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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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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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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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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2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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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3. 새들의 군무 (3)

DUMMY


이따금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이 일종의 피드백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싶을 때가 있다. 뇌의 뉴런들처럼, 각자는 별개의 세포들로 존재하지만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 같은 것들이 천억의 신경세포들을 연결하고 활성화시키듯 이 땅은 하나의 거대한 뇌처럼 움직이고 모든 생물들은 그들 사이의 어떤 전달물질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고. 그리고 이따금씩 나는, 미숙한 유아기의 그 믿음의 중심에 서서 현란한 경험을 하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오전까지만 해도 평범했다. 지하 마트 앞에 있는 빵집 주인의 상기된 뺨에는 다른 아침과 다를 바 없는 볶은 수수냄새처럼 고소하면서도 세련된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관리인 우현은 고객관리소에 앉은 채 등교하는 내 뒷모습을 끝까지 쫓았고 지하철에서는 두통을 자극하는 냄새들이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오전까지만 해도 교정에 상주하고 있는 참새 떼가 버드나무 근처에서 재잘거렸고 일찍 떨어진 낙엽들이 발밑에서 나뒹굴었다. 단과대 앞 산책로엔 공작초와 들국화 향기가 가득한, 평범한 10월의 평범한 날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는 빈 강의실에서 혼자 눅눅해진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었고, 분자생물학 선생님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장균에서 일어나는 DNA 복제 실수와 그 수선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상층부의 공기의 흐름이 변하고 있었다. 교실 안은 누런 빛깔의 안개가 스며든 것처럼 어둑해졌다. 비가 내리려는 것도 아닌데, 공기 중의 습도는 기껏해야 50% 정도인데 안개와도 같은 막이 빛을 적당히 차단시키고 적당히 투과시켜 햇빛은 어둡고 부드럽고 누렇게 빛났다. 복제 실수로 생긴 돌연변이 날씨처럼 기이했다. 창밖을 통해 보이는 구름은 점점 두터워져 난층운이 되었고 동시에 누런빛에도 점차 무게가 실려 바닐라 향처럼 짙고 텁텁해졌다.


여기까지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창가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강의실을 가로질러야 했다. 눈에 띄는 행동을 극도로 삼가는 내가 수업 중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일은 맨 정신일 땐 도저히 할 수 없지만, 이렇게 가끔 의식 속으로 파고 들어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어떤 목소리에 등을 떠밀릴 때가 있다. 그 목소리는 어쩌면 대기의 목소리이고 어쩌면 나무들, 혹은 새들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땅의 목소리, 혹은 그 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그런 종류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나를 교실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나무들도 잎을 바르르 떨며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다. 모든 냄새들이 짙고 밀도가 치밀해졌다. 해류에 맞춰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길을 만들고 방향을 잡듯이 이 냄새들의 기류가 나로 하여금 저절로 방향을 잡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소란스럽게 날아가고 있는 새들이다. 저들도 무엇인가에 끌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동 중인 새들의 무리는 다른 방향에서 온 일행들과 합류하면서 개체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다. 게다가 온갖 종이 섞여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내 발걸음은 시민공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멎었다. 방향을 바꿀 필요도 없이, 바로 이곳이 목적지라는 걸 두텁게 하늘을 뒤덮고 있는 수만 마리의 크고 작은 새들이 말해주고 있다. 각 방향에서 날아든 새들은 작은 실개천들이 합류하여 강을 이룬 것처럼 이곳에 어둡게 고여 출렁이고 있다. 마치 명계와의 경계에 놓인 아케론(Achéron)강처럼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 채 나는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지상은 온갖 새들의 그림자로 덮여있고, 분명 이 광경만으로도 저녁 뉴스거리이긴 할 테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무질서하게 모여들어 웅성이던 새들은 어느 틈엔가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이제 무엇인가가 시작되려고 하는 모양이다. 새들은 하늘을 오르내리며 몇 갈래로 나누어졌다가 합해진다.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 개막식을 위한 예행연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선두의 새를 쫒아 솟아올랐다가 흐트러지고 창공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내뱉어진다. 새들은 계속해서 점점 불어나 수십만 마리는 될 듯하다. 종을 넘어선, 새들의 군무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 새들은 판 뒤에서 자력으로 조절되는 철가루처럼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점차 조직이라는 말도 무색할 정도로 개체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 같다. 검둥이 뮤처럼 보이기도 했다가 형체를 잃어버리고 불길함만 간직한 저승사자가 되었다가 무성한 잎을 흔드는 노거수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낙엽들이 우수수 흩어지며 나무는 해체되었다가 다시 모여들어 정체해 있는 호수가 된다. 어느 틈엔가 호수는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 춤을 춘다. 하나가 둘로 나누어지고, 춤은 계속된다. 세포분열을 하듯 둘은 또다시 넷으로, 여덟로, 열여섯으로 자꾸자꾸 나누어진다. 이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잘게 부서져 무질서해보이지만, 그 중심에 무수히 많은 별들의 탄생을 품은 은하계처럼 서서히 소용돌이친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기이한 누른빛 하늘에서 전달되는 떨림을 반주삼아, 새들의 울부짖음은 장송곡이다. 중심에 검은 구멍을 품은 거대한 은하계가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치다가 다시 멀어졌다. 마지막 새가 날아오른 그 곳에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있다. 머리에 붉은 리본을 맨, 내가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그 여인은 날지만 못할 뿐, 새들과 상호호흡하며 새들의 군무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자신이 무엇인지도 잊은 채 춤을 추고 있다. 여인이 추는 춤은 혼신을 다해 내부를 표현하는 그런 춤이 아니다. 한계의 지점까지 응축되었다가 외부로 피어오르는 한 마리 새의 영혼처럼 너무나도 가볍고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분명 무아지경에 이른 몸짓이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는, 낯익으면서도 낯선, 언어이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에 상징처럼 달려있는 붉은 리본은 마치 여왕개미의 더듬이처럼 무리와의 소통을 도모하고 있는 것 같다.


