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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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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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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1
추천수 :
276
글자수 :
205,656

작성
16.02.0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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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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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13. 진실의 파편들 (3)

DUMMY


혼자 남자 곧 잠이 올 것처럼 몸이 나른해진다. 물론 잠은 오지 않는다. 주머니에서 꽃다발 속에 있던 편지를 꺼낸다. 편지에는 짤막한 글이 적혀있었다.



산야 군.

그 향기가 모든 두려움과 고뇌를 잊게 하지 않던가?

일요일 오후에 자네를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네.

이건 정기적인 면담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수함과 약간의 악의적인 즐거움으로 신청하는 데이트라네.

결정은 자네가 하는 것이지만

나는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겠네.


- 살바도르 신



우현과는 다른 방법으로 신 선생님은 나를 두렵게 한다. 물리적인 힘을 가하지 않고도 나쁜 마법을 지닌 마술사처럼 기분을 상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할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할머니한테 물어보고, 된다면 되는 거고, 안 된다면 안하면 그만인, 그런 시절은 이미 끝이 났다. 물론 이런 경우엔 당연히 안 된다고 하실 거고, 할머니가 대신 전화를 해서 그 ‘쌀바되르인지 쌀되박인지’ 에게 호통을 치실 것이다.


신 선생님이 면담을 요청했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후각이 가져오는 각별한 체험에 대해 ‘없음’이라 적었는데도 신 선생님은 설문지만으로 나에게 흥미를 가진 것처럼 말했다.


아아. 그리고 그날, 신 선생님의 연구실로 가는 복도에서 미류를 보았다. 미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나는 한참동안 그의 뒷모습을 쫓으며 멍하니 서 있다가 얇은 금속판에 음각으로 새겨진 ‘Salvador Shin’ 이라는 이름표를 확인하면서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까지도 미류가 그와 면담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큼직한 벵골 고무나무 화분이 두 개 있었고 창문에 드리워진 철제 블라인드는 반 쯤 열려있었다. 연구실 안에는 식물에서 추출해 낸, 이미 향기의 고리가 풀려버린 냄새의 무덤을 합성머스크 향이 휘젓고 다녔다. 아마추어 조향사가 실습용으로 조합해낸 향수를 뿌려둔 것 같았다. 오른쪽 벽에는 세잔느의 그림이, 왼쪽 벽에는 장미목으로 만들어진 골동품 시계가 걸려 있었다. 신 선생님이 앉아있는 책상 옆에는 커다란 책장이 있긴 했지만 연구실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샐러리맨의 사무실처럼 느껴졌다.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갈색 유리병들이 신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향기일 것이라고 짐작케 할 뿐이었다. 아마도 의식과 향기의 상관관계 같은 것이 아닐까.


“이 방에서 나는 향이 뭔지 알겠니?”


신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앉으라는 뜻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그렇게 물었다. 블라인드를 통해 가로로 두껍게 썰어진 햇빛이 신 선생님의 등에서 이리저리 난반사 되면서 머스크 향을 부채질했다. 조금 전에 복도에서 맡았던 미류의 냄새가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향기를 타고 실처럼 가느다랗게 헤엄치는 걸 잠깐 포착했다가 놓쳤다. 미류가 신 선생님의 면담 상대였던가.


“머스크······ 냄새요.”


나는 큰 테이블 앞에 뎅그러니 놓여있는 의자에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처럼 어색하게 앉은 후에 재채기를 참으면서 머뭇머뭇 대답했다. 물론 다른 냄새도 났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강렬한 냄새를,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냄새를 짚어 대답했다.


“자네는 이 냄새가, 역겨운가?”


“......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무스콘을 비롯해 대부분의 향수 및 방향제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향수에 그럴듯한 수식어를 붙여 몸에 뿌리지만 그것들은 ‘음미’하기에는 너무 강렬하고 쉽게 상한다. 강한 휘발성 유기화합물들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지속적으로 맡다보면 후각세포가 극도로 피곤해지던가, 음식의 맛도 다른 사람의 기분도 파악하지 못할 만큼 감각이 무뎌져야할 것이다. 더구나 의식하고 맡았을 경우 사향이나 시벳 등 동물들의 생식선 냄새는 아무리 합성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희석했다 하더라도 썩 유쾌하지 않다.


