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6,058
추천수 :
276
글자수 :
205,656

작성
16.02.07 01:17
조회
341
추천
6
글자
10쪽

기억의 원소 #9

DUMMY

♔♔


이제 올 것이 왔다. 지금부터 네가 기억해내야 할 것, 그것은 네 스스로 걸어둔 마법이다. 너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저주를 받은 아이처럼 성장을 두려워했다. 유년의 그림자에 마법을 걸어 단단한 얼음 속에 가두어놓고 그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폐허처럼, 그것에 접근하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너는 이제 입을 열어 마법을 풀어야한다.



굴참나무는 네 손을 잡고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돌배나무로 너를 인도한다. 수많은 밤, 너를 악몽 속에 밀어 넣었던, 차라리 암흑 속에 눈감고 있었으면 좋았을 뻔 했던 사건 하나가 돌배나무 가지 끝에서 유령처럼 흔들린다.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가 있는 것을 좋아했다. 나무는 가장 쾌적하고 안정감까지 갖춘 특수한 형태의 비밀의 집이었다. 머리 위로 새들이 날아들고 바람이 발가락을 간질이고 나뭇잎들이 사그락 사그락 노래를 불러주는 곳. 수십 종류의 작은 곤충들이 나무껍질 사이에 알을 낳기도 하고 식량을 저장하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는 곳. 때로는 잘게 썬 나뭇잎 말고도 다른 곤충의 알을 훔쳐가는 개미들의 끝없이 긴 행차가 축제처럼 이어지고 호랑나비애벌레가 까만 눈을 빛내며 작은 이빨로 새로 돋은 잎을 갉아먹는 곳. 나무 한그루는 하나의 완전한 세계였다. 그리고 나무 위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멀리, 영혼의 근본 속으로 몰두할 수 있었던 비밀의 방이었다.


개울 건너 연자네 감자밭 옆의 잘생긴 돌배나무에 꽃이 활짝 피면 아이들은 취한 듯 돌배나무로 향했다. 돌배나무의 준수한 모습에 비해 수줍게 피는 흰 꽃의 은은한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꽃잎 사이로 보이는 냇물과, 자작나무들 너머 언뜻언뜻 보이는 고향집 지붕에 석양이 내려와 앉은 모양은 정말 사랑스러웠으니까.


그리고 한 아이가 나무 위에 앉아있다. 푸른 리본을 묶고 있었는지 붉은 리본을 묶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한 아이만이 거기에 앉아, 바람이 꽃잎들에게 속삭이는 먼 나라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돌배나무 꽃처럼 조용히 피어 있다. 해가 기울 무렵 돌배나무처럼 늘씬하고 예쁜 연자가 나무 밑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채, 아니면 더 나아가 그렇게 가까이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연자를 재미있게 지켜보면서 숨죽여 나무 위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석양이 냇가를 떠나버리기 전에 나무에서 내려온 아이는 새파랗게 질린 채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간다.


