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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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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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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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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656

작성
16.01.28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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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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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3쪽

8. 목각인형의 비밀 (3)

DUMMY


“예약 없이 그냥 왔는데, 혹시 자리가 있을까요?”

“물론이지!”

빵처럼 통통하게 부푼 손을 펼치며 지배인은 정중하게 자리를 안내한다. 오랜 단골임에도 한 번도 정중함을 잃지 않았던 지배인이 안내한 곳은 할머니와 늘 앉던 바로 그 창가자리이다. 테이블 중앙에는 노란 장미가 작고 투명한 유리병에 꽂혀있고 두 사람분이 세팅되어 있다.


“감독님이 혹시 모르니 네 자리를 남겨두라고 하셨어.”


지배인은 한 사람 몫을 치우면서 말한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났을 때,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면서 호박아저씨는 말했다.


‘그래도 주말에는 호박마차에 와서 식사를 하는 걸 할머니는 원하실 거다. 공교롭게도 네 생일과 할머니의 장례식이 비슷하게 겹쳤다만, 슬픔에 젖어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밝은 쪽을 택하는 게 바람직한 거다. 나는 할머니의 오랜 친구이고, 너는 나에게도 손자나 마찬가지라는 걸 잊지 말거라.’


결국 이곳에 왔다. 의외로 혼자 왔다는 사실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벌써 할머니의 부재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재이를 데리고 오려했다는 발상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지배인은 약간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카운터로 가 인터폰을 넣는다. 아저씨에게 알려주려는 것이다. 할머니와 예약을 하고 왔을 때엔 꼭 이렇게 했다. 예약을 하지 않은 날은 지배인이 주문을 받은 후에 2층에 인터폰을 넣었다. 이곳은 모든 게 정돈되어 있어서 마음이 안정된다. 오랜 기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단골손님 이상으로 지내왔던 덕분에 모든 예측이 가능하다.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실수할 확률이 적고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곧 수척한 얼굴의 호박아저씨가 내려왔다. 아저씨는 나보다 더 슬퍼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저씨가 말했다. 과거에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짧은 시간은 모두 잊었다고. 그러나 ‘전생’에 할머니와 부부로써 죽을 때까지 함께 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불교 신자도 아니고 딱히 윤회설을 믿는 것도 아니지만(웬걸, 아저씨는 경건한 카톨릭 신자이다), 할머니와의 인연은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수줍음이 많은 아저씨로서는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을 것이다. 5시 33분이다. 저녁으로서는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어제 먹은 것들은 모조리 토했고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통조림 아스파라거스 스프뿐이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배는 고프지만 아직 위에 부담을 주면 안 될 것 같아 샐러드는 생략하고 감자스프와 쌀 필라프를 곁들인 만새기 찜을 주문한다. 스프의 양은 적게, 소스에 식초나 레몬은 빼달라고 부탁한다.


“산야, 또 두통을 앓은 게냐.”


여전히 진지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묻는 아저씨에게 대답대신 조금 웃어 보인다. 아무리 내 미소가 창백하다 해도 아저씨의 안색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저씨는 짧은 한숨을 내쉰 후 주방에 주문을 넣고 나서 ‘그럼 천천히 맛있게 먹어라’고 말한 뒤에 다시 2층으로 올라가신다. 이제 디저트를 먹을 때 쯤 돼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잠시 후 따뜻한 곡물 빵과 함께 감자스프가 나왔다. 2/3정도의 양이었고 후추는 뿌려지지 않았다. 부드러운 맛이 혀끝에 닿고 위로 전해진다. 빵도 얼마나 맛있는지. 나는 밀가루와 통곡물, 이스트, 소금만 들어간 한결같은 빵으로 스프를 싹싹 닦아 먹었다. 두통이 물러간 뒤에는 이렇듯 감각세포가 주는 황홀한 기쁨에 젖어 기꺼이 삶의 예찬론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생선요리를 맛있게 다 먹었을 때, 줄곧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처럼 2층에서 아저씨가 내려왔고, 거의 동시에 재이가 나타났다.

