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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성 님의 서재입니다.

삼국지 : 내가 죽어 소금에 절여지기까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필성필성필
작품등록일 :
2020.05.11 16:04
최근연재일 :
2022.11.09 06:27
연재수 :
4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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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86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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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9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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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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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21쪽

427화 – 각자가 바라보는 그 너머의 세상, 그 끝을 향해서

DUMMY

그렇게 가후는 떠났다.


정확히는 기존의 볼일을 보고 나서 다시금 일선에서의 일을 물린 채, 다시금 이 세상에 본연의 모습을 감춘 한 걸음 뒤의 관망자요, 두 걸음 뒤의 관리자로 돌아간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남긴 경고는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나는 이제 고작해야 하나의 새장을 열었을 뿐이네. 그리고 자넨 고작해야 두 번째지.’


제아무리 단 하나의 새장을 열어젖힌 것으로 알다가도 모를 포홍의 진의를 조금이나마, 그것도 흐릿하게나마 알게 되었다지만, 하여 그토록 그가 추구하는 이해하기 힘든 시대발전을 비롯한 새 시대, 그 너머를 엿보았다지만.


결국 이는 비단 아직 영원을 점지하지 않은 한순간에 불과한 모습들이었다.


“이로써 또 하나의 기반이 쌓이고 기틀이 잡히며 기초가 닦인 셈입니다.”


그렇게 가후가 없는 자리에서 다시금의 독백을 남긴 관녕이었으나 아직도 그런 자신의 곁을 맴도는 것은 그런 그가 떠나기 이전에 남긴 경고요, 미래를 향한 예지이자,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얽매이는 자들 향한 한탄이 서린 대화였다.


‘결국 피로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똑같아, 소위 말한 고결한 희생이지. 소위 말하는 순교요, 저 하늘과 이 땅에 자리한 이들을 만족시킬 제물이야. 세상은 피 흘리지 않고 바뀌는 것이 없는데, 결국 더 나은 세상조차 저 하늘과 무언가를 교환해야 하는 바는 다를 바 없지. 고로 애써 이를 비틀거나 어긋나게 하면 되려 세상에 골칫거리가 생겨, 순리를 역행하는 만큼, 더 큰 반발력이 생겨 돌아오는 법이지.’


‘폐하께서는 결국 세상을 바꾸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토록 아끼는 이 나라의 장래성을 상징하는 두 재상을 잃었지. 부정하고 부패하며 부강한 나라에 어울리는 국상과 정의롭고 공정하며 빈약한 나라에 어울리는 승상. 어디 이뿐인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이 나라에 그간 담겨있던 막연한 믿음과 희망 또한 무너져 내렸지. 그 추종자들이, 후인들이 멋대로 설쳐 이 난리를 피웠으니 그간에 스스로 쌓아 올린 인망과 명망 또한 그리 무너졌네. 더는 이 나라를 상징하는, 저 하늘의 해와 같이 드높은 곳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는 포홍이란 그 이름 두 글자에 막연한 신뢰가 깃들긴 힘들겠지. 그럼에도 그 빛이 썩어 문드러지고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었다. 미친 짓이지, 바보짓이고 말고.’


특히나 어렴풋이 이를 알고 있는 가후의 자조적인 한탄은 되려 포홍을 향한 알다가도 모를 연민과 한탄 또한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알면서도 내버려두었다.......’


울림이 있는 말, 알 것도 같은 느낌, 그럼에도 막연한 동의를 표할 수 없으며 또 그럼에도 결국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은 현실이 선사하는 이 기분 나쁜 동의를 자처하는 무의식과 체념에 복잡해지는 심경이었다.


혼세, 환란이 찾아든 인세는 결국 구원자를 탐하게 되어있으니, 비단 그것은 되려 그 이전의 운명을 자처했던 자신이 자초한 선택이자 스스로가 이를 원치 않으면서도 또 막상 그러기를 바라는 모순된 예속이자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종을 자처하도록 납득을 시키는 자발적 복종에 가까웠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관녕은 어쩌면 가후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총사 또한 스스로 뛰어드신 겝니까?’


