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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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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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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02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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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11. 진실의 파편들 (1)

DUMMY


아침햇살이 고스란히 머리 위로 쏟아져 나는 눈을 뜬다. 새벽녘까지 습관처럼 그림을 그리다 결국 씻지도 않은 채 소파에 누웠다. 처음에는 선잠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이렇게 늦은 아침이다. 이제야 욕실로 들어가, 문은 열어둔 채 샤워를 한다. 그리고 습관처럼 현관을 나서려다가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매일 아침, 지하 매장의 빵가게에서 빵을 사는 것은 늘 나의 몫이었다. 할머니가 입원하신 뒤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규칙성은 마음의 잡음을 없애준다고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러나 규칙을 깨트리고 나서 늦은 아침까지 잠을 잤다는 사실은 아침으로 빵 대신 다른 걸 먹는다고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믿게 한다. 당근과 껍질완두콩, 브로콜리, 커리플라워 등이 믹스되어있는 냉동 채소를 녹여 버터에 볶고 달걀프라이를 한 후 냉장고에서 치즈와 오렌지주스를 꺼낸다. 주방 창문을 통해 보이는 파란 하늘은 모처럼 깨끗하고 맑다.


11시쯤에 미류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말인데 뭐해? 날씨도 좋은데 집구석에 처박혀있지만 말고 이렐리로 나와. 난 주말에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해서 꼼짝도 못하거든. 자칭 지배인이 어찌나 잔소리가 심한지, 와서 내 편 좀 되어 줘.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하다가 미류는, 엄마에게 한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했다. 그런 종류의 의식불명은 흔히 2주가 고비라고도 하니까 그 전에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거라고. 어쩌면 올리비아의 의견일 수도 있지만, 미류는 엄마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가끔 이렇게 엄마의 안부를 묻곤 했다. 미류가 엄마에 대해 물으면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고 인사치례로 올리비아의 안부를 물었다. 여전히 잘 계시지? 여전하지, 뭐.


그리고 잠시 뒤에 재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화 안 풀렸어? 오늘 점심 내가 사줄게 만날까? 그래, 거절당할 걸 알고 그냥 해본 소리라고, 이런 속 좁은 녀석 같으니라고. 사실은, 오늘 밤 11시에 그, 새들의 군무에 대한 특집이 있는 거 알아? 넌 TV도 거의 안 본다고 했던 것 같아서, 혹시라도 모를까봐 알려주려고. 그 일이 있고나서 한강에 투신하는 자살자들이 끊이지 않는대. 예고편을 보니 유정휘 씨랑 너희 어머니 얘기도 나오던데. 제목이 굉장히 자극적이더라고. ‘죽음의 무도’라고.




나는 온종일 TV를 볼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고민을 했다. 나에게 결정이란 이렇듯 늘 힘들다. 내 안에는 대립하는 몇 개의 자아가 공존하는 것 같다. 그들은 선과 악, 빛과 그림자, 흑과 백처럼 극단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일치하는 의견을 보이기도 하는 고만고만한 내 자신의 복제품들이다. 그들이 제각각 나름대로의 의견을 내놓으면 나는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일을 결정하는 것 하나도 내게는 힘겨운 선택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나를 과잉보호한다고들 했지만 그건 내 탓이다. 할머니가 만들어 놓은 틀이 없었더라면 나는 발효된 밀가루반죽처럼 흐물흐물 주저앉아버리고 말았을 것이기에.


‘개인적인 감정은 모두 뒤로하고 객관적으로 청이 씨를 바라본 적은 있는지.’

신 선생님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 왜 그게 내 몫이 되어야 하는 걸까. ‘죽음의 무도’라니, 얼마나 객관성을 잃은 프로그램인지는 제목만 들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걸 무엇 때문에 봐야 하나. 쌍둥이목각인형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내가 모르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진짜 이유’에 대한 일말의 단서라도 찾기를 기대해서. 아니면, 할머니와 엄마를 바라보는 타인의 관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잘 모르겠다.


나는 새들의 군무와 붉은 리본을 차례로 지우면서 엄마의 삶만을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려 애쓴다. 어렸을 때 입양된 쌍둥이자매, 사춘기 때 그 반쪽을 잃어버리고 혼자 남은 엄마의 삶을. 그러나 ‘왜?’라는 너무나도 감정적인 목소리가 올라와 지긋하게 엄마에 대해 생각할 수가 없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로 인해 엄마의 삶이 완전히, 온전히 망가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산 채로 땅속에 묻겠는가. 아무리 병이 깊다 해도 본능의 뿌리는 쉽게 파괴되지 않는 법인데.



