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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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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9
추천수 :
276
글자수 :
205,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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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2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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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
추천
12
글자
20쪽

2. 새들의 군무 (2)

DUMMY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완만한 곡선의 복도를 따라 좌측으로 병실들이 보인다. 할머니의 병실은 네 번째이다. 병실 문들이 마주하고 있는 복도 창가에는 분홍색과 노란색 베고니아가 교차로 놓여 있다. 수분을 가득 머금고 있는 줄기와 잎은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병원이라고 하는 특수한 장소에는 어느 정도 생기발랄한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병실 앞에 서자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한 뒤 문의 손잡이를 움켜잡는다. 할머니는 완강하게 닫혀있는 이 커다란 회색 문 너머에 계신다. 복도에서 낚아챌 수 있는 한줌의 활기도 이 문은 통과하지 못할 것 같다. 손바닥이 의식보다 먼저 팽팽하게 긴장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차를 두고서야 나는 병실 문을 여는 일에 일종의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 기분에는 회복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조금씩 소진해가는 할머니의 기력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포함되어 있다. 손바닥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손잡이를 돌린다.


“조심해!”


손바닥의 예지가 옳았다는 듯, 매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늘고 건조한 목소리가 마른 침엽수 잎처럼 바삭거린다.


“산야가 왔으니 이젠 살았다. 이 벌들 좀 봐라.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아까부터 벌들이 모여들어 이렇게 윙윙거리는데도 다들 모른 척 하고만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란 말이냐. 여기가 병원이 맞긴 한 건지 모르겠구나.”


할머니는 정말 벌 떼를 보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다. 할머니의 시선은 오직 허공에만 고정되어 있고 몸은 침대에 묶여있는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노여움마저 깃들어 부르르 떨고 있는 할머니와는 대조적으로 편안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아까부터 이러시네. 그래도 간호사를 부를 만큼은 아닌 것 같아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란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으시구나.”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40대 후반의 간병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중하고 침착하다. 시시콜콜 간호사를 부르면 그만큼 환자에게 투여되는 안정제의 양이 늘어날 뿐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자신은 더 편할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서 경찰에 신고를 해라. 벌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고, 어서.”


나는 공포로 굳어진 할머니의 시선을 따라 허공을 바라본다. 아무 것도 없는, 말 그대로의 허공이다. 요즘 할머니의 시각계는 다른 질서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중이다. 간병인의 셔츠에 달린 끈을 거대한 절지동물로 인지한다든지(그래서 간병인은 요즘 끈이 달린 셔츠를 입고 오지 않는다), 벽에 걸린 거울의 정체가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아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식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무엇이 있다고는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보이는 것을 실제와 다르게 인식하실 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하지는 않으셨다. 나는 다시 허공을 관찰한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무엇인가 있다, 거기에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저녁햇살이 있고, 약간의 먼지가 있다. 실내를 부유하다 햇빛에 노출되어 반짝이고 있는 먼지들.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벌들을 사라지게 해줄게”


블라인드를 내려 빛을 차단하자 짧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할머니는 빠른 속도로 현실을 향해 달려온다. 간병인은 할머니의 안색이 펴지는 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오늘은 3시 경에 차 감독님이 다녀가셨단다. 할머니의 컨디션이 좀 좋지 않아서 오래 계시지 않고 바로 돌아가셨다가는 금방 다시 오셔서 저 멋진 시클라멘을 두고 가셨단다. 싱싱한 것을 보고 있으면 기운이 날 거라고 하시면서. 정말 멋지지? 그럼 할머니와 얘기 나누렴. 나는 잠시 나갔다올 테니.”


간병인이 가리킨 곳에는 짙은 분홍색 꽃을 활짝 피운 시클라멘이 싱싱하고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예쁘다는 말보다는 정말 멋지다는 말이 훨씬 잘 어울린다. 간병인은 할머니께 곧 돌아오겠다고 말한 후에 회색 문 뒤로 사라진다.