‘뭐, 반쯤은? 세상은 단 한 사람에 의해 뒤바뀌기도 하지만 반대로 홀로 바뀌기만 하는 것도 아니니까. 적어도 내 이 땅을 휘저으며 그에 따른 책임과 부채 의식은 있으니까. 아니지, 이를 그리 표현한다기보다는......, 이 땅에 앵속과 난세를 비롯한 기존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그 위에 올라선 제국과 하늘, 세계를 부순 것에 대한 애도? 속죄? 호기심? 궁금증? 자발적 방임? 수동적 이행? 글쎄, 그에 따른 대답이 온전하게 될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이를 마당극이자 무대 위의 연극으로 치자면 나는 그것이 자의든, 타이든 간에 내 도맡은 역할이 악역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그에 맞춰 흘러가는 것뿐이야.’


스스로에 대해 이토록 자조적이며 격조 있는 비판이자 합리화가 어디 있던가?


거진 처음으로 전해듣게 된 가후의 입장을 듣게 된 병원의 심정은 실로 오묘했다.


그 모든 것의 죽음 앞에 그리 무게감을 느낀다 하면서도 이리 가볍게 얼버무릴 수 있는가 싶은데, 그렇다고 무던히 이를 말하는 그의 자태 속에 이것을 막연한 장난이요, 회피이자 얼버무림의 흔적은 한치도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 비단 잡으면 흩어지고 쥐려 해도 쥐여 지지 않는, 그럼에도 비단 그것이 존재함을 스스로 증거하는 신기루와 같았다.


그러나 비단 그것을 알아도 어찌할 수 없다는 듯 가후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어차피 자네도 동의한 길이야.’


‘압니다.’


‘한데 왜 의문을 가져. 눈앞에 벌어짐에, 당연한 것을.’


‘알면서도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는 지금의 자신들에게 마치 현상 같은 일이라면서, 실로 그간의 세월 이 땅을 주무른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되려 그것이 이제와 그의 진정성이요, 새로운 정체성과 같으니 그것이 더 크게 느껴지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도 답은 찾았나?’


‘아니요? 허니 묻는 것입니다. 이 너머엔 대저 무엇이 있을지.......’


‘길.’


그리고 그 순간에 관녕은 그 본질에 가까운 답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최대한 적은 피를 흘리는 길. 수백 년 치의 피. 수만 리에 걸쳐 흐르는 이 땅의 모든 물길보다 더 많을 수백만 치의 피. 고작해야, 길어봤자 100년. 그것이 이념이든, 사상이든, 신앙이든, 종교든, 갈등이든, 충돌이든, 정치든 그것이 뭐든 간에 전쟁으로 귀결될 그것을 최소한으로 최우선으로 최선을 다해 최대한 가져올 수 있는 길.’


‘그러니까, 그 모든 분쟁과 갈등을 끝내겠다는 겁니까? 그 모든 것을 하나 되게 만들어서 진정 진시황이라도 되어 보이겠다는 겁니까? 이전에 총사와 나누었던 담화 속에 그것만이, 그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입니까?’


‘아니, 엄밀히 말해 그 이상이지. 이 비좁은 중원이라는 바다라는 끝이 존재하는 동역 땅만 억지로 꾸역꾸역 묶어놓고 하나 되었다 우기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그 개념이 다르거든. 막연한 신과 인간의 그런 것, 그래, 그게 전부일 수 있지만, 또 그게 아니란 말이지.’


‘알고는 있었지만, 알게 될 것도 같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어렵습니다.’


‘이해를 시키겠다는 게지, 납득을 시키겠다는 게야. 인간이 신을, 신이 인간을, 그에 따른 세상을 달리 할 수 있도록 만들어내겠다는 게지. 뭐 엄밀히 말하면 적어도 생각이란 것을 해보게 하려는, 그 막연하고 당연시하는 것들에 대한, 당연하지 않음에 대한 시각과 사고를 심어주기 위함인 것 같지만, 이조차도 폐하의 뭔가를 담아내기에 부족한 듯 싶으니, 그래. 우선은 간단히 이리 정의하도록 하지.’


