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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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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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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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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656

작성
16.02.02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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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기억의 원소 #6

DUMMY

♔♔


동틀 무렵, 아이들은 냇가로 내려가는 오솔길에 쪼그리고 앉아 노랑망태버섯이 노란색 망태치마를 입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아침안개가 묻어 번들거리는 버섯을 한눈팔지 않고 지켜보고 있으면 뱀 알처럼 말랑말랑하고 흰 버섯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것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태양이 떠오를 때쯤 되면 느릿느릿 움직이던 버섯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활기를 띠기 시작해 여기저기에서 황금색 망사를 활짝 펼치는 것이었다. 아침이 하루에 완전히 노출되는 순간이었다. 너는 아이들을 따라 활짝 웃는다. 노랑망태버섯도 부채꼬리바위딱새처럼 분위기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들떠있다. 할아버지는 어미돼지가 새끼를 뱄다고 일러주셨고 자작나무들은 아버지가 오실 거라고 일러줬으니까. 아이들은 괜히 아침부터 키득키득 웃고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할아버지는, ‘돼지가 새끼를 밴 게 그렇게도 좋은감.’ 하셨다. 아이들은 단풍잎 같은 손바닥을 입에 대고 목을 움츠려 장난스럽게 웃을 뿐이다.



해가 서천으로 기울기시작하자 아이들은 아예 큰 길에 나가 아버지를 기다린다. 노을처럼 붉게 물든 서로의 뺨을 바라보며 키득거린다. 아이들은 기다리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이 순간의 기다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달콤하다는 걸 아이들은 알고 있다. 옆 도시에서 읍내를 향해 출발한 막차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다가온다. 버스가 속도를 줄이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아이들은 기어코 버스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리고 문이 거칠게 열리자마자 아버지에게 달려가 양쪽 팔을 하나씩 차지한다. 아이들은 새들처럼 깔깔거린다. 너도 달려가 아이들처럼 아버지의 목을 껴안고 한없이 울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기쁨과, 바닥이 닿지 않는 슬픔의 깊이가 동시에 느껴져 가슴이 아플 뿐이다.



밤이 되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산책을 나가자고 하신다. 아이들은 노란망태버섯이 활짝 피어났을 때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버지가 택한 길은 냇물소리가 졸졸거리는 냇가였다. 모래와 자갈과 억센 풀들이 뒤엉켜 걷기가 좋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야행성 동물처럼 크고 작은 돌들 사이를 익숙하게 걷는다. 잡풀이 무성한 곳에 들어서자 아버지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린다. 높게 자란 미꾸리낚시의 잔 갈퀴들이 발목을 할퀴지만 아이들은 탐험선에 올라탄 것처럼 즐겁기만 하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아버지와 산책이라니. 상상 속에서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야생의 밤이 커다랗게 열리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소쩍새가 울어댄다. 오래도록 걸으면서 눈은 이미 칠흑 같은 밤에 익숙해졌다. 이슬이 땅을 적시듯 어둠이 오랫동안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어 아이들의 몸도 밤처럼 변해가는 중이었다. 수달이 물속으로 참방참방 뛰어들고 사슴이 시원한 야밤의 산책을 즐기는 것이 온 몸에 느껴진다. 너구리 가족이 까맣고 작은 손으로 풀숲을 헤치고 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오소리가 커다란 엉덩이로 안정감 있게 앉아 긴 목을 늘어뜨리고 쳐다보는 것이 모두 느껴진다. 그 모든 것들이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제 밤이 완전히 몸속에 들어온 것이다. 아니면 몸이 밤 속에 완전히 흡수된 것이다.


아버지는 밤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이들을 양 옆에 앉히신다. 단이의 허리춤에는 목각인형이 있다. 이 목각인형은 아재가 만들어 준 쌍둥이 목각인형이다. 아버지가 주신 목각인형 하나를 개울가에서 잃어버린 후 상심한 아이들을 위해 아재가 박달나무로 쌍둥이인형을 만들어 옻칠까지 해준 것이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도록 튼튼한 발판을 디디고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두 개이면서 하나인 쌍둥이 목각인형이다. 통통한 뺨은 건강했고 작은 입술은 웃고 있었다. 머리에 인 함지에는 모래나 조약돌을 담을 수도 있었다. 또 끈을 꿰어 허리에 찰 수도 있었다.


