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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에서 돌아오는 중 ☽

굴참나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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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웃별
작품등록일 :
2016.01.25 14:04
최근연재일 :
2016.02.0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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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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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4. 재회 (1)

DUMMY


수업이 끝나자마자 강의실을 빠져나와 커다랗게 열려있는 단과대 입구 유리문을 나서자 교정의 버드나무에서 소그룹의 노란 방울새들이 종알거리며 공원으로 이동한다. 그들의 종알거림 속에는 ‘비가 내리겠다’는 부분이 들어있다. 나는 그 부분만 알아듣는다. 참새 한 무리도 뒤따라 날아간다. 몸이 으스스 떨린다. 그날의 새들의 군무가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붉은 리본만을 남겨두고 흩어진다. 아직 병원에는 가보지 않았다. 의식불명이라고는 하지만 엄마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계셨더라면 내 발뒤꿈치를 잡아줄 수 있었을 텐데. 엄마가 몸을 담그고 있는 혼탁한 의식의 강물에 빠지지 않도록. 그랬다면 나는 잠깐 엄마를 볼 용기가 났을지도 모르는데.


“산야.”


낯익은 목소리가 계단을 내려가려는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오늘 하루 종일 들떠있는 것처럼 보였던 재이의 목소리이다.


“생일 축하해.”


재이가 붉은 리본을 매단 볼펜을 내민다. 나는 흠칫 놀란다. 이번에는 붉은 리본 때문이 아니다. 불길한 그림자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볼펜에, 생일선물이라는 표시로 볼펜 중앙에 묶어 놓은 붉은 나일론 리본은 전혀 엄마의 그것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부담스럽지 않은 물건에 친절하게 매달린 관심의 표시, 아무 것도 아닌 볼펜과 선물 사이를 구분 짓게 하는 끈일 뿐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볼펜 어딘가에 묻어있는 낯선 냄새였다.


며칠 전 내게 배달되었던 향초와도 비슷한 냄새성분이 거기 어딘가에 내려앉아 있는 것 같아 유심히 바라본다. 나에게 ‘본다’는 말은 조금 모호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거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내 왼쪽 시력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신 선생님의 말처럼 공감각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거기에는 시각적으로 피어오르는 냄새나 소리의 모습까지 포함되어있는 건 사실이지만, 공감각이 뛰어나게 발달한 사람처럼 그렇게 조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구속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롭다면 내가 보는 것에 대해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텐데.

공기 중에 희석되어 곧 사라지는 방향성 입자들은 그대로 놓아주고 나는 아직도 볼펜에 앉아있을 ‘냄새자국’을 찾아본다.


내가 망설이는 듯 보였는지 재이는 내 손을 끌어당겨 볼펜을 쥐어 준다. ‘그냥 볼펜이잖아’ 하며. 도대체 이런 허물없는 친절은 어디에서 익히는 걸까? 상대방이 언젠가는 ‘좋게’ 변할 것이라고 믿으며, 마치 미개한 지역에 선교를 나간 사람처럼 확신에 차 베푸는 친절. 재이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절하다. 몇몇 소극적인 아이들에게는 특히나. 물론 그런 관심을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재이가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 아이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개성일 뿐 동정 받아야 할 사항은 아님에도, 한번 툭 건네준 친절이 상대방을 구원할 것처럼 행동하는 그 당당함에 압도되어 나는 정말 길을 잃은 철새가 된 듯 당혹스러워진다.

이런 감정은 내 성격 탓이지 재이의 잘못은 아니다. 나의 내향적인 성격이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재이의 외향적인 성격 또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재이는 그냥 친절하고 단순하고 제 할 일을 척척 해내는 아이일 뿐이다. 첫 생물학 실습 시간에도 그녀는 해부한 개구리로부터 꺼낸 내장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스케치하는 역겨운 작업을 비명소리 한번 내지 않고 깨끗하게 해냈다.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면 해야지.’ 라면서.

재이는 그런 아이인 것이다. 아마 생쥐의 골수에서 유전자를 추출해내는 실험도 잘해낼 것이고 그 이후에 주어진 길도 잘 걸어갈 것이다. 재이에게는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저······”


그러나 다가가지 않아도 상대방의 손을 끌어당길 수 있는 사람은 비슷한 방법으로 손을 놓아버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 나는 무슨 말을 하려 하는가. 내가 무리로부터 떨어져나간 철새였다 할지라도 이미 어느 한적한 장소에 적응을 마치고 텃새화 되었음을 증명하려 하는가. 나 같은 사람에게 생일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생일이 아니라 할머니와 함께 가던 ‘호박마차’와 호박아저씨였는지도 모른다. 나도 할머니처럼 좀 습관에 얽매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응?”


재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인내심 많은 누나처럼, 내가 네 말은 다 들어줄게, 하는 표정이다.


“뭔데 그래? 말해 봐.”

“토요일 저녁에 시간이 괜찮다면······,”


재이도 언젠가는 내 손을 놓아버릴 것이다. 설사 단속적인 친절로 어떤 ‘관계’가 형성된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견디지 못한다. 상냥하고 순진한 웃음으로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나중에야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여자애처럼 구는 내 외면의 모습이 아니라 좀 더 내면의 것, 내가 가진 직감과 유령처럼 모호한 존재감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에 당황해서, 화가 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떠난다고 했다. 나는 언제나 조롱의 대상이었다. 미류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그랬고 예외는 없었다.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 다른 한쪽은 할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호박마차’에 가자고 한다. 그것도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룬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번 주 토요일? 그럼 내일? 저녁때라면 괜찮은데······.”

“그럼······, 저녁을 함께 먹지 않을래?”


재이의 부드러운 냄새가 얇은 막 속에서 부풀어 오른다. 우연히 정원에 날아든 희귀한 새를 발견한 사람처럼 뺨이 상기된다.


“정말 의외지만 기꺼이 받아들일게. 볼펜 한 자루에 대한 대가치고는 굉