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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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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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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9
추천수 :
276
글자수 :
205,656

작성
16.02.0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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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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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12쪽

21. 시간의 색깔 (2)

DUMMY


이렐리에는 누딘과,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 또래의 여학생, 그리고 올리비아가 있었다. 올리비아는 예전과 거의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산야, 정말 오랜만이구나. 쌍둥이와 정말 닮아서 깜짝 놀랐지 뭐니. 미류로부터 얘기 들었단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야. 미류는 또 역마살이 발동해 가출을 했지 뭐니. 이젠 성인이니까 내가 일일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섭섭하지. 전화라도 한 번씩 주면 얼마나 좋아.”


내 시간표를 모두 꿰고 있는 미류는 벌써 며칠째 수업이 끝나도 강의실로 찾아오지 않고 문자도 없다. 휴대폰까지 꺼져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누딘도 그렇게 말했다.


“지난 일요일에 왔을 땐 감기기운이 좀 있는 것 같다고 했거든. 그렇지만 휴대폰이 꺼져있는 것은 이상하네. 그 녀석은 감기가 아니라 감기 할아버지가 와도 휴대폰을 꺼놓지 않는데 말이야.” 그리고는 “혹시 군대에 가려고 작정한 게 아닐까? 저번부터 그런 말을 했는데. 학교에 다닌다고 딱히 장래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스스로 뭔가를 찾는 편이 낫다고 지겹도록 말했거든. 만약 학교를 그만두면 여기에 취직시켜줄 수 있느냐고 물어서 올리비아와 나는 어림도 없다고 그랬지. 그럼 군대나 가서 천천히 생각해봐야겠군, 그러더라고. 그렇다고 한마디도 없이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휴대폰까지 꺼 둔 채 잠적할 녀석은 아닌데. 아니면, 남산에는 가봤어?”


누딘은 설탕을 듬뿍 넣은 코코아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남산?”

“몰랐어? 미류는 방과 후에 주로 거기에서 연주를 했는데. 뭐,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만큼은 번다나, 하면서.”


누딘의 그 말이 내 가슴의 상처를 아프게 긁는 것 같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미류는 동그라미가 거의 다 지워진 칼림바를 아직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미류를 숲에서 꺼내줘야 하는데. 그것이 내 임무였는데.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생각해봐, 남산에 있으면서 며칠째 집에도 안 들어온다는 게 말이 돼?” 올리비아가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난 가출한 것보다 섭섭할 거야.”




어쨌든 이렐리에서 나와 남산을 향해 걷는다. 올리비아의 말대로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근처에 있으면서 집에 들어오지 않을 미류가 아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찾아보는 게 옳다. 미류는 그렇게 했을 테니까. 나는 미류의 마음을 안다. 어릴 때처럼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우리의 만남에 대해 나는 집중력을 이어가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더없이 행복한 기분이 들다가도 그 포근한 감정이 어느 순간 냉랭하고 허전하게 변하고 마는 이 유아적 변덕은 말 그대로 마음의 청사진이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우리의 우정이, 혹은 사랑이 추악한 힘에 의해 산산이 깨지게 되면 다시는 매끈하게 회복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들이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나는 오래 전과 똑같이 H호텔 앞에서 육교를 통해 남산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쏴아 하며 가슴을 시리게 하는 미류의 소리도, 미류가 연주하는 칼림바 소리도, 심지어는 새소리도 들을 수 없다. 너무나도 고요해 내 가슴은 텅 비는 것 같다. 신 선생님 집에 갔던 일요일 저녁부터 오늘까지 단지 닷새 동안만 연락이 없었을 뿐인데. 미류는 그 오랜 시간 여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애를 숲에서 꺼내줘야 하는 건 나였는데.


멀리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를 향해서라기보다는 텅 빈 공간을 수직으로 가로질러 허공에서 흩뿌려지는 분수처럼 숲 전체를 촉촉하게 적시는 소리였다. 멀리에서 휘적휘적 걷고 있는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왼쪽으로 가서 한참을 앉아있고 다시 일어서서 오른쪽으로 향한다.


“안녕하세요, 아재아저씨?”


서울 근교의 U시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저씨를, U시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남산에서 만나다니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아저씨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내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공원을 안내하는 이정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지나치고 만다.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아저씨는 정말 바쁜 것 같다. 하긴, 이렇게 공원이란 공원은 모두 헤집고 다닌다면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할 것이다. 정말 쓰레기를 줍고 청소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풀이나 나뭇잎, 낙엽 아래의 곤충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고 휘파람을 분다.


“이렇게 멀리에서 보니 반갑네요, 아재아저씨.”


나는 아재아저씨가 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비슷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이 꽃을 보며 혼잣말을 하듯 작은 소리로 말이다. 얼마나 걸어 다녔는지 밑창이 거의 다 닳아버린 신발에는 진흙이며 낙엽들이 묻어있다.


“안녕? 오른쪽 아이야. 오랜만이구나.”


아재 아저씨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갑자기 나를 똑바로 본다.


“오른쪽 아이라니요? 저는 산야예요, 산과 들이요. 기억나시죠?”

“하하하, 내 눈을 속이진 못해. 어디 왼쪽으로 빙글 돌아봐라.”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아저씨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아도 거역하기 어려운 법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왼편의 시야를 확보해둔 후에 왼쪽으로 빙글 돈다. 아저씨가 껄껄거리고 웃는다.


“거 봐라, 네가 오른쪽 아이가 맞잖니. 나는 너희들의 비밀을 알아. 왼쪽 아이는 어디 갔느냐?”


둔탁한 것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것처럼 멍해졌다. 눈에서 번쩍이는 빛은 귀울림으로 이어진다.