엄마에서 시작해 생각은 할머니로 옮겨간 뒤에 즉시 신 선생님과 향초로 건너뛰면서 우현의 얼굴이 떠올랐고 TV를 볼 것인가 말아야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민하다가 손은 수화기를 들고 호박아저씨에게 전화를 건다. 늘 이런 식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생각이라는 말은 잘못되었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온통 기억의 장면들이니까. 유령을 만들어 현실과 분리된 또 다른 현실 속을 배회하는 일은 가능할지 몰라도, 세밀한 기억력은 생각을 하는 데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끊임없이 연상되는 기억을 꺼내보고 상황을 설정할 뿐이다. 기억의 장면들에 살을 붙일 수도 군더더기를 뺄 수도 수식을 할 수도 철학적 사고를 유추해낼 수도 시를 쓸 수도 없다. 그런 추상적인 영역에는 저 몽롱한 의식의 소유자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법이다. 현실이라는 꿈을 영롱하게 채색할 수 있는 자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빛깔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자들, 검은 새들이 일렁이는 잿빛 하늘을 보며 무지개빛 무대를 상상할 수 있는 자들 말이다.

생각은 몰두할 수 있는 자들만의 전유물이다. 그들의 기억력을 전적으로 믿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내 사고력에 부족한 일괄성은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그토록 습관을 중요시 여기도록 가르친 데에는 나의 이런 불안정한 정서도 한몫 했을 것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호박아저씨의 말이 흘러나온다.

“산야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구나. 오늘 아침엔 오랜만에 공원을 산책했는데 가을 냄새가 물씬 나더구나. 산야 어렸을 때 생각도 많이 했단다. 가끔 검둥이 뮤와 함께 놀러와 근처의 공원을 산책하곤 했잖니. 어느 날은 산책을 하다 말고 부러진 버드나무 아래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더구나. 거기에서 뭘 하냐고 물었더니 누구를 기다린다고 했지.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했더니 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니? 나무의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했지. 폭풍이 몰아친 후 며칠 뒤에 찾은 공원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지. 나무들은 부러지고 꺾이고 뿌리가 파헤쳐지고······. 어렸을 때 너는 시인이었단다.”

이야기의 내용과는 대조적으로 호박아저씨의 목소리는 힘이 없다. 아니, 삶을 향한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공허하고 투명하다.


나는 목소리에 약간 힘을 싣고 짐짓 놀란 척, 그렇게 귀여운 때도 있었군요, 한다. 사실은 밀려오는 그리움에 전화를 건 이유조차 잊을 뻔 했는데. 그리고 담담하게 이번 주말에, 아니, 내일이라도 당장 이사를 가고 싶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이 집을 처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저씨께 모두 맡기면 된다고 하셨기 때문에 먼저 말씀드리는 게 옳을 것 같아서요.’

아저씨는 그 점은 아무 염려 말라고, 하지만 그렇게 서두를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냐고 하셨고 나는 이미 마음을 정리했다고 대답한다.


“그래, 그렇다면 청이에게로 가는 거냐.”


묻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동의를 구하는 말투이다.

나는 가슴이 뛴다. 엄마가 깊은 수면상태에서 깨어난다면 그 집으로 직접 오게 되는 걸까? 아니면 요양원으로 보내지는 걸까? 이사를 가기로 결심하고 나서 드는 가장 현실적인 궁금증이다. 조금 더 깊은 곳에서는 엄마는 깨어날 것인가? 라는 의구심이 뱀처럼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든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아저씨에게 물어보지는 않는다. 그건 아무도, 아마 엄마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일 테니까.


“그래, 어떤 결정을 내리든 너를 믿는다.”


아저씨의 마지막 그 짧은 말이 나를 깊은 늪에서 건져 올린다. 내 안의 ‘나들’이 어떤 합의점이라도 발견한 듯 정신이 맑아진다.