“내가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게다가 시클라멘에서는 철가루 냄새가 난단 말이야."

“레몬소다 같은 시원한 냄새가 나는데, 뭐. 병실이 환해지니 좋잖아.”


할머니는 반박하는 대신 힘없이 웃으신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쓸데없는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신 모양이다.


“목이 마르구나. 물 한 잔만 주겠니? 벌들 때문에 뒷목이 뻣뻣하구나.”


침대를 약 45도 정도로 세우니 할머니의 상체가 꼭 침대만큼만 일으켜 세워졌다. 나는 작은 유리컵에 물을 따라 나뭇가지처럼 마른 할머니의 손에 쥐어드린다. 아기가 스스로 잘 하는지 지켜보는, 혹시 실수로 물을 쏟았다하더라도 나무라지 않을 엄마의 마음으로 할머니를 바라본다. 잔소리는커녕 할머니는 스스로의 몸도 돌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토록 청결했던 할머니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항생제의 부작용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이미 오래전에 윤기를 잃은 머리카락에서 상대적으로 생명력이 느껴진다.


“오늘이 며칠이지?”

“26일, 금요일.”

“그렇구나, 벌써. 우리 산야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생일이 뭐가 중요하다고. 할머니가 빨리 건강해져야지.”

“그게 쉬울 것 같지 않구나······. ‘호박마차’에는 이제 함께 갈 기회가 없겠지······.”


할머니의 목소리는 한겨울 헐벗은 나무처럼 쓸쓸하다. 그럴지도 모른다. 삶에 변화가 오면 습관도 변하는 법이다.


“뮤가 가지고 온 게 뭔지 보세요.”

“뮤?”

“응, 할머니가 전에 내 가방을 보고 뮤라고 했거든.”

“내가? 그럴 리가 있니.”

“그랬다니까.”


나는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가방을 열어 아까 관리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소포를 꺼내다가, 포장지에 붙어있는 라벨을 보고 깜짝 놀란다. 수취인 란에 선명하게 인쇄되어있는 이름은 내 것이었다. 나에게 소포라는 게 올 리가 없기에 당연히 할머니 것이려니 생각하고 이름도 확인해보지 않은 채 가방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어쩌면 관리인이 소포를 건네줄 때 포장지에 붙어있는 내 이름을 흘깃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완강한 편단은 큰 보폭으로 걸어오는 관리인의 압도적인 걸음걸이, 커다란 손, 그로부터 발산되는 동물적인 향취와 더불어 내가 무엇을 보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어차피 본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오, 우리 산야에게 누가 생일선물을 보낸 건가 보구나?”


내 생일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생일선물이라고 확신하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황갈색 크라프트지로 포장된 작은 상자에다 발신인에는 학교 주소가 인쇄된 라벨이 붙어있을 뿐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호기심과 기대감은 생일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밋밋해 보이는 상자를 화사한 색으로 덧칠하고 꽃무늬까지 그려놓는다. 나는 떠밀리듯 포장지를 벗기고 상자를 연다. 그게 누구인지를 확인해보기 위해 뮤처럼, 코를 가까이 대고 포장지의 냄새를 킁킁 맡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안에는 직접 만든 것처럼 보이는 올리브색의 작은 초가 들어있다.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있던 애플민트향이 공기 중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부풀어 오른다. 카드도 없고 생일을 축하한다는 작은 메모조차 없는 걸 보면 생일선물은 아닌 것 같다. 약간 거슬리는 시큼하고 복잡한 냄새가 애플민트향 속에 섞여 가라앉아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히비스커스의 말린 꽃받침 냄새와도 비슷한데 더 무겁고 텁텁한 것이 미적지근한 애플민트향과는 잘 맞지 않는다.

