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헌터 축제.
“사무실엔 어쩐 일이야? 상진이 축제 보러 가고 없는데.”
“에이, 괜찮아요. 그냥 사무실 구경하고 싶었어요. 겸사겸사 축제도 보고요. 꼭 한번 와보고 싶었거든요. 축제.”
대격변으로 찾아온 혼돈이 안정화된 게 10년 남짓, 그 이전의 풍요로웠던 시절은 영상으로만 남은 지금이었다.
그건 이런 축제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대규모로 모이는 축제 같은 행사는 정부에서도 지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정부에서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사람들도 아니고,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축제가 부활하고 있었다.
“축제 혼자 보게? 상진이라도 불러줘?”
“애도 아니고 오빠랑 무슨 그런 걸 같이 봐요?”
“그런가?”
동생이 있어 봤어야 알지.
근데 거친 파주에 소영이 혼자 축제 구경 보내기 신경 쓰이는 게 사실이었다.
요즘 세상이 그런 세상이지 않던가.
몬스터도 무섭고 인간은 더 무섭고.
“네. 그런데 오빠는 축제에 관심 없어요?”
나랑 보고 싶은가 보구나.
하지만 회귀 전에 상진이에게 행한 전력이 있어, 녀석의 가족들에게 지금 이상 다가가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소영이가 내게 호감을 보이더라도 거절할 생각이다.
물론 내 오해일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별로.”
“칫, 알았어요.”
잠깐 앉아서 사무실을 살펴보던 소영이 미련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어머니를 빼다 박은 소영이는 미인이다.
거친 헌터들이 돌아다니는 헌터 축제에 그녀 홀로 내보내기에는 조금 걱정되는 게 사실, 그래서 인식 저해 기프트를 지닌 분신 하나를 그녀의 곁에 붙였다.
그녀는 물론 접근하는 누구도 분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알아도 상관없었다.
분신의 모습은 인간과 판박이였으니까.
그간 분신 운용에 능숙해져서 무의식중에도 분신을 인간처럼 다룰 수 있게 됐다.
‘불굴 기프트가 좀 뛰어나야 말이지.’
괜히 불굴이 아니었다.
소영이까지 나가자 다시 혼자 남은 사무실.
아공간에 넣어둔 나머지 분신 넷을 꺼내 점검했다.
마력석에 마력은 충분한지, 공유한 기프트는 문제없는지.
‘그러고 보니, 복장이 너무 초라하네.’
복장이 너무 단출했다.
기프트 ‘불괴’를 믿고 변변한 장비를 하나도 두지 않았더니, 뭔가 없어 보이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러니 얕잡아 보였지.’
어쩐지 사냥만 나갔다 하면 빌런들이 덤비더라.
장비도 없어 만만해 보였던 거다.
효율적인 몬스터 사냥을 위해서는 맨주먹보다는 날붙이 하나라도 들고 있는 게 유리했다.
그럼 이전처럼 빌런 놈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도 않을 테고.
축제 구경은 모르겠고, 일단 장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무실을 나와 파주 헌터 단지에 입점한 헌터 백화점을 찾았다.
단지 앞 광장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파주에 이렇게 많은 헌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곳에 몰려 있어 그런지 열기가 후끈했다.
‘3시부터 위문 공연한다던데, 아이돌이네?’
빠른 템포의 멜로디와 함께 비키니 아머를 걸친 여자 아이돌이 무대 위를 절도 있게 뛰어다녔다.
칼군무가 제법 인상적인 무대로 일반인치고 칼각도 제대로였다.
이젠 검도 고수가 아니면 아이돌도 못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들 중 한 명이 유독 눈에 띈다.
검을 휘두를 때 다리와 허리가 단단히 지지해주어서인지 검 끝에 흔들림이 없었다.
좋은 기회에 각성할 수 있다면 훌륭한 헌터가 될 자질이 엿보였다.
이런 것도 직업병이라고 오랜 헌터 생활 때문인지 자질이 충분한 사람만 보면 분석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도 아이돌로 잘 나가는 것 같은데, 헌터는 무슨 헌터.
돈 잘 벌면 안전한 아이돌 생활이 좋다고 생각했다.
국경 밖에서 몬스터나 찾아다니는 헌터가 아니라.
그나저나 예쁘고 귀여운 애들이 헐벗고 나와 재롱 피우는 게 나름 진귀한 풍경이긴 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볼 수 없을 만큼.
