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6,078
추천수 :
276
글자수 :
205,656

작성
16.01.25 15:30
조회
1,345
추천
18
글자
7쪽

1. 새들의 군무 (1)

DUMMY

【 뇌우가 몰아친다. 반투명한 비닐을 어깨에 걸친 여인이 한 손에는 검은 우산을 들고 논의 물꼬를 틀고 있다. 어깨와 턱으로 고정시킨 우산이 자꾸 기울어지지만 여인의 손놀림은 익숙하다. 금세 트인 물꼬를 따라 논물이 콸콸 쏟아진다. 대기에서는 미약한 전류마저 감지된다. 몇 개의 물꼬를 더 틀고 여인은 논두렁길을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굉음이 터진다. 뿌리에 공생하고 있는, 인류의 수보다 훨씬 많은 미세한 생명체들이 토양으로 전달된 전류에 일제히 몸을 떤다. 여인은 우산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부자연스럽게 달리기 시작한다. 어깨에서 비닐이 팔랑거린다. 대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가 여인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큰 것이 다시 한 번 오고 있다. 이번에는 진짜다. 백 수십 년 전, 낙뢰를 맞고 산산이 부서지던 그날의 해송처럼, 나는 모든 기공을 열어두고 체념한다.

강력한 에너지가 몸을 관통하는 통증을 느낀 순간 내가 본 것은 놀랍게도 여인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빛줄기였다. 싸리나무에 가득 핀 하얀 꽃이 유령처럼 흔들리고 엄청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으로 붕 떴다가 꽃잎처럼 떨어지는 여인의 가슴에서는 향처럼 지펴진 어두운 연기가 피어오른다.

나는 또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여전히 당제목으로서 위상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기적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여인의 뱃속에는 두 개의 작은 생명체가 서로의 중력을 껴안고 잉태된 쌍성처럼 빛나고 있다. 전류를 모유처럼 빨아먹고 있는 광섬유들의 집합체 같다. 그리고, 오! 여인은 멎었던 숨을 토해낸다. 여인의 목에 걸려있던 금속성 물질은 증발되었으나 그것이 이 몸과 여인과 저 두 생명을 살린 것이다. 】

gulcham-namu2.jpg

1.jpg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여전히 햇빛이 비추고 있는데 비도 함께 내린다. 대기는 주황색 셀로판지를 덧댄 것처럼 축축하고 누렇게 빛난다.


“신 선생님 연구실에 갈 거야?”


재이가 우산 속으로 뛰어들며 묻는다. 나는 움찔하고 놀란다. 내 왼편은 언제나 불명확한 무엇으로 채워져 있어 좌측에서 다가오는 것들은 조금만 거칠어도 모두 공격적으로 느껴진다.


“한 번.”

“?”

“네가 사람 말을 무시하는 횟수. 걱정 마, 대화가 새롭게 시작될 때마다 ‘0’으로 재설정해줄 테니까.”

“세 번 무시하면 레드카드라도 주려고?”

“와, 지금 농담한 거야? 오늘은 운이 정말 좋구나, 한번밖에 무시당하지 않은데다 농담까지 듣다니.”


재이의 비눗방울 같은 목소리는 대기가 무거워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산딸나무 근처에서 터진다.


“신 선생님과 정기적인 면담을 할 생각은 조금이라도 있어?”


내 발걸음이 교수 연구실 쪽으로 향하는 걸 알고 재이가 묻는다. 정기적인 면담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면담이라는 것이 뇌에 채워진 자물쇠를 열고 기억창고를 파헤치는 임상실험은 아니겠지만 전직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사람과 단 둘이 면담을 한다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더구나 내게 정신적 결함이 있다는 진단이라도 내려진다면 말이다. 얼마간의 확률로 잠재해 있던 병의 씨앗은 병이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 발아를 하고 의식까지 지배할 만큼 자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지 않은가. 본질은 변한 것이 없는데 이름을 붙이고 기정사실화하는 순간 본질까지도 변했다고 믿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신 선생님은 처음부터 너를 부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최초의 기억은 비, 빛과 어, 어둠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을까요? 그 때의 상황이라든가 느낌은? 빛과 어둠을 단순히 보았나요? 만졌나요? 빛과 어둠의 냄새를 맡았나요? 회상하려고 하면 시각적 이미지로 떠오르나요?’ ‘자, 잘 모르겠습니다, 너,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런 성의 없는 대답을 한 널 부르다니. 그렇지 않아?”



학년 초부터 신 선생님은 공개적으로 정기적인 면담을 할 학생들을 모집한다고 했다. 설문지나, 수업 시간 중에 무심코 던진 질문을 통해 학생들을 선별해 1차적으로 면담을 하고, 그 학생이 동의한다면 주기적으로 만나 연구 중인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라고. 그동안 적지 않은 아이들이 호출되었지만 면담이라는 것은 보통 1회로 끝이 나는 식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것은 학생이 원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신 선생님이 그 학생과 면담을 지속할 의사가 없어서였다. 어쨌든, ‘지속적으로 면담에 응할지는 학생 본인이 결정할 일이고 나는 그럴 의사가 없는 학생들을 2회 이상 호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니 적절히 대응하고 지속적인 면담을 피하면 될 것이다. 이런 일은 예방주사를 맞을 때처럼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낫다.


“이제 하나만 더 쌓이면 레드카드인 거 알아?”


재이의 쫑알거림이 조약돌이 되어 내 생각 속으로 던져진다. 재이의 목소리는 ‘말’일 땐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부드럽다가도 ‘소음’으로 바뀌면 단단해진다. 소음은 모두 단단한 조약돌이고 파장을 만들며 물결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렇게 되면 생각은 단절되어 의식 밖으로 흩어지고 만다.

