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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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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6,055
추천수 :
276
글자수 :
205,656

작성
16.02.04 22:46
조회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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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7쪽

15. 공중의 방 (2)

DUMMY


나는 잠들었고, 꿈을 꾸었다. 버스를 타고 고향마을을 찾아가는 꿈이었다. 왜 고향이 그토록 먼 곳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꿈속에서 내가 찾아가고 있는 곳은 틀림없는 고향마을이었다. 발밑에 융단을 펼쳐놓은 듯 푸르고 폭신한 산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서 꿈은 시작되었다.

버스의 소음에 놀란 긴 꼬리의 검은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푸드덕 푸드덕 날아다녔고 길가에는 색색의 들꽃들이 어지럽게 피어있었다. 구불구불 비탈진 산길을 오르면서부터 메스꺼워진 속을 달래기 위해 창문을 열자 나뭇가지들이 버스 안까지 손을 뻗어 얼굴을 긁고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바람이 입을 통해 폐로 직접 들어와 숨이 막혔다. 먼 곳에서 미류가 연주하는 칼림바의 선율이 들려왔다. 그 선율은 미류의 목소리와 같은 보라색이었다. 그렇게 칼림바 소리를 들으며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오랫동안 달리고 또 달려 산을 넘고 있었다. 그 산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였고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였다. 엉킨 실타래처럼 길고 구불구불한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산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왔고 힘겹게 그 산을 다 넘고 나면 더 험하고 가파른 산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달려간 끝에 노을을 맞이했다. 산을 다 넘고 마을이 시작되는 곳, 냇물이 불타오르는 곳에서.

붉은, 붉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붉디붉은 저녁노을이 하늘과 산과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지붕들과 버스 속까지 스며들었다. 그토록 곱고 황홀한 색이 있을 수 있다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오묘한 색감들이 그 산자락에 녹아 흘러들어와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색이 아니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얼굴들 중의 하나, 혹은 세상이 심장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면 그곳이 바로 그 중심부가 아닐까.

버스에서 내리자 그곳에는 [산야방]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나는 세상의 심장부에서 눈을 떴다.



공중의 방에서 맞이한 새벽은 불면의 터널을 거의 빠져나와 선잠 속으로 배달된 어스름에 안도를 하던 그런 새벽이 아니다. 보랏빛 하늘 끝에 금성이 빛나고 새들이 쫑알거리고 아침이 걸어 들어올 수 있도록 안개가 길을 열어주는 그런 새벽이다. 나는 눈을 떴다. 시신경이 안구에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 나는 온 몸으로 눈을 뜨고 있는 중이다. 천정에 비스듬히 난 창문에는 청색에 조금 더 가까운 보랏빛 새벽하늘이 기웃거리고 있다. 이토록 기쁜 아침은 기억에 없다.


나는 한참동안 하늘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누운 상태에서도 벽에 낮게 뚫린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이 고스란히 보인다. 그렇다, 여기는 공중의 방이다. 창밖에서는 조용한 거리가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띄엄띄엄 어두운 지붕들 너머로 초록색 안개가 밀려오고 있다.


이게 다 뭘까? 혼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온기가 느껴진다. 온도도 습도도 적당한 것이 느낌이 아주 좋다. 식물들이 발산하는 복합적인, 청량한 것들이 머리에 깊숙하게 와 닿는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아래를 내려다본다. 식물들이 하나의 개체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공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집이라는 수피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생명체였다. 그 속에서 나는 몇 해의 봄과 겨울과 가을과 여름을 나고 있는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숨을 쉬고 있다. 거대한 나무속에 안전한 보금자리를 설계해놓은 것 같다. 엄마는 어떻게 이런 집을 생각해낸 걸까? 이 식물들이 어떻게 이런 모양으로 이 집 안에서 살아있는 것일까?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미류가 돌아간 후 무려 14시간이나 잠들어 있었다! 다른 세상에서 눈을 뜬 것처럼, 아니, 오랜 여행 끝에 고향에 돌아온 여행자처럼 잊고 지내던 안식에 젖어든다. 할머니의 죽음도, 새들의 불길한 군무도, 수면 위에 떠오른 붉은 리본도, 우현도, 신 선생님도 모두 잠깐 다녀왔던 낯선 나라의 풍경처럼 멀게 느껴질 뿐이다.


