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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6,065
추천수 :
276
글자수 :
205,656

작성
16.02.0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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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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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10쪽

기억의 원소 #7

DUMMY

♔♔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 쌍둥이들의 아버지는 먼 나라 여자와 결혼해서 이젠 돌아오지 않는대. 그 소문은 괭이밥처럼 노란 색이 아니었다. 읍내의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아무개네 아들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라서가 아니라, 그날의 유별나게 아름다운 밤하늘이 가리키던 암울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버지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먼 나라에서 가지고 온 선물을 안고 돌아올 것이라고 아이들은 믿고 싶었다.


밭에서 돌아오는 아버지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놀이에서 수선스럽게 빠져나가는 다른 집 아이들을 보아도 전혀 부럽지 않았던 이유는 아이들에게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뱃사람이었다. 뱃사람이었다는 사실 외에 아이들은 아버지의 직업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사는지에 관심을 가질 만한 나이도 아니었지만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더 멀리 이국까지 나갔다 돌아오는 일을 하는 아버지는 그 자체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이국적인 물건이 들어있을, 하얀 소금기가 묻어 있는 그 가방은 그 동안의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완벽한 이유를 제공해주었다. 어느 날 불쑥 돌아와 주무시고 계실 아버지의 뒷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기다림이라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소식에 관해 나무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개울물에 떠내려 간 목각인형처럼 아버지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상상 속에서도 아버지를 찾을 수가 없어, 가슴이 시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한 아이가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우연히 다홍색 셔츠를 입고 있어서 단이라고 불렀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이가 앓지 않았으면 청이가 앓았을 테니까.

‘단이가 무병을 앓는 거여, 무당을 불러 내림굿을 한판 벌여야지만 나을 병이라니깐.’ 용이 할멈이 부산스럽게 말한다. ‘유독 단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니께. 무당이 될 기회를 놓치면 큰 불행이 닥쳐올 것이여.’ 그것은 새들이 가르쳐준 게 아니다. 새들은 먼 장래의 일은 말하지 않으니까. 할머니는 그런 용이 할멈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신다.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이 강한 법이여.’ 하시며.


너는 단이의 머리맡에 앉아 생기를 잃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용이 할멈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단이가 어떤 목적을 위해 병을 앓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샤먼이 되기 위한 강신降神의 과정과 견줄 수도 있을, 사랑하는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보내기 위한 하나의 호된 의식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단이가 아픈 날이 길어지자 청이는 단이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게 한다.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주고 단이에게 파란색이 붉은색보다 조금 더 많이 섞인 깨끗한 셔츠를 꺼내 입혀준다. 머리를 손질해 주고, 그리고 청이는 단이의 셔츠를 받아 입는다. 이제 청이가 단이가 되고 단이가 청이가 된다. 이불 속에 들어가 앓는 것은 여전히 단이이다. 너는 여전히 단이의 머리맡에 앉아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에야 단이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청이는 단이의 손을 잡고 당제목을 향해 걸어간다. 깡이를 동반하지 않은 채 단호하게 걷고 있는 아이들의 발걸음에서는 결의마저 느껴진다.


한길에서 서편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당제목은 멀리에서 보아도 단연 돋보인다. 땅거미가 아직 나무 꼭대기까지 점령하지 못했던 터라 말라가는 건초색 햇살이 나무 위에 둥둥 떠 있다. 가까워질수록 외양에서 흘러나오는 제압할 듯한 힘 이면에 숨겨진, 오래된 것들이 주는 인자함과 부드러운 포용력이 아이들을 휘감는다.

시간을 축적해 놓은 듯한 수려한 외관은 주위의 배경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줄기는 커다랗게 나선을 그리며 뒤틀려 있고 두꺼운 회옥색 수피는 거북의 등처럼 갈라졌다.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땅에 닿을 듯 늘어져 있는 가지들과 과거 속으로 흘러간 사람들이 쌓았을, 부드럽게 마모된 돌단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 세월의 그림자를 한층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 돌단과 깊게 갈라진 수피에는 오랫동안 신성시 되었던 것이 주는 신비감이랄까 경건함 같은 것이 배어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저토록 비장한 얼굴로 당제목에 온 이유는 용이 할멈처럼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단을 굴리듯 마주 댄 두 손바닥을 부드럽게 비비며 단조로운 노래를 읊을 줄 알아야 했고 등을 동그랗게 말아 딱딱한 집을 짊어진 달팽이처럼 허리를 굽힐 줄도 알아야 했으니까.

어쩌면 아이들은 당제목에 하나님이 쉬러 내려오실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도 신성한 힘이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실 거라고, 황금빛으로 찰랑거리는 냇물이나 이른 아침의 푸른 안개, 낙엽위에 떨어지는 좁쌀 같은 햇살을 소중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이 부신 걸지도 모른다고.