아이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저녁을 지으시는 할머니의 품속 깊이 파고들어 오한이 든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떤다. 너무도 심하게 떨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못하시고 아이를 품에 꼭 안으신다. 아이는 덜덜 떨면서 흐느낌도 아닌, 비명 소리도 아닌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묘한 음향을 입술 사이로 발산한다. 아궁이에서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와 눈을 찔렀지만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서야 아이는 딸꾹질이 섞인 흐느끼는 목소리로 ‘돌배나무에’를 연발한다. 다른 한 아이가 재빠른 동작으로 텅 빈 돼지우리 곁을 지나 텃밭으로 가 개울 건너를 내다본다. 저녁노을이 꺼져가고 있는 하늘 아래, 그 땅거미 밑에 뽀얀 빛을 내뿜는 돌배나무와 그 가지 어딘가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온다. 그게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자 오싹해진다.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연자네 감자밭이었으므로 연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상할 것은 전혀 없었다. 나무에 자신을 매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러나 꺼져가는 연자의 눈빛은 아이의 이마의 빛까지 꺼버리려 하고 있었다. 낮에도 악몽을 꾸다가 놀라서 깬 밤처럼 혼자 있지 못했다. 돌배나무의 흰 꽃이 연자의 혼령처럼 보여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자체를 끔찍스러워했다. 할머니 곁에서 잠들었을 때에도 몇 번씩이나 놀라 깨어 그곳이 연못이 아니라 방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잠을 자곤 했다. 아이는 하루 종일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 다른 아이는 연자가 매달렸던 돌배나무를 보는 것보다도 두려웠다. 연자의 혼령이 저 아이의 영혼을 데려가면 어쩌나 싶어 하루 종일 그 아이의 곁을 맴돌았다. 밤이 되면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열에 들뜬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이가 밤새 무사하기만을 기도드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들어버리곤 했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그쪽으로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숨을 죽이고 있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아무리 자신의 붉은색 리본을 달아줘도,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양말을 신겨줘도 앓아누운 아이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와 함께 별을 본 다음날 앓았던 것과는 달랐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한, 형체도 없는 공포가 아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끝없는 구멍 속, 깊고 깊은 연못 속으로 아이는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혼기에 접어든 예쁜 연자는 수치심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이라고 했다. 수치심이 무엇이기에 연자 스스로가 아름답게 빛을 발하던 눈빛을 꺼버렸는지 아이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다만 죽음의 실체와 대면했던 그 사건은 꿈과 현실이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상상속의 존재보다 현존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강하게 영혼을 자극할 수 있는지, 현실 속에 얼마나 많은 악몽들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탈피를 마친 차디찬 뱀처럼 매끄럽게 꿈속으로 파고 들어와 수많은 밤을 공포 속에 몰아넣는 현실 속의 악몽. 현실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 그토록 집요하게 비현실 속으로까지 파고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사건은 말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돌고래의 좌뇌와 우뇌처럼 하나의 의식으로 청이에서 단이로, 단이에서 청이로 자유롭게 옮겨갈 수 있었던 유년의 신비의 성이 얼마나 불안정하게 지어졌는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을 목격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는 시름시름 앓으며 그 검은 연못의 손을 잡으려 하고 있지만, 다른 한 아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재가 만들어준 쌍둥이 목각인형을 앓고 있는 아이의 이불 속에 밀어 넣어주었을 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발을 디딘 반쪽 뇌를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누워있는 반쪽은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연자가 빠져버린 죽음의 늪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대기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어느 날이다. 한 아이는, 그래, 다홍색 주름치마를 입었으니 단이라고 하자, 단이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마당으로 나와 하늘을 보다가 자작나무들이 유령처럼 흔들거리는 것을 보다가 다시 하늘을 보곤 한다. 나무들과 냇물, 냇가의 작은 조약돌들, 무리지어 채식지에서 돌아오는 새떼들, 무당개구리들을 비롯해 작은 산마을에서 공생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 하늘이 거대한 성문처럼 열렸다. 곧 비를 동반한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번개가 번쩍인다. 번쩍하고 빛난 후에 금방 우르르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재빨리 당제목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나무 아래에서 아이는 꼼짝도 않고 서 있다. 비바람이 거세지고 천둥이 친다. 아이는 굴참나무가 아주 가까이에서 치는 번개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안다. 공기의 흐름은 비와 바람에 뒤섞여 불규칙적으로 질이 다른 대기로 번지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굴참나무를 축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굴참나무 속으로 힘차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그 모든 형체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희뿌연 대기 속에 맹목적으로 뛰쳐나온 나무들의 영혼 같은 것이 비바람 속에서 회전하고 있는 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오늘 번개가 매우 가까이 올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아이는 방으로 들어가 누워 앓고 있는 아이의 머리맡을 지나쳐 장롱에 달린 작은 문을 열고 할머니의 패물 상자를 꺼내본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꿔 창고로 들어가 금속이라는 금속은 모두 찾아 다래끼에 넣어 물고기를 잡는 할아버지처럼 허리춤에 찬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다리를 건너 돌배나무에게로 간다. 금속 조각들이 든 다래끼를 뒤춤에 꼭 차고 나무에 올라간다. 다홍색 주름치마가 활짝 펴졌다 접혀졌다 하는 모양이 부채꼬리바위딱새 같다. 검푸른 공기의 흐름이 연기처럼 아이의 뺨에 와 닿는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체온조절중추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소름은 점점 더 심하게 융기되어 온 몸의 살갗이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빳빳하게 일어선다. 아이는 심한 냉기를 느끼며 나무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금속조각들을 매단다. 천둥번개가 온 하늘을, 온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대기는 본 적이 없다. 아이는 넋을 잃고 살갗에 돋은 소름처럼 대기에 돋아난 소름을 만져본다. 강한 비바람 속에 잠시 뛰쳐나온 나무들의 영혼이 만져지는 것 같다. 금속조각들을 타고 대기의 전류가 나무에 전해진다.


