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대룡병원 (2)
대리운전기사가 벤츠를 주차하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한동안 벤츠 뒷좌석에 앉아 있던 마취과 의사가 취기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기억에서 싹 지우면 돼. 아무 일도 없었어.”
그때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의사의 발목을 잡았다.
“의사 선생님, 거기 잠깐만 서 보세요.”
의사가 뒤돌아보자 강수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 기세에 떠밀려 의사가 뒷걸음쳤다.
“누구세요?”
“대룡병원 마취과 의사지?”
“그런데······”
의사가 불청객 강수의 행색을 내시경 같은 눈빛으로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강수는 의사의 불안한 심장박동을 느끼며 정곡을 찔렀다.
“사람 죽이고 다 잊고 살 수 있어?”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정석. 니가 마취하다가 실수로 죽였잖아.”
의사가 당혹감에 숨이 막혔다가 이내 성질을 버럭 냈다.
“이 사람이 뭔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왜 사람을 죽여? 당신 뭐야? 응? 증거 있어?”
“증거? 있어.”
“그럼 내놔봐.”
“니 폰 내놔봐. 거기 증거 있으니까.”
“뭐?”
“보르도 와인바에서 통화했잖아. 그 환자 어떻게 처리했냐고.”
의사는 경악한 듯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원무과장과 통화할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스마트폰에 도청 어플이 심어져 있나?
“다, 당신 뭐야? 경찰이야? 경찰이면 신분증 제시해.”
마취과 의사가 더듬거리자, 봉순이 잽싸게 치고 들어왔다.
“지금 선생님께서 질문해야 할 건 그게 아니잖아요. 선생님께서 질문해야 할 건 ‘나의 비밀을 어떻게 아셨어요?’ 이거에요.”
“그래. 니들 내가 그 말했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의사는 비밀을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게감보다 호기심의 무게가 더 커서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하고 말았다.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요?”
“원무과장? 그 새끼가 말했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선생님하고 원무과장이 통화했는데, 원무과장이 말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 개새끼가 왜······?”
배신감에 치를 떨던 마취과 의사가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강수와 봉순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원무과장이 말했을 리 없어! 너희 뭐야?”
“잘 나가다가 왜 또 이러셔? 봉순아, 어떡할까?”
“말로 해서 안 되면 힘으로 해야죠.”
“미안합니다.”
강수가 깎듯이 목례를 하는가 싶더니 순간 의사의 팔을 꺾어서 스마트폰을 뺏었다.
봉순은 의사의 지문으로 락을 풀어서 원무과장과 통화하며 녹음 된 내용을 스피커 폰으로 틀었다.
의료사고의 증거 앞에서 의사는 털썩 주저앉았다.
“유정석 씨는 사고였어요. 그냥 단순 사고. 나는 은폐할 생각이 없었는데, 원무과장이 병원 이미지 나빠진다면서······ 원무과장이 다 처리해 준다고 해서······ 유정석 씨는 내가 죽인 게 아니에요. 사망 1시간 전에도 위독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코마 상태는 다시 깨어날 수도 있는데······ 유정석 씨는 정말 내가 죽인 게 아니에요.”
“뒤처리는 원무과장이 했다는 거야?”
강수가 의사를 노려보았다.
“예.” 의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떡할래? 경찰에 넘길래?” 강수가 봉순을 보았다.
“그럴까?”
의사는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고 강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을 했다.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죽도록 공부해서 의사 됐는데······ 원무과장이 코마 상태에 빠진 환자들을 누군가한테 팔아넘긴다는 소문이 있어요.”
“뭐? 다시 말해 봐.”
강수와 봉순이 동시에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증거는 없는데 간호사들 사이에 소문이 돌아요. 원무과장이 무연고자를 사망 처리한 후에 돈을 받고 넘기는 거 같다구요.”
“장기 밀매한다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원무과장이 슈퍼카를 7대나 몰아요. 유산 상속받은 것도 없는데, 원무과장 월급으로 어떻게 3억이 넘는 슈퍼카를 7대나 굴리겠습니까. 뭔가 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
사랑스러운 내 새끼들. 오늘은 누구를 탈까?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주차된 슈퍼카를 보며 고민하던 원무과장은 파란색 람보르기니를 끌고 대룡병원으로 출근했다.