서쪽하늘이 열리고 코로나에 둘러싸인 오렌지색 태양이 나타났다.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여인은 하늘로 날아오른다. 새들도 여인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여인이 단 날개는 이카루스의 것이었는지 태양 근처에서 수직으로 하강한다. 날아올랐던 새들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멀어진다. 군무는 갑작스레 막을 내렸다. 모든 목적을 이루었다는 듯.


잠시 후, 붉은 리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어지러움과 함께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오른쪽 눈도 왼쪽 눈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번쩍거림만을 본다. 그 빈 광장에는 붉은 리본만이 남는다. 마치 그 광장으로 직접 붉은 리본이 떨어진 것처럼 선명하다. 수축과 이완을 빠르게 반복하는 심장만이 내가 살아있다고 살아있다고 외치고 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길가의 포플러들이 다량의 안정제를 분사한 듯하다. 코의 점막을 통과하는 비릿한 냄새를 분명히 의식한다. 발걸음을 늦춰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호흡을 조절해본다. 이젠 공황장애가 아니라 눈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겉옷을 벗어들고서, 방금 전에 벌어졌던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떼어내기 위해 맹렬히 걷고 달린다. 두피가 산화될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언짢지만 차라리 몸에 신경을 쏟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군무를 지켜보는 동안 몸은 온통 새들의 배설물로 더럽혀졌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해 보려고 애쓴다. 아니, 생각이라는 말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고가 불가능하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온통 새들의 검은 장송곡과 붉은 리본이다. 나는 다른 장면을 꺼내려고 노력한다. 붉은 리본이 아닌, 누런 하늘에 새까맣게 모여든 새들의 무리가 아닌 어제의 일을, 그 전의 일을, 할머니가 건강하실 때의 일들을 생각하려 애쓰지만 기억은 물레방아처럼 끊임없이 새들의 군무와, 강위에 떠오른 붉은 리본을 실어 나른다.





