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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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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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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글자수 :
205,656

작성
16.02.0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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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기억의 원소 #8

DUMMY

♔♔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어느 날 아침이다. 아직 새벽 어스름도 채 사라지기 전에 아이들은 푸르스름하고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서리가 내려 하얗게 얼어버린 텃밭에 나와 있다. 텃밭과 경사진 언덕배기를 구분 짓는 경계면에 한 무더기의 돌 더미가 있다. 그곳에 할아버지가 새끼 돼지들을 묻고 계신다. 돌멩이를 하나씩 떼어내 그 아래 새끼들을 눕히고 지푸라기로 덮은 후 다시 돌멩이를 올린다. 돌멩이에는 하얀 서리가 보석처럼 얼어 붙어있다.


새벽녘에 할아버지는 새끼돼지들을 살피려고 돼지우리에 갔다가 그것들이 모조리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어제 저녁까지도 꼼지락거리며 젖을 빨던 분홍색 새끼돼지들이 단 한 마리도 살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미돼지가 새끼들을 낳기 일주일 전부터 할아버지는 돼지우리를 볏짚으로 꽁꽁 싸매고 천막까지 쳐 놓으셨다. ‘돼지들은 모성애와 인내심이 부족해 새끼들을 잘 돌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혹시 낯선 사람이 다가오거나 흥분이라도 하게 되면 자신이 낳은 새끼들을 물어 죽이기도 하니까 절대로 경계심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리고 며칠 전 12마리의 새끼들을 무사히 출산하자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며 따뜻한 죽을 만들어 어미돼지에게 먹이셨다. 수고했다, 이 녀석, 하시면서.


할아버지는 새끼돼지들을 모두 묻고 담배를 한 대 피우신다. 하얀 담배연기가 입김과 함께 새어나와 안개 속으로 침입해 안개 흉내를 낸다. 그래도 아이들은 입김과 담배연기와 안개를 선명하게 구별해낸다.




눈이 내린다. 이제 계절은 겨울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새끼돼지들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쌓였다. 씨앗이 된 들꽃들도 눈 속에 묻혀 버렸다. 나무들은 잠들었고 산도 침묵 속에 눈을 감고 있다. 산짐승들만이 바스락거리며 나무껍질을 벗기고 눈 속을 파헤쳐 먹을 것을 찾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산짐승처럼 바스락거리며 아재를 찾아다니고 있다. 찾아다닌다고 해 봐야 아재의 폐허 근처에서 눈덩이를 뭉쳐 주먹만 한 작은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눈 위에 발자국을 찍어대며 간간이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것처럼 아이들은 아재를 기다린다.


아재가 돌아오면 은여우바위에 있는 아재의 비밀의 집에 대해, 또 거기에서 본 동굴 밖의 세상과 하얀 얼굴에 대해 이야기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젠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은 깡이와 함께 커다란 진짜 눈사람을 만들어 ‘기다리는 사람’이란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여기, 높은 구릉마을의 겨울은 길고 춥기 때문에 한번 만들어 놓은 눈사람은 이듬해 봄까지 잘 녹지 않았다. 그래서 아재의 마당에는 눈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이를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아이들은 잘 알고 있다. 그 기다림이 주는 가슴 설렘을 말이다. 기다림은, 그것이 무엇을 향한 기다림이든지 간에 마음을 깊고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얼마나 아름다운 꽃을 마음속에 피우고 또 피웠던가. 아이들은 그리움을 소리로 변화시켜 외부로 흘려보내는 대신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소리로 변화된 그리움은 곧잘 슬픔을 남기지만 침묵함으로써 그리움은 꽃으로 피어났다.


아재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도 마땅한 나무뿌리를 발견하지 못했던가, 이미 은여우바위 속에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고 아이들은 속삭인다. 그렇게 말을 해야 안심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해야 그렇게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새끼돼지들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던 것이다. 울면 새끼돼지들이 정말로 죽어버릴 것 같아서. 내년 봄에 들꽃으로도 피어나지 못할 만큼, 아주 죽어버릴 것 같아서.

한겨울, 폐허라지만 불을 때면 그래도 방안이 따뜻하게 덥혀지는 집을 두고 아재가 산 속으로 들어갔을 확률은 높지 않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낯선 사람들이 데리고 간 게 아니기를, 아재 스스로 어디론가 잠적해버린 것도 결코 아니기를 아이들은 바랬다.