“김박사, 어제 많이 마셨어? 어제 너무 횡설수설하더라.”
원무과장이 마취과 의사의 진료실로 찾아가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하지만 마취과 의사는 원무과장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수술 일정 차트를 확인하는 척했다.
“컨디션 어때? 괜찮지?”
의사가 대답하지 않자 원무과장이 뺀질뺀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묻는데 왜 대답이 없어? 나를 은인으로 모셔야 할 사람이 말이야. 나 아니었으면 김박사 가운 벗어야 했잖아. 그 일 있고 나서 나한테 밥 한 끼를 샀어, 술 한 잔을 샀어, 고맙단 인사를 했어? 아무것도 안 했잖아. 이러면 나 삐진다, 김박사.”
“감사합니다. 됐죠?”
“그래. 됐다. 김박사한테 인사받았으니까. 오늘도 열심히 수고하시고.”
원무과장은 마취과 의사의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표정이 돌변했다.
김박사 저 새끼한테 뭔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뭔 일일까? 설마 경찰서에 가서 꼰지르지 않았겠지? 그랬다면 경찰들이 조사를 나왔을 텐데. 뭔 일일까?
불안에 떠는 놈은 머지않아 비밀을 누설한다. 그 전에 입을 봉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원무과장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고민하다가 서류 파일 하나가 비스듬하게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간호사를 호출했다.
“여기 청소 누가 했어?”
“늘 하던 대로 영선이 엄마가 했는데······ 영선이 엄마가 실수라도 한 게 있습니까?”
원무과장의 결벽증을 알기에 간호사가 주눅이 든 목소리로 질문했다.
“아냐. 나가 봐.”
영선이 엄마는 이딴 실수를 하지 않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서류 파일을 반듯하게 원위치시키다가 기다란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했다. 영선이 엄마는 단발머리인데······. 원무과장의 눈빛에 의심이 일렁거렸다.
사실 서류 파일이 비뚤게 놓인 이유는 영선이 엄마의 잘못이 아니다.
지난밤에 강수와 봉순이 원무과장 사무실로 잠입했다.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비밀이 담긴 서류를 발견하지 못했다. 원무과장 같은 빠꼼이가 이런 곳에 은밀한 비밀을 풀어놓을 리도 없다.
강수의 레이다 같은 시선이 구스타프 클림트 짝퉁 그림 뒤에 소형 금고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강수는 청진기처럼 금고에 귀를 붙이고 다이얼을 돌렸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금고 문이 덜컹 열렸다. 그러나 금고 안에는 엉뚱하게도 여자 팬티 12장이 들어 있었다.
“변태 새끼. 취미도 더럽네.”
봉순이 역겹다는 듯이 성질을 냈다.
마취과 의사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강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오줌빨 시원하네.”
의사가 강수를 보자마자 인상을 팍 구겼다.
“원무과장 잡으려면 증거가 필요한데······ 협조하실 생각 있으시죠?”
강수가 의사 대신 물 내림 버튼을 눌렀다.
“아니 제가 뭘 어떻게······ 아, 미치겠네.”
의사는 속에서 치미는 열을 한숨으로 크게 토해냈다.
“의료사고로 환자가 사망했고, 증거 은폐했으면 형량이 얼말까요? 나는 변호사는 아니지만, 최소 10년은 떨어질 거 같은데. 어떡하실래요? 협조하고 정상참작 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가 어떡하면 됩니까?”
“간단해요. 일단 원무과장이랑 밥 한 끼 하세요.”
***
마취과 의사는 강수의 지시로 원무과장을 찾아갔다.
“선약 없으시면 내가 점심 식사 대접해도 될까요?”
“아, 좋지. 우리 김박사가 사는 밥인데 시간 만들어서라도 먹어야지.”
원무과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의사와 함께 대룡병원을 나섰다.
“뭐 좋아하세요?”