결국은 이태원까지 왔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비에 내 몸은 흠뻑 젖어있다. 이마를 타고 얼굴로, 목덜미를 타고 등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차다. 셔츠가 몸에 엉겨 붙는다. 이 거리에서 미류의 어머니가 ‘올리비아’라는 옷가게를 하고 있었고 바로 이 거리를 기준으로 나는 이태원동에, 미류는 보광동에 살았었다. 이 거리는 할머니에 의해 금단의 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미류와 나는 종종 ‘올리비아’에 놀러가곤 했다.


그러나 발걸음이 멈춰선 곳에는, 그러니까 ‘올리비아’가 있어야할 그 자리에는 ‘이렐리’라는 이름의 아프리카 민속품이 가득 들어찬 카페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근처 어디에도 무대의상이 진열된 가게는 없다. 뱃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허전해졌다가 점점 이 카페가 미류의 어머니의 가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든다. 결혼은 한 번으로 족하다던 올리비아가 마음을 바꿔 아프리카와 무역을 하시던 그 아저씨와 결혼을 하고 함께 이런 카페를 차렸는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런데도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길 주저한다. 그녀와 미류가 보고 싶어 여기까지 달려 왔으면서, 생각했던 옷가게가 여기 없다는 것이 내 결단력을 흐리게 한다.


차양으로 보호된 작은 바깥 진열대에 쌍둥이자매목각인형이 있다. 갑작스런 전율은 아니지만, 의식의 깊은 바닥에서 서서히 무엇인가가 올라온다. 아몬드를 닮은 눈매와 칼세올라리아처럼 봉긋하고 요염한 입술의 쌍둥이자매는 하나의 발판 위에 서서 아무도 떼어놓을 수 없다는 듯 서로의 등에 단단히 손을 얹고 서 있다. 머리에는 하나의 커다란 받침을 이고 있다. 반들거리는 검은 흑단은 쌍둥이자매의 그윽한 눈매를 더욱 깊고 신비롭게 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손가락을 대본다. 모든 기억들이 거세게 소용돌이치며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마치 조금 전에 보았던 새들의 군무처럼, 밀려오는 엄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순서 없이 뒤섞인 기억들의 윤무가 영혼을 휩쓸어갈 것만 같다. 붉은 리본에 대한 공포감과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감정들이 내 안에서 동그랗게 물결의 파동을 일으키며 골이 깊어졌다가 상쇄된다.


목각인형이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분명 그 앨범을 보면서였다. 엄마가, 혹은 단이(나는 이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할지 모르겠다. 이모라고 부르는 것은 금기처럼 되어버린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므로)가 들고 있었던 쌍둥이목각인형을 보았을 때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아련해서 마치 거꾸로 되돌려진 시간 차원이 내가 알고 있는 공간 차원과 제대로 맞물려지지 않아 꼭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현실 감각이 결여된, 그런 종류의 그리움이었다. 이 쌍둥이 목각인형이 불러오는 애틋함은 내 기억 속에 지워지다 만, 아니, 각인되다 만 짧은 노래와 함께 선조체에, 저 본능의 밑바닥에 기록되어 있다.


‘······산도 잠들고, 알록달록······ 들도 잠이 들면 산야도 잠든다네.’


불확실한 이 기억이 환상이나 꿈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날의 번쩍이는 빛과 어둠에 대한 기억보다도 먼 기억일 것이다. 최초의 기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멀고 까마득해 의식조차 침투하지 못한 기억.

가게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온다. 나는 목각인형에서 손을 떼고,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아파오는 가슴을 누르며 내가 걸어온 곳과 반대방향으로 빠르게 걷는다.






전화벨이 울린다. 꿈결인 듯 꿈의 연장인 듯 먼 곳에서 희미하게 울리던 벨소리가 점점 커진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둠 속에서 파랗게 반짝이는 LED불빛을 향해 걸어가 수화기를 든다.


“산야?”

“아, 이모할머니······”

“그래, 괜찮니? 연락이 닿질 않아서 걱정 많이 했단다.”

진 할머니의 목소리는 젖어있다. 나는 순간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직감이 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져오는 진 할머니의 목소리는 가구나 식물들이 부족한 콘크리트 건물 안이라는 느낌이 든다. 흡수되지 못한 소리들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는 곳, 병원이다.