그렇게 가후는 마치 하나하나 그 순서가 정해져 있다는 듯 그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더 깊게, 더 넓게, 더 길게, 더 다채롭게. 때론 남을, 그리고 나를.’


그렇게 모든 손가락이 접힌 그 끝에선 주먹이 남았으나, 그 마지막 스스로를 돌아봄에 있어 새로이 접힌 손가락 하나가 다시금 펴지며 어렴풋이 고개를 들었다.


‘진리와 이치를 쫓는 것. 그리고 막연히 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직접 겪는 것. 본질을 향한 탐구와 갈망이 신과 인간을 그리고 세상을 이해시킨다는 말이지. 사람은 학습이라는 것을 하기에 그 경험만큼 소중한 자산은 없으며 그것이 쌓이고 쌓여 더 나은 바를 지향함에 나아감과 물러섬을 알아야 하니, 적어도 그에 녹아든 무형의 구체요, 구심점과 축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그 모든 것의 내외와 전향(轉向)에 대한 것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중하지. 이를 위한 계몽이네. 아니, 발버둥인가? 그도 아니면 이 또한 의미 없이 추락할 이카루스의 날갯짓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날개는 왜 있지? 왜 나는가? 말 그대로 날개가 있으니까? 허면 반대로 물어보겠네, 날개가 없는데 대저 왜 날고 싶나?’


화아아악-


‘..........!’


풍덩-


굳이 신과 세상을 입에 담지 않고, 이를 억지로 이해시키지 않으려도 해도 그에 담긴 것들이 졸지에 바다처럼 마치 파동처럼 물결처럼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크나큰 충격과 더불어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무거우니 마치 물에 빠진 듯 싶었다.


아니, 그 기세가 빠르고 매서운 것이 강력한 저항에 휘둘려 추락하는 하늘 속인 것을 착각하여 어두컴컴한 물 속이라 느끼는 것인가?


해가 없으니, 도통 이곳이 어느 곳인지 모르겠다.


주변엔 검푸른 어둠뿐이요 그 너머로 풍랑이 이는 바다가 일렁이는 것 같은데 자신은 끝도 없이 추락하는 것과 같으니, 대저 무엇이든 무언가를 잡아야만 할 것 같았고 또 반대로 어떻게든 손과 발을 내어져 추락하는 자신을 거슬러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할 것 같았다.


이 땅의 이들로부터 내던져져 이 바다에 버려지는 것인지, 저 하늘로부터 떨어져 이 땅에 추락하는 것인지, 그래서 오르려는 것인지, 그래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이미 그 믿음에 배신당해 이를 원치 않는 것인지.


대저 자신은 어디에 있고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


그럼에도 자신은 왜 자꾸만 가라앉기만 하는지. 내려가고 내려가며 더한 밑으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밑바닥을 향해 내려가야만 하는지, 그것이 억울하고 원통했다.


그리고 그 끝에 흐릿하고 일렁이는 형체와 더불어 저보다 먼저 떨어지는 듯 보이는 슬픈 얼굴로 피를 흘리며 하염없이 추락하는 병원에 모습이 있었다.


비단 조금 전까지, 그 숭고한 죽음과 더불어 이 땅의 이들이 도달하지 못한 진보된 세상의 드높은 지향점에 도달하며 모든 것을 이루었는데, 지금의 그는 어째서 저리 비참히, 신화 속 이카루스와 같이 저리 날개를 잃고 추락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뒤를 따르는 자신은 과연 어찌 되는 것일까?


설마 자신의 끝 또한 이와 같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모두를 빙자한 제 자신의 추락으로 끝맺을 또다른 비극인가?


이 모든 것은 꿈인가? 그도 아니면 의미 없을 환상인가? 뒤바꿀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훈이며, 설사 그렇다고 한들 세상을 뒤바꿔도 제 자신의 끝만큼은 뒤바꿀 수 없다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선사하는 절망인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뛰어든 자신의 끝 또한 추락인가?


