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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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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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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글자수 :
205,656

작성
16.02.0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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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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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4. 공중의 방 (1)

DUMMY


도로를 달리는 내내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들떠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여행을 떠난다고 마음이 들뜨지는 않는다. 그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기분이다. 낯선 곳이든 그렇지 않은 곳이든 습관화되어있지 않은 장소에서 평소와 다른 하루를 보내는 것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도로를 달리는 내내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들떠있다. 어쩌면 들뜨는 기분과 불안한 기분은 종잇장의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기분이 좋게 불안하면 들뜬다고 하고 기분이 좋지 않게 들뜨면 불안하다고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활짝 열어놓은 차창을 통해 신선하고 쾌적한 바람이 몰려와 폐를 채우고 단조로운 칼림바 연주곡은 심장을 치며 세포 속에 파고들었다. 눈부신 가을 햇살에 잎을 반짝이며 서 있는 포플러들이 내 속에 들어오는 것 같다. 잔바람에 나부끼는 낙엽까지도 내 일부인 같다.


“나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정말 나무가 된 기분이 든다. 굴참나무까지는 아니더라도 길가에 자라는 작은 관목 정도는 된 것 같다. 차 안에서 맞는 바람은 전혀 부드럽지 않다. 미류의 센스 없는 운전 실력 때문인지 아니면 고물차(애정이 깃든 표현일 뿐 악의는 전혀 없다) 때문인지 혹은 둘 모두의 조화인지, 급커브로 몸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휙 기울어지기도 했고 무방비로 벌어진 입을 통해 들어온 바람에 숨이 막히기도 했다. 그렇게 좁은 차 안에서 바람을 맞기도 하고 먹기도 하며 나는 박자를 잊은 음악처럼 고동치는 심장을 느끼고 있다.


“나무에게도 심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조용한 바람에도 잎을 떨며 햇빛을 이리저리 실어 나르고 있는 창밖의 나무들처럼 나는 가느다랗게 전율하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일이, 이토록 감동적일 수 있다니. 몰랐다. 감각의 문 하나가 열린 것 같다. 이런 불안정한 감정의 분출은 몽상가들에게나 주어진 특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성이나 지각을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그 값어치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쓸모없는 꿈이라고 말이다.


“오늘 날씨 환상이다. 그치? 올리비아가 맞았어. 너는 좀 더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어야 하는 애야.”


바람이 미류의 목소리를 이리저리 휘감는다. 문득 살아있다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눈물이 흘렀다. 한 번도 자살이나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런 암흑의 영역에 속해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규칙적인 습관에 얽매였던 것도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어둠의 요소들과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마도 그래서였다. 그런 것들은 간과하고 모른척하는 것이 살아가기 수월했던 것이다. 어쩌면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미지의 것들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처럼 될까봐.


U시를 지나 길가에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자라고 있는 기분 좋은 도로를 따라 외곽으로 나오자 한적한 곳에 대형할인마트와 가구매장, 의류매장이 물류창고처럼 모여 있는 낯선 광경이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한 어떤 광고도 없이 그저 얌전히 거기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이런 곳에 대형 매장이 있다니 이상하다.”


“왜 이상해? 원래 대형 매장들은 도심에서 벗어난 외곽에 모여 있는 거야. 근처에는 아파트단지도 있고.”


“그래도 이상해. 지나가는 길에 필요한 뭔가를 구입하는 게 아니라 쇼핑을 하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와야 한다는 얘기잖아.”


“네가 너무 주상복합아파트에 길들여져서 그래. 세상에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있는 거라고. 너도 쇼핑을 위해 멀리까지 나와야 하는 삶에 곧 익숙해질 걸.”



거기에서 다시 2킬로미터 정도 더 가니 탁 트인 호수를 끼고 관광객을 위한 먹거리 골목이 늘어서 있는 마을이 나온다. 유황오리집, 누룽지백숙, 두부요리 전문점, 가마솥 곰탕, 활어회직판장.