“후각세포가 조금 더 발달된 일부 사람들은 여기에서 암모니아나 동물의 분비물을 연상시키는 냄새를 맡는다지만, 익숙해지면 자네도 좋아하게 될 거야. 냄새라는 게 그런 게 아니겠나? 무엇을 연상하느냐에 따라 동물의 생식선 냄새나 오줌냄새는 곧 즐겁고 달콤한 향기로 탈바꿈하는 거라네. 냄새야말로 강력한 연상도구지. 기억의 자취라고나 할까? 반갑네, 사냐군. 아니, 양이었던가.”


신 선생님은 나를 알고 있었고 첫 인사 또한 계획된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나는 속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 있는 이유는 성정체성 따위를 논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게. 사실은 오래전부터 자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 만나고 싶었네. 청이 씨의 아들은 어떤 아이일까, 늘 궁금했는데, 할머니의 걱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알겠군. 내가 어머니와 할머니를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는 말았으면 해. 나는 ‘그곳’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고 지금도 청이 씨를 가끔 만나러 간다네. 청이 씨의 병은 내 분야이기도 하니까.”


신 선생님은 놀라지 말았으면 한다고 했지만 나는 너무 놀라 가방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엄마를 알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본능적으로 신 선생님과의 사적인 접촉은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의 사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었는지는 몰랐다. 신 선생님은 설문지를 보고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재이의 말대로 처음부터 의도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을 가방 밑으로 숨겼다. 손가락에서 발생하는 푸른 열기를 들켜버릴 것 같아서. 내 떨리는 몸에 반응해 벵골 고무나무가 반사적으로 청량한 향기를 발산해 주었고 약하긴 하지만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병원에서 우연을 가장해 만나기를 기대도 해 봤는데 자네는 그곳에 오지 않더군.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네. 사생활에 개입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내가 궁금한 건, 사냐 군이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거야. 혹시 청이 씨의 특별한 기억력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지?”


나는 호기심과 절망이 뒤섞인 감정으로 신 선생님을 보았다.


“아니오.”


나는 어디까지 엄마를 닮은 것일까? 신 선생님은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그래, 역시 그렇구나. 그것이 네 탓은 아니겠지······. 그럼 혹시, 유정휘 씨가 왜 자네를 면회에도 거의 데리고 가지 않았는지, 왜 그토록 엄마로부터 격리시키려 했는지, 그 진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진짜 이유니 가짜 이유니 하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었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간헐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병력이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장기 치료에 들어간 이유는 바로 살인미수 때문이었다. 희생자는 자신의 어린 아들, 바로 나였다. 엄마가 자식을 산 채로 땅에 묻었다는 사실이 있는데 진짜 이유가 더 필요할까?

나는 그렇게 시적이지 않다. 철학적이지도 않고, 기억에 의지해 재현된 과거의 징검다리를 밟고 현재라는 강을 건널 뿐이다. 나는 그 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베일을 벗겨낸 듯 선명한 기억이 시작되는 곳도 바로 그 날이다. 그러니까 내 최초의 기억은 구체적이든 그렇지 않든 바로 그 날에서 시작된다. 유아기라고 하는, 빛과 암흑의 모호한 대비로 지루했던 긴 터널을 빠져나와보니 바로 그 날이었다.

나는 더러운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도 숨이 막혀 크게 울 수 없었다.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밝아져 눈을 꼭 감았는데도 울긋불긋, 무지개 색으로 부서진 빛의 파편들이 눈에 박혀 어지러웠다. 그것은 경찰차의 머리에서 단속적으로 흘러나오는 불빛과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열, 경찰견이 짖는 소리 등이 합해진 것이었다. 제복을 입은 경찰이 커다란 수건으로 나를 감싸 안고 병원으로 이송했다. 담배연기가 찌든 경찰의 몸 냄새, 제복 냄새와 자동차 시트의 냄새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구역질을 했다. 시큼하고 쓴 물이 흙과 함께 목구멍을 넘어올 때의 그 불쾌한 감각이 아직도 느껴진다. 그리고 어딘가 아주 밝은 곳으로 이송되었다. 날카롭고 강렬한 빛이 몸을 마구 찔러대는 곳, 아마도 병원일 법한 그곳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달그락거리며 이마에 와 닿았다. ‘세상에······ 세상에, 오, 세상에나······.’