“왼쪽 아이가 단이이고 오른쪽 아이가 청이라고 했니?”

“아니, 왼쪽 아이가 얘고 오른쪽 아이가 나야.”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아이가 말한다.


“그럼 아빠도 끼워 줄래? 여기 이 디딤목을 아빠로 할까?”


아버지는 파도처럼 웃는다.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밀려오는 파도처럼 하얗게 웃었다가 입을 다물면 웃음은 쓸쓸하게 뒤로 물러서는 것이 깜깜한 밤 속에서도 모두 보인다. 아버지는 그곳에 양 팔을 벌리고 누우신다. 아이들도 아버지의 왼팔과 오른팔을 하나씩 차지하고 눕는다. 별이 유난히 총총해 하늘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칠흑 같은 밤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소리는 검은 공간 여기저기에서 떨어지는 유성들의 목소리처럼도 들린다. 아버지는 이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밤이라 더욱 투명한 물소리와 별들과 유성들을 보여주기 위해, 아이들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밤의 한가운데를 보여주기 위해 오랫동안 걸어 이곳까지 온 것이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팔을 베고 누워 산발적으로 밤하늘에서 풀려나오는 유성들을 보고 있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 만큼 아름답고,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한.


어쩌면 이 밤은 페르세우스자리에서 유성우가 내리는 날일지도 모른다고 너는 생각한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이토록 많은 유성들을 볼 수 있을까. 아버지는 어쩌면 이 날에 맞추어 집에 오신 건지도 모른다.



무수한 별 밑에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다. 그러다가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내린 별들이 가슴을 가득 채울 때 쯤, 아버지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견우와 직녀, 혹은 헤라클레스의 전설이나 페가수스 이야기가 아닌, 좀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욱 감동적으로 들리는 이야기들이 아버지를 통해 흘러나온다. 이상하게도 슬픔이 함께 새어나온다.


“저 별들, 저렇게 눈앞에서 무수히 반짝이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빛들은 이미 수 백, 수 천 년 전의 빛이라는 걸 알고 있니? 저 별빛 하나하나가 우리 눈까지 도달하려면 몇 백 년, 몇 천 년, 몇 만 년, 혹은 몇 억 년 이상씩 걸리기도 한단다. 저기 직녀별이 보이지?”


거문고자리의 베가를 가리키는 아버지의 손가락은 어둠 속에서도 암흑성운처럼 분명하게 보인다. 아이들의 눈은 은여우바위 속 작은 생명체들처럼 별빛만으로 모든 사물들을 인식한다.


“저 별빛이 여기에 있는 우리 눈에 도달하려면 26년의 시간이 필요하단다.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하거든. 직녀성은 여기에서 26광년 떨어진 곳에 있단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는 별빛은 26년 전의 빛인 거야. 하지만 이 드넓은 우주에서 26광년이란 이웃집처럼 가까운 거리란다.”


“어느 중국 사람이 천 년 전에 황소자리에서 커다랗고 밝은 별이 갑자기 나타난 걸 발견했대. 그건 별이 폭발하는 광경이었어. 별들은 나이가 들면 풍선처럼 부풀다가 알맹이만 남기고 터져버리거든. 그런데 천 년 전에 발견한 그 새로운 별은 사실 그 날로부터 3400년 전에 이미 폭발한 별이었단다. 왜 그런지 알겠지? 여기에서 3400광년 떨어진 곳에 그 별이 있었으니까.”


아이들은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아이들이 이해하는 것은 목소리의 음색이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모든 소리들에도 표정이 있고 색조가 있음을 알게 된다. 유성우처럼 밤하늘에서 풀어져 내려와 가슴 깊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아이들은 보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저 별들 중에 어떤 별은 벌써 폭발해서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겠네? 그리고 저 하늘 어딘가에는 지금도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아기별이 있을 수도 있겠네? 우리 눈으로는 몇 백, 몇 천 년 후에나 보게 될.”


