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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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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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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글자수 :
205,656

작성
16.01.2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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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6. 목각인형의 비밀 (1)

DUMMY


초록색 삼나무 숲으로 나를 데려가준 미류는 내가 불러낸 유령이었을까? 어린 시절 이후 이렇게 생생한 유령은 만나보지 못했다. 과거에 미류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의식이 엿본 소망이라는 이름의 생명력이었을까?

투통은 새벽녘부터 급속도로 물러가고 있다. 여전히 고통스럽긴 해도 이제 위액은 역류하지 않는다. 소화기관은 잠잠해졌다. 십이지장에 칭칭 감겨있던 압박밴드가 풀린 것이다. 다른 날에 비해 모든 증상들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이유는 그 덕분일까? 눈을 감아도 계속되는 잔상과 압통은 장애물임에 틀림없지만 이 단계에서는 생각이 가능하다.


나는 ‘호박마차에 예약을 할 것인가 재이와의 약속을 취소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아침을 맞이했다. 재이에게는 두통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두통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통 때문만은 아니다. 통증은 걷힐 기미가 보이고 곧 소화기관도 정상적으로 작동할 테지만, 어쨌든 두통은 어느 정도 정당한 이유거리이다. 조금 더 정직하게, 할머니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단 둘이서, 그것도 호박마차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자신 없다고 말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것은 속이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그런 눈치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재이는 약속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마 ‘괜찮아. 내가 자신을 갖도록 해줄게’ 라고 말하며 나를 붙잡을 것이다.


계속해서 침대에 머리를 댄 채 미류를 생각한다. 사실 간밤에도 끊임없이 미류의 얼굴이 머릿속을 표류하고 있었다. 교정의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나를 기다렸던 미류에게,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와 내 관자놀이를 감싸고 이마를 맞대고 등을 쓰다듬는 미류에게, 내가 한 말은 고작 다음에, 였다. 짙고 풍부해진 미류의 향기는 칼림바의 선율보다도 아름답고 애처로워 사실은 목을 끌어안고 뺨을 부비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길고 지루했던 기다림의 시간을 할머니처럼 무표정하게 쳐다보다가 다음에, 라고 말했다. 그것은 속인 것이다. 나는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스스로에게 속아 넘어갈 때가 있다. 꿈처럼 미류가 거기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불편한 표정으로 돌아서 버린 것이다. 미류 앞에만 있으면 그렇게 나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말하지 않아도 미류가 모두 알아서 해주기를 당연한 듯 바라고 있었다.

학교에서 미류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미류의 유령이 아니라 진짜 미류가 나타났는데, 나는 숨을 죽이고 서서 그 애가 나를 알아봐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솔직하지 못하다. 소심한 것은 솔직하지 못한 것과 같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한 결과를 불러온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두통은 결국 내가 키운 것이다. 감정의 불균형을 느끼고 나서 겪게 된 고통이니까.



재이에게 전화를 하려고 휴대폰을 꺼낸다. 휴대폰은 꺼져있다. 배터리를 바꾸고 휴대폰을 켠다. 메시지가 3건 와 있다. ‘산야 전화 안 받네’, ‘전화 좀 받아라’, ‘산야야 폰이계속꺼져있어서어쩌지 사정이생겨서 모처럼의저녁약속을 취소해야할것같아서 정말미안해 빨리연락이되어야할텐데’ 휴대폰이 꺼져있는 동안 재이가 계속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나는 재이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나도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졌어. 내가 먼저 초대해놓고 이렇게 돼서 내가 더 미안해.’ 이 문장을 쓰는데 8분이나 걸렸다. 휴대폰으로 문자를 쓰는데 익숙하지 않은데다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썼다 지웠다 하며 걸린 시간이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번개처럼 재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산야야, 미아안. 기적처럼 너와 저녁 약속을 했는데 취소해야 하다니, 내 마음이 얼마나 속상한지 알지?”


재이의 목소리는 부딪히고 있다. 전화상으로는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지만, 봄 날씨에 내리는 우박처럼 요란하고 차고 심술궂고 매우 낯설다.


“아, 괜찮아. 나도 몸이 좀 좋지 않아서. 내가 더 미안한 일이지.”


“어디 아퍼? 목소리가 좋지 않네.” 잠시 침묵.