첫 서리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선을 긋던 날, 마을에 두 명의 낯선 사람이 나타나 아재를 찾아다녔다. 한 사람은 광택이 나는 검은 가죽잠바를 입었고 다른 사람은 촘촘한 체크무늬의 고동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아재를 가리켜 ‘사회적부적응자’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붙잡아 세우고 그런 사람이 이 마을 어딘가에 있지 않느냐고 묻고 다녔는데, ‘사회적부적응자’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은 두 이방인이 내뿜는 위압감 때문에 그저 모른다고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아재가 마을에 나타난 지는 벌써 1년 반이나 지났지만 마을 사람들은 한 번도 아재를 별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니, 아재는 정말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사람들의 생활범위 밖에서 살고 있었다. 거의 먹지도 않고 씻지도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사람들은 아재의 존재를 아예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폐허에 가끔 쉬러 내려오는 산짐승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은 아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처럼, 그들 또한 아재를 마른 감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까치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쳐버릴 것이다. 아이들이 비밀의 집에 앉아있을 때처럼 아재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걸어 다니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재가 보이지 않는 날이 길어지자 그 낯선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 아재를 잡아간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보다 깊은 곳에서는 아재를 잃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오래전부터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낯선 남자들과는 상관없이,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어느 날처럼 아재는 또 갑자기 사라질 것만 같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예감이 들곤 했다. 아재는 동굴 속의 하얀 얼굴과도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고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저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는, 아재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처럼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재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런 예감은 아재의 모든 것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구부정하고 마른 몸과 어두운 얼굴, 동물과도 같이 단순하고 강렬한 눈동자, 먼지와 때로 얼룩진 발가락들, 그의 뒷모습을 닮은 슬픈 그림자,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재가 걷고 있는 방향이 얼마나 아득한 곳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날이 조금 더 나중에 오기를 마음속으로 얼마나 바랬던가.



아이들은 아재를 기다리며 하고 싶은 말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재, 사실은 우리 은여우바위 속에 들어가 봤어.’

‘아재, 은여우바위 속은 춥지 않아? 거기에서 은여우들과 함께 지낸 거야? 토끼들도 만났어? 멧돼지도? 사슴은?’

‘아재, 이 눈사람들의 이름이 뭔지 맞춰봐.’

‘아재, 그 하얀 얼굴의 이름도 혹시 기다리는 사람이 아닐까?’

‘아재…….’



오랜만에 하늘이 활짝 열리고 먼 곳에서 태양이 차갑게 빛나는 오후이다. 아이들은 오늘도 아재의 마당에 나와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눈을 놀이상대로 삼아 놀고 있다. 눈의 결정들은 굴참나무의 목소리와도 비슷하다. 수없이 많은 육방정계의 결정체들 중 같은 모양을 한 것은 단 하나도 없으니까.


‘쉿’

깡이가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갖다 댄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깡이는 눈 덮인 산길을 휘적휘적 위태롭게 내려오고 있는 야윈 남자를 가리키고는 재빨리 부엌으로 들어가 찬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아이들은 차분하게 아재를 지켜보고 서 있다가 아재가 산기슭에 내려섰을 때에야 비로소 깔깔거리며 웃는다. 까치들도 까까깍 웃는다.


아재는 며칠을 굶은 산짐승과도 같이 쾡한 눈으로 마당의 눈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마루에 나무조각품 하나를 내려놓는다. 아이들은 아재가 내려놓은 이상스럽게 생긴 탈바가지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소금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가방이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완벽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던 것처럼, 삐죽삐죽한 머리카락과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파리한 얼굴의 탈바가지는 아재가 며칠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완벽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아이들은 아재가 왜 그토록 이상한 가면들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는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재는 나무들의 얼굴을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본래 감추고 있는 표정을 찾아내면 아재는 그걸 쓰고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출지도 모른다고 아이들은 생각한다. 부채꼬리바위딱새처럼 그렇게 황홀하고 멋진 춤을. 그리고는 진짜 나무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기다림의 나라에서 언어란 얼마나 낯선 것인가. 오랫동안 아재를 기다리며 생각했던 말들이 스르르 구름이 되어 하늘 위를 둥실 떠가는 것을 본다. 아재가 돌아와 방안에 눕는 순간, 모든 것들이, 바람과 햇빛과 나무들과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시간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기다리며 생각했던 말들이 가치를 잃고 마는 것을. 은여우바위도 산짐승들도 눈사람도 하얀 얼굴도 아버지처럼 모두 하늘로 훨훨 날아가고 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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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08 10:34
    No. 1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네요. 몇 번을 읽고 나니 그 여운이 남네요. 오늘밤 꿈에 훨훨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좋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08 11:07
    No. 2

    ^-^ 제 글의 여운으로 선생님께서 훨훨 나는 꿈을 꾸신다면 정말 얼마나 행복할까요?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8.28 21:18
    No. 3

    비오는 밤 다른 아재도 잘 보고 갑니다.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28 22:34
    No. 4

    감사합니다. 호랑이님도 건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23 05:16
    No. 5

    나도 할아버지와 같은 죽음의 경험이 있어요. 일곱마리의 고양이들이 전부 죽어 버려서 땅에 묻은 기억.... 말 못하는 짐승의 죽음이 사람 마음을 참 허전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죠.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28 00:20
    No. 6

    희망님도 고양이에 대한 그런 기억이 있으시군요. 정말 마음이 아프지요. 또 나이들어 거동이 불편한 우리 강아지를 봐도 동물을 다르게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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