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넘버36을 수거하라 (2)
천회장은 마상무가 따라놓은 650만 원짜리 리차드 헤네시 코냑을 한 모금 입에 넣더니 우물우물해서 뱉어내고는, 야욕이 가득한 표정으로 코냑을 원샷 했다.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돈 쓰면 결실을 얻는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마상무가 아부를 했다.
“록산을 호출해서 넘버36 그놈 잡아 오라고 해. 록산 그놈만큼 일 처리 잘하는 애들은 없으니까.”
“비용은 어느 정도 선에서 측정할까요?”
“원하는 대로 줘. 넘버36만 흠집 내지 말고 잡아 오라고 해. 내 아들 천백이 병 고칠 약이니까.”
천회장은 마상무에게 지시를 한 후 시선을 돌려 배박사를 바라보았다.
“넘버36 잡아 오면 배박사, 너는 그놈 뇌를 가르든지 심장을 열어보든지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내 아들 천백이 더러운 병을 책임지고 고쳐. 알겠어?”
“예, 회장님.”
“지금 이 순간부터 한 치의 실수라도 저지르는 놈은 내가 직접 벌을 내리겠다. 그 벌이 너희 목숨이 될 수도 있어. 목숨이 걸린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걸 명심해. 알겠어? 알아들었으면 나가봐.”
마상무와 배박사가 깍듯이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천회장은 아버지의 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천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백아, 이제 너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는구나.”
어느새 천백의 눈빛에는 사악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가득했다.
희망은 악마를 잠시나마 순한 양으로 변화시키는가. 하여튼 지금 천백은 누가 보아도 순한 양 그 자체다.
그런데 희강에게 죽이라고 지시했던 놈이 넘버36이라는 것을 알면 천백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
미 육군 특전부대 델타포스에서 전역한 후 프랑스 민간군사기업 L&D 용병으로 북아프리카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갖 전투에 참전했던 록산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서 알몸으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했다.
록산의 피부는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처가 없었다.
콧대가 오뚝한 복서가 최고로 무섭다는 말이 있다. 복서의 콧대가 오뚝하다는 말은 링 위에서 수많은 펀치를 맞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복서의 오뚝한 콧대처럼 록산의 상흔 없이 매끈한 피부는 그의 전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증명한다.
3살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던 록산은 스물한 살에 델타포스에 입대해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고, 부하들과 전우애로 똘똘 뭉친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
델타포스는 블랙 옵스를 수행하다가 전사해도 위령비는커녕 미국 정부로부터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다.
블랙 옵스는 극비리에 진행되는 작전이기 때문이다.
록산은 전쟁터에서 전사할 것이라고 각오했다. 그것이 델타포스의 명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에서 블랙 옵스를 수행하던 중 록산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부하 두 명이 전사했다.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록산은 델타포스에서 전역하고 방황하다가 프랑스 민간군사기업 L&D 용병이 되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던 전우들의 비명이 떠오르는지 록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폰이 벨을 울렸다. 록산이 가부좌를 풀고 폰을 귀에 붙이니 마상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님께서 물건 하나 회수하랍니다. 비용은 원하는 대로 지급할 테니까, 조용히 수거하세요.”
“종류가 뭡니까?”
록산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간인인데, 특이 사항은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번 건은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특히 머리가 손상되면 안 됩니다.”
마상무가 말을 끝내자, 록산은 전화를 끊고 메일함을 열었다. 강수의 사진과 건강 상태가 첨부파일로 도착해 있었다.
첨부파일을 확인한 록산은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토끼 사냥 시작해야겠다.”
***
한편 희강은 천백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덫을 놓고 강수를 기다렸다.
“개새끼야, 오늘 내가 니 놈 배때기 가른다.”
희강이 내뱉는 욕설이 10층으로 올라오는 강수와 봉순을 맞이했다.
“주둥이에 걸레 물었냐? 보자마자 욕이냐. 내 배때기 가르라고 누가 시켰냐?”
“뒈질 놈이 궁금한 것도 많네. 아가리 닥치고 이리 와라, 빨리.”
희강이 강수를 향해 사시미를 까닥거렸다.
“봉순아, 액션 영화 한 편 감상해라.”
강수가 희강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자, 똘마니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강수를 향해 사시미와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은 강수에게 손가락으로 구부릴 수 있는 플라스틱 빨대 같았다.
똘마니 열댓 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강수가 희강을 향해 달려갔다. 겁먹은 희강이 슬금슬금 뒷걸음치더니 냉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저 개새끼가!”
강수가 계단을 타고 1층으로 향하려던 그때 곳곳에서 포그머신을 든 똘마니들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포그머신에서 토해지는 스모그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강수 씨!”
자욱한 스모그 속에서 봉순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눈먼 장님처럼 앞을 볼 수 없는 강수는 봉순에게 달려갈 수가 없었다. 강수는 닥치는 대로 창문을 두들겨 깼다. 깨진 유리창 밖으로 스모그가 빠져나갔다. 그런데 봉순도 스모그와 함께 사라졌다. 봉순이 서 있던 자리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이 벨을 토해냈다.
뒤늦게서야 희강이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인식한 강수는 폰을 들어서 귀에 붙였다. 곧장 폰 너머에서 개지랄하는 희강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야, 이 개새끼야! 왜 나한테 사사건건 태클 걸고 지랄이야?! 왜? 왜? 왜 이 개새끼야?!”
“니가 봉순이 데려갔냐?”
강수가 나직하지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개새끼야! 내가 데리고 있다 어쩔래?”
