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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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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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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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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0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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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17. 최초의 기억 (2)

DUMMY


마을버스가 있었지만 나는 대형할인마트가 있는 역 근처까지 약 6킬로를 걸어왔다. 아파트의 지하매장과는 규모가 다른 그 할인마트에서 약간의 식재료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상가 건물에서 ‘구름호수 블랑제리’ 라는 이름의 빵집을 발견한다. 빵 굽는 냄새가 허기진 몸을 휘감는다. 충분한 수면은 이렇게 활기찬 아침으로 이어진다.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가게 안에는 세 명의 손님들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나는 바게트를 반쪽만 살 수 있을까 물으려다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통곡물 식빵을 가리킨다.

엊그제까지 살던 지하매장 빵집에서 나는 매일아침 바게트를 샀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신 뒤부터 습관적으로 평일에는 하나를, 주말에는 반쪽씩만 사게 되었다. 친절한 빵집 주인이 먼저 할머니도 안 계신데, 바게트는 반쪽씩만 사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 주었고 나는 주말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평일에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아침에 반을 먹고 나머지 반은 학교에 싸 가지고 간다. 바게트 표면이 눅눅해져 맛은 덜하지만 그렇게 하면 학생식당을 이용하는 번거로움 없이 점심을 해결할 수 있다. 어차피 눅눅하고 질겨진 바게트 샌드위치보다 수백 명이 동시에 이용하는 시끄럽고 번잡한 학생식당의 요리가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말에는 반쪽씩만 사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빵가게에서, 오늘은 주말이니 바게트를 반쪽만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빵집 주인은 아직 뜨거워서 썰지는 못해요, 라고 말하며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식빵을 봉투에 담아 건네준다. 오픈 주방이라 조리사용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빵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훤히 보인다.


나는 고소한 냄새에 못이긴 비둘기처럼 빵을 뜯어먹으면서 집으로 향한다. 지금까지 먹어본 빵 중에서 가장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가 ‘산야!’ 하고 나무랄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이곳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상한 나라이다.

아파트단지를 거의 지났을 때 귀에 익숙한 미류의 칼림바 연주곡이 가방에서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휴대폰을 꺼낸다. 미류가 휴대폰을 가지고 뭔가를 하더니 자신의 번호에 전용 벨소리를 저장해둔 모양이다.


“잘 잤어? 좋은 아침이지? 나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거든. 벌써 조금 있으면 고속도로야.”


“아르바이트는 어떻게 하고?”


“오늘도 5시까지 가기로 했어. 올리비아가 낮 동안 나와 있겠다고 해서. 정말이야, 이번에 새로 들여온 물건들을 정리도 할 겸 가게에 나온다고 해서 난 늦게 가기로 한 거라고. 아, 배고파.”


전화를 받으면서 머릿속으로 장 본 내용을 훑어본다. 토마토와 달걀, 샐러드 믹스, 치즈와 우유, 그리고 냉동 시금치를 샀다. 나는 다시 마트로 발걸음을 돌려 베이컨과 생크림, 돌돌 말린 파이 생지를 추가로 산다. 사과도 한 봉지 산다. 키슈(Quiche)를 만들 것이다. 키슈는 굽는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손쉽게 만들 수 있고 실패할 확률이 적어서 할머니가 입원하신 뒤부터 혼자 먹는 식탁에 자주 등장하게 된 메뉴이다. 내용물을 바꾸면 자주 먹어도 그다지 질리지도 않는다. 키슈를 굽고 남은 열에는 사과를 구울 것이다. 잘게 썰어 시나몬을 뿌리고 오븐에 넣어두면 나중에 사과홍차를 맛있게 마실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마을버스를 타고 집 근처 먹거리 골목에서 내려 약간 경사진 비탈길을 걸어 올라왔다. 가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늦가을 날의 햇살이 낙엽 위에 흩어져있다.



키슈를 오븐에 넣어놓고 내 방에 올라가서 골목을 내다보니 마침 미류의 소형자동차가 황록색을 반짝거리며 헤엄치듯 천천히 골목 끝에서 나타난다. 이 순간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행복한데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다. 미류의 자동차는 성충으로 막 변하려고 하는 광대노린재 같다.