“네가 충격이 크리라 생각한다. 오후의 일은 나도 TV를 통해 보았단다.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할머니도······, 보셨겠군요?”

“하늘에 새까맣게 모여든 새떼들은 생중계로 방송되었단다. 물론 언니도 보았고 사망 시각도 그 시간이었다는구나.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청이는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고 하는구나. 비록 의식불명 상태이긴 하지만.”


나는 진 할머니께 지금 병원으로 간다고 말씀드린 후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새들이 몰려든 하늘 아래에는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었었다. 장비에 방수포를 씌워놓고 촬영을 하는 방송국 사람들도 보였고 휴대폰이나 디지털카메라로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장면이 방송에 나가리라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사건에 목이 말라있으니까.


창문을 통해 어두워질 줄 모르는 도시의 불빛을 품은 하늘이 비친다. 외계로 납치라도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기억의 간극은 벌어져있다.


아파트 입구에 카드를 대자 문이 열리면서 소포가 도착했다는 음성 메시지가 나왔고 나는 끔찍한 몰골로 고객관리센터로 갔다. 관리실 직원이 납작하고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도 심상치 않은 내 몰골을 살피고 있을 관리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소포를 보며, 포장지에 적힌 내 이름을 확인하며, 그리고 동시에 발신자란에 적혀있는 엄마의 이름을 보며 돌아섰다. 감사하다는 말도 잊은 것 같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와 무얼 했던가? 더 이상 놀랄 힘도 남아있지 않은 나는 소포를 현관 수납장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옷들을 벗어 힘겹게 애벌빨래한 뒤 세탁기로 가져갔다. 오늘 입었던 옷은 심하게 불결해서 그대로 세탁기에 넣을 수 없었다. 버리려고도 생각했지만 내가 입던 옷들이 더럽혀진 상태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 또한 탐탁지 않아 그렇게 했다. 그리고 다시 욕실로 들어가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머리는 세 번 감은 것 같다. 이때부터 피곤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욕조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극도의 긴장감이 풀어져서인지 몸은 최음제라도 맞은 듯 노곤했다. 목욕가운을 걸치고 나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오늘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더 이상 손가락 끝에는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소파에 앉았다. 세탁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삑삑거리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렸고, 그리고, 반수면 상태에 들어갔던 것이다.


숙면은 아니지만 필요한 휴식을 취했다는 듯 몸은 가뿐하다. 그래서 반수면 상태는 긴 밤의 끝에 겨우 도달한다 하더라도 신경까지 잠재우지 못하는 어설픈 새벽잠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불면증이 만성이 되어버린 이후 이런 잠은, 극히 드물긴 하지만, 극도의 긴장감이나 피곤함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선물이다. 잠과 각성 사이를 오가며 의식이 쳐 놓은 거미줄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허공에 매달린 자신의 껍질을 보는 것은 쾌락에 가깝다. 수면 위의 붉은 리본도 미류도 할머니도 나와는 상관없는 먼 행성에서 흘러나오는 왜곡된 영상이다. 어쩌면 내 허약한 정신이 현실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 몸이 알아서 반수면 상태라는 도피처를 제공해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운명도 이런 식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내 기억 속의 모든 페이지들과 일상의 예감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 고독에 절은 이마대신 순진무구한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어미로부터 버림받고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툴툴 털어버리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경이를 느낄 수 있다면, 끊임없이 나를 쫓는 두통과 불면, 분열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병원에 가기 전에 수납장 위에 올려놓은 소포를 열어본다. 열쇠와 약도가 들어있다. ‘이 집은 언제라도 산야의 집’ 이라는 초록색 글씨가 약도 위에서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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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6

  • 작성자
    Lv.3 쟈카
    작성일
    16.01.26 12:11
    No. 1

    묘사에서 세심함이 묻어나 있네요.^^ 계속 봐야겠어요 ㅎㅎ 추천 꾹! 선작 꾹! 또 올께요~홧팅!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1.26 12:26
    No. 2

    우와 감사합니다 ^-^ 열심히 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9 난정(蘭亭)
    작성일
    16.01.29 06:43
    No. 3