할머니는 학교 사람들 중에 감이 잡히는 사람이 없느냐,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을 보면 꽤나 수줍음을 타는 사람인가보다, 페퍼민트가 아닌 애플민트를 향료로 사용한 걸 보면 확실히 소극적인 사람인 게 분명하다(그것과 분리되는 시큼한 향은 맡지 못하신 게 분명하지만 할머니의 후각은 아직도 건재하다), 등등 마음대로 장황한 추측을 하신 끝에 정 가져가기 싫으면 병원에 두고 가라고 하신다. 내가 내키지 않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머니표 잔소리에는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못하는 사람의 물건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항목이 있었으니까.


“이 친구와 함께 ‘호박마차’에 다녀오면 좋겠구나. 자꾸 우리 산야 생일이 신경 쓰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날까지는 살지 못하려는 모양이다.”


할머니와 나는 매년, 생일이 들어있는 주말이면 ‘호박마차’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이름처럼 요리마다 청둥호박이나 호박꽃 등이 소스에 혹은 가니쉬로 빠지지 않고 나왔고 가게 안도 호박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했다. 손님들은 대부분 오랜 단골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오너는 오래전부터 할머니와 친구로 지내고 있는, 할머니의 전남편이다. 감독직을 맡아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자신을 ‘차 감독’이라 소개하는 호박아저씨. 그것이 할머니가 생일을 챙겨주시는 방법이었다. 아무리 생일 당일에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선물을 주고 나름대로 맛있는 요리와 생일케이크까지 먹어도 ‘호박마차’에 가지 않으면 생일잔치를 치루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빈번하게, 적어도 두 달에 세 번 정도는 들르는 그 레스토랑에.

할머니는 그리운 듯 ‘호박마차’ 이야기를 하신다. ‘작은 삼촌’이라는 별명을 가진 지배인의 유머감각과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드는 체중에 대해. 작은 실내에 커다랗게 늘어진 샹들리에와, 그 화려한 샹들리에에 비해 은은하고 편안한 조명, 5일에 한 번씩 바뀌는 테이블의 꽃, 그리고 동갑내기 친구이자 한때 남편이었던 호박아저씨와, 벽에 걸려있는 할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 또 레스토랑에 어울리지 않는 사뭇 진지한 음악에 대해서도. 그곳의 스피커는 아저씨가 살고 있는 2층 오디오와 연결이 되어 있어서 아저씨가 듣고 있는 음악이 고스란히 레스토랑에 흘러나왔다. 아저씨는 주로 아카펠라나 오라토리오 같은 종교음악을 들었다.


“호박마차는 최고의 레스토랑이야. 음악만 빼고 말이다.”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부족하지만 예전과 비슷한 활달함이 묻어 있다. 비록 병실에 묶여있는 몸이지만 할머니의 하루하루가 지금 같기만 하다면 좋으련만. 할머니가 조금만 더 건강하게 조금만 더 오래 사신다면 다른 변화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쓸 수 있을 텐데, 하고 좀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사이에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얕게 고인다. 할머니의 리듬은 다시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다. 원래 차분하고 감정을 표출하지 않기로 유명한 할머니셨다. 감정의 기복뿐만 아니라 외양에 주는 변화도 싫어해서 늘 비슷한 느낌의 옷이며 신발을 착용했고 극도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던 할머니. 그런데 이젠 스스로 깨달을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신다.


“내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습관처럼 반복하는 말. 무엇을, 누구로부터 용서받는다는 말인지.

‘유정휘 씨가 왜 자네를 면회에도 거의 데리고 다니지 않았는지, 왜 그토록 어머니로부터 자식을 격리시키려 했는지, 그 진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있나?’

머릿속에 신 선생님의 목소리가 뭉게뭉게 떠올라 나는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머리를 흔들어 부채질을 한다. 멀리 가, 멀리 가버려. 이렇게 심신이 쇠약해진 중에도 끈질기게 잡고 놓지 않는 물음에 대해 나는 내 영역을 넘어선 일을 해보려고 마음먹는다. 할머니가 입원하신 뒤부터 나는 좀 상냥해진 것이 틀림없다.


“용서받을 수 있지, 다 용서받을 수 있고말고······. 할머니가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는 걸······.”