교수연구실건물에 들어서자 나는 정색을 하고 재이를 본다.


“그런 눈으로 볼 필요까진 없잖아. 우산도 없는데 그럼 여기에서 널 기다리다가······”




가슴 속에서 탄산수의 병뚜껑을 딴 것처럼 쏴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이의 목소리는 단단해져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데 무수히 작은 공기방울들이 가슴을 두드려대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청량감은 있지만 아픈 소리. 침묵으로 가라앉은 복도가 출렁이며 한 사람을 뱉어낸다. 마치 하디스의 궁전에서 빠져나와 빛을 향해 나아가는 미끈한 고래처럼 확신에 차서 앞만 보고 걷는다. 시선을 먼 미래에 둔 채, 나를 그대로 지나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금 막 내가 걸어왔던 곳으로 빠져나간다. 건물 안에 약하게 남아있는 빛까지 모조리 끌고 가버린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참동안 빛을 잃은 복도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말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급격한 전환기를 맞게 된 산야의 현재와, 병원에 의식 없이 누워있는 엄마(청이-혹은 단이)가 굴참나무를 통해 회상하는 자신들의 유년기입니다. 

이 두 개의 세계가 맞물려 연결된 장치들을 발견한다면 소설을 읽기가 조금 수월해질 것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4

  • 작성자
    Lv.49 난정(蘭亭)
    작성일
    16.01.25 19:48
    No. 1

    대단히, 아주 대단히 멋진 씨앗이 움트려고 하는군요. 건필!! 아, 선작도 하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1.25 22:29
    No. 2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4.16 14:45
    No. 3

    선호작으로 등록하고 재밌어요를 꽝 찍었어요.
    문체가 개성적입니다. 스토리가 어떤지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4.16 21:34
    No. 4

    안녕하세요 홍병유님^^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셀폽티콘
    작성일
    16.04.21 00:41
    No. 5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4.21 11:20
    No. 6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8.05 14:09
    No. 7

    여기는 어제 읽었고, 그럼 앞으로...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05 16:34
    No. 8

    앞으로 ㄱㄱ 그러나 어디에서 멈추게 되실 지 저는 몰라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02 05:22
    No. 9

    다시 정주행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선작했던것으로 클릭했더니 글이 없어서 순간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내 찾아 다시 시작합니다. 즐건 하루 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02 15:39
    No. 10

    희망님, 복잡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오늘은 초여름 같은 날씨지만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8 검고양이
    작성일
    17.05.02 15:51
    No. 11

    이웃별님 열심히 건필하세요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02 15:55
    No. 12

    고양이님. 고마워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윈드윙
    작성일
    17.10.31 14:34
    No. 13

    제목에 이끌고 저도 모르게 와서 꾸욱 꾸욱 놀러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10.31 15:38
    No. 14

    오오 분홍여우 발자국이 꾸욱 꾸욱 찍혔어요! ^^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굴참나무의 기억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2 기억의 원소 #10 +18 16.02.09 396 9 5쪽
31 22. 시간의 색깔 (3) +9 16.02.09 500 6 17쪽
30 21. 시간의 색깔 (2) +2 16.02.09 539 7 12쪽
29 20. 시간의 색깔 (1) +8 16.02.09 346 6 16쪽
28 19. 향기가 보여준 것(2) +10 16.02.09 576 6 13쪽
27 18. 향기가 보여준 것(1) +10 16.02.09 372 6 27쪽
26 기억의 원소 #9 +6 16.02.07 342 6 10쪽
25 17. 최초의 기억 (2) +6 16.02.06 537 6 17쪽
24 16. 최초의 기억 (1) +8 16.02.06 409 6 15쪽
23 15. 공중의 방 (2) +6 16.02.04 522 6 7쪽
22 기억의 원소 #8 +6 16.02.04 828 6 10쪽
21 14. 공중의 방 (1) +4 16.02.03 425 5 12쪽
20 기억의 원소 #7 +6 16.02.03 450 6 10쪽
19 13. 진실의 파편들 (3) +8 16.02.03 409 7 23쪽
18 12. 진실의 파편들 (2) +10 16.02.02 433 7 26쪽
17 기억의 원소 #6 +10 16.02.02 518 7 10쪽
16 11. 진실의 파편들 (1) +10 16.02.02 382 7 24쪽
15 기억의 원소 #5 +8 16.02.02 405 6 12쪽
14 10. 목각인형의 비밀 (5) +8 16.02.01 436 8 29쪽
13 기억의 원소 #4 +8 16.02.01 609 9 10쪽
12 9. 목각인형의 비밀 (4) +9 16.01.30 423 10 13쪽
11 기억의 원소 #3 +12 16.01.30 334 8 10쪽
10 8. 목각인형의 비밀 (3) +11 16.01.28 364 8 13쪽
9 7. 목각인형의 비밀 (2) +12 16.01.27 523 8 14쪽
8 6. 목각인형의 비밀 (1) +6 16.01.27 288 9 9쪽
7 기억의 원소 #2 +14 16.01.27 437 8 9쪽
6 5. 재회 (2) +10 16.01.26 438 9 15쪽
5 4. 재회 (1) +11 16.01.26 429 12 21쪽
4 기억의 원소 #1 +10 16.01.25 536 11 4쪽
3 3. 새들의 군무 (3) +16 16.01.25 406 11 17쪽
2 2. 새들의 군무 (2) +8 16.01.25 760 12 20쪽
» 1. 새들의 군무 (1) +14 16.01.25 1,346 18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