어렸을 때는 자주 남산으로 산책을 나가곤 했다. 이태원의 구불구불하고 언덕진 길을 걷거나 달려 건물 전체가 검은 빛의 유리로 된 H호텔 앞에서 육교만 건너면 거기는 더없이 친근한 냄새와 소리들로 채워진 남산이었다.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는 실개천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시민의 숲도 있지 않느냐고 할머니는 나를 달랬지만 그 어느 곳도 뮤를 데리고 미류와 함께 거닐곤 했던 남산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5월 초의 어느 날, 산책을 하던 중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주황색 곤충이 나뭇잎에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형광색에 가까운 밝은 주황색이 신기하면서도 왠지 곤충의 색상으로는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이렇게 눈에 띄면 새들의 공격을 쉽게 받을 텐데 하면서. 처음에는 분명히 단일색상을 띠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황색 등딱지에 희미한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조금씩 황록색이 되어갔다. 우리는 점심을 먹는 것도 잊은 채 그 곤충의 변화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불과 몇 시간에 걸쳐 밝은 주황색 곤충이 마침내 금속처럼 빛나는 녹황색의 성충으로 탈바꿈했을 때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광대노린재의 녹색이 그토록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이유는 그 밑에 숨어있는 밝은 주황빛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 둘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미류를 실은 황록색 자동차는 그렇게 성충이 되기 직전의 광대노린재 같다. 느릿느릿 골목을 지나 집 앞에 광대노린재의 유충이 멈춰 선다.


미류는 소풍을 나온 아이처럼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왔다. 우리는 황금측백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 놓인 작은 벤치에 앉아 잡담을 나누었다. 햇살이 두꺼운 통유리를 통해 들어와 식물들 위에서 반짝인다. 산짐승이 된 기분이 든다고 미류가 말했다. 미류는 원래 산짐승이었다고 내가 알려줬다. 미류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미류는 올리비아의 남자에 대해 얘기한다. 올리비아보다 8살이나 어린 골프선수인데 미류에게 골프장에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의하는 등, 친해지려고 노력 한다고.


“같이 가보지 그랬어?”

“난 주말에 바쁘니까.”

“거짓말이다.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한나절 정도의 자유는 언제든지 누릴 수 있으면서.”

“그렇게 친하게 지냈다가 또 올리비아랑 헤어지면 어떻게 해?” 미류가 말한다.

“나는 올리비아가 바람둥이라도 곁에 있어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생활은 사생활이고 엄마는 엄마잖아. 그러니까, 어머니를 만나러 너 혼자 병원에 가는 게 자신 없다면 같이 가줄게. 잘 생각해봐. 이렇게 네 방을 남겨놓고 널 기다리고 계셨을 어머니를.”


나는 공중의 방을 가리키는 미류의 손가락을 보며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시금치를 잔뜩 넣은 따끈따끈한 키슈를 먹으면서 미류는 “시금치를 왜 이렇게나 많이 넣었어?” 묻는다. “영양 때문에?”


“아니, 가계 절약형 냉동 블록 시금치를 샀더니 도저히 나눌 수가 없어서 한꺼번에 해동시키고 다 넣어버렸어.”


“어쩐지 너 같지 않아. 꼭 뽀빠이가 된 것 같잖아.” 미류가 큰 소리로 웃는다.

“식사를 한 후 마을을 한번 둘러보자. 호수도 있고, 여기 참 좋은 곳 같아.”

“그래, 그러자.”


아재아저씨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류에게 보여주고 싶다. 호수의 색과 함께 변해가는 아저씨의 신비로운 눈빛을. 미류와 함께라면 그 최초의 기억의 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재 아저씨는 알지도 모른다. 이젠 그날의 기억을 최초의 기억이라 말할 수도 없다. 보다 먼 기억들이 잠에서 깨어났으니까. 문득 미류에게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뭘까 궁금해진다.


“내 최초의 기억?”

미류는 팔을 뻗어 가까운 곳의 나뭇가지 하나를 당겨 냄새를 맡는다.

“네 살이 되던 해였지. 최초의 기억치고는 너무 늦나? 어쨌든 그해 봄, 튤립이 가득 핀 공원에서 첫사랑을 만난 것이 가장 오래된 기억이야.”


미류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한다.