벽에 붙은 작은 테이블 위에는 마라카스와 목각인형이 놓여있다. 동그란 이마와 감각적인 입술을 가진 목이 긴 소녀상이다. 이것이었다······. 최초의 기억보다 더 먼, 억눌렸던 기억들이 깨어나고 있다.

그것은 꼭 붙어있는 쌍둥이목각인형도 아니었고 꿈도 아니었다······.

내가 누워 있는 머리맡에는 늘 이 목각인형이 있었다.


‘엄마인형이 지켜보고 있으니 눈 감아도 무섭지 않지?’


엄마는 마라카스를 아주 천천히 흔들며 밤꾀꼬리 같이 투명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굴러갈 듯하다가 멈추어 서는 소리, 물소리 같긴 하지만 드넓은 강물이 아니라 산을 타고 흘러나와 조약돌을 굴리는 소리로 ‘모든 생명을 하나로 엮어주는 이곳은 산이고 들이라네. 산짐승들이 눈에서 초록색 불을 끄면 산도 잠들고······.’ 하고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나는 수도 없이 그 노래를 들었다. 마라카스 소리는 맨발로 냇가의 모래를 밟는 소리 같기도 하고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내 몸을 잡아당긴다고 생각했다. 잠들고 싶지 않지만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버린다고. 나는 잠이 드는 게 싫었다. 눈을 감으면 어둠속에 나 혼자 갇히는 것 같아 무서웠다.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믿을 수 없는 걸. 잘 봐,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것들을. 소리들도 보이고 냄새들도 보이고 나무들의 조용한 숨결도 보이네.’


눈을 감아도 불을 꺼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공중의 방을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계단 입구에서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나무판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나무판에 칠한 바탕색은 빛이 바랬지만 오렌지색 꼬리를 뽐내는 멋쟁이 파랑새와 [산야방]이라는 글자는 환하고 선명하게 느껴진다. 산야 방. 나

는 뒷짐을 지고 소리를 내서 읽어본다.

산. 야.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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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기억의 원소 #9 +6 16.02.07 341 6 10쪽
25 17. 최초의 기억 (2) +6 16.02.06 537 6 17쪽
24 16. 최초의 기억 (1) +8 16.02.06 408 6 15쪽
» 15. 공중의 방 (2) +6 16.02.04 522 6 7쪽
22 기억의 원소 #8 +6 16.02.04 827 6 10쪽
21 14. 공중의 방 (1) +4 16.02.03 424 5 12쪽
20 기억의 원소 #7 +6 16.02.03 449 6 10쪽
19 13. 진실의 파편들 (3) +8 16.02.03 408 7 23쪽
18 12. 진실의 파편들 (2) +10 16.02.02 433 7 26쪽
17 기억의 원소 #6 +10 16.02.02 517 7 10쪽
16 11. 진실의 파편들 (1) +10 16.02.02 381 7 24쪽
15 기억의 원소 #5 +8 16.02.02 404 6 12쪽
14 10. 목각인형의 비밀 (5) +8 16.02.01 436 8 29쪽
13 기억의 원소 #4 +8 16.02.01 609 9 10쪽
12 9. 목각인형의 비밀 (4) +9 16.01.30 422 10 13쪽
11 기억의 원소 #3 +12 16.01.30 333 8 10쪽
10 8. 목각인형의 비밀 (3) +11 16.01.28 363 8 13쪽
9 7. 목각인형의 비밀 (2) +12 16.01.27 522 8 14쪽
8 6. 목각인형의 비밀 (1) +6 16.01.27 287 9 9쪽
7 기억의 원소 #2 +14 16.01.27 437 8 9쪽
6 5. 재회 (2) +10 16.01.26 438 9 15쪽
5 4. 재회 (1) +11 16.01.26 428 12 21쪽
4 기억의 원소 #1 +10 16.01.25 535 11 4쪽
3 3. 새들의 군무 (3) +16 16.01.25 405 11 17쪽
2 2. 새들의 군무 (2) +8 16.01.25 759 12 20쪽
1 1. 새들의 군무 (1) +14 16.01.25 1,345 1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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