나는 재이를 보고 미간을 조금 찌푸렸는지도 모른다.


“제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 봤는데, 너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이더라고.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네가 반응을 하지 않기에 들어와 봤어. 식사에 그렇게 집중을 하고 있는 거야? 여기 분위기, 이름만큼 굉장히 독특하구나.”


할머니와 식사를 할 때도 아저씨는 주문만 받은 후 2층으로 올라갔다가 메인요리를 거의 다 먹고 포만감이 느껴질 때에야 본격적인 인사를 나누러 다시 내려오곤 하셨다. 가끔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디저트를 함께 먹기도 했는데, 전생의 인연이야기도 달콤한 디저트와인을 마시며 해 주셨다. 어찌 되었든 사생활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형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그렇게 적당히 예의를 갖추고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호박아저씨는 헤어진 뒤에 오히려 오랫동안 친구사이로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만 할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아저씨는 이른 아침에 배달된 채소들이 신선한지, 수량은 맞는지 확인을 하듯 내 신상을 묻고 안부를 전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한눈에 훑어보는 것으로 모든 점검을 마칠 수 있을 만큼 내게 숙달되어 있으니까. 뜻밖의 재이의 등장이 아니었어도, 아저씨에게 필요한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이는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는 데 필요한 약간의 틈새를 이상하리만치 들뜬 열기로 막아버린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벌어진 틈새란 무척 중요한 것인데. 그 틈새가 있었더라면 나는 재이를 아저씨에게 소개했을지도 모른다.


아저씨는 느린 동작으로 재이에게 물과 메뉴판을 갖다 주고 내 메인 접시를 치우면서 치즈를 준비할지 묻는다. 발효식품의 독소를 해독할 수 없을 것 같아 오늘은 치즈도 포기하고 디저트로 내가 좋아하는 퐁당 오 쇼꼴라(fondant au chocolat)만 먹으려 했는데 재이가 먹겠다고 한다. 그리고 글라스와인을 한 잔 주문한다.


“요기는 간단하게 했거든.”


아저씨가 몸소 가져다 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덮는 재이가 밉게 느껴진다. 나는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 조금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그랬듯이. 아니면, 재이로부터 발산되는 냄새가 약간 변형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이는, 조금 주의를 기울이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좋은 냄새를 갖고 있다. 물론 재이의 냄새가 다른 사람에게도 좋게 느껴질지는 알 수 없다. 냄새만큼 주관적인 것이 또 있을까. 어쨌든 재이를 이곳으로 초대할 용기를 내게 한 것도 그녀의 냄새일 것이다. 식물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고유한 신호 같은 걸 발산하는데 그것들은 유동적이고 매우 다양한 표정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정확히 냄새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왼쪽 시력을 잃게 만든 내 두뇌 일부의 손상은 화학적 신호들을 분별할 수 있는 영역의 극적인 활성화로 보상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재이에게서는 기본적으로 뭐랄까, 코스모스처럼 싸한 냄새가 난다.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하고 가벼운 것 같기도 하지만 단단하게 빛나는, 해변의 모래알을 맨발로 밟는 듯한, 꺼끌꺼끌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냄새. 재이의 성격과도 비슷한 냄새.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르다. 평소의 재이와는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 코스모스처럼 싸한 냄새가 아니라 쑥처럼 싸하다. 쑥 냄새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냄새를 표현하는 말이 너무 적어, 쑥에서 나오는 약간 공격적으로 느껴질 만큼 화한 냄새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재이가 미워 보이는지도 모른다. 이 냄새들은 담배냄새라든지 향수처럼 몸에 덧입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합성해내고 있는 스스로의 부산물들인 것이다.