“네 살 때, 첫사랑? 로맨틱하기보다는, 너무 조숙한 거 아냐?”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에 찍힌 번호는 꽃다발과 함께 배달되었던 그 번호이다. 신 선생님이다.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신 선생님의 무례한 초대를 잊은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 온 뒤부터 거짓말처럼 불쾌한 것들은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가장 오래된 기억에 대해 미류에게 물으면서도 그것과 연상되어 자연스럽게 따라왔어야 할 신 선생님에 대한 것들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는 장소가 바뀌어도, 잠을 푹 자도, 아재 아저씨를 만나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변할 뿐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 걸지도 모른다.


“어떤가? 자네 스스로 먼저 전화를 걸어줄 것 같지가 않아서 확인 차 연락을 한 걸세. 오늘 맞이해야할 손님이 한 명인지 두 명인지를 확실히 해둬야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실은 오늘 자네 말고 또 한 명을 특별 초대했다네. 자네도 알 거야. 같은 반 학생이니까.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면 말이지······.”

“아니오, 이미 정했습니다. 오늘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하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그러나 다소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최초의 기억 같은 걸 왜 물어? 너, 혹시 신경심리학교수의 ‘실험용 모르모트’ 중 한명인 거야?”


신 선생님과 통화를 하는 내내 미류는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다가 전화를 끊자마자 내게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한 번 면담을 한 건 맞지만, 그럴 의사가 없다는 걸 좀 더 확실히 밝힐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어쩌면 엄마에 관한 걸 수도 있는데 그 얘기도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아. 나 용기가 생긴 것 같아.”


“알겠어, 그럼 됐어.” 미류가 말한다.


“사실 난 네가 수학과에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했어. 넌 수학을 좋아했고 사람들의 말보다 수학이 보여주는 추상적인 언어가 더 잘 들린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한때는 나도 수학 공부를 좀 했는데 역시 내 머리는 이과와는 안 맞는 것 같더라고. 너도 내가 심리학과를 선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응. 넌 스페인어나 프랑스어를 공부해 남미나 아프리카로 떠날 줄 알았지.”

“정말?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네 친구들이 많잖아. 그런 덴. 짐승들 말야.”

“뭐?”

“농담이야. 사실 네가 무슨 과를 선택할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 어쩌면 피아노과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해본 적은 있어. 지금도 피아노는 치고 있어?”


“응, 이렐리에서도 가끔 연주를 해. 거기 구석에 있던 신디사이저 봤어? 그걸로.”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 왜 피아노를 전공하지는 않았어?”


“비싸서. 올리비아를 털어봤자 먼지밖에 안 나올 텐데, 이렐리와 집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음악을 전공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지. 흔히 꿈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들 하지만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까지 그렇게 하다가는 꿈 자체가 오염될 것 같잖아. 그리고 그 꿈은, 부추겨진 꿈, 주입된 꿈이었지, 진짜 내 꿈은 아닌 것 같았고. 나는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그 ‘평범하게’ 사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건지 알 것 같아. 왜냐면 평범한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알았거든. 넌?”


“난?”

“넌, 졸업하면 뭘 할 건데?”


“졸업? 모르겠어. 졸업이나 할 수 있을지. 사실 유전공학실험교재에 설명되어있는, 생쥐의 골수에서 DNA를 추출하는 실험을 순서대로 정리해놓은 부분을 봤는데 구역질이 나더라고. 이 분야는 나한테 맞지 않는 게 확실해.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그런데 너의 그 첫사랑 얘기는 그렇게 끝난 건 아니겠지?”


나는 대화를 슬그머니 돌린다. 장래의 일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류의 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이다.


“어, 너 치고는 대단한 집중력인데. 끊어진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 대화를 되돌리다니.”