“안돼애애애-! 허억......, 허억.......”


“아, 이유를 알 것 같군, 아무래도 자네 또한 나처럼 추락하기 싫어서였겠지?”


“.........!”


그렇게 관녕은 지난 기억의 편린이 뒤섞인 미몽 속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돌아온 현실 속에 그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도리어 멀끔한 모습의 가후가 아닌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병상에 누워있는 풍방이었다.


“그 무슨.......,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까?”


“때론 말이네, 사람은 하늘과 땅을 착각할 때가 있어.”


그리고 그에게서 듣게 된 이상한 말.


그 너머로 뭔가 달라진 듯 느껴지는 그의 어색한 말씨.


“그조차도 아니면 되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끌어올려지고 있는 것을, 되려 제가 추락하고 있는 것이라 느낄 때가 많지.”


“말투가 변하셨군요.”


“자네가 지금 바라보는 내가 정녕 나인가?”


“끄흑!”


그리고 그 순간에 병원은 눈앞에 뿌여지는 것을 느끼며 알 수 없는 두통을 느껴야만 했다.


애초에 깨어날 적부터 흐릿했던 눈앞의 풍경이 자뭇 선명해지나 싶었으나 이것이 또다시 이리 뿌옇게 변모하며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처럼 변해버릴 줄은 또 몰랐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다시 튀어나오는 것은, 가후의 모습이었다.


‘나도 아직 온전히 이를 모르는데 어찌 이를 설명하겠나? 대저 왜? 왜 그렇게까지냐고 물으면 또다시 나에 대한 물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 그 모든 것이 나로부터 뻗어나가 폐하께 도달하는 것인지, 폐하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 모든 것이 내게 도달한 것인지. 어디, 다시 한번 정의를 해볼까? 소명? 부채의식? 책무? 유희? 놀음? 장난? 호기심? 그도 아니면 원념이자 복수? 글쎄, 그건 나조차도 몰라. 쫓기는 것 같으면서도 되려 막연히 방치하듯 내버려둔 채, 신경을 쓰지 않아. 말, 그대로 신이나 벌일 법한 주사위 놀음이지. 그 결과가 어떻든 그에 토를 달지도 않고 판을 뒤엎을 생각이 없는 듯 보이니, 간혹 정리는 하는 것 같은데, 그에 따른 변화가 이리 극적임에도, 막상 그 끝을 예상하기 힘듬에도 언뜻 돌이켜보면 이조차도 마치 당연한 것 같으니, 그게 묘한 일이지. 그 스스로가 전면에 나서지 않아. 자꾸만 뒤로 숨고, 사라지려고 하지. 그래, 그렇지, 한데 말이야. 실로 무섭게도 일은 진행되고 있네.’


그러나 분명,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는 되려 가후가 아닌 풍방의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하늘을 향해 다가섰으니까......., 글쎄, 그에 대한 후회는 딱히 모르겠네요.”


“하늘 말입니까?”


‘한 걸음씩. 비단 수없이 귀한 이들을 제물로 바쳤네. 그리 인신공양을 거부함에도 결국 그와 같은 길이 벌어졌으니, 되려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제물을 바친 꼴이지. 그렇게 해서 하나씩 내버리고, 내던지고, 체념하며, 기초를 다지고 쌓고 또 쌓으면 어느덧 하늘 높이, 멀고도 먼 저 서쪽을 향해 오르고 내달릴 준비가 끝이 나겠지.’


눈앞의 현실과 기억의 편린이 한데 뒤엉켜 일렁이니 어느덧 그리 혼재된 감각 속의 미몽은 실로 악몽으로 같았다.