상진이 녀석이 여자 아이돌 좋아하는 걸 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건전한 취미 같았다.
이런 생각도 하는 건 다 기프트 ‘불굴’ 때문일 것이다.
불굴로 무장된 내 정신은 여자 아이돌의 비키니 아머에도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러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이런데 정신 팔릴 시간이 아니지.
‘분신들 장비. 일단 오래 쓸 수 있게, 튼튼한 걸로.’
헌터 백화점 내부는 한산했다.
대부분 손님이 공연을 보기 위해 빠져나간 영향이 컸다.
사람이 없으니 여유 있게 장비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한가하니 좋네.’
분신에게 맞는 장비들을 찾아 움직였다.
사람에 치일 일 없으니 물건을 고르는 건 금방이었다.
손잡이가 긴, 월도와 검게 염색된 레더 아머 다섯 개를 샀다.
장비 구입을 마치고 나오니 백화점 로비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름 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제법 시간이 흘렀나 보다.
콘서트가 벌써 끝났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남자 가수가 나와 자연스럽게 흩어진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
국경 지역에는 여자 헌터보다 남자 헌터가 월등히 더 많았다.
그리고 남자는 남자의 재롱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헌터 앞에서 웃통 찢는 마초 컨셉은 이곳 파주에서 통하지 않았다.
‘여기선 웃통이 아니라 몸통을 찢는 몬스터가 즐비한 곳이니까.’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일 것이다.
물론 이런 거 좋아하는 놈들이 없는 건 아니더라만, 일단 난 관심 없었다.
“이거 어떻냐?”
“휘유, 불이 멋진데?”
헌터 백화점 로비, 들어올 때까지 없던 검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장 뒤편의 영상에서 불을 뿜어내는 검을 사용해 사냥하는 헌터의 모습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잔뜩 폼 잡고 검을 휘두르는데, 잔 동작이 너무 많았다.
그게 다 멋있어 보이기 위한 장치란 걸 알지만, 실전에서 써먹진 못할 수준인 건 사실이었다.
“이게 살라맨더의 마력석을 박아서 그렇다는데, 이번에 크게 한번 땡겨서 이거나 살까?”
“미친놈아, 사긴 뭘 사. 그리고 도박이나 끊어! 있는 돈 다 도박에 꼬라박은 새끼가 허세는.”
“도박은 무슨 도박! 인마, 토토라고. 토토. 그거 정부가 허락한···.”
토토, 아직 하는구나.
세상이 이렇게 되고 스포츠 명맥 끊겼다고 알았는데, 아직 그 수준은 아닌가 보다.
“시끄럽고, 이따 체험행사 한다는데 그때 와봐야겠다.”
“왜? 설마 저거 하겠다고?”
“왜? 이거 에고 있다며? 혹시 아냐, 날 주인으로 섬길지?”
“에라이 미친놈.”
두 젊은 헌터가 보고 있는 건 살라맨더 대검으로 살라맨더의 마력석을 손잡이 끝에 박아 스스로 타올랐다.
타락한 살라맨더, 재앙 3급으로 불린 타락한 불의 정령이었다.
반년 전, 일본 사쿠라지마 화산섬에 나타난 것으로 안다.
이를 사냥하는 과정에서 사쿠라지마섬 헌터 마을 절반이 사라졌다고 했다.
이에 대한 정보는 아버지가 보던 뉴스를 통해 단신으로 들은 게 다라 자세한 정보까지는 몰랐다.
‘근데 이게 여기 있었네. 그것도 전시 상품으로.’
헌터 마을 절반을 태워 먹은 걸 무슨 자랑이라고.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었다.
이렇게 전시할 시간에 이걸로 강한 괴물이라도 하나 더 잡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다 일본 사정이고.
‘그러고 보니 이때 일본이 어떻게 되더라? 그래. 설녀, 유키온나가 등장한 게 올겨울이었지?’
유키온나, 일본에 가장 처음 등장한 멸망급 괴수다.
유키온나에 의해 일본 대도시 중 하나인 삿포로가 무너졌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등장한 게 연말이니,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만 돌아갈 생각으로 로비를 벗어나니, 백화점 입구에 상진이와 소영이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공연장에서 만났나 보다.
“같이 있네?”
“어, 왔냐?”
“오빠, 왔어요? 이럴 거면, 축제 같이 보시지.”
“축제는 아니고, 장비 좀 사러.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상진이 녀석이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긴. 세상 창피해서 내가 못 살아. 오빠, 우리 오빠가 어땠는지 알아요?”