엄마의 집은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내가 유아기를 보낸 곳이긴 하지만 그곳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까 그곳을 생각했을 때 드는 무거운 느낌은 나중에 추가된 정보일 것이다. 자식을 땅 속에 묻었던, 분열증에 시달리는 엄마의 집이라는 사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낯선 짐승처럼 치부되었던 엄마의 집으로 들어갈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난다는 사실이 불안했을 뿐이다. 하지만 할머니와의 일상이 기록된 이 집은 찢어지고 상처를 입었다. 나는 서둘러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 그리고 며칠 동안 내게 일어난 미세한 심경의 변화는 엄마를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기를 기대하는 것만 같다. 나는 현관 서랍장에서 열쇠와 약도를 꺼내 본다. 약도 위에 초록색 펜으로 ‘이 집은 언제든지 산야의 집’이라고 적혀있는 메모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내 마음은 이미 이곳으로 들어가리라 결정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11시 20분이 되어서야 TV를 켠다.



“정말 굉장했어요. 그 어떤 영화나 뮤지컬보다 훨씬 환상적이었지요. 이건, 가창오리의 군무와는 전혀 다른, 예언적인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이건, 정말이지 직접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분이에요. 새똥이 우박처럼 내리는 바로 그곳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만이,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내 삶이 송두리째 그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느낌, 그런 광경을 일생동안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었다는 건 행운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의 삶이 무의미한 것 같아 며칠 동안은 멍한 상태로 보냈어요. 아직도 그 광경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요. 온 종일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요. 내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무기력해졌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확신할 수 있어요. 그걸 보고 물에 뛰어든 사람들은 세상을 비관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으리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건 불가해한 감정입니다. 세상에, 살아보지도 않은 앞으로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다니요.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내 삶은 쌩쌩하게 살아있었는데 말이죠.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잖아요. 말로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일들 말이에요······”


인터뷰에 응한 여자의 뺨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40대 초반 쯤 되었을 듯한 민낯에는 주근깨가 솔직하게 박혀있다. 새들의 군무가 있고 엄마가 물에 뛰어들고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이제 일주일 남짓 지났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자살자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묘한 기분이 든다. 엄마는 구조되었지만 비슷한 시각에 강으로 뛰어든 6명은 모두 익사했다. 같은 날 2명이 추가로 강물에 몸을 던졌고 그날 이후에도 투신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한강을 찾는다고 한다.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고 하는 공통점 외에는 연령도 성별도 직업도 성격도 취향도 가지각색이었기 때문에 그날의 군무가 최종 혐의자라는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이다.

방송 내내 TV화면에는 새들의 군무가 비춰졌다. 현장에서 느꼈던 생생한 감동은 찾아볼 수 없는 그저 평범한 군무처럼 보인다. 새들의 군무 속에서 춤을 추는, 붉은 리본을 단 엄마에게로 화면이 맞춰지면서 클로즈업된다.

나레이터는 이제 올 것이 왔다는 듯 엄마 이야기를 한다. 검은 새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춤을 추던 그 무용수는, 故유정휘씨의 양녀로서 어린 시절 춤의 신동이라 불리며 무용계를 들썩이게 했던 쌍둥이 자매 중 하나이다. 할머니와 자매의 어린 시절의 사진들이 화면에 흐른다. 故유정휘씨가 결성한 무용단 ‘새들의 정원’은 소극장 공연이 유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즈음부터 무용은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군무를 추는 형식이 더 유행했고 형식보다는 소재 자체에서 새로움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故유정휘씨 또한 성인의 예술무대에 아이들을, 그것도 요술공처럼 자유자재로 튀어오를 수 있는 쌍둥이라고 하는, 완벽에 가까운 소재를 동원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의 몸이 좋지 않아 다른 한 아이만 무대에 선 바로 그날, 불행은 시작된다.

중년의 남자가 화면에 나온다. ‘000씨. 전 국립무용단원’이라는 소개 글이 화면 아래에 잠깐 나왔다가 지워진다.

“토요일 저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국립극장대극장에서 ‘대추나무 유령’을 공연할 때였죠. 그때 단이가 몸에서 열이 펄펄 난다고 해서 청이 혼자 무대에 섰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이가 빠진 청이는 혼자나 마찬가지였던 거예요. 소극장이었으면 양해를 구해 공연을 취소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튼, 어쩌면, 무대에 선 게 단이가 아니라 청이였다는 게 문제였을지도 몰라요. 단이였다면 혼자서 무대에 서는 걸 그렇게까지 꺼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사고가 난 거죠. 청이가 방향을 잃어버린 것처럼 비틀대며 뛰어올라, 마치 날개가 꺾인 새처럼 무대 아래로 추락을 하더군요. 그 후 무릎인대가 파열되어서 과격한 춤은 더 이상 출 수 없게 된 거고요.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무대에서 추락한 청이가 호수에서 추락한 단이보다는 형편이 나았던 셈이죠.”