“유정휘 씨······”


벽에 걸린, 춤추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재이가 말한다. 할머니는 63세까지 안무는 물론 공연에 몸소 출연도 하셨던 분이다. 진 할머니께 거의 맡기다시피 하셨지만 당신의 무용연구센터를 운영하시며 동시에 모교에서 제자들을 키우는 일에도 힘을 쏟으셨다. 그러나 무용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할머니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더구나 벽에 걸린 사진은 할머니가 30대 후반이었을 때 찍은 것으로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절의 사진이었다.


“절제와 분출이 동시에 느껴지는 몸짓을 매우 좋아하죠.”


아저씨가 치즈와 와인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팬이시군요? 저는 최근에야 유정휘 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먼저 그분의 양녀에 대해 알게 된 다음에요. 며칠 전에 TV에서 떠들썩했죠. 인터넷에서는 아직도 그 열기가 지속되고 있고요. 정말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 무례한 손님이 괘씸한 나머지 호박아저씨의 윗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길고 하얗게 센 눈썹도 푸르르 떨린다.


“오,”


아저씨답지 않게 목에 힘을 주며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재이를 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 틀림없다. 재이의 거침없고 직선적인 성격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아저씨는 재이를 잘 모른다. 흔히들 재이의 첫인상은 세련되고 섬세한 느낌이라고 한다. 물론 외모를 두로 그렇게 판단한다. 아저씨도 재이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그 놀라움은 아마 더욱 클 것이다.


“기자양반인가? 그녀의 손자에게서 뭘 알아낼 거라도?”


마법에 걸린 석상처럼 아저씨는 굳어버렸다. 노려보고 있는 건 아니지만 미동도 없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저씨의 눈빛이 닿으면 아마 얼굴이 따끔따끔하고 화끈거릴 것이다. 재이 역시 내 얼굴에 시선을 꽂은 채 굳어버렸다. 아저씨가 주방으로 사라진 뒤에도 재이는 퍼즐 맞추기에 실패한 아이처럼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정말, 네가?”


나는 무심하게 오른쪽 어깨를 들썩일 뿐, 잠자코 2층으로 올라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는다. 할머니를 잃은 아저씨의 슬픔은 보기보다 훨씬 깊다.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올리비에 메시앙의 플롯 연주곡이 낮고 음울하게 흘러나온다. 할머니가 계셨더라면 ‘오, 차 감독, 제발 이런 음악을 들으며 식사를 하게 하는 일은 그만 둬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재이는 얌전히 있어주었다. 내게 귀찮은 질문 같은 걸 하지도 않았고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다. 할머니와 엄마 일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재이는 이상하리만치 긴장하고 있다. 아니, 긴장이 풀어진 상태인데 그 사실을 알고 스스로가 긴장을 유도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재이는 낯선 냄새들을 마구 합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재이에게 향초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억눌러야 했다. 네 옷과 머리카락에서도 비슷한 냄새가 나서,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 초를 보낸 사람은 신 선생님일 가능성이 크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장담한다. 그 초는 신 선생님이 보낸 것이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새들의 군무가 있던 날, 할머니는 병실에 그 초를 켜두셨다. 나중에 간병인이 말하길 할머니는 마치 ‘거기에 있는 사람처럼’ TV속 사건에 동참하고 계셨다고 했다. 앙상한 두 팔을 흔들고 발을 공중에서 버둥거리며, 거기에서 새들과 그리고 엄마와 함께 춤을 추었다고.


“먼지를 보고 벌이라고 하실 정도였으니 뭐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초가 의심스러워. 촛불을 켜 놓으니 내 기분도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았거든. 향기는 둘째 치고, 뭔가 수상쩍어. 오죽하면 중간에서 내가 꺼버렸을까.”


올곧은 간병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타버린 심지 근처에서 나던 그 냄새를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열에 변형된 거친 향, 아마도 무향무취로 분류될 그 냄새를, 애플민트향이라는 겉옷을 서툴게 걸친 그 냄새를 말이다. 할머니는 엄마가 강물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이미 숨을 거두셨다. 사망시각은 서류에 정확하게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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