“결국 그 모든 것을 피로써 쓰여질 수밖에요. 그 피의 무게로 환치되는 것이 가치이기에, 나는 짐승의 피가 섞인 것을 어쩌면, 승천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다 끝내 저항한 것인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것이 잠잠해지고 잔상을 거쳐 현실이 되었을 때, 다시금 관녕의 눈앞에 자리한 것은 보다 주름지고 핼쑥하며 더 이상 마냥 검은빛으로 찰랑이지 않은 그 사이로 드문드문 흰머리와 더불어 푸석함을 내비치는, 확실하게 늙은 채로 병상에 누워있는 풍방이었다.


“인간은 평생 꿈과 이상이라는 이름의 미몽 속을 헤어 나오지 못해요. 그 모든 고되고 헛됨이 끝이 났을 때, 그리고 끝을 낼 수 있을 때, 어쩌면 그때가 제일 고통스러우면서도 후련한 것일지도 모르죠.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쩌면 저 너머의 끝에는 그저 지금의 연장선이 있을지도 몰라요. 물론, 가봐야, 가서 확인해봐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전까지는 더 나은 세상이 있을지, 보다 못한 고난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분명 그 끝에 가서 미몽에서 깨어났을 때, 그때의 나는 더 이상의 이전과 같은 모습과 마음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요. 설령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해도, 모든 아쉬움을 털어버렸다고 해도, 모든 것이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순 없으니까. 어쩌면 나는 알면서도 그를, 그 순간 속에 영원을, 영원토록 그 속에 호기심 넘치던 그때로 갇혀 있기를 바랬는지도 몰라요. 그가 내 사위인 것을 알면서도 그 사위 이전에 뜻을 함께하던 그때의 그 모습을, 그 순간들을 바랬는지도 모르죠.”


순식간에 그 모든 생기와 젊음이 빠져나간 듯, 십수 년의 세월의 노화를 단 한 순간에 맞이한 듯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 갑자기 슬프네요. 울적해요, 더 이상 이대로, 이 모습 그대로 멈춰서 살아갈 수가 없으니, 이제는 나도 이리 변해버렸어. 깨닫게 되고 이해를 하고 받아들이니 이리되어 버렸어. 이전처럼 막연히 거부하고 떼를 쓰고 싶은데, 실상 그리 떼를 쓸 적에도 정작 선제 앞에선 떼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는데,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살아오다 이리 급작스레 현실을 마주하라고 하면 그게 어디 쉽겠냐고, 안 그래요?”


그렇다고 막연히 원통하다고 함은, 그저 애석함과 슬픔, 그리고 울적함이 더해진 체념과도 같았다.


“그것이......”


“애써 위로 말아요, 본디 인간은 검게 태어나서 희어지는 것이니까. 그리 죄악을 씻어내며 살아온 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게 수행이고, 도를 닦는 길이니까. 참, 나도 밑에 홍건적 부리고, 여러 음양사, 방술사 두게 되니까, 수행자 같이 말하게 되네. 당장에 이 핏물 묻은 의복부터 좀 깨끗이 빨아왔으면 싶은데.”


“사람을 불러 조두(澡豆)라도 시키시겠습니까?”


“그러네요, 콩으로 옷에 묻은 부정(不淨)을 씻는 거. 팥으로 몸에 묻은 부정(不正)을 씻는 거. 그거 다 사람이 하는 거네.”


“예?”


“막연히 신이나 하늘이 하는 게 아니라구, 결국 사람이 해야 하는 거라구요. 내가 직접 빨던 남의 손을 빌리건 간에.”


그럼에도 막연히 그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에 따른 납득이 아예 되지 않는 것은 또 아닌 듯 보였다.


“아....., 예.”


“뭐에요, 그 반응은? 내가 엄청난 깨우침과 깨달음을 주는 좋은 말을 건넸는데? 나, 지금 되게 서운하려 그러네?”


“아, 그게 그러니까........, 국상. 이, 이는 무례를 저지르려던 것이 아니라......”


그러던 찰나, 되려 뾰로통한 표정으로 따져 묻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관녕의 태도가 제법 우스웠는지 풍방이 마치 장난기 어린 여인처럼 웃었다.


“풋! 그렇게 안 봤는데, 승상도 어리숙하고 어린 면이 있네요?”


“아, 그게.......”