“나는 입이 고급지지는 않아. 애들 유학비에 김박사 지갑 홀쭉할 건데, 싼 거 먹으러 가자. 청담동에 스시 잘하는 데가 있는데, 김박사 입에도 맞을 거야. 거기 셰프가 일본에 유학 가서 오노 지로한테서 도제로 스시 배웠대. 먹어보면 완전 급이 달라.”
원무과장은 의사를 스시집으로 데려가서 45만 원짜리 런치 오마카세 세트를 게걸스럽게 먹고 사케를 목구멍 속에 털어 넣었다.
“맛이 기가 막히지. 이런 거 먹자고 돈 버는 거 아니겠어?”
의사는 원무과장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어금니를 꾹 깨물며 강수의 말을 떠올렸다.
“원무과장 폰으로 문자 보내면 확인만 하세요. 그러면 해킹 어플이 깔리니까.”
의사는 강수의 말을 되새기며 원무과장의 아이폰을 슬쩍 곁눈으로 보았다. 그때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원무과장이 문자를 삭제하기 전에 확인해야 한다. 의사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동자가 떨렸다.
“아이폰 신형. 이야, 디자인이 깔깔하네. 구경 좀 해도 될까요?”
의사의 어색한 말투와 떨리는 표정을 약아빠진 원무과장이 단박에 캐치했다.
“김박사님, 좋은 음식 먹으면서 식은땀은 왜 흘리시나?”
“아 그건······ 스시 가격이 너무 쎄서······”
의사는 궁색한 변명을 토해냈다.
“그래요? 이 정도 퀄리티면 적당한 가격인데.”
원무과장이 강수가 보낸 메시지를 삭제하고 의사에게 아이폰을 내밀었다.
“구경해요.”
메시지가 지워지자 의사는 더욱 당황했다.
“예? 예, 잠깐 화장실에······ 드시고 천천히 일어서세요. 화장실 갔다가 계산할게요.”
원무과장은 허둥지둥 화장실로 가는 의사의 뒷모습을 보며 마지막 남은 스시 한 점을 우걱우걱 씹어먹고, 사케를 가글하듯이 우물거리다가 삼켰다.
***
신경과민으로 속이 쓰린 마취과 의사가 겔포스를 짜 먹을 때 폰이 벨을 토해냈다.
“문자 확인했어요?”
폰 너머에서 강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확인 못 했습니다. 오늘 원무과 직원들 회식인데, 원무과장한테 성추행당하는 여직원한테 문자 확인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쯤에 다시 문자 보내주세요.”
의사가 전화를 끊고 수술실로 간 후 원무과장이 사탕을 빨아 먹으며 진료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책상 밑에 설치해둔 도청기를 꺼냈다.
“비밀을 공유하는 놈은 항상 감시해야 한다니까.”
람보르기니 운전석에서 원무과장은 마취과 의사의 통화 내용이 담긴 도청기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의사가 강수와 통화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 구제는 지옥 밑이라더니, 은혜를 베풀었는데, 김박사 개새끼가 내 등에 칼을 꽂아?”
원무과장은 비릿하게 웃음을 흘리며 곧장 KD바이오 실험체 인수 담당자인 황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황실장님, 접니다. 잘 지내셨죠?”
“이 풍진 세상에 잘 지내야지? 좋은 물건 나왔어?”
“그게 아니라 일전에 넘긴 물건 중에 유정석 아시죠? 걔가 문제가 좀 있네요.”
“요점만 빨리 말해.”
“이상한 애들이 유정석 사망 원인을 조사하는데, 이거 이 대로 방치하면 곤란한 문제가 생길 거 같아요.”
“알았어. 우리 쪽에서 조치할 테니까, 괜히 들쑤시지 말고 가만히 있어.”
황실장은 전화를 끊고 곧장 천백에게 상황을 전했다. 그러자 천백이 비릿하게 웃으며 조비서에게 지시했다.
“대룡병원 라인도 써먹을 만큼 써먹었어. 깡패 새끼들한테 연락해서 원무과장하고 그 의사 새끼부터 정리하고, 이상한 애들 처리하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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