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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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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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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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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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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0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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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22. 시간의 색깔 (3)

DUMMY


엄마의 집에 온 지는 며칠 되지 않았지만 나는 첫 날부터 이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근처에만 와도 녹색 빛이 감도는 뽀얀 광채 같은 것이 검둥이 뮤처럼 나를 알아보고 감싼다. 여기 마당에는 작년에 맺은 도토리와 올 해 새로 생긴 미숙한 도토리들을 한꺼번에 매달고서 풍성하게 서 있는, 내 나이와 비슷한 굴참나무가 있고 오래 전부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산야방]이 있다. 집 문을 열면 식물들에게서 발하는 빛이 내게 닿았다가 온갖 방향으로, 온갖 색채를 품고 튕겨나간다. 나는 그렇게 분산되고 부딪히고 합해지고 튕겨나가고 엉키는 빛들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집에 들어서자 엄마의 아틀리에 쪽에서 웅성거리는 기묘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과장을 좀 섞어, 나는 나무들 사이에 난 짧은 오솔길을 걸어 나무들의 성벽을 지나 엄마의 아틀리에로 들어간다. 아직 엄마의 집을 모두 탐험하지는 않았다. [산야방]과 주방과 욕실만이 내가 조심스럽게 드나드는 곳이다. 아틀리에에 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는 엄연히 엄마의 공간이다. 그리고 아틀리에에서 동쪽으로 난 작은 문도 아직 열어보지 않았다. 거기는 아마도 엄마의 침실이나 침실 겸 서재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조금 더 익숙해지면 저 방도 열어보고 청소를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한쪽에 놓인 작업대를 보자 지난번에 아재 아저씨로부터 돌려받은 가위 생각이 난다. 가방에서 가위를 찾아 서랍 속에 넣는다. 납작하고 긴 서랍. 나는 서랍을 조금 더 길게 빼 본다. 서랍 속에 보물이 들어있을 것 같은 상상은 이제 하지 않지만 가슴이 조금 두근거린다. 서랍 안에는 작은 앨범이 들어있다. 아무리 뭐라고들 해도 그 어머니의 그 딸이다 싶어 웃음이 나온다. 할머니의 서랍처럼 텅 빈 채 앨범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작은 앨범 외에는 아무 것도 흥미롭지 않다.


앨범을 펼치니 거기에는 기억 속에서 지워져있던 나의 유년기가 햇살을 가득 머금고 웃고 있었다. 여자아이처럼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한쪽에는 빨간 리본을, 다른 한쪽에는 초록색 리본을 달고, 어디에서나 웃고 있었다. 식물원에서, 서울대공원처럼 보이는 어느 공원에서, 분수대 앞에서, 호수에서, 꽃밭에서······ 튤립이 가득 핀 어느 꽃밭에서······. 햇살이 가득 내려앉은 내 머리카락과 활짝 웃는 얼굴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가장 쉽게 열어볼 수 있는 작업대 서랍 안에서 나의 유년기가 행복에 겨워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어떤 따뜻한 생물이 몸 위를 기어가는 것처럼 간지러워 두 팔을 비빈다. 뺨도 비빈다.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웅성거림 같은 소리가 또다시 들려와 나는 고개를 돌린다. 그 소리들은 캔버스 위, 미완성의 그림 위에 한가득 고여 있다······. 미완성이었다고 생각했던 그림은 이미 변해있었다. 전과 분명히 다른 느낌이다. 뭔가 비어있다고 느꼈던 부분, 거기에는 작은 여자아이들이 바위에 납작하게 엎드려 까르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까르르, 시각화 되어 캔버스에 번져있는 웃음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청각적으로 재현된다. 까르르······ 엄마는 어린 시절 그렇게 웃었구나.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저 밑바닥에서 형성된 기포들이 쏴 하고 올라와 심장 근처에서 터진다. 나는 가슴이 시려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른다. 등 뒤에서 뱀처럼 강하고 금속처럼 단단한 두 개의 팔이 내 어깨와, 가슴에 올린 두 개의 손을 감싼다. 미류가 와 주었다. 미류가 나타날 땐 이렇게 쏴아, 하고 기포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나는 등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과, 고독한 산짐승처럼 벌떡이는 미류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이런 하늘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별들로 가득 메워진 하늘은, 현실이긴 하지만 내가 만질 수 있고 직접 볼 수 있는 현실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우리는 지금 모악산 근처 어딘가에 와있다. 미류는 바다에, 남쪽의 순천쯤에 가자고 했으면서 저녁까지 먹은 후에 국도를 타고 느릿느릿 달리다보니 벌써 시간은 한밤중을 지나 새벽을 향하고 있다.

