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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6,080
추천수 :
276
글자수 :
205,656

작성
16.02.09 18:39
조회
396
추천
9
글자
5쪽

기억의 원소 #10

DUMMY

♔♔

할머니는 하얀 광목을 탁탁 털어 마당의 빨랫줄에 펴서 너신 후 햇살이 따스한 툇마루에 앉으신다. 세탁을 마치고 풀을 먹인 광목이 눈부시게 하얀 빛을 발한다. 정갈하게 비질이 된 마당에 광목의 그림자가 인쇄된 것처럼 선명하게 드리워진다.


“날이 따뜻하니 잠이 솔솔 오는구나.”


나른한 햇살이 할머니의 주름진 이마 위에서 어른거린다.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다. 봄은 길게 자라 여름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중이다.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향긋한 풀냄새에서는 이미 여린 봄의 향기가 아닌 초여름의 녹음을 느낄 수 있다.


어디에선가 회백색 상제나비 한 마리가 너울너울 날아와 마당을 한 바퀴 돌더니 광목 위에 앉는다.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나’를 응시한다. ‘나’의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눈도 없고 손도 없고 피부도 없는데, 다리도 없고 몸도 없는데 나비는 ‘나’의 무엇을 저토록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벙어리 깡이처럼, 내 의식의 고유감각에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나비는 조용하지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동작으로 광목을 박차고 날아올라, ‘나’를 통과해, 할머니의 이마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이 감돌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은 나비의 착지에도 미동조차 않는다. 나비의 날개가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할머니의 이마에 옅은 그림자를 만들어낼 뿐, 할머니의 얼굴에는 음영의 굴곡이 모두 사라졌다. 나비는 주름살마저 느슨해진 할머니의 이마 위에 조용히 머물러있다. 시간조차 꼼짝도 하지 않고 멈춰서있다. 할머니가 늘 부르시던 낯익은 노래 소리만이 할머니와 두 아이의 주변을 빙빙 맴돌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시간이 멈추었음을 느낀다. 할머니의 이마 위에서 쉬고 있는 건 나비뿐만이 아니라 바람과 햇살과, 시간임을.



운명이라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소나기를 가득 품은 검은 구름처럼 몰려와 삶의 질과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피할 겨를도 없이 다가와 비를 뿌리고 달아나는 운명의 장난을 ‘나’는 입을 벌린 채 아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내린 비가 작은 내를 범람시키듯 할머니의 죽음에서 출발한 운명의 소나기는 연이어 할아버지의 목숨까지 앗아갔고 그 산마을에서의 유년 시절을 송두리째 가져가버린 것이다.


이제 ‘나’는 스스로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굳게 폐쇄되었던 유년 시절이 ‘내’ 앞에 활짝 열리고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고향마을의 풍경이 이토록 세밀하게, 그리고 연속적으로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굴참나무 덕분이었다. ‘나’는 아재의 폐허 근처에 흩뿌려진 들꽃과도 같이 산재적이고 불규칙적으로 ‘내’ 안에 몰려드는 기억에 모든 의식을 맡기고 마치 기억상실에서 치유된 환자처럼 유년 시절을 보았다. 이제 ‘나’는 하얀 광목 위의 상제나비처럼 선택을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안다. 굴참나무의 도움 없이 ‘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육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인지, ‘내’가 간신히 잡고 있는 의식의 끈을 아주 놓아버릴지. 아니면 여기에 계속 남아 있을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은 꿈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날들처럼, 앞으로의 일도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결정을 내려야한다. 오래 전 그 날처럼.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뒤에 우리는 고아원에 보내졌다. 장마철에도 발휘되는 아이들의 적응력은 곧 새로운 놀이를 고안해 내듯이, 고아원에 맡겨지게 된 우리 역시 그곳의 생활에 그런대로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는 것은 그 생활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반복되는 생활에 차츰 낯선 부분들이 눈에 익고 습관에 길들게 되었다는 뜻일 뿐. 여전히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깡이와 아재를, 아버지와 파랑새를, 냇가와 당제목을 사무치게 그리워했지만 그 산마을은 이제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달 뒤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약속을 기억해낸 것이다. 바다 건너 먼 나라로 데리고 가주겠다던 그 약속을. 목각인형을 닮은 긴 목과 꿈꾸는 눈빛을 지닌 그 여인에게서는 낯선 나라의 향기가 났다.

