호, 흠집 내지 말고 수거하라는 말, 가슴속 깊이 명심해.”
***
박씨는 어제 부부싸움을 하고 선술집에서 홀로 술을 마셨다. 술은 주거니 받거니 마셔야 맛이 나는데, 나이가 드니 술을 함께 마실 친구도 없었다.
밤 10시가 넘어서 박씨는 찜질방으로 갔다. 집에 돌아가면 마누라 얼굴을 마주해야 하고, 또 잔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씨는 살얼음이 동동 뜬 식혜를 마시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박씨는 속이 쓰려 눈을 떴다. 어제는 텅 비어 있던 찜질방이었는데, 주말이라 손님들로 바글거렸다. 그러나 박씨는 마음이 편했다. 잔소리하는 마누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육개장을 사 먹으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핸드폰을 찾았다. 분명히 잠이 들기 전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는데.
“내 핸드폰 못 봤어요?”
박씨는 옆에서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을 보았다. 아줌마들은 박씨를 힐끔 보더니 계속 수다를 떨며 달걀을 까먹었다.
박씨는 카운터로 가서 사장을 호출했다.
“핸드폰 잃어버렸는데 CCTV 볼 수 없습니까?”
찜질방에는 3군데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장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저거 작동 안 되는 겁니다.”
“이런 데는 CCTV 설치가 의무 아닙니까? 가짜를 달아두면 어떡합니까?”
“손님들 민원이 자꾸 들어와서요. 찜질방 특성상 손님들이 CCTV 불편해하거든요.”
박씨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쓰렸고, 일주일 전에 구매한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속이 더 쓰렸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어젯밤으로 돌아가면, 박씨가 찜질방으로 들어올 때 꽁태가 뒤를 따라왔다.
박씨가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다가 잠이 들자, 꽁태가 박씨 옆으로 다가왔다.
“형님, 집에 가시죠.”
꽁태가 박씨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러나 박씨는 깊은 잠에 빠져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꽁태는 슬쩍 주변을 곁눈질하더니 박씨의 핸드폰을 들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때 찜질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강수가 꽁태의 모습을 관찰했다.
도둑놈의 새끼. 하지만 강수는 귀찮아서 돌아누웠다.
***
다음 날, 강수가 설렁탕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꽁태가 노숙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여기 완전 맛집이에요. 뭐 먹고 싶어요? 소머리국밥? 설렁탕? 뭐든 말해요.”
“음······.”
노숙자는 메뉴판을 보면서 선뜻 주문하지 못했다. 그러자 꽁태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모, 여기 설렁탕 하나, 수육 하나.”
곧장 설렁탕과 수육이 나왔다.
“먹어요. 배고플 텐데.”
꽁태는 설렁탕과 수육을 노숙자 앞에 가까이 놓았다.
“근데 왜 나한테 이런 걸······?”
노숙자가 꽁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냥 아저씨가 불쌍해서. 우리 아부지가 가난한 사람 돕고 살라고 유언했거든. 또 내가 나랏밥 먹는 대구시청 공무원이고. 빨리 먹어요. 설렁탕은 뜨거울 때 먹어야지. 깍두기 국물 넣고.”
“역시 공무원은 친절하네요.”
노숙자가 꽁태를 바라보다가 게걸스럽게 설렁탕을 먹었다.
“수육도 먹고. 근데 아저씨, 민증 있으시댔지?”
“예.”
“아저씨, 나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어떻게요······?”
“일단 설렁탕부터 드시고. 쏘주도 한 병?”
“좋죠.”
꽁태가 소주를 시켜서 노숙자에게 공손히 따라줬다.
구석 자리에서 설렁탕을 먹던 강수의 귀에 꽁태와 노숙자의 대화가 들렸다. 강수는 설렁탕 국물을 떠먹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찜질방에서 본 꽁태였다. 핸드폰을 훔쳤던 놈이 시청공무원 행세를 하다니.
어젯밤 찜질방에서는 귀찮아서 넘어갔지만, 두 번째 걸린 놈을 강수는 얌전히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
설렁탕집에서 나온 강수는 꽁태의 뒤를 따랐다. 꽁태는 노숙자를 데리고 곧장 핸드폰 대리점으로 들어갔다.
“우리 삼촌인데, 폰이 없어서 하나 장만하려고. 알뜰폰으로 할부 최대로 길게 해서 하나 개통해줘.”
대리점 직원은 노숙자 명의로 핸드폰을 개통하는 꽁태가 범죄자인 걸 단박에 알아챘다. 하지만 간섭도 신고도 하지 않았다. 어제저녁에 실적을 올리지 못한다고 사장에게 타박을 먹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든 서너 대의 핸드폰을 개통해야 한다.