인공적인 불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역에서, 누군가가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하고 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편편하고 포근한 낙엽 위에 우리는 누워있다. 이 아래에는 굼벵이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개미들의 길도 있고 지렁이도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환형동물들도 있을 것이다. 눈 먼 두더지들의 터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생물들과 수없이 많은 박테리아들이 있을 것이다. 땅 속에는 흙과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욱 복잡한 세계가 존재한다. 엄마는 내 병의 치료를 그 복잡오묘한 미시적 세계에 맡겼던 것이다. 주변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야행성 동물들이 기척을 내고 살아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는 나뭇잎처럼 별들이 사각거린다. 서울의 밤하늘은 이렇지 않다. 도시의 야경이라는 것과 밤하늘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단 한 번도 밤하늘을, 이런 진짜 밤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왜 별들이 ‘반짝인다’고 하는지 이제야 겨우 알겠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를 것 같다. 벌써 흘렀는지도 모른다. 눈물은 별이 되어 밤하늘로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왼쪽 눈이 보지 못하는 탓에 내 거리 감각은 조금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밤, 온통 별들만이 반짝이는 검은 밤을 거리 감각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다. 내 손가락 끝에 닿아 있는 미류의 손가락처럼, 손을 뻗으면 별들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방향도 잃은 채 완전히 별들 속에 묻혀버린 것 같다.


“이런 하늘을 본 적이 없어······. 너는 언제나 날 놀라게 하는구나.”

“유성!” 미류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별이 선을 그으며 순식간에 떨어진다.

“저기도!” 이번에는 내가 가리킨다. “또!”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밤하늘이다.


“유심히 살펴보니 방향을 잃을 염려는 없겠다.” 내가 말한다.

“큰곰자리와 카시오페이아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알아냈어. 책에서 본 것보다 훨씬 많고 모두 너무 반짝이니까 알기 어려웠는데, 북쪽하늘은 대충 알아보겠다. 이제 북극성이 어느 녀석인지도 알았어. 자, 저게 북극성이야. 맞지?”


“뭐야, 이 웅장한 밤하늘 아래에서 겨우 책이나 사진을 보고 외운 걸 써먹는 건 실례라고. 더구나 밤하늘을 한 번도 올려다본 적 없는 녀석이 말이야. 아무리 직관적인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렇지, 별자리 판을 보면서 맞춰보려고 애를 써도 도무지 맞아떨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익히고 또 익힌 사람을 앞에 두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뱉은 한마디 말에 내 가슴은 상처를 받는다, 아, 아프다.”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어야 공평한 거지.”


“네가 잃은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대단한 걸 얻고도 당연하게 여기는 거지? 그렇다면 나야말로 뭔가 걸쭉한 것을 얻었어야 하지 않을까?”


“너야말로, 잃은 게 뭐가 있다고······.”


실없는 얘기를 나누는 우리의 목소리는 제법 조용하다. 작은 풀벌레 소리처럼 겁은 없지만 투명하다. 잠들어 있는 다른 생명체를 의식해서일까. 단단하게 빛나는 밤에 우리들이 내는 소리가 반사되어 다시 돌아오기 때문일까.