“실은, 나, 신 선생님과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는 학생 중 하나야. 될 수 있으면 남들한테 그런 말 안하려고 했는데, 너한테는 말해도 소문날 일도 없을 거고. 뭐,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소문이라는 게 그렇잖아. 원래 이번 주 토요일 2시에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고 저녁시간은 비어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오후 5시로 약속시간이 변경된 거야. 한 달에 한두 번씩, 선생님의 시간에 맞추기로 약속했거든. 선생님이 워낙 바쁜 사람이니까, 그런 조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선생님의 연구에 도움을 주고, 대신 내 장래도 조금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리 나쁜 투자는 아니야. 그렇지? 그래서 아무래도 6시에 그곳으로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우리, 점심 때 만나자고 하면 너무 뻔뻔하겠지? 너 몸만 괜찮다면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데. 아니면 다음 주로 미루자고 하면 안 될까?”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한 일이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마 재이도 그럴 것이다.



머리카락과 입 안에서 나는 흙냄새를 맡으며 창가로 다가간다. 제라늄들이 그리운 추억으로 얼굴을 씻고 해맑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어제와 다르지 않지만 이미 어제와 같은 세상은 아니다. 문득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 이것은 강도가 높은 두통을 앓고 난 뒤에 보상처럼 따라오는, 한줌의 섬광과도 같은 감정이다. 비록 할머니에게는 벌떼의 모습으로 정체를 드러내긴 했지만, 햇빛에 반짝이며 부유하는 먼지들조차 이 순간만큼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저 아래, 아직 덜 걷힌 아침안개에 둘러싸인 실개천을 끼고 붉은 폴리우레탄 산책로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이어진 풍경이 부드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북쪽하늘에서 밀려오는 두터운 구름들은 역동적이고 건강해 보인다.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빛을 발하고 있다.

극심한 두통은 이렇게 나를 세상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진, 멀고 먼 나라까지 데리고 갔다가, 데리고 온다. 삶을 향한 애착이 봄날의 목련처럼 희게 피어나는 것을 본다. 내가 두통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순간의 투명도 때문이다. 마치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 인간을 위한 정화의식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방문을 열자 거실 가득 농축된 꽃향기가 강렬하게 밀려들어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조금씩 배달된 조문의 꽃다발들인데, 대부분 같은 아파트 사람들이 관리실에 맡겨놓은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관리인 우현이 고객관리실 입구에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내용의 작은 공지를 붙였던 것이다. 그는 할머니의 팬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도도한 아파트의 거주자들은 예의라는 이름의 사치를 좋아한다. 아파트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에 따라 자신들의 가치가 함께 높아지거나 낮아진다고도 생각한다. 유명인이었던 할머니는 아파트와 함께, 거주자들의 가치를 높여왔던 것이다.


꺾인 상태에서도 오래 가도록 처리해 놓은 꽃바구니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꽃다발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 꽃다발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대로 두어야 할지, 풀어서 꽃병에 꽂아도 되는지. 그렇게 나는 배달된 크고 작은 꽃다발들을 그 상태로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꽃다발들은 할머니께 배달되었다기보다는 상주인 내 것이다.


나는 갑자기 무슨 생각인가가 떠오른 사람처럼 진열장과 선반에서 꽃병들을 꺼낸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수납장에서 봐 온 작은 옹기단지와 파스타를 삶을 때 주로 사용하는 속이 깊은 냄비를 꺼내 물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도 모자를 것 같아 중탕용 냄비를 비롯해 꽃을 꽃아 둘 수 있을 만큼 깊이가 있는 그릇들을 꺼낸다. 줄기를 흐르는 물에 씻어내고 끝부분을 비스듬하게 잘라낸 후 꽃병에 적당히 꽂는다. 향기를 맡아가며 꽃들을 꽂았다 뺐다 하다가 꽃병에 꽂는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 어떤 꽃과 어떤 꽃을 함께 두면 그 꽃들이 서로 좋아하는지 하는, 나름대로의 기호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도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보초라도 서고 있는 것처럼 별로 싱싱하지 않은 꽃들이 집안 구석구석에 배치된 모양이 조금 기괴해 보이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4.21 07:20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4.21 11:27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8.07 13:26
    No. 3

    공개 댓글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한 편. 또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07 16:35
    No. 4

    호랑이님도 뜨거운 날씨에 건필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09 05:16
    No. 5

    극심한 고통도 일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처연해 보여요. 그리고, 꽃은 있는 그대로 꺾지 않고 보는게 더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생명이 흐르면서 살아 있는 것 같거든요. 또 올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16 00:33
    No. 6

    그렇지요. 희망님^^ 자연은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지요.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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