그렇게 말하더니 미류는 중요한 해설이라도 맡은 것처럼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가장 오래된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럼,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한다. 뭐, 내가 좀 조숙했던 건 맞지만, 첫사랑이니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라. 그걸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라서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야. 이 세상에는 네 말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잖아. 어쨌든 그 날, 어딘가의 공원이었던 것 같은데, 색색의 튤립 위로 나비들이 날아다녔고 나뭇잎들 사이로 바람이 살며시 불고 있었지. 햇살은 또 얼마나 찬란했는지. 그리고 황금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작은 여자애가 그것들과 놀고 있었어. 그러니까 튤립, 나비, 나뭇잎, 바람, 햇살들과 말이야. 그 아이는 꼭 춤을 추는 나비처럼 팔짝팔짝 뛰어다녔지. 그러다가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하는 것처럼 갑자기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아당겼어. 어린 내 가슴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지. 유년기엔 다 그렇게 나비나 꽃들을 쫓아다니는 거라고 말하겠지만 그 아이와 함께 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일종의 소통이랄까, 참여랄까,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있는 공생의 세계를 엿보았다고나 할까. 그건 분명 어떤 종류의 언어였던 것 같아. 나는 그런 언어를 보았어. 누군가가 어떤 ‘말’을 하는데, 내 모든 감각기관이 그의 언어를 수용하게 되어 오해의 소지는 조금도 생겨나지 않는, 그것은 독립된 개체의 일방적인 표현이 아니라 주위 모든 것들과의 상부상조로 얻어지는 씨실과 날실의 치밀한 조화였어. 외부의 세계로 끝없이 열려있고, 외부의 개체들 하나하나에게 고유하고 특별한 반응을 보이며 거의 무한정으로 조립이 가능한 그런 언어를 말이야. 어쨌든,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우리는 엄마들이 작별인사를 나눌 때까지 ‘그것들’ 속에서 함께 있었지. 하나가 되어 있었던 거야.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새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오히려 잊고 있었던 놀이를 기억해낸 것처럼 친숙하면서도 그리운 기분에 젖어 어찌할 바를 몰랐어. 그런 기분을 두고 행복이라고 말하는 걸까.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능력 하나가 잠깐 열렸다 닫혔는지도 모르지. 집에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그 세계와 그 아이의 환영에 몰입해서 지냈지.”


미류의 목소리는 감각피질을 선택적으로 자극하며 내 머릿속에서 보랏빛 꽃으로 피어났다. 파랗지도 않고 빨갛지도 않은,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보라색 영역에 속한 꽃. 미류의 목소리는 그랬다.


“그때의 기억은 거의 본능처럼 내 가장 깊은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어. 누군가가 내게 본능을 일깨워준다고 하면 나는 그날의 일을 껴안은 채 눈을 뜰 거야.”


그 황금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걸······? 그 누군가가 미류라는 걸······? 나는 처음으로 오래 전에 작은 계집아이였던 소녀에게 질투심이 섞인 부러운 감정을 느낀다.


“네가 가진 최초의 기억은 뭔데?” 미류가 묻는다.


“전에는 빛과 암흑이 교차된 무엇이었는데 이젠 모르겠어. 이곳에서 보낸 유년기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어떤 기억이 더 먼저인지 나중인지조차 구별이 안 되는 걸.”


우리는 잡담을 하면서 사과홍차를 여러 잔 마신 후에 집을 나섰다.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돈 후 미류는 나를 신 선생님이 일러준 주소지까지 데려다주었다. 약속장소는 주택이나 오피스가 아니라 카페였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재이였다. 잔잔한 흰 꽃무늬가 수놓아진 검정 원피스를 입고 얇은 흰색 카디건을 어깨에 두른 채 테라스에 앉아있는 재이는 조금 눈에 띄었다. 재이는 손가락을 까닥이며 ‘안녕?’ 인사를 했고 미류는 나를 카페 앞에 내려주면서 이렐리로 갈 거라고 말했다. 오늘은 5시부터라고 했으면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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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8.30 05:33
    No. 1

    저에게 남은 첫 기억은 여동생이 태어나던 날의 기억...ㅎㅎ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30 15:26
    No. 2

    감사합니다^^ 호랑이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04.26 17:51
    No. 3

    우리가 흔히 생각해 보는 첫 기억에 대해 이리 표현하셨네요.ㅋ
    저는 감촉과 온기가 떠오르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4.27 17:38
    No. 4

    책을 읽다보면 감촉 같은 게 떠오르시는 분도 많으신 것 같아요.
    엄마의 따스함이나 이불 속 온기 같은 거겠지요?
    사실 전 글과 달리 최초의 기억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26 05:29
    No. 5

    사과홍차 저도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쓴맛이 도는 맛과 사과향이 묘하게 어울리는... 오늘 다시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28 00:21
    No. 6

    희망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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