아이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그 때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아주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려 퍼져 밤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그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란다. 우리 눈은 허상을 진실이라고 믿게 할 뿐만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하지. 그렇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거야. 눈을 믿지 말고, 온 몸으로,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그래야만 사라져 간 별들이 남긴 아름다운 잔해와 빛이 꺼진 별들, 그리고 지금 막 태어나고 있는 아기별들을 알아볼 수 있는 거야. 천문학자들이 수 천 년 후에나 겨우 발견하게 될…….”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다. 밤하늘에서 선을 그리며 꼬리를 떨어뜨리는 유성처럼 아버지는 말을 끝맺지 못하셨다.




이튿날 아버지는 떠나셨다. 아버지는 아무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곤 하셨다.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가지고 온 이국적인 물건들과 이야기들을 남겨놓고. 그러나 이렇게 집에 온 다음 날 급히 떠난 적은 없었다. 아이들은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 함께 다녀왔던 그 밤의 그 하늘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불러오곤 했던 현실 이면의 세상인 것만 같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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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Lv.23 tulip642..
    작성일
    16.05.05 11:29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5.05 17:52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79 서백호
    작성일
    16.08.23 02:39
    No. 3

    며칠만에 다시 한편 읽고 갑니다. 꾸준한 독자가 못 되어서 죄송!!!!!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6.08.23 15:55
    No. 4

    죄송이라뇨!!? 이 글이 진도가 잘 나가는 글이 아니기에
    이만큼 오신 것도 놀라운 거예요 ^ㅁ^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04.22 00:16
    No. 5

    이들의 자리를 상상해 봅니다~별이 빛나는 밤에~~이 분위기에 꼽싸리 끼고 앉아 좋네요.^^ (마지막 문단의 궁금증을 제외한)

    우현이가 계속 나올 거 같아 확인차 여쭤 본 건데....ㅋㅋ
    성실한 답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4.22 22:26
    No. 6

    히히 저는 요즘 별이 진다네~♬에 빠져있어요. 노래 참 좋네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7.05.18 05:16
    No. 7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마치 별똥별처럼 왔다가 여운만 남기고 가는 것 같네요.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5.19 00:06
    No. 8

    감사합니다 희망님. 좋은 밤 되시길^^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7.08.09 19:24
    No. 9

    세 번째 단락이 제게는 참 와닿는 부분이네요...ㅠ.ㅠ;;
    추억이 새록새록 돋네요...
    오래 전에 일찍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생각나면서
    왠지 마음이 가라앉고 아련하게 그리워집니다...
    감성을 깨우는 좋은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이웃별
    작성일
    17.08.10 22:39
    No. 10

    꾸준히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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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6. 최초의 기억 (1) +8 16.02.06 409 6 15쪽
23 15. 공중의 방 (2) +6 16.02.04 522 6 7쪽
22 기억의 원소 #8 +6 16.02.04 828 6 10쪽
21 14. 공중의 방 (1) +4 16.02.03 425 5 12쪽
20 기억의 원소 #7 +6 16.02.03 450 6 10쪽
19 13. 진실의 파편들 (3) +8 16.02.03 409 7 23쪽
18 12. 진실의 파편들 (2) +10 16.02.02 433 7 26쪽
» 기억의 원소 #6 +10 16.02.02 518 7 10쪽
16 11. 진실의 파편들 (1) +10 16.02.02 382 7 24쪽
15 기억의 원소 #5 +8 16.02.02 405 6 12쪽
14 10. 목각인형의 비밀 (5) +8 16.02.01 436 8 29쪽
13 기억의 원소 #4 +8 16.02.01 609 9 10쪽
12 9. 목각인형의 비밀 (4) +9 16.01.30 423 10 13쪽
11 기억의 원소 #3 +12 16.01.30 334 8 10쪽
10 8. 목각인형의 비밀 (3) +11 16.01.28 363 8 13쪽
9 7. 목각인형의 비밀 (2) +12 16.01.27 522 8 14쪽
8 6. 목각인형의 비밀 (1) +6 16.01.27 288 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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