여기저기에서 유성들이 떨어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 천문학자나 될까?”


“음, 그거 멋진 걸? 하지만, 널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야.”


“지금 우리가 움직인 게 아니라면 천체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아주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걸 알 수 있겠어. 자랑하는 건 아니고, 그 ‘직관적인 기억력’에 의지해, 아까 여기 처음 누웠을 때 본 하늘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겠어. 책에서 조잡하게 익힐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거대한 밤하늘을 실제로 보니 정말 흥미롭구나.”


내가 일부러 거들먹거리며 말하자 미류가 상반신을 일으켜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는다.


“뭐야, 이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에 선을 그어놓고 천체의 이동이니 황도니 세차운동이니 그런 얘기나 하려고? 주계열성이니 백색왜성이니 중성자별이니 블랙홀이니······ 그러다가 양자역학에 끈이론에 평행우주까지 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얘기는 밤하늘을 보면서 나누기보다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나누는 게 더 어울리는 거라고. 그리고 천문학자가 별밤지기와 같은 건줄 알아?”


“아, 잘못했어.”


우리는 웃는다. 절제하며 숨죽여 웃지만, 가슴이 터질 듯 우습다. 너무 웃어 눈물이 나온다. 눈물은 별이 되었을 것이다.


“나 정말 별을 지켜보는 사람이 될까봐? 그런 걸 별밤지기라고 해? 어차피 장래를 고민해야 한다면 이렇게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직업을 택하고 싶다. 이렇게 계속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새로운 별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그 별에 네 이름을 붙여 줄게.”


“아, 고마워. 생각해보니 넌 그런 일을 잘 할 것 같긴 하다. 계속 지켜보는 일말이야. 예전에도 넌 드럼세탁기가 돌아가는 걸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지켜보곤 했잖아. 지루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빨래들이 계속 바뀌니까 전혀 지루하지 않다고 했지.”


“전혀 지루하지 않았지. 별들도 그럴 것 같아. 그래, 밤하늘에 한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한쪽 눈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저 어마어마한 거리, 그러니까 시간 앞에서 모든 사람들, 아니, 만물은 동등해. 그래서 나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맞아. 사람들은 2차원적 평면에 찍힌 점인 것처럼 별과 별을 연결해 별자리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 끈들은 모두 환상에 불과하지. 고작 45광년 거리에 있는 카펠라와 3400광년 떨어져 있는 알나스가 같은 마차부자리니 말이야. 눈은 진실을 응시하기에는 너무 부적절한 도구야.”


“저 별은 뭐지? 저 남쪽하늘 끝에 밝게 빛나는 별.”


“시리우스. 맨 눈으로 보았을 때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이야.”


“아, 저게 큰개자리의 시리우스구나.”


“그래. 하나의 별처럼 보이지만 실은 쌍성이야. 중력으로 껴안은 상태에서 태어나 공통의 질량중심을 가지고 서로를 돌고 있는······. 저런 별들은, 적당한 환경에서는 서로의 질량을 주고받기도 하고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융합되기도 하지.”


나는 알고 있다. 미류는 별 박사라는 사실을. 오늘은 사자자리유성우가 극대기가 되는 날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여기까지 나를 데리고 왔다는 것을. 사라졌던 며칠 동안 미류는 별을 보기 좋은 자리를 물색하고 다니다가 이곳에 산짐승들의 보금자리처럼 아늑한 자리를 만들어 두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시리우스 주성의 동반성은, 그걸 시리우스B라고 하는데, 처음으로 관측된 백색왜성이기도 해. 중심핵이 노출되고 핵융합반응도 끝나 이젠 내부에 갇혀있는 열을 조금씩 방출하면서 아주 천천히 식어가는 일만 남은, 수명을 다한 별. 백색왜성의 유일한 에너지원은 원자핵의 운동으로 나타나는 열이니까,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 열원인 핵자들마저 움직임을 멈추고 나면 저 별의 존재는 밤하늘에서 완전히 지워지고 말테지. 물론 아주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긴 하지만, 생각해봐, 대부분 탄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저런 축퇴별이 오랜 시간 아주 천천히 식어 그 속의 원자들이 고형화된다면, 그러니까 탄소가 그런 식으로 압축되고 정렬해 결정화된다면, 다이아몬드가 되겠지. 그게 바로 밤하늘이 품은 신비로움이 아닐까 해. 무수히 많은 별들이 저 하늘 어딘가에서 단단하게, 그 왜소함에 비해 거대한 질량을 품은 채 보석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봐. 물론 까마득히 먼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상상할 수는 있으니까.”