    화이팅!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1.29 11:51
    No. 4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4.17 09:50
    No. 5

    '두통을 자극하다'라는 표현이 저에게는 어색하다고 할까 모호하다고 할까 하여튼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지 않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4.17 21:07
    No. 6

    홍병유선생님. 소중한 지적 감사해요~!
    듣고보니 두통이라는 게 감각을 가진 무엇이 아니라 감각 그 자체이므로 자극할 순 없지요.
    주인공은 두통을 달고 사는 사람이라 그 두통이 더욱 심화된다는 뜻으로 표현하긴 했는데 좀 더 자연스러운 문장을 생각해볼게요^^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셀폽티콘
    작성일
    16.04.21 13:20
    No. 7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4.21 17:20
    No. 8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03.29 17:47
    No. 9

    빨간 리본....세리와 오페라에서도 나온 거 같은데....산야집이 오두막은 아니지요~?! ㅎ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3.30 00:08
    No. 10

    데조로님. 6회까지는 좀 더디게 읽힐 거예요. ^^;;
    그런데 그 빨간.. 리본과는 좀 다른 느낌이 아닌가요? ㅎ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03.30 06:30
    No. 11

    물론이죠~!
    걍~ 계속 나오길래 작가님을 찔러봤습니당~히히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3.31 22:56
    No. 12

    움찔움찔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04 05:05
    No. 13

    새들에 둘러 싸여 하늘로 올라가던 그 여자가 혹시 할머니의 영혼이었을까요? 또 와서 읽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04 23:57
    No. 14

    하늘로 올라갔다기보다 물에 떨어진 거예요^^ ㅎㅎ
    처음에는 인물 관계가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희망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토이월드
    작성일
    17.05.11 09:47
    No. 15

    글 읽으러 왔다가 공부하고 가는 느낌이랄까요. ^^
    단 한마디로 표현하면... "와! 정말 세밀한 묘사가 나와는 전혀 다르다."
    라는 느낌으로 읽고 있습니다.
    천천히 읽으면서 따라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완결내신 걸 이제야 따라가는 군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16 00:31
    No. 16

    해피드림님 반가워요^^ 가볍지는 않지만 즐겁게 읽으실 수 있다면 기쁘겠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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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기억의 원소 #8 +6 16.02.04 828 6 10쪽
21 14. 공중의 방 (1) +4 16.02.03 425 5 12쪽
20 기억의 원소 #7 +6 16.02.03 450 6 10쪽
19 13. 진실의 파편들 (3) +8 16.02.03 409 7 23쪽
18 12. 진실의 파편들 (2) +10 16.02.02 433 7 26쪽
17 기억의 원소 #6 +10 16.02.02 517 7 10쪽
16 11. 진실의 파편들 (1) +10 16.02.02 382 7 24쪽
15 기억의 원소 #5 +8 16.02.02 405 6 12쪽
14 10. 목각인형의 비밀 (5) +8 16.02.01 436 8 29쪽
13 기억의 원소 #4 +8 16.02.01 609 9 10쪽
12 9. 목각인형의 비밀 (4) +9 16.01.30 423 10 13쪽
11 기억의 원소 #3 +12 16.01.30 334 8 10쪽
10 8. 목각인형의 비밀 (3) +11 16.01.28 363 8 13쪽
9 7. 목각인형의 비밀 (2) +12 16.01.27 522 8 14쪽
8 6. 목각인형의 비밀 (1) +6 16.01.27 288 9 9쪽
7 기억의 원소 #2 +14 16.01.27 437 8 9쪽
6 5. 재회 (2) +10 16.01.26 438 9 15쪽
5 4. 재회 (1) +11 16.01.26 429 12 21쪽
4 기억의 원소 #1 +10 16.01.25 535 11 4쪽
» 3. 새들의 군무 (3) +16 16.01.25 406 11 17쪽
2 2. 새들의 군무 (2) +8 16.01.25 760 12 20쪽
1 1. 새들의 군무 (1) +14 16.01.25 1,345 1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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