그렇게 청이는 무용과 자연스럽게 인연을 끊게 되고, 쌍둥이라는 특수효과가 사라진 단이의 춤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평범한 안무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2년 뒤 세상을 별로 동요시키지 못한 채 조용히, 단이의 자살 사건이 신문 구석에 실렸다. 이제 故유정휘씨를 말할 때에도 쌍둥이자매를 연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레이터가 하는 말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와 같다.


故유정휘씨는 1943년 현 YMC시네마의 전신인 유문극장 사장 故유문철씨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Y여대 무용과를 다니던 중 D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예선발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 스페인과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있는 동안에도 수차례의 수상과 창작활동을 통해 무용계의 커다란 주목을 받는다. 가냘픈 몸매와 유연한 근육, 재능과 열정, 무용가로서의 그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갖춘 그녀는 예술에 조예가 깊은 부모님의 후광을 등에 업고 거침없이 성장한다. 컨템포러리무용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결혼과 입양, 이혼이라는, 축배와 고배를 모두 마셨지만 그녀의 완전무결함에는 흠집조차 남지 않는다.

아까 그 남자가 화면에 다시 나온다.

“당시 세간에는 육아 때문에 이혼을 결정했다는 추측도 나돌았지만, 사실 유정휘 씨는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처음부터 이혼을 결정한 후에 입양을 추진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부가 온전해야 입양도 수월하니까요. 그녀는 실제로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무용과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아이들을 입양한 것도 무용을 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죠. 아이들에게 공정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어쨌든 유정휘 씨의 안목은 대단했죠. 전혀 반짝이지 않는, 7살밖에 안 된 아이들을 발탁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故유정휘씨는 본인의 무용연구센터인 ‘새들의 정원’과, 동명의 무용단을 결성하고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한다. ‘새털눈이 종탑위에 쌓이면’, ‘황금비율’, ‘대추나무 유령’, ‘바람아 낙엽아’, ‘새들의 아침’, ‘지그재그’, ‘호랑나비애벌레의 우화’ 등 예술성과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들을 속속 발표하였다. 명작을 잉태하는 무용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탁월한 감각을 지녔던 그녀는 그 모든 활동을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병행하였고, 삶을 마감하기 직전까지도 제자를 길러내는 일에 힘을 쏟았으니 가슴속에 사그라지지 않는 불꽃을 간직하고 있는 예술가였다. 갑상선과 혈액에까지 전이되었던 암만이 그녀의 길을 가로막은 치명적인 방해꾼이었다.

그녀의 빛을 가리는 좋지 않은 소문들은 일체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신념 때문이기도 했다. 편견의 눈으로 보면 예술인의 삶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예술의 순수성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나치게 세속적인 관계들은 가차 없이 거부했고 자유분방한 삶 또한 멀리해왔다. 시인이 고도로 정제된 언어만으로 음률을 만들어 내듯 그녀에게 있어서 내부의 압력을 분출시킬 수 있는 도구는 몸짓뿐이었다. 그래서 그 신성한 몸을 죽기 직전까지도 극도로 아꼈다. 그녀에게 있어서 춤은 예술이었고, 동시에 종교였는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얼굴이 화면에 나온다.

“몸짓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순간의 예술입니다. 다른 분야처럼 기록해 둘 수 없고 수정할 수 없기에 연소하고 남는 불순물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없죠. 그래서 나에게 순간의 완전연소를 방해하는 삶의 잡다한 이물질들은 처음부터 경계대상인 겁니다.”