세 살짜리 어린 여자아이에게 관심을 가진 여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고아원 마당을 거닐고 있을 때, 그 아이의 걸음걸이와 발목을 유심히 살펴보며 미소 짓고 있을 때, 나는 나무에서 사뿐히 내려왔다. 그리고 부채꼬리바위딱새로부터 익힌 춤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여인은 아이의 손을 놓았고 꿈꾸는 듯한 그 눈이 기쁨으로 커다랗게 열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때 나는 붉은 색 리본을 달고 있었던가, 푸른 색 신발을 신고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그 고아원에서는 우리에게 색깔별로 옷을 입히지 않았으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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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8

  • 작성자
    Lv.49 난정(蘭亭)
    작성일
    16.03.14 22:15
    No. 1

    이웃별님, 늘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3.14 22:17
    No. 2

    감사합니다. 난정님~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15 23:51
    No. 3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16 01:16
    No. 4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16 01:19
    No. 5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16 13:16
    No. 6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9.03 07:11
    No. 7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장담하건데 이 정도 필력이면 스포츠, 무협, 로맨스, 19금 뭐든 다 도전할 수 있어요.
    그러니 보다 대중적인 소재를 선택해서 많은 독자들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 보여주세요.
    독자의 한사람으로...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9.03 12:47
    No. 8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동입니다 ㅠㅠ
    열심히 하라는 말로 새겨들을게요. 천하의 천중림 백호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9.03 13:00
    No. 9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니라 도전하라는 말입니다.
    별림!!!!!!
    그런데 별림을 알기 전에 저도 별님을 쓴 적이 있습니다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9.03 18:57
    No. 10

    닉넴으로요? 오호~ 천중성星 같은 느낌인가요...? ㅎ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04.26 23:36
    No. 11

    ㅋㅋㅋ덜렁덜렁.....21화가 끝인줄만 알고....이거 못 읽을뻔했어요.ㅜ.ㅜ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더니 마무리 이야기가 있었네요.
    갠적으로 새리와 오페라에서는 까뮈 문체향이 났다면 이번거는 이상문체향이 난다고 해야할까요~?! 나중애 팬 사인회 할 때 부르셔야합니다.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4.27 17:46
    No. 12

    아하하 이러지 마세요. ㅋㅋ
    데조로님은 책 몇 개씩이나 내신 작가님이시면서... ㅎ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04.27 20:26
    No. 13

    사람을 상 중 하로 나누면 안 되겠지만 글은 상 중 하로 나눌 수 있답니다.
    조금만, 더 많은 이들이 읽을 수있는 기술과 별님의 고유의 문체가 훼손되지 않는 방법을 찾으시면 될 거같아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4.27 23:28
    No. 14

    넵 열심히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데조로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토이월드
    작성일
    17.05.23 20:36
    No. 15

    드디어 오늘 다 읽었습니다. ^^
    읽는 동안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웃별님의 다른 글도 읽어야겠지요? ㅎㅎ
    앞으로도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28 00:24
    No. 16

    감사합니다^^ 좀 더 가독성이 있으면서 스토리가 탄탄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입니다. 행복님도 원하시는 좋은 글, 즐겁게 쓰시길 바랍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31 09:06
    No. 17

    님의 글 다 읽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 갑니다. 항상 행복한 글쟁이이시길 바래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31 18:33
    No. 18

    난해한 글을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희망님^^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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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8. 향기가 보여준 것(1) +10 16.02.09 372 6 27쪽
26 기억의 원소 #9 +6 16.02.07 342 6 10쪽
25 17. 최초의 기억 (2) +6 16.02.06 537 6 17쪽
24 16. 최초의 기억 (1) +8 16.02.06 409 6 15쪽
23 15. 공중의 방 (2) +6 16.02.04 522 6 7쪽
22 기억의 원소 #8 +6 16.02.04 828 6 10쪽
21 14. 공중의 방 (1) +4 16.02.03 425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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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2. 진실의 파편들 (2) +10 16.02.02 433 7 26쪽
17 기억의 원소 #6 +10 16.02.02 518 7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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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억의 원소 #5 +8 16.02.02 405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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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억의 원소 #3 +12 16.01.30 334 8 10쪽
10 8. 목각인형의 비밀 (3) +11 16.01.28 364 8 13쪽
9 7. 목각인형의 비밀 (2) +12 16.01.27 523 8 14쪽
8 6. 목각인형의 비밀 (1) +6 16.01.27 288 9 9쪽
7 기억의 원소 #2 +14 16.01.27 437 8 9쪽
6 5. 재회 (2) +10 16.01.26 438 9 15쪽
5 4. 재회 (1) +11 16.01.26 429 12 21쪽
4 기억의 원소 #1 +10 16.01.25 536 11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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