“거대한 질량을 품은 다이아몬드. 아름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구나. 지금 우리가 보는 저 별빛 또한 아주 오래 전의 빛이니까 아무리 먼 훗날의 일이라고 해도 과거에서 흘러나온 저 별들보다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도 없겠지. 얼마나 먼 훗날의 일인데?”


“갓 생성된, 표면온도 20만K의 백색왜성이 3000K까지 식는데 200억년이 걸리니까, 표면온도가 5K까지 내려가려면 1,000조 년이 걸린다지.”


미류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천조 년, 하고 말하자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천조 년. 200억년이라는 시간도 너무 까마득해, 우주의 나이보다도 긴 세월이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천조 년이라니. 나는 몸이 잘게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천조 년이라는 말이 귀에 와 닿는 그 순간, 영원보다도 멀게 느껴지는 시간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사라지게 한 것이다. 나는 원자 단위로, 쿼크 단위로 해체되어 우주의 시작점과 끝, 번성하고 쇠퇴하고 사라져가는 그 모든 시간대를 동시에 한꺼번에 목격한 듯한 착각에 휩쓸리고 만다.


“괜찮아?”


미류의 목소리가 천조 년에서 나를 꺼내주었다. 손가락에 쥐가 날 지경이다. 나도 모르게 미류의 팔을 꽉 쥐고 있었던 것이다.


“시작점이 곧 끝이나 다름없고 끝은 곧 시작인, 그 끝없는 순환의 고리가 내 몸을 이루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어. 내가 우주 저편에도 있고 여기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고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있는, 아니,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린 곳에 내가 있었어······.”


“그건 착각이 아니라 사실일지도 몰라.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점보다도 못한 현재가 가지는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끝없이 넓은 우주 속에서 티끌만도 못한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곧 해체되어 먼지로 돌아갈 내 몸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는 걸까······ 아니, 나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우주 전체가 어떤 거대한 동물의 세포는 아닐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해. 우리 세포만 생각해도 그렇잖아. 만물의 최소단위는 진동하는 끈일 수도 있다는데, 누가 알겠어. 그 끈 속에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


"아니면 이곳이 전지전능한 신의 세포 속일지도 모르지. 그 세포, 세포들을 두고 과학자들은 여분의 차원이라든지 평행우주라든지 하는 걸지도.”




추워서 잠에서 깨니 머리 위로 온통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는 미류의 등에 바싹 붙어 미류의 허리에 팔을 두른다. 조금 따뜻해진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떴을 때와 똑같은 밤하늘이 있다. 세상은 온통 별들과 그 부산물들로 반짝거린다. 시리우스는 다른 별들과 함께 약간 서쪽으로 이동해있다.