“아니다······, 내가 잘못했지······”


할머니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가슴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무엇을 바로잡으려는 듯 시간을 들여 천천히 병실의 공기를 폐에 채웠다가 뱉어낸다.


“산야를 어미로부터 떼어놓은 것도 내가 잘못한 것이고, 산야를 하나밖에 없는 친구로부터 떼어놓은 것도 내가 잘못한 것이고, 산야를 애지중지한 나머지 씩씩하게 키우지 못한 것도 내가 잘못한 것이고······ 잘못한 게 많지······ 그래도······ 우리 산야 덕분에 할머니는 행복했다. 그 행복이 내 것이 아니라 청이 것이고 단이 것인 것만 같아, 내가 그들로부터 도적질을 해 온 행복인 것만 같아 늘 마음이 불편했다만, 그조차도 과분한 감정이었지······. 산야는 너무 보드랍게 느껴졌어······. 이 할미의 마음을 이해하지? 그래서 조금 더 강해지기를 바라면서도 깨질까봐, 비바람에 가지가 부러질까봐 노심초사해야 했단다. 하지만 연약한 건 이 늙은이의 마음이었을 뿐, 세상 누구보다 산야는 견고했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산야가 미려한 굴참나무였다는 비밀이 이제야 보이는 것 같구나.”


할머니의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매끄럽다. 식물을 좋아하지도 않는 할머니가 나를 투박하지만 당당해 보이는 굴참나무에 비유하는 것이 낯설다.


“실은 청이가 그 비밀에 대해 말해 줬단다. 산야는 2년에 걸쳐 열매를 익히는, 신중하고 듬직한 굴참나무라고 말이다······. 그 애는 가까이 지낸 적이 거의 없었는데도 나보다 더 우리 산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구나.”



나는 귀를 의심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가만히 듣는다. 할머니의 눈앞에 놓인, 의식이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는 꿈과 현실 사이의 세상을 그저 듣고만 있다. 할머니가 언제 엄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이것은 현실이라고 할 수도 없고 꿈도 아니며 그저 할머니의 의식의 일부분일 뿐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보지 않는 할머니의 눈빛은 신비에 가깝다. 마법사의 구슬처럼 탁하게 빛이 바랜 그 눈은 모든 노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보물이다. 꿈을 꾸는 눈빛. 아직 펼쳐지지 않은 푸른 미래를 향한 더없이 순진한 꿈이 아니라 지나간 것들에 대한 꿈. 이미 살아오고 겪은 것들에 대한 까마득한 회상. 때로는 후회나 아쉬움이 담겨있지만 체념이라는 더 강한 구속물질이 개입되어 지극히 순종적으로 변하는 몽환. 그것은 긴 세월을 끌어안은 사람들만이 꿀 수 있는 가장 찬란한 꿈인 것이다. 할머니의 눈은 그 꿈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 산야에게 마지막으로, 아마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부탁을 하나 해야겠구나. 이걸 내가 유언장에 썼는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아서 말이다. 착한 우리 산야에게 말이다, 엄마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할머니가 죽고 난 뒤에 혼자 살지 말고 엄마와 함께 지내라고 부탁하는 것보다 훨씬 안심이 돼서 그래. 이것이 내 마지막 욕심 이란다······. 내가 죽고 나면, 아니, 그 전에라도······ 엄마에게로 가, 엄마를 돌봐주겠니······ 할미의 마지막 부탁이다.”


할머니는 지금 인생에서 어떤 말을 해도 괜찮은 단 두 시기 중의 하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한 시기는 이제 막 말을 익히는 유아기이고 다른 한 시기는 사람에 따라서는 조금 더 일찍 찾아오기도 하는, 말을 잊어가는 노년기이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유언처럼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목소리는 대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기대할 뿐이다. 엄마는 아직도 정신요양원을 집처럼 드나든다지만 지금껏 혼자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몸과 더불어 마음까지 약해진 할머니는 아직도 내가 홀로 서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생각에 엄마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와서.