“추락하는 거 무섭죠? 나만 버려지는 것 같잖아, 남들은 적어도 그대로거나 자꾸만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것 같은데, 어째 나만 자꾸만 깊고 무겁게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고 어째 자꾸만 소외되고 이전만 못하게 되는 것 같고, 그게 싫어서 더 무섭고 두려워서 더 조급해지고, 그 와중에 이뤄놓은 것들조차 금세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들이고, 그 이뤄놓은 것들조차 없다고 여겨지면 더 미칠 지경이지. 그러니까 그 와중에 어떻게든 뭐라도 붙들고 잡아서 안 떨어지려고 하고 그거 부여잡고 발버둥 치며 더 높이 오르려고, 그러는 거잖아.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닥인지조차 모르는데, 비단 나는 멀쩡히 잘 가고 있는데 세상이 뒤집혀서 내가 더 높은 곳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더 낮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모르잖아. 그나마 여기가 어디쯤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게 다른 사람들이 붙어있는 위치인데, 그래서 어떻게든 더 많은 이들의 곁이나 그들 너머에 자리한 머리 꼭대기 위에 붙어있으려 하는 거잖아. 그나마 바닥이 어디인지 알고 있으면 좋은데. 아, 여기서 멈추겠구나 싶으면 그나마 이리 겁을 먹진 않을 텐데, 설령 그 끝이 죽음이자 소멸인 건 알아도 그 전까지의 끝이 없으니까 그 무저갱이 무서워서, 대저 어디까지 추락할지 나조차도 예상할 수 없어서 이러는 거잖아, 지금. 그저 어설프게 바닥 끝에서도 더한 바닥이 있다는 거, 바닥보다 더한 밑바닥이 있다는 거, 그 정도만 알고 이러는 거잖아, 지금. 먼저 간 이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저들과 같은 결말이 싫어서.”


“..........”