그렇게 시작한 말은 간단했다.
좋아하는 여 아이돌에게 사인받은 후 내내 이렇단다.
소영인 그 모습이 창피해 끌고 왔다는데, 난 그게 왜 창피한 일인지 모르겠다.
상진이가 만족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게 그 사인이냐?”
“어.”
“네, 여자 아이돌 앨범이래요.”
“울상은 아니었나 보네.”
“뭐?”
아까 본 게 울상이 아니라 사인받고 기뻐서 그런 건가?
근데 이 시절 녀석이 아이돌 좋아했던가?
맞다, 그러고 보니 녀석 방에 아이돌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뇌리 깊숙이 박혀 있던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 팀 사고로 다 죽었지, 아마?’
녀석이 좋아하던 아이돌이 사고를 당했다.
행사 가던 길에 몬스터가 나타나 덮친 불행한 사고였다.
하지만 이는 아이돌 팬이나 알뿐 크게 화제 되지 않았다.
녀석이 좋아하는 팀이 아이돌로 크게 유명하지 않은 것도 이유지만, 지금 시대에 그런 사고는 흔하디흔한 사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후였지.
아이돌의 죽음이 한 빌런 단체와 연관되어 있다는 게 1년 후 밝혀진 것이다.
아이돌엔 관심도 없던 내가 이런 사실을 안 건, 다 상진이 덕분이다.
진실이 밝혀진 이후 한동안 상진이가 이에 대해 한동안 성토한 탓이었다.
정작 문제는 그 사건과 연루된 자들 모두 별 탈 없이 잘 살았던 것에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썩어빠졌으면, 권력 좀 있는 놈들은 죄를 지어도 무사히 빠져나가더라.
억울한 건 힘 없는 서민들 뿐이었다.
상진이가 들고 있던 아이돌 앨범을 봤다.
문득 한 사람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팔다리가 길쭉길쭉해서 칼각이 좋았었지.’
오늘 축제 무대에서 봤던 비키니 아머를 걸친 아이돌이었다.
녀석이 좋아하던 아이돌이 애들이었구나.
응?
그럼 이들이 죽는다는 거네?
상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이들은 살려야 하나?
‘그게 이번 내년 봄이었지?’
막 봄이 시작될 즘이었을 거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거 보이냐. 사인?”
“어? 아, 사인. 이게 왜?”
“나 오늘 여신님 영접하고 사인도 받았다?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 아니냐?”
이 새끼, 미친놈인가?
뭐가 됐던 녀석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그래, 그래. 좋았겠다.”
“크, 역시 내 친구! 넌 내 맘 이해할 줄 알았다!”
이해하긴, 개뿔.
어차피 그 아이돌, 좋아하는 사람이 너지, 나냐?
그러니 이해하고 말고 할 이유가 없었다.
격하게 고개를 들이미는 녀석을 밀어냈다.
“새끼, 더럽게 어딜 들이밀어?”
“싫은 척은.”
“진짜 싫은 거거든?”
아무리 상진이라도 남자 새끼를 품에 안는 취미는 없었다.
그러지 저리 좀 꺼지라고.
겁나 끈질기네.
이 녀석이 이렇게 힘이 좋았나?
아니면 잔뜩 흥분한 상태라 그런가?
“야, 진혁 오빠가 싫어하는 거 안 보여? 저리 가, 쫌!”
잘한다, 소영이
결국 소영이가 상진이 녀석을 밀어내고 내 옆에 선다.
이제 좀 낫네.
근데, 이 남매 이상하다.
보통 나이 차이가 7살 정도 나면 사이가 좋다고들 하던데, 이 둘은 그런 게 없었다.
생각해보면 소영이 사춘기 시절에 녀석은 군대에 있어서 아닌가 싶다.
‘아니면, 상진이의 지금 같은 태도 때문일지도. 이건 어디 내놔도 창피한 오빠의 전형이잖아.’
아이돌에 빠진 오빠를 보는 여동생의 심정을 모두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대충 소영이의 고충도 이해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친구인 나도 가끔 녀석이 한심해 보이는데, 친동생은 오죽할까.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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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과 터치패드가 휜게 느껴질 정도로.
갑자기 이러니, 겁부터 납니다.
갑자기 터지는 게 아닌지.
이걸 고치든, 새로 노트북을 사던 해야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연재 좀 쉴게요.
죄송합니다.
공지는 따로 올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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