두 아이는 나무 앞에 우두커니 서서 늘어진 가지들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들이 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어지럽게 흔들린다. 저녁 그림자가 나무 전체를 덮고 동쪽 언덕 아래 외따로 서 있는 집을 막 잠식하려는 순간, 한 아이가 거북의 등 같은 수피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아이의 차디찬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 눈물은 성숙한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절제된 무엇이었다. 무표정 위를 흐르는 한 방울의 고통. 내부를 향해 극단적인 수축을 일으켜 그 밀도가 무한대가 된 하나의 불가사의한 구멍이었다. 그래서 아이 자신이, 당제목과 당제목 주위에 쌓아 올린 고기古奇한 돌단과 온 천체가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그토록 고통으로 똘똘 뭉친 무엇이 존재할 수 있을까. 통곡소리보다도 애절한 침묵의 소리들은 날선 검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의 흔적을 가슴에 남기고 새처럼 멀리 날아간다. 새처럼 멀리 날아가는 것은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훨훨 날려 보내기 위해 당제목에 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산에 가도 귀를 기울일 수 없고 들판에 누워 있어도 향기를 맡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드디어 당제목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수억 개의 기공에서 숨결처럼 뿜어져 나오고 수피에서 파장처럼 전파되어 아이들을 감싼다. 주위의 모든 식물들이 일제히 나뭇잎들을 미세하게 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색채의 폭발물이 눈앞에서 터진 것 같이 강렬하고 역동적이다. 온통 식물들의 숨결로 뒤덮여있는 세상을 아이들은 눈을 감고 바라본다. 그것은 유기적인 언어의 결합이었다. 당제목은 쓰다듬듯 식물 하나하나를 에워싸며, 수많은 개체들과 동시에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식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유연함으로 하나하나의 개체에 맞는 다른 음색을 구사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다. 아이들은 거기에서 당제목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고, 보았고, 당제목의 숨결의 일부가 되었다. 그 속에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시간 속에 잠들어버린 모든 것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모든 생명들, 그 모든 것들을 연결하는 잊혀진 고리들이 들어있었다. 수천수만 년 후에나 보게 될, 지금 막 탄생하는 별들이 그 숨결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완전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깡이와 놀고 아재네 집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뿌리와 약초들을 들춰보기도 하고 가을 들판에 배를 대고 엎드려 수만 가지 가지각색의 향기를 맡기도 한다. 동틀 무렵부터 자작나무 숲길에 쪼그리고 앉아 노린재유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나뭇잎을 바라본다거나 떨어진 낙엽이 켜켜이 쌓여있는 발밑의 미시적 세계에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인다. 나무뿌리로 흡수되어 나뭇잎이 되기도 하고 열매가 되기도 할, 아이들의 몸속에 들어와 그 일부가 되기도 할, 그 순환과 회귀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자작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상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미역냄새를 맡아도 아버지가 타고 나간 배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아이들은 이제 알고 있다.

그렇다고 기다림 자체를 멈춘 것은 아니다. 당제목에서 아버지를 새처럼 훨훨 떠나보냈는데도 기다려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확신이 없는 기다림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이었고 아이들은 그 기다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울고 난 뒤에 뺨에 남는 눈물자국처럼 아버지를 슬픔으로 얼룩진 그리움의 대상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조용히 밤하늘을 올려다본다든지 아재가 만들어준 쌍둥이 목각인형에 집착하는 것으로 기다린다는 말을 대신할 뿐이었다. 목각인형이 디디고 있는 그 발판은 아버지라고 아이들은 생각했다. 이젠 ‘기다림’이 아니라 ‘그리움’이라 표현해도 좋으련만 아이들은 기다린다. 사라져간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가슴 아프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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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07 07:34
    No. 1

    그 모든 것들을 연결하는 잊혀진 고리가 들어있었다.\

    제목은 '잃어버린 고리'인데 '잊혀진 고리'가 처음으로 나왔네요.
    잊혀진 고리가 잃어버린 고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 찾아보겠습니다.

    기다림과 그리움, 분명히 차이가 있네요. 아이들은 아버지를 가슴에 묻을 준비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08 00:44
    No. 2

    지금부터는 이야기가 조금 빠르게 진행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8.26 02:06
    No. 3

    오늘은 수월하게 한 편 일고 갑니다. 여긴 비가 8월 25일에는 안 왔습니다. ㅋㅋ
    건필요!!!!!!!!!!!!!!!1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26 15:47
    No. 4

    자정 지나서 비가 왔다는 뜻인가요? ㅎㅎ 다행이네요!
    여기까지 따라오시다니 존경합니다.ㅋㅋ
    이제 좋은 계절이 왔으니 힘내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21 05:21
    No. 5

    아버지의 배신에 아이들은 증오를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워도 하겠지요? 그것이 부모와 자식의 질긴 연결 고리니까요.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28 00:16
    No. 6

    감사합니다. 희망님. 좋은 밤 보내세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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