신 선생님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의 깍지를 풀고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청이 씨는 나 같은, 틀에 박힌 사람과의 딱딱한 면담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 정확히 30분이 지나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곤 했으니까. 벽에 걸린 시계를 치웠는데도 마찬가지였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의 그림자를 재보면서 약속한 30분의 면담 시간을 읽어내는가 했는데 실내가 아닌 정원에서도 마찬가지였고 흐린 날도 그랬지. 청이 씨는 뇌 속에 시간이 반영되는 지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그녀가 기분이 좋을 땐 내 개인적인 신상에 관심을 가져주기도 했지. ‘노랑날개하늘나리가 오늘은 지난주보다 15도 아래를 보고 있다.’ 라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겠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거야.”


신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며 ‘아무도’ 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조금 웃었다. 웃으면서도 뺨에 돋는 소름은 어찌할 수 없었다. 오후에 강의를 하는 신 선생님의, 밖으로 뻗친 빛바랜 머리꽁지에 햇살이 비쳤을 때, 나는 가끔 시들어가는 노랑날개하늘나리 같다고 생각했다. 움직일 때마다 꽃가루가 우수수 떨어질 것도 같았다.


“청이 씨의 관찰력은 놀라울 만큼 뛰어났어. 머릿속에는 병동 내 환자들의 입원 및 퇴원 기록이나 의사들의 진료시간 리스트가 저장되어 있는 것 같았지. 반복된 만남과 표정을 통해 상대방의 습관과 성격, 마음까지도 읽는 듯 했고 예지 능력까지 발휘를 했으니까. 일기예보는 기상청보다 정확했지. 상식을 뛰어넘는 시스템이 뇌 속에 가동되고 있는 것 같았어······.”


신 선생님은 엄마에게 발현된 돌연변이 적 특수성에 도취된 듯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유정휘 씨는 청이 씨의 그런 면을 두려워했던 건 아닐까?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동물처럼 기분 파악을 잘하고 감정의 기복을 냄새로써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래도 좀 부담스럽지 않겠나? 그리고 엄마를 닮은 자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래서 자네를 면회조차 데리고 가려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래서 자네의 시선이 부드럽게 왜곡되도록 보호안경을 씌워주고 과잉보호를 하셨던 건 아닐까? 옳은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정휘 씨를 만나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 사실이네.”


“그러나 만약, 자네에게도 청이 씨와 닮은 특수성이 있다면 말이지, 그건 정말 큰 의미가 있는 거야. 통상적으로 개개인의 뇌는 유전과 환경에 반 정도씩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결과가 있지. 특히 청이 씨가 보여주는 그런 특수성은 유전된 사례도 없고, 보통 다른 부분의 결손을 대가로 얻게 되는 반쪽뿐인 선물인 예가 많아. 극단적으로 몰고 간다면 언젠가 수업시간에 얘기했던 ‘사방’들이 되겠지. 타인을 향한 애정이나 사회성의 결핍대신 청이 씨는 완벽에 가까운 기억력을 얻은 걸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압도적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그녀의 ‘결핍’이라는 것은 사방증후군의 ‘결손’과는 완전히 달라. 자네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무척 소극적이고 예민하긴 했어도 ‘바보천재’라 불릴 만큼 폐쇄적이진 않았어. 학교생활도 제대로 했고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몇몇 과목은 매우 우수했더군.

그녀의 특별함은 후각수용체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네. 사실 그녀는 냄새를 무척 잘 맡거든. 무슨 냄새든지 알아맞히니 신기할 따름이야. 향수병 뚜껑을 열면 그 속에서 나는 냄새들의 성분비까지도 대충 짐작해낸단 말이네. 마치 교향곡을 들으면서 그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악기 하나하나를 구별해내듯이 말이야. 기가 막히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에게도, 이런 표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청이 씨보다 훨씬 사회성을 갖춘 자네에게도 극도로 예민한 후각과 청이 씨에 버금가는 기억력이 있다면······. 우리는 좀 더 긍정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을 거야.”


“만약 자네도 그렇다면, 다른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예를 들면 불면증이라든지, 두통이라든지, 물론 자네의 궁극적인 관심사일 분열증까지 염두에 두잔 말일세. 확률이란 때로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지. 그건 슈뢰딩거의 고양이와도 같은 거야. 뚜껑을 열어 보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있는 것도 아닌 거지. 혹은 살아있음과 동시에 죽어있는 중첩의 상태.