나는 두렵다. 내 별명은 겁쟁이였고, 별명처럼 나는 두려운 것이 많다. 할머니가 없는 생활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두렵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라는 식의 명쾌한 할머니의 잔소리가 없는 생활은 새벽이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긴 겨울밤처럼 두렵다. 나는 투박하고 속 좋은 굴참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 무책임한 사람이 나를 버리고나서 지어낸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그런 기분은 아랑곳없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할머니의 눈의 초점은 나를 지나 더 먼 곳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맞춰져 있다. 몇 개 남지 않은, 하얗게 센 속눈썹은 피부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머리가 이렇게 긴데 깎으란 말도 안 해?”


나는 끝없이 달아나려고만 하는 할머니의 의식을 현실로 불러들이고 싶어 그렇게 말한다. 할머니는 머리를 깎은 지 약 2주가 되면, 날짜를 계산하고 있는 사람처럼 단정치 못하다고, 미용실에 가야겠다고 잔소리를 시작하셨다. 나는 일주일을 더 견디다가 3주째가 되면 미용실에 가곤 했다.

그러나 이제 할머니는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신다.

머리카락이 목에 닿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다. 아무 것도 없는 휑한 목보다는 뭐랄까, 좀더 보호받는 느낌이다. 고개를 숙이면 머리카락 속에 나를 숨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작은 한숨이 나온다. 이젠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할머니의 잔소리가 그립기만 하다.



“우리 아가, 붉은 리본을 달면 예쁘겠구나······.”


할머니의 손길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지만 할머니의 눈빛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난다.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나를 넘어서서 아마도 누군가의 영혼에 닿아있다. 오래 전에, 붉은 리본을 달고 춤을 추었던 아이, 스스로 물속에 뛰어들어 삶을 마감해 할머니의 평생의 한이 되었다던 엄마의 반쪽, 그 아이의 영혼에 닿아있는 것이다. 할머니가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눈은 빛이 만들어낸 섬을 볼 뿐이고 섬에 나무가 자라게 하고 태양이 빛나게 하고 새들이 날아들게 하고 돌고래가 뛰어놀게 하는 것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경험이 만들어낸, 의식과 무의식이 뒤엉킨, 꿈인 것이다. 그러니 붉은 리본을 달면 예쁘겠다는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조금 충격을 받지만 그뿐이다. 할머니의 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너희들의 해맑았던 얼굴을 기억하고 있기에 내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구나······. 너희 두 자매를 처음 만났던 그날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날이었단다. 나의 일생을 통틀어서 말이다······.”


할머니는 화석처럼 침상에 누워 움직이지 않으신다. 이 침상은 금속 냄새가 감도는 병원의 침상이기도 하고 빛바랜 의식의 섬유조직으로 만든 기억의 침상이기도 하다.

창가로 가 블라인드를 조심스럽게 올리고 창문을 잠깐 연다. 생강냄새를 머금은 10월의 향긋한 바람이 병실을 한 바퀴 돌고 할머니의 이마에 내려와 앉는다. 주름진 두 뺨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인다. 이전의 건강한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왠지 전보다 더 강해졌다는 느낌이다. 육신의 무게를 점점 잃어 가볍고 투명해진 대신 좀 더 영적으로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창문을 잠깐 열었다가 닫고 잠든 할머니께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선다. 애플민트향이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따라 나오다가 이내 차고 단단한 병원냄새에 희석되고 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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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49 난정(蘭亭)
    작성일
    16.01.28 07:10
    No. 1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1.28 12:27
    No. 2

    감사합니다. 난정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4.16 23:20
    No. 3

    글의 성숙도로 볼 때 상당한 연배에 다다르신 분 같네요. 여성분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저의 추정은 잘 틀리더군요. ㅋㅋ

    문피아에 들어와서 읽어본 글 중에서 단연 최고의 글입니다. 정신적인 성숙함이 수반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글이네요. 이 멋진 글에 고개 숙여 존경심을 표합니다. 계속해서 읽어볼 것입니다. 다른 소설까지 모두 읽고 싶으니 지워버리지 마세요.