유성들은 비가 되어 내리고 있다. 내 가슴에도, 잠들지 않은 미류의 가슴에도 유성우가 내리고 있다. 어느새 불면증은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생각된다. 나를 스치고 지나간 모든 이야기들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저 유성들처럼, 귀 기울이지 않으면 존재했던 것조차 알 수 없는 삶의 이야기들이 반짝거리며 한순간 불타오르고 꺼진다. 아직 단단하게 나를 엮고 있는, 아직 내가 모르는 삶 역시 언젠가는 불타올라 먼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켜봐야 한다. 오랫동안 빛을 내며 반짝이는 별들처럼 언제나 거기에서 빛나고 있지 않기에, 보고 기억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새벽녘에 일어나 신비한 힘을 지닌 광대노린재를 타고 바다로 향한다. 지난밤에는 보지 못했던 주변의 풍경들이 푸른 안개에 둘러싸여 유성우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번개에 맞았는지, 파괴되어 고사[枯死]한 거대한 나무는 푸른 이끼로 뒤덮인 채 조용히 잠들어있고, 밑동에서는 어린 도토리나무가 새로이 자라나고 있다. 아련한 감동이 밀려온다. ‘삶과 죽음이 계속되는 순환이고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누딘의 말이 생각난다.


집 몇 채가 띄엄띄엄 낮게 엎드려있는 작은 마을이 점점 멀어진다. 둔덕처럼 낮은 산들이 안개에 휩싸여 둥근 무덤처럼 신비롭게 보인다. 불면의 밤을 넘어, 아침이 오기 전의 이 색채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 강인한 푸른빛이 코에 닿고 폐로 차 들어오면 밤이 물러간다는 사실이 머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그제야 겨우 얕은 선잠에 들 수 있었다. 새벽은 미류의 색깔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강인하고 부드럽고 안심이 되는 색깔. 신비로 둘러싸인 보라색 새벽이 걷히면서 공기는 점차 푸르게 변한다. 나는 미류의 옆모습을 본다. 그 신성한 색채의 조화에 흠을 내고 싶지 않아 그저 밤이 미류를 뒤로하고 물러가는 모습을, 일부는 아침 속으로 동화되는 모습을 길 위에서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다. 차들이 바다 한가운데의 돌고래 떼처럼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그들의 길을 헤엄쳐가고 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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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9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15 23:40
    No. 1

    우주적 차원 시간의 색깔로 본 인간은 점. 점이란 보이지 않고 위치만 있는 것이죠. 차원으로 보면 0차원. 즉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ㅋ 딱 점 찍고 사라지는 위치이죠. 허무 그자체! ㅠㅠ

    1000조년 (x) 1,000조 년(o) 천 조년(x) 천조 년(o)
    일억 년(o) 억년(o) 이만 년(o) 만년(o)
    우리내 말의 띄어쓰기 규정 정말 지겹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영어가 훨씬 쉬워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16 01:13
    No. 2

    감사합니다, 선생님! 얼른 고칠게요^^*
    허무 그 자체이긴 하지만.. 미시적 세계에도 분명 존재하는 삶의 이야기들과, 우주를 떠다니는 원자 알갱이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생.. 그 모두를 껴안을 수 있다면..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곤 했었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17 11:15
    No. 3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17 13:44
    No. 4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9.03 07:08
    No. 5

    영어보다는 우리말이 훨씬 아름다워요. 그리고 별림의 글도 아름답고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9.03 12:43
    No. 6

    호랑이님. 감사합니다^^
    우리말의 오묘한 아름다움을 잘 살리고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04.26 23:18
    No. 7

    과학적이면서 철학적인 마무리네요.
    잘 읽었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4.27 17:45
    No. 8

    수고하셨어요. 데조로님! ㅋㅋ
    잡초 뽑는 일보다 엄청 힘든 일을 하셨네요 xDD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31 09:02
    No. 9

    별 박사 미류는 어느 알수 없는 별에서 떨어진 어린 왕자는 아닐까 싶네요..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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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5. 재회 (2) +10 16.01.26 438 9 15쪽
5 4. 재회 (1) +11 16.01.26 429 12 21쪽
4 기억의 원소 #1 +10 16.01.25 536 11 4쪽
3 3. 새들의 군무 (3) +16 16.01.25 406 11 17쪽
2 2. 새들의 군무 (2) +8 16.01.25 760 12 20쪽
1 1. 새들의 군무 (1) +14 16.01.25 1,346 1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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