그 때문에 유정휘 씨는 자네를 격리시키고 보호하려 한 거겠지만······ 그런 노력들이 효과적이라고 장담하지는 못할 거야. 어떤가, 우리 함께 그 부정적인 면을 다독여줄 해결책을 찾아보지 않겠나?”


내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신 선생님은 턱을 문질렀다. 상대방이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제안을 하는 것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듯. 그 꺼끌꺼끌한 감촉이 손가락에 닿는 것 같아 나는 가방 밑에 감춘 내 손가락들을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내가 알아 본 바로는 고등학교 때까지의 자네 학교 성적은 특이한 패턴을 지니고 있어. 학교생활에 별로 의욕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성적은 늘 상위권, 특히 역사와 외국어성적은 매우 뛰어나고, 그러면서도 문학성적은 좋지 않은 편이더군. 작문실력은 형편없었지. 보편적으로 역사나 외국어나 문학은 비슷한 계열로서 생각되기 쉬운데 다른 과목에 비해 문학만은 왜 그렇게 좋지 않을까?”


“그 대답은 이미 청이 씨를 통해 알고 있다네. 은유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이 세상의 문법에 맞지 않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거야······. ‘검둥이 뮤가 가지고 온 헤이즐넛’ 기억나나? 자네는 ‘고소할 줄 알았는데’ ‘온통 울퉁불퉁한 냄새와 석양처럼 쓴 맛이 나는’ 그 헤이즐넛 말일세.

자네의 작문답안지에 적혀있었던 그 헤이즐넛처럼, 보통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감각들의 시각적 형상화 같은 것이 자네의 세상 속에 포함되는 거지. 예를 들면 극대화된 야콥손기관을 통해 공기 중의 미립자들을 감지하는 파충류의 갈라진 혀처럼, 자네는 그것들을 감지하고, 볼 수 있는 거야.”


“나는 원래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것에는 별로 소질이 없다네. 하지만 자네와 청이 씨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건 사실이라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거야. 어떤가? 나와 주기적으로 만나 뭔가를 이루어 볼 생각은 없는지? 그것은 자네의 장래와도 연결이 될 수 있을 거야. 자네의 장래는 자네의 능력에 비해 그리 밝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나는 불쾌한 이 모든 기분들을 뒤로하고, 객관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엄마의 이야기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게다가 신 선생님이 말하는 엄마의 특징은 많은 부분 내 것과 일치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나도 모르는 나를 들여다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면담을 지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히 밝히고 자리를 물러나왔다. 우유부단한 내게 그런 결단을 하게 한 것은 미류였다. 미류도 그렇게 말을 하고 여기에서 나가 당당하게 빛을 향해 걸어갔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때 신 선생님이 발산하는 냄새는 약간 우현과 비슷했다. 너무 탁해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 냄새.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고 속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냄새, 어떤 동물이 그 물에 빠져 분해되고 있을지도 모를, 불길한 냄새가 신 선생님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신 선생님의 편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넣고 집을 둘러본다. 아까 진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방문들을 열어보고 방 안을 살펴보고 진열장 안을 들여다본다. 할머니의 집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먼지 하나 내려앉지 못할 듯 윤이 나는 마루, 가구들, 테이블, 유리문이 달린 진열장, 진열장 안의 소품들, 춤추는 도기 인형들, 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부엌 개수대, 식기들, 그리고 하얀 할머니의 피부가 있었다. 탄력 없는, 투명하리만치 하얀 할머니의 피부는 집안의 반짝반짝 윤이 나는 무생물들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무생물처럼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았다.


며칠 동안 많은 일들이 몰아치고 있다. 이런 걸 전환기라고 부르는 걸지도 모른다. 몸에 나타나는 2차 성징기의 뚜렷한 변화처럼 삶에도 그런 시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2차에서 끝나지 않고 어쩌면 3차, 4차, 5차, 그런 식으로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사람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나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초록색애벌레와 호랑나비가 완전히 다른 존재이듯 몸의 크기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가 내부에서 커다랗게 변하는 것이다.