그러나 그녀의 빛에 가려진, 홀로 남겨진 그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 반쪽을 잃고 극도로 피폐해진 청이는 자기 자신이 청이인지, 단이인지도 구별하지 못할 만큼 정신적으로 허약해져있었다. 그녀의 영혼 속에는 푸른빛과 붉은빛의 경계를 구별할 수 없는 서녘하늘의 노을처럼 단이의 영혼이 깃들어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침착하다가도 자기가 단이라고 말할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눈빛부터 확 달라졌죠. 그 아이는 쌍둥이동생의 영혼과 함께 살고 있었던 거예요.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 약물 복용도 했지만 그때뿐이었어요. 아니요, 친구가 없었던 데에는 좀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청이는 다른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잘 감지했어요. 사람뿐만 아니라 식물의 기분까지도 파악하는 것 같았지요. 가게 앞에서 말라가고 있는 홍콩야자나 팔손이 같은, 오픈 기념 선물로 받은 후에 그대로 방치해 놓은 듯한 화분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는데, 아래쪽에 답답하게 묶어놓은 장식용 포장지를 벗겨낸다거나 물을 준다거나 잎을 몇 개 떼어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일단 그 아이의 손길이 가면 이게 살겠나 싶었던 식물들도 대체로 잘 살아났어요. 어쨌든 타고난 능력처럼 보였던 그 부분이 문제였어요. 왜냐고요? 그런 식으로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죠.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기분, 벌거벗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그 애 앞에 있으면. 다 또래의 민감한 학생들인데 누군들 견디겠어요. 그때만 해도 말수는 적었지만 말을 안 하진 않았죠. 필요한 말은 곧잘 했고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했으니까. 유정휘 씨도 긍정적이었어요. 좋아질 거다, 좋아지고 있다, 하시면서 말이죠. 친구 한명 없었어도 학교생활은 그럭저럭 해나갔고 U시 소재지의 H대 회화과에도 붙었습니다. 담임이었던 저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죠.”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다는 사람의 인터뷰가 끝나자 붉은 리본을 달고 춤을 추던 엄마의 모습이 클로즈업된 채, 얼핏 보면 산 속에 지어진 학교처럼 쾌적해 보이는 어느 시설의 전경이 오버랩 된다. 아직 소녀티를 벗기도 전에 그녀는 용감하게 어머니로서의 삶을 선택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된 셈이다. 존비살인미수죄로 세상을 경악케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故유정휘씨는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바로잡으려 하지만 이미 청이의 정신적 손상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상태가 깊어진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무게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낳은 자식이 누구의 자식인지, 아들인지 혹은 딸인지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국립병무병원에서 복역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사회성을 기르기 위한 소그룹의 모임활동에 조차 적응하지 못한 채 혼자 시간을 보낸다.


“그 여자는 아주 이상했어요. 뭐, 나를 비롯해서 거기 들어간 사람 중에 정상은 하나도 없겠지만 그 여자는 좀, 너무, 특이했어요. 사람들과는 말 한마디 나누려 하지 않으면서 새들한테는 괴상한 말을 지껄여댔고,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날에는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마냥 병원 마당에 있는 나무를 껴안고 꼼짝없이 서 있는가 하면 개처럼 냄새를 잘 맡았고 가끔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했어요. 한번은 그룹별 합창대회 연습을 하고 있는데 그 여자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들어오는 건 분명히 봤는데 감쪽같이 사라진 거죠. 그룹 전원이 그 여자를 찾아 운동장, 식당, 침실, 화장실,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녀도 없었는데, 그 여자가 연습실 화분 옆에 조용히 앉아있는 걸 보고는 얼마나 이상한 기분이 들던지. 그제야 아까부터 거기 앉아있었던 걸 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사람들도 그랬어요. 생각해보니 아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고. 그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나는 그 여자가 주변 물체들에서 나오는 주파수를 알아내 거기에 자기 자신의 주파수를 맞춘다고 생각해요. 새들하고도 그 주파수로 통하는 거고요. 아무튼 그 여자는 확실히 이상했어요.”