잠시 후, 꽁태가 노숙자를 데리고 대리점에서 나왔다.
“아저씨, 핸드폰은 내가 보관하고 있을게. 아저씨가 사용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시청으로 와요. 시청 어디 있는지 알죠?”
“내가 대구 토박인데 당연히 알지.”
낮술을 마신 노숙자가 딸꾹질하며 말했다.
“갑니다, 아저씨.”
꽁태가 핸드폰을 들고 가고, 노숙자는 설렁탕과 수육으로 불룩한 배를 쓰다듬었다.
“저런 공무원만 있으면 살기 좋은 세상인데······.”
***
꽁태는 대명1동으로 가서 허름한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사무실 안에는 낡은 책상과 소파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폰으로 웹툰을 보던 황구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형님 몇 개 했어?”
“폰 다섯 개, 통장 세 개. 넌?”
“통장 두 개.”
“근데 여기서 웹툰 보고 퍼질러 있냐, 이 새끼야?”
꽁태의 목소리에 성질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황구는 웹툰을 보며 낄낄 웃었다.
“왜 또 까칠해? 또 포커판에서 돈 날렸구나?”
“이 새끼가.”
꽁태가 황구의 귀싸대기를 후려치려고 다가왔다.
“너 새꺄, 반말하지 말라고 내가 경고했지?”
“형님 생일이 12월 29일. 난 1월 5일. 일주일 차인데 뭔 존댓말을. 형님이라고 꼬박꼬박 호칭 붙여주잖아. 그걸로 만족해.”
황구가 꽁태를 쏘아보았다. 황구는 꽁태보다 30센티미터나 키가 더 컸다. 그래서 꽁태는 귀싸대기를 후려치려고 어깨 위로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래. 내가 너한테 존댓말 듣는다고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팔자가 상팔자 되는 것도 아니고. 혈압 올리지 말자. 건강을 위해서.”
꽁태는 책상 밑에 있는 바구니를 책상 위에 올렸다. 바구니 안에는 수십 개의 대포폰과 대포통장이 범죄 조직에 팔려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복강동에서 연락 안 왔어?” 꽁태가 황구를 보며 물었다.
“안 왔어.”
“물건 받아 간다는 게 언젠데. 일주일째 연락도 없고.”
“걔들 달린 거 아냐?”
황구가 여전히 웹툰을 보며 건성으로 물었다.
“걔들이 왜 달려. 프로 중에 프론데. 아씨, 전번을 모르니까 연락도 못 하고. 짜증 이빠이네.”
꽁태는 노숙자, 지적 장애인, 신용불량자 명의로 폰을 개통하고, 찜질방이나 커피숍에서 폰을 훔쳐서 보이스 피싱 조직에 넘긴다.
보이스 피싱 조직의 사업이 번창하니 꽁태의 사업도 덩달아 번창했다.
꽁태가 대포폰을 박스에 담아서 포장할 때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적혀있는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철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강수였다.
“아저씨 뭡니까?”
꽁태가 경계심이 바짝 묻어 있는 눈빛으로 강수를 응시했다. 강수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실내를 살폈다.
“아저씨 뭐냐니까?”
꽁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수를 쏘아보았다.
“조필봉 씨 폰 찾으러 왔어.”
“조필봉? 조필봉이 누군데?”
“1시간 전에 설렁탕 먹고 폰 개통한 사람.”
꽁태가 이내 노숙자를 머리에 떠올리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조필봉 폰을 여기서 왜 찾아? 우리가 통신사 대리점도 아니고 유실물 찾아주는 센터도 아닌데. 빨리 나가세요.”
“대포폰 팔면 개당 마진이 얼마야?”
“이 새끼가 뭐래? 누가 대포폰 파는데? 빨리 나가세요. 곱게 말로 할 때.”
“안 가면?”
강수의 말에, 꽁태가 비릿하게 웃으며 황구를 보았다.
“황구야, 말로 하니까 안 간댄다. 어쩌냐?”
“내가 또 친히 몸을 일으켜서 빠따질 해야 하나?”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웹툰을 보던 황구가 어기적거리며 일어섰다. 190센티미터의 키에, 허리둘레가 50인치가 넘는 몸뚱어리였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를 잡아든 황구가 강수에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러나 강수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황구가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은 후 야구방망이를 다잡아 쥐었다. 그리고 강수를 향해 야구방망이를 풀스윙하려고 폼을 잡는데, 꽁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스톱! 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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