“와, 맛있는 집이 많이 모여 있네. 신난다.” 미류가 말한다.


호수를 끼고 있어서인지 점심때가 다 되었는데도 마을 구석구석에는 안개의 흔적이 남아있다. 실제로 마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초승달처럼 양 끝 자락이 날씬한 호수의 수면 위로 아직 엷은 물안개가 흐늘거린다. 숲이 시작되었고 갈림길이 두 번 나왔다.

조금 더 들어가자 단정한 집들이 띄엄띄엄 박혀있는, 한쪽에만 플라타너스가 자라고 있는 골목에 다다랐다. 중심이 되는 굵은 골목을 기준으로 곁가지처럼 골목이 더 갈라져 있고 그 가지 끝에 제각각 하나씩 혹은 둘씩 집들이 매달려있는데 집들은 하나같이 호수 쪽을 향하고 있다.


길은 끝나지 않지만 집이 끝나는 곳, 집과 더불어 골목의 의미도 끝나는 그곳에 엄마의 집이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마당 안쪽에서 자라고 있는, 도토리까지 매달고서는 누렇게 물들어있는 굴참나무였다. ‘산야가 미려한 굴참나무였다는 비밀이 이제야 보이는 것 같구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엄마가 그렇게 말해주었다던, 그 굴참나무가 마당 안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낮은 담을 통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정원에는 덩굴나무가 벽에 붙어 자라고 있다. 가시들이 빽빽하게 나 있고 가지 끝에는 야생 장미나무 씨앗이 빨갛게 매달려있다. 계절을 잊은 듯 뒤늦게 핀 분홍색 꽃도 두어 개 매달려있다. 해당화다. 담벼락 아래 화단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들이 흩어져있다. 과거에 심었던 잔디는 대부분 벗겨졌고 마당을 뒤덮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게 자란 잡초들이다. 반투명한 볼록 유리 창문까지 포함해 창문이 유달리 많은 것만 빼면 지극히 평범한 주택인데도 기억 속에 이 집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큼 친근하게 느껴진다. 미류가 내 어깨를 꽉 잡는다. 그제야 나는 대문을 밀어볼 용기를 낸다. 대문은 잠겨져있지 않았다. 마당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뜻밖의 침입자들 때문에 새가 푸드덕 날아간다.


“······!”

미류가 내 어깨를 꽉 잡는다.

“집안이 아니라 숲속에 들어온 것 같잖아······.”


집안은 온통 식물들로 가득 차 있다. 나무들이 높은 천정까지 닿아 있고 바닥은 이끼 때문인지 폭신하다. 각 방향의 창문에서 뿌옇게 들어오는 빛은 식물들의 숨결과 어울려 초록색으로 흔들리고 있다, 너울거린다, 춤을 추고 있다······. 단풍나무, 측백나무, 산벚나무, 사철나무, 철쭉, 괴불나무, 그 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나무들과 덩굴식물들이 뒤엉켜 뿜어내는 숨결은 빽빽하게 집 안 가득 들어차 있다. 최소한의 공간을 활용한, 바 형식으로 된 오픈 주방만이 숲속에 고립된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밖은 한 계절이 끝나가는 중이지만 이곳은 계절이 없다.


미류가 벽 쪽의 낮은 둔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네 방 아니야?”


농담이었지만 나무 뒤에 움푹 들어간 벽 모서리에는 짚이 깔려있는 작은 공간이 하나 있다. 한 사람이 드러누우면 꽉 찰 것 같은 그 공간에서 어쩌면 엄마는 여우처럼 잠을 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나눈 공간의 다른 한쪽 편에는 아틀리에로 사용하는 곳이 있고 그 너머에 덩굴로 둘러싸인 작은 문이 하나 있다.


“저것 봐.”