모자이크 처리된 남자의 인터뷰가 끝난 뒤에 확실히 이상했다는, 비슷한 또 다른 사람의 인터뷰. 그리고 계속해서 나레이터. 그녀는 처음부터 이쪽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달랐던 것일까. 아니면 감당해야할 정신적 짐이 너무 컸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내부에 살고 있는 단이의 영혼이 조금씩 그녀를 점령했던 것일까. 어쩌면 사회와 차단될 수 있었던 치료감호소가 그녀에게는 가장 자유로운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외면 받아왔던 사회에 하고 싶었던 말을 바로 그 시기에, 그녀의 방식대로, 준비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그녀만의 초대형무대에서 발표한 단 한 번의 공연은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새들의 군무는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생방송으로까지 진행되었고 관객은 감동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녀를 따라 강물 속에 뛰어들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감동의 파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나레이터의 목소리는 보랏빛 볼록 유리를 끼운 것처럼 어지럽기만 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지만, 스스로의 목소리에 도취된 듯 불투명하고 얼룩져있으며 때때로 무거운 조약돌처럼 바닥에 가라앉는다. 나는 더 이상 볼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TV를 끈다. 처음부터 진실을 기대하고 본 것은 아니다. 단지 궁금해서, 나도 모르는 진실의 파편들을 신 선생님이 아니라 TV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해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늘 두려움에 쫓겨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나는 결코 자살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은 유전이 아니다. 유전은 비슷한 환경 속에서 비슷한 대응능력을 제공하는 것뿐이지 병 자체의 복사본을 물려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엄마라는 존재를 감싸고 있던 안개는 걷힐 것이다. 엄마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 좋던 싫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엄마와 함께 산다는 것은, 엄마의 윤곽선을 좀 더 뚜렷하게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일까? 안개가 걷히고 나면 엄마는 ‘왜’ 나를 버리려고 했던 것일까? 라는, 오랜 시간 동안 외면해 왔던, 가슴에 공룡의 뼈처럼 묻혀 있던 의문에 대한 답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궁금증조차 품지 않고 밀어내려 했던 것은 가슴에 도장처럼 찍혀있는 슬픔이고 외로움이었다. 어미가 새끼를 버린다는 것에 ‘왜?’라는 물음은 불필요한 것이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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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04 09:12
    No. 1

    열쇄와 약도를 찾아 본다

    열쇄
    열쇄 (熱殺)[열쐐]

    [명사] 한창 더울 때에, 그 더위를 초월하여 덥다고 할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는 일.

    열쇄를 열쇠로 바꾸셔야 할 것 같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04 10:49
    No. 2

    네 맞아요! 지적해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신경 안 쓰면 항상 틀리는 철자가 서너 개 있는데 그 중 하나입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04 09:25
    No. 3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 작품으로 보이기 시작하네요.
    제 실력으로는 최소 세 번은 읽어야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보물 같은 글을 연재해 주신 이웃별 님께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04 10:49
    No. 4

    읽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8.18 17:43
    No. 5

    진실은 저 멀리에...
    오늘도 한편 잘보고 갑니다.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18 20:47
    No. 6

    감사해요. 호랑이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04.18 22:40
    No. 7

    짠하네요. 이 모든 것을 안고 엄마 집으로 들어 갈 산야가 기대됩니다. 우현 건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쉽게 버리기 위한 장치인가요~?
    맞다면, 다른 에피로 대체 안 될까요~?! 헤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4.21 22:51
    No. 8

    장치이긴 한데 잃어버린 고리에서는 어느정도 필요악이라고 할까요?
    데조로님께서 불편함을 느끼시는 건 당연할 거에요. 쓰는 저도 불편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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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17 05:13
    No. 9

    인간과 주파수가 아니라 주위 사물과의 주파수가 더 잘 맞는다는 것은 고독한 삶일까요? 아니면 고요한 삶일까요?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17 23:42
    No. 10

    둘 다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희망님!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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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기억의 원소 #9 +6 16.02.07 342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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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5. 공중의 방 (2) +6 16.02.04 522 6 7쪽
22 기억의 원소 #8 +6 16.02.04 828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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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2. 진실의 파편들 (2) +10 16.02.02 433 7 26쪽
17 기억의 원소 #6 +10 16.02.02 517 7 10쪽
» 11. 진실의 파편들 (1) +10 16.02.02 382 7 24쪽
15 기억의 원소 #5 +8 16.02.02 405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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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9. 목각인형의 비밀 (4) +9 16.01.30 423 10 13쪽
11 기억의 원소 #3 +12 16.01.30 334 8 10쪽
10 8. 목각인형의 비밀 (3) +11 16.01.28 363 8 13쪽
9 7. 목각인형의 비밀 (2) +12 16.01.27 522 8 14쪽
8 6. 목각인형의 비밀 (1) +6 16.01.27 288 9 9쪽
7 기억의 원소 #2 +14 16.01.27 437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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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재회 (1) +11 16.01.26 429 12 21쪽
4 기억의 원소 #1 +10 16.01.25 535 11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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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새들의 군무 (2) +8 16.01.25 759 1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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