진 할머니는 이사 가기 전에 엄마의 집을 먼저 둘러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집을 보지 않고 돌연히 갈 것이다. 정복자처럼,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침입자처럼. 머릿속으로 따져볼 틈도 없이,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어야만 내 결단이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미류는 가져갈 것들 중에서 당장에 필요하지 않은 것부터 조금씩 싸 놓아야 나중에 편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중요한 건 집을 창고처럼 파헤치지 않고 짐을 싸 고스란히 옮기는 것.’ 미류는 이삿짐센터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해 본 사람처럼 말했다. 미류의 말을 따라 당장에 필요하지 않은 책들과 옷을 챙겨두려 해도 적당한 가방도 상자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할머니가 입원해 계셨던 기간이 길었기에 갑자기라고 할 수도 없지만 정말 혼자가 되고나니 무력하기만 하다.


나는 미류와 진 할머니가 남긴 흔적을 보며 식탁에 앉는다. 미류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미류가 마셨던 잔을 만져본다. 잔은 이미 식었지만 온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벨이 울린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나는 현관문을 연다. 피자냄새를 풍기며 서 있는 미류의 목에 어린아이처럼 두 팔을 감는다. 미류가 다시 올 것 같았다. 왠지 그럴 것만 같았다.


“어째서 고객관리실에서 연락 없이 널 올려 보내줬지?

“여기 명성은 다 옛 말인 거지, 피자 좀 받아줄래?”

“두 판이나 샀어?”

“테이크아웃 시엔 1+1이래. 이모할머니는?”

“네가 간 다음에 바로 가셨는데.”

“그럼 둘이서 한 판씩 먹어야겠다.”


미류는 아마도 마트에서 구해 왔을 납작하게 접힌 박스들을 실내로 옮긴다.



“여전히 그림도 그리네?”

“응. 잠이 안 올 땐.”

“잠이 안 오는 날이 이렇게나 많아?”


스케치북을 들춰보던 미류의 눈길은 목발을 짚은 어릴 적 자신의 모습 위에서 멈춰있다. 병원에서 내가 뇌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을 무렵 미류도 다리 골절로 입원을 했었다. 처음에는 휠체어를 타고, 그 다음에는 목발을 짚고 매일같이 내 병실로 놀러 와 끊임없이 웃어대던 미류를, 나는 오랫동안 그리워했다. 시간에 탄력이 있어 소중한 시간 별로 그 길이가 정해지고, 그걸 잴 수 있는 시계가 있다면, 그 날들의 시계는 거의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긴 시간의 선상에 하나의 점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을 찰나도 그것이 영원에 가까운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추상화를 즐겨 그리는구나.”

미류는 머쓱하게 웃는다.

“느낌이 아주 좋은 걸.”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보는 방식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걸. 그것은 정상적인(어떤 의미에서는) 내 오른쪽 눈으로 보았을 때와 왼쪽 눈으로 보았을 때의 차이와도 비슷한 것이다. 오른쪽 눈으로 보면 사물들이 보인다. 빛을 반사하는 모든 물체들이, 형상을 구별 지을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이 보인다. 그러나 왼쪽으로만 보면 거기에는 텅 빈 공간만이 남는다. 의사는 시각야 일부가 손상되었기 때문에 안구에 이상은 없지만 보이는 것을 인지할 수 없는 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전보다 선명하게 공간속에서 반짝이고 너울거리고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수증기처럼 피어나는 색채들, 냄새의 미립자들, 흔적의 실루엣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냄새들과 소리들, 사물의 자취들이 그들만의 고유한 광채를 내뿜으며 마치 저녁노을이 천천히 밤에 흡수되어가듯, 청보랏빛 새벽안개가 밤을 깨우듯 그렇게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을 왼쪽 눈으로는 모두 볼 수 있다. 이 색채들은 아침의 비올라와 오후의 비올라가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주고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국지적 대기의 순환인지를 분간할 수 있게 해주고 사람들의 기분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림 속에 담고 싶었다. 사진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 미류의 다리에 입혀진 하얀 석고붕대위에서 햇살처럼 부서져 맴돌던 기쁨의 파편들, 그 정지된 시간의 광채까지, 4차원적 조형물을 2차원의 평면에 구축하고 싶은 것이다.