미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커다란 캔버스는 나도 이미 보고 있는 중이다. 엄마가 화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떤 종류의 그림을 그리는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분열증 어린이의 그림이 인쇄된 달력을 본 적이 있었다. 추상적이지만(어쩌면 그 아이들은 세밀화를 그렸는지도 모른다), 자유로움이 박탈된 듯한 경직된 그림들을 보면서 엄마도 그런 종류의 화가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마도, 사회가 범죄를 저지른 가엾은 정신병 환자에게 개과천선하도록 열어준 길일 거라고만. 피부에 가시처럼 작은 돌기들이 돋아난다. 내 몸은 돌처럼 얼어붙는다. 엄마도 지독한 불면증으로 매일 밤 그림을 그리다가 이런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일까?


“이것 봐, 엄마가 분열증이라고 했니? 내가 보기에는 아니야.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정신에 결함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 반대지.”


산마을 저편에서 미류의 목소리가 들린다.


“전설이야······”

“······”

“이 그림의 제목.”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이 이런 것일까? 그림 속에는 녹색 계통의 산마을이 전설처럼 담겨있다. 녹색 계통이긴 하지만 그 색조의 폭이 너무 넓고 그 조합의 범위가 너무나도 방대해서 환상 그 자체였다. 미류와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광대노린재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형광색 색상 위에 가지각색의 녹색이 덧입혀진 것 같았다. 말문이 막히고 만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짝거리는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모자이크한 것 같다. 하나하나의 조각 속에는 녹색의 등딱지를 입기 전의, 원색이 살아있는 핵 같은 것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이것은 느낌인지 실제로 그러한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식물의 세포를 관찰할 때처럼 현미경으로 보아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유리알 하나하나 속에는 또다시 꿈 속 같은, 이제 곧 부화할 이야기들이 자신의 차례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듯 느껴졌다. 미세한 생명체들이 세밀한 움직임으로 꿈틀거리면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각각 너무나도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마치 혹스유전자로부터 명령을 전달받은 세포들처럼, 불규칙한 간섭무늬 속에 암호화된 피사체의 정보를 담고 있는 홀로그램처럼, 그 하나하나는 태양도 되고 나무도 되고 아기자기한 들꽃도 되고 작은 언덕도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왼쪽 눈과 오른쪽 눈에 비치는 두 가지 세상의 완벽한 조합이고 물질과 에너지, 시간과 공간의 합체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무엇인가가 빠져있다. 어째서인지 나는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토록 아름다운데도 아직 미완성인 채 이젤 위에서 완전무결하게 창조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림에 넋을 놓고 있을 때 미류가 팔꿈치로 나를 건드린다. 손가락으로, 기둥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간 담쟁이덩굴을 가리킨다. 내 시선은 담쟁이를 따라가는 미류의 손가락을 따라 천정을 가로지르는 대들보까지 갔다가 반대편으로 내려와 묘하게 감춰져있는 공중의 방으로 향한다.


“저기에 짐을 풀어야 할 것 같지 않니?”



공중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는 [산야 방]이라고 적혀있는 이정표가 걸려있었다. 나는 나무판에 그려진 파랑새를 손가락으로 더듬어본다. 오렌지색 꼬리를 활짝 펼친 파란 새는 빛이 바랜 채 오랜 세월 동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모든 생명을 하나로 엮어주는 이곳은 산이고 들이라네. 산짐승들이 눈에서 초록색 불을 끄면 산도 잠들고 알록달록 곤충들의 노래가 끝나면 들도 잠이 든다네. 산도 들도 잠이 들면 산야도 잠든다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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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08 08:45
    No. 1

    무언가 빠진 것 같은 그림,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요.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08 11:04
    No. 2

    ^^ 과연 무엇일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8.26 19:24
    No. 3

    오늘도 건필!!!! 날이 조금은 시원해져서. 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26 23:18
    No. 4

    감사합니다. 오늘 밤은 시원한 정도가 아니고 발이 시릴 정도네요^^
    호랑이님도 이제 기분 좋게 글 듬뿍듬뿍 쓰실 수 있겠어요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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