달리는 승합차 안에서 희강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맞은편을 보았다. 봉순이 비곗덩어리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짓눌린 채 앉아 있었다.
“봉순이 털끝 하나라도 건들면 내가 니 뼈를 모조리 발골해서 죽인다.”
강수의 분노 가득한 말에 희강은 봉순의 귀싸대기를 쩍쩍 후려쳤다.
“개새끼가 지금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는지 상황 파악을 못 하네. 응? 이 쌍년 살리고 싶으면, 폰으로 주소 찍어주는 곳으로 곧장 와라. 경찰 달고 오면 이 쌍년부터 죽인다.”
“봉순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반드시 너 구해줄 테니까!”
강수의 뜨거운 목소리가 폰 너머에서 흘러나오자, 봉순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를 위해 사지로 달려오겠다니!
***
희강이 폰으로 보낸 주소는 폐공장 지역이었다. 강수는 택시를 타고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강수를 맞이한 것은 황량한 바람과 시커멓고 갈비뼈가 앙상한 개 한 마리였다. 시커먼 개가 굶주린 눈빛으로 강수를 응시하다가 돌아설 때 폰이 벨을 토해냈다.
강수가 전화를 받으니 희강의 목소리가 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왼쪽으로 시선 돌려라.”
희강의 말에 강수가 왼쪽을 보았다. 100m 떨어진 곳에 폐업한 거산공업이 보였다.
“차봉순 살리고 싶으면 빨랑 와라. 내 인내심이 바닥 나겠다.”
강수를 보며 야비한 웃음을 흘리던 희강이 뒷걸음쳐서 폐공장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강수는 그곳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갔다. 봉순을 구출해야 한다.
그러다가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강수의 발목을 잡았다.
저 새끼들은 봉순을 인질로 삼아서 나를 죽일 것이다. 그다음에 봉순도 죽일 것이다. 나는 다쳐도 된다. 그러나 봉순은 절대 다치면 안 된다. 절대로!
거산공업 폐공장 안에는 봉순이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고, 인터내셔널파 똘마니 200여 명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이라도 하려는 듯이 결연한 표정으로 연장을 들고 있었다.
“행님, 동네 양아치도 아니고 200 대 1. 쪼매 쪽팔리는 짓거리 아입니꺼?”
산타의 직속 똘마니였던 27살 비계가 긴장을 풀려는지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다.
“위기 상황에서는 쪼매 쪽팔려도 된다.”
30살 비계가 대꾸하자, 27살 비계는 그래도 이건 상도에도 조폭의 룰에도 맞지 않는 짓이라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우리 인터내셔널파는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다 아입니꺼. 행님, 저는 누가 뭐래도 인터내셔널파 조직원이라는 걸 명예롭게 생각합니더. 양복 입고 사시미 들고 다이다이 맞장 뜨는 조폭. 비겁하게 등 뒤에서 사시미질 안 하는 우리 인터내셔널파. 그렇게 해야 양아치들하고 차별화되고, 뽀대 나는 행위 아입니꺼, 행님.”
“그래. 그건 니 말이 맞다. 오늘 우리는 확실히 양아치 짓 하는 거다. 산타 형님이 계셨다면 이딴 행동은 절대 용서 안 하셨다.”
“맞심더, 행님. 산타 행님은 죽어도 가오 하나로 버티고, 가오 하나로 다이다이 맞짱 떴다 아입니꺼.”
“그래도 우리는 보스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그런 임전무퇴의 각오로 이번 싸움에 임한다면 부끄러움은 쪼매 없어지지 않겠냐. 산타 형님도 용서하실 거구.”
“알겠심더, 행님. 저는 마 행님 말씀에 충실하게 복종하겠심더.”
우뚝 서 있던 강수의 귀에 30살 비계와 27살 비계가 지껄이는 목소리가 들렸고, 곳곳에서 긴장한 듯이 쿵덕거리는 똘마니들의 심장박동이 들렸다.
봉순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까? 강수는 거산공업 폐공장 안을 응시하며 머리를 굴렸다.
강수가 오지 않자 희강이 봉순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밝은 곳으로 나왔다.
“야, 이 새끼야! 쫄았냐? 응? 이 쌍년 숨통 끊을까? 빨리 와라!”
“강수 씨 오지 마!”
“봉순아, 나 못 믿어? 비곗덩어리들 쓸어버리고 밥 먹으러 가자.”
“못 믿으니까 오지 마! 여기 조폭들 200명도 넘어. 200 대 1이야. 암만 강수라도 이길 수 없어! 그냥 돌아가서 경찰에 신고해.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말고. 가, 제발!”
봉순은 강수를 향해 애절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희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봉순의 목에 사시미를 겨누었다.
“이것들이 아주 지랄병을 하네. 당장에 확 목을 그어버릴까!”
희강이 사시미 끝으로 봉순의 목을 지그시 눌렀다. 그것을 목격한 강수의 눈동자에 분노의 핏발이 섰다.
“개자식, 너는 내가 죽인다!”
강수는 한 걸음 두 걸음 걷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봉순아, 내가 간다!”
“강수 씨 오지 말라니까······!”
봉순이 나직이 내뱉는 목소리가 강수의 귓가에 들렸다. 그러나 강수는 봉순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새끼 죽이는 놈이 내 오른팔이다!”
희강이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인터내셔널파 똘마니들이 바짝 긴장하며 연장을 다잡아 쥐고 앞다투어 강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강수가 무서운 속력으로 달리자 힘줄이 불끈 솟아오르고 온몸의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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