“이젠 정말 친구도 생기고 인기도 있는 거 맞아? 생일에 꽃다발을 받을 만큼? 정말 여자 친구도 생긴 거야? 그때 그 애지?”


미류가 과장되게 밝은 얼굴로 말한다. 그 과장된 웃음이 스스로를 서글프게 한다는 걸, 미류는 아직 모른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때때로 결과가 먼저 발생하고 나서 한참 있다가 원인이 뒤따라오기도 한다. 이런 감정의 뒤바뀜으로부터 시간역학을 생각해낸 게 아닐까 싶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본, 미묘한 색깔의 온기는 바로 지금의 과장된 웃음이 가지고 온 결과라는 것을 나는 지금 막 깨닫는다.


“그런 거 아니야. 그 꽃다발은······.”


그리고 그때 내가 느낀 슬픔은 그 온기 속에서 지금의 과장된 웃음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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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07 07:00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08 00:42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67 하늘소나무
    작성일
    16.08.20 23:48
    No. 3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21 00:42
    No. 4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8.24 22:10
    No. 5

    오늘도 23쪽을 읽고 남들과는 달리 공개 댓글을 남기고 갑니다. ㅋㅋㅋ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24 22:14
    No. 6

    ㅋㅋㅋㅋ 남들과는 달리 내용이 없어요!! ^ㅁ^
    감사합니다. 호랑이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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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20 05:13
    No. 7

    노랑 날개하늘나리 생소한 꽃이라 찾아 봤네요. 백합같아요. 그런데 넘 이쁘네요. 님때문에 제가 꽃을 하나더 볼줄 아는 눈이 생겼네요. 또 올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28 00:15
    No. 8

    네. 나리 종류는 백합과라 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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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참나무의 기억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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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기억의 원소 #10 +18 16.02.09 396 9 5쪽
31 22. 시간의 색깔 (3) +9 16.02.09 500 6 17쪽
30 21. 시간의 색깔 (2) +2 16.02.09 539 7 12쪽
29 20. 시간의 색깔 (1) +8 16.02.09 346 6 16쪽
28 19. 향기가 보여준 것(2) +10 16.02.09 575 6 13쪽
27 18. 향기가 보여준 것(1) +10 16.02.09 371 6 27쪽
26 기억의 원소 #9 +6 16.02.07 342 6 10쪽
25 17. 최초의 기억 (2) +6 16.02.06 537 6 17쪽
24 16. 최초의 기억 (1) +8 16.02.06 408 6 15쪽
23 15. 공중의 방 (2) +6 16.02.04 522 6 7쪽
22 기억의 원소 #8 +6 16.02.04 828 6 10쪽
21 14. 공중의 방 (1) +4 16.02.03 424 5 12쪽
20 기억의 원소 #7 +6 16.02.03 449 6 10쪽
» 13. 진실의 파편들 (3) +8 16.02.03 409 7 23쪽
18 12. 진실의 파편들 (2) +10 16.02.02 433 7 26쪽
17 기억의 원소 #6 +10 16.02.02 517 7 10쪽
16 11. 진실의 파편들 (1) +10 16.02.02 381 7 24쪽
15 기억의 원소 #5 +8 16.02.02 405 6 12쪽
14 10. 목각인형의 비밀 (5) +8 16.02.01 436 8 29쪽
13 기억의 원소 #4 +8 16.02.01 609 9 10쪽
12 9. 목각인형의 비밀 (4) +9 16.01.30 422 10 13쪽
11 기억의 원소 #3 +12 16.01.30 333 8 10쪽
10 8. 목각인형의 비밀 (3) +11 16.01.28 363 8 13쪽
9 7. 목각인형의 비밀 (2) +12 16.01.27 522 8 14쪽
8 6. 목각인형의 비밀 (1) +6 16.01.27 287 9 9쪽
7 기억의 원소 #2 +14 16.01.27 437 8 9쪽
6 5. 재회 (2) +10 16.01.26 438 9 15쪽
5 4. 재회 (1) +11 16.01.26 428 12 21쪽
4 기억의 원소 #1 +10 16.01.25 535 11 4쪽
3 3. 새들의 군무 (3) +16 16.01.25 405 11 17쪽
2 2. 새들의 군무 (2) +8 16.01.25 759 12 20쪽
1 1. 새들의 군무 (1) +14 16.01.25 1,345 1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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