그러나 그 장난기의 끝에 흘러나온 말에 돋아나는 소름과 전율을 느끼는 그는 그러한 풍방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살아보니까 알겠더라구, 곁에 있어 보니까, 직접 겪어보니까 알겠더라구요. 꿈을 꾸는 사람의 곁에 붙어있으면 의외로 상처받고 버려진다는 걸, 그 꿈에 동화된 이들의 운명은 거진 비극으로 끝난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고로 우리는 쓰고 버려지는 조두에요, 그에 감화된 이상 우리는 저들의 꿈을 위해 쓰고 버려지는 도구에요, 고로 이 세상은, 그에 속한 이들은 거진 모두가 하나같이 꿈을 꾸는 이들을 위해 부림받고 쓰여 버려지는 저들을 위한, 소위 저들의 이상을 위한 제물이랍니다. 우리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벌어진 그 모든 부정하고 불완전한 오물덩이와 함께 추락할 거에요, 그러니까 나의 꿈과 남의 꿈이 하나 되는 그 순간을 조심해요, 자칫 잘못하다간 그 부스러기가 돼서 함께 버려지기 마련이니까. 결국 깨끗한 옷을 걸치는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에요. 그게 신이건, 하늘이건, 임금이건, 구원자건 간에 그 모든 영광 속에 나는 없답니다. 나의 노력과 성의는 그리 사라지는 거에요.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존재할 뿐이니, 그분의 이름 외에 것들은 빛날 수 없고 빛나서도 아니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반기를 들었답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저리 해맑게 웃고 있는 저 순수한 미소 속의 존재가 과연 포장된 위선을 알려주는 필요악일지 그도 아니면 그 위선을 빙자해 어떻게든 그 선을 무너트리려고 하는 절대악일지 판별할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그는 그 빛 속에 직접적으로 몸을 담았던 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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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429화 – 그때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이 다 상처투성이에 불과하겠지 22.11.09 532 5 18쪽
429 428화 – 나아감에 그 끝엔 오직 영광뿐인 상처뿐이 없나니 22.11.05 158 3 15쪽
» 427화 – 각자가 바라보는 그 너머의 세상, 그 끝을 향해서 22.10.29 158 3 21쪽
427 426화 – 절반의 실패와 더불어 남겨진 유산이 이룩한 진보 +1 22.10.22 172 4 16쪽
426 425화 – 백성이, 기득권이, 사족이, 관료가 아닌 군대가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 옳다 +2 22.10.05 196 3 21쪽
425 424화 – 실패한 시대의 이면, 이를 뛰어넘을 또다른 시대적 일면 22.10.04 162 5 21쪽
424 423화 – 미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 날개의 그것과는 사뭇 같은 이야기(3) +2 22.10.03 162 3 24쪽
423 422화 – 미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 날개의 그것과는 사뭇 같은 이야기(2) +1 22.09.28 162 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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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420화 – 이는 공화정의 몰락인가 그도 아니면 크레타의 몰락인가 22.09.21 149 2 23쪽
420 419화 – 전조의 낙양과 다를 바 없이 붕괴하는 장안 +1 22.09.20 149 4 20쪽
419 418화 – 부패할 수 없는 자의 시대가 저물면 철혈의 재상이 집권할 시기가 찾아든다 22.09.19 157 4 24쪽
418 417화 – 마총 전투의 승리와 그 이후의 옹주 +2 22.09.15 168 3 21쪽
417 416화 – 마총 전투 22.09.15 150 2 22쪽
416 415화 – 전국책을 품에서 놓지 않은 남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2) 22.09.13 159 3 19쪽
415 414화 – 전국책을 품에서 놓지 않은 남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1) 22.09.07 208 4 27쪽
414 413화 – 승천을 해야만 하는 용의 운명 22.09.06 155 4 19쪽
413 412화 – 진한대전의 시작과 용의 출현(2) +3 22.09.04 167 5 22쪽
412 411화 – 진한대전의 시작과 용의 출현(1) 22.09.04 173 4 23쪽
411 410화 – 진한대전의 의의 +2 22.08.31 202 3 21쪽
410 409화 – 읍참진밀(2) +2 22.08.26 214 5 16쪽
409 408화 – 읍참진밀(1) 22.08.25 165 3 20쪽
408 407화 – 익주 재일의 기재 22.08.18 187 4 21쪽
407 406화 – 전쟁과 복수를 천명한 양치기 소년의 결의 +2 22.08.17 174 5 28쪽
406 405화 –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천명 22.08.14 162 4 23쪽
405 404화 – 그 정치와 전쟁의 사이, 조위와 유범의 출사표 22.08.12 155 4 25쪽
404 403화 – 진밀과 이권은 품 안의 비수요 전장의 방패이자 정치이며 전쟁이다 22.08.10 169 4 20쪽
403 402화 – 그 와중에 무엇보다 중요해진 것은 그들이 자리하고 있는 익주만의 사정이었다 +2 22.08.09 160 4 26쪽
402 401화 – 같은 꿈을 꾸는 자들을 위한 희생양과 대공황 22.08.06 179 3 22쪽
401 400화 – 실로 위험한 이들이 동화 같은 꿈을 꾸었다. 그것도 같은 꿈을 꾸었다. +2 22.08.05 191 5 19쪽
400 399화 – 복수를 천명한 양치기 소년은 들개를 이리라 속이며 이 땅에, 이 나라에 전쟁이 필요한 이유를 설 22.08.03 196 5 21쪽
399 398화 – 대나무를 입에 문 이리는 복수를 위해 누군가 던져주는 쌀밥을 씹는 들개가 되었다 22.08.02 194 2 23쪽
398 397화 – 선수 교체 22.07.25 237 3 24쪽
397 396화 - 관서대공황의 전조와 대국. 아니, 패권국의 위기(4) +2 22.07.25 220 3 16쪽
396 395화 – 붓과 낫과 망치, 벼 이삭과 월계수 잎을 두른 크고 원대한 꿈을 품은 공화국 +5 22.07.21 228 5 34쪽
395 394화 – 밀감과 감, 검독수리와 크고 원대한 꿈을 품은 제국 22.07.20 194 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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