아이는 나무에서 뛰어내려 돌배나무의 영혼을 이끌고 힘껏 달린다. 인간이 닿지 못하는 영역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성한 이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확신에 차 있다. 번개가 번쩍하고 빛남과 동시에 굉음이 터진다. 아이는 귀를 막고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다리를 막 건너기 시작했을 때, 저릿저릿한 빛이 온 몸을 휘감았다. 아이는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돌배나무를 돌아본다. 처참하게 파괴된 돌배나무에 불꽃들이 수천 개의 횃불처럼 일렁이고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꿈결인 듯 눈을 감아도 보이는 이 불꽃들은 별이 폭발하고 난 뒤의 잔해라고 생각하며 아이는 불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불꽃의 목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똑같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12 11:34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12 15:21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8.30 12:22
    No. 3

    이렇게 아름다운 돌배 나무를 보면서 돌배주(酒)를 상상하는 나는 과연 뭔가?
    이래서야 어떻게 글쟁이라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30 15:28
    No. 4

    글쓰는 타입이 여러가지라는데 호랑이님은 술 한잔 하고 밤늦게 쓰시는 타입인가봐요^^ㅎ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27 05:24
    No. 5

    아이가 정말로 대담하네요. 불참나무도 번개를 두려워하는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28 00:22
    No. 6

    감사합니다. 희망님^^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굴참나무의 기억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2 기억의 원소 #10 +18 16.02.09 396 9 5쪽
31 22. 시간의 색깔 (3) +9 16.02.09 500 6 17쪽
30 21. 시간의 색깔 (2) +2 16.02.09 538 7 12쪽
29 20. 시간의 색깔 (1) +8 16.02.09 345 6 16쪽
28 19. 향기가 보여준 것(2) +10 16.02.09 575 6 13쪽
27 18. 향기가 보여준 것(1) +10 16.02.09 371 6 27쪽
» 기억의 원소 #9 +6 16.02.07 342 6 10쪽
25 17. 최초의 기억 (2) +6 16.02.06 537 6 17쪽
24 16. 최초의 기억 (1) +8 16.02.06 408 6 15쪽
23 15. 공중의 방 (2) +6 16.02.04 522 6 7쪽
22 기억의 원소 #8 +6 16.02.04 828 6 10쪽
21 14. 공중의 방 (1) +4 16.02.03 424 5 12쪽
20 기억의 원소 #7 +6 16.02.03 449 6 10쪽
19 13. 진실의 파편들 (3) +8 16.02.03 408 7 23쪽
18 12. 진실의 파편들 (2) +10 16.02.02 433 7 26쪽
17 기억의 원소 #6 +10 16.02.02 517 7 10쪽
16 11. 진실의 파편들 (1) +10 16.02.02 381 7 24쪽
15 기억의 원소 #5 +8 16.02.02 405 6 12쪽
14 10. 목각인형의 비밀 (5) +8 16.02.01 436 8 29쪽
13 기억의 원소 #4 +8 16.02.01 609 9 10쪽
12 9. 목각인형의 비밀 (4) +9 16.01.30 422 10 13쪽
11 기억의 원소 #3 +12 16.01.30 333 8 10쪽
10 8. 목각인형의 비밀 (3) +11 16.01.28 363 8 13쪽
9 7. 목각인형의 비밀 (2) +12 16.01.27 522 8 14쪽
8 6. 목각인형의 비밀 (1) +6 16.01.27 287 9 9쪽
7 기억의 원소 #2 +14 16.01.27 437 8 9쪽
6 5. 재회 (2) +10 16.01.26 438 9 15쪽
5 4. 재회 (1) +11 16.01.26 428 12 21쪽
4 기억의 원소 #1 +10 16.01.25 535 11 4쪽
3 3. 새들의 군무 (3) +16 16.01.25 405 11 17쪽
2 2. 새들의 군무 (2) +8 16.01.25 759 12 20쪽
1 1. 새들의 군무 (1) +14 16.01.25 1,345 18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