“아저씨, 아재 아저씨!”


아저씨는 호수를 바라보던 눈길을 거둬 나를 잠깐 본 후에 나무들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아저씨가 보는 것들이 정말 나무들일까? 잠시 그렇게 서서 나무 위에 앉은 햇살을 바라보다가 아저씨는 다시 휘적휘적 걷기 시작한다. 새들과 물결과 바람을 응시하며, 나뭇잎을 뒤적거리며, 땅에 낮게 피어났다가 씨앗을 준비하는 들꽃들에게 말을 시키며······ 느리고 몽환적인 걸음걸이로, 걷는다. 앞으로 가기도 하고 옆으로 비켜서기도 하고 다시 뒤로 돌아오기도 하고 왼쪽으로 가기도 하고 오랫동안 앉아있기도 한다. 아저씨의 발자국을 연결해 선을 그리면 개미를 따라 그은 선처럼 엉키고 꼬일 것이다.


할머니에게 아재 아저씨의 말을 전해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호숫가에서 춤을 추던 아이는 아마도 사고로 물에 빠졌을 거라고. 아마도 한쪽 시야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당한 사고일 거라고. 아니, 할머니는 벌써 그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엄마가 깨어나면 나도 아재아저씨처럼 말할 것이다. 왼쪽으로 빙글 돌아보라고. 그럼 엄마가 왼쪽 아이인지 오른쪽 아이인지 알아낼 수 있다.


나는 엉키고 꼬인 길을 따라 아주 조금씩 멀어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어떤 사람들의 발자취는 저렇게 꼬불꼬불하다. 직선으로 걷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저렇게 방향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미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어떤 모양이 나올까.



이 숲에서 할머니와 함께 검둥이 뮤를 산책시키던 중 올리비아가 먼저 할머니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그렇다, 바로 이 동그랗게 맞닿은 길 위에서였다. 이마에서 시냇물 소리가 나는 여자가 할머니를 부르며 다가오는 동안 나는 그 옆에서 걷고 있는 똑같은 이마를 가진 미류를 보았다. 할머니와 올리비아가 서로에게 미류와 나를 소개시키는 동안에도 나는 미류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심연의 바닥에서 아주 작은 기포들이 형성되는 걸 느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작고 투명한 알들이 태어나듯이. 그리고 그 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하나씩 둘씩 수면을 향해 올라와 터지기 시작하고 쏴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 탄산수의 뚜껑을 열었을 때와도 같은 소리는 분명 내 가슴속에서 들렸지만 나는 미류가 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가을햇살에 미류의 짙은 갈색 곱슬머리는 석양처럼 붉게 보였고 훤히 드러난 이마는 시냇가 바위처럼 단단하게 빛났다. 나를 향해 활짝 열린 미류의 얼굴을 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가슴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처음 만난 후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우리는 십 년을 함께해 온 사람들보다 더 서로를 사랑했다. 내가 겁이 많은 것, 머리가 아픈 것, 유령을 보는 것, 기분까지 파악할 정도로 냄새를 잘 맡는 것, 예민한 것, 소심한 것 등 유쾌하지 않은 모든 사실들을 알고도 미류는 내게서 달아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를 못되게 구는 아이들로부터, 그리고 겁 많은 내 자신으로부터 지켜주려 애를 썼다.

미류는 시도 때도 없이 초인종을 눌러댔고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할머니와 나 외에는, 아무리 자주 보는 사람이라도 따르지 않았던 뮤도 미류만큼은 잘 따르게 되었다.


미류를 만난 이듬해에 내 우뇌에 세력을 거의 확장시키지는 않는, 양성이랄 수도 악성이랄 수도 없는 종양이 있다는 진단이 내려졌을 때, 그리고 수술을 결정했을 때, 미류는 2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내가 입원한 병원에 같이 입원을 했다. 할머니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이 우리는 하루 종일 함께 지냈다. 함께 간식을 먹고 함께 낮잠을 잤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배가 아플 때까지 종일 웃어댔다. 얼마나 아름다운 날들이었던가.


갑자기 견고한 성벽이 둘러쳐진 아파트로 이사와 미류와 연락이 닿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미류가 매일같이 남산을 뒤지고 다니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류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조금만 시야에서 사라져도 나를 찾아다니던 아이였으니까. 내가 그 아이를 숲 밖으로 꺼내줘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젠 내가 찾아다니면 된다. 그렇다. 만약 미류가 보이지 않으면, 이젠 내가 찾아다니면 된다. 나는 미류보다 좀 더 냄새를 잘 맡으니까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류는 소리를 달고 다니니까.


이렐리에서 누딘이 선물로 준 쌍둥이 목각인형을 꺼내본다. 머리와 머리가 일곱 개의 작은 고리들로 연결되어있는 쌍둥이 남매상이다. 누딘도 몇 해 전에 올리비아에게 선물 받은 것인데 ‘이것이 바로 정령의 힘이 느껴지는 그것’이라고 했다. 하나의 나무토막으로 판 거라서 고리에는 봉합부분이 없다. 물리적인 힘으로 깨트리지 않는 한 고리가 빠지거나 한 쪽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 둘 다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데 남자아이는 양 손을 양 가슴에 하나씩 얹고, 여자아이는 한 손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다른 손으로는 길게 땋아 앞으로 늘어트린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그 손짓과 표정에서 나오는 생기는 목각인형의 것이기도 하고 원래의 나무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 쌍둥이 남매 상을 보고서야 나무의 얼굴을 찾아내는 것과 나무에게 가장 알맞은 얼굴을 주는 것이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류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 누딘이 말했다.

“그 애는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절대 떠나지 않아.”

나도 안다. 나도 알지만, 가슴이 왜 이렇게 아픈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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