    전 원래 소설을 쓰던 사람은 아닙니다. 은퇴하고 나서 어린 시절의 꿈을 되새기며 조금씩 긁적거려 보고 있습니다. 이웃별 님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은 저의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4.17 00:27
    No. 4

    선생님. 부족한 글에 이토록 멋진 댓글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아직 미숙하고 배워야할 게 많아요. 오히려 많은 가르침 부탁드릴게요!
    사실 이 글의 반(청이 단이 이야기)은 저 역시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 쓴 것이랍니다.
    어느 곳이든 오래 산 곳이 고향처럼 되는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리움은 짙어지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셀폽티콘
    작성일
    16.04.21 01:07
    No. 5

    와, 진짜, 잘 쓰시네요.
    '복도에서 낚아챌 수 있는 한 줌의 활기도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관념을 형상화하는 능력도 탁월하시네요.
    일단, 이번 공모전에 출품하신 작품은 다 못 읽었는데 무조건 추천해 놓고 읽어야겠습니다.
    너무 아까운 글쟁이십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4.21 11:23
    No. 6

    셀콘님. 과한 칭찬 부끄럽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냥 열심히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사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03 04:42
    No. 7

    할머니가 호박마차를 좋아하는 것은 혹시 전생에 신데렐라?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03 18:29
    No. 8

    아하하 희망님 농담 재밌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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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22. 시간의 색깔 (3) +9 16.02.09 500 6 17쪽
30 21. 시간의 색깔 (2) +2 16.02.09 539 7 12쪽
29 20. 시간의 색깔 (1) +8 16.02.09 346 6 16쪽
28 19. 향기가 보여준 것(2) +10 16.02.09 575 6 13쪽
27 18. 향기가 보여준 것(1) +10 16.02.09 371 6 27쪽
26 기억의 원소 #9 +6 16.02.07 342 6 10쪽
25 17. 최초의 기억 (2) +6 16.02.06 537 6 17쪽
24 16. 최초의 기억 (1) +8 16.02.06 408 6 15쪽
23 15. 공중의 방 (2) +6 16.02.04 522 6 7쪽
22 기억의 원소 #8 +6 16.02.04 828 6 10쪽
21 14. 공중의 방 (1) +4 16.02.03 425 5 12쪽
20 기억의 원소 #7 +6 16.02.03 450 6 10쪽
19 13. 진실의 파편들 (3) +8 16.02.03 409 7 23쪽
18 12. 진실의 파편들 (2) +10 16.02.02 433 7 26쪽
17 기억의 원소 #6 +10 16.02.02 517 7 10쪽
16 11. 진실의 파편들 (1) +10 16.02.02 382 7 24쪽
15 기억의 원소 #5 +8 16.02.02 405 6 12쪽
14 10. 목각인형의 비밀 (5) +8 16.02.01 436 8 29쪽
13 기억의 원소 #4 +8 16.02.01 609 9 10쪽
12 9. 목각인형의 비밀 (4) +9 16.01.30 423 10 13쪽
11 기억의 원소 #3 +12 16.01.30 334 8 10쪽
10 8. 목각인형의 비밀 (3) +11 16.01.28 363 8 13쪽
9 7. 목각인형의 비밀 (2) +12 16.01.27 522 8 14쪽
8 6. 목각인형의 비밀 (1) +6 16.01.27 288 9 9쪽
7 기억의 원소 #2 +14 16.01.27 437 8 9쪽
6 5. 재회 (2) +10 16.01.26 438 9 15쪽
5 4. 재회 (1) +11 16.01.26 429 12 21쪽
4 기억의 원소 #1 +10 16.01.25 535 11 4쪽
3 3. 새들의 군무 (3) +16 16.01.25 405 11 17쪽
» 2. 새들의 군무 (2) +8 16.01.25 760 12 20쪽
1 1. 새들의 군무 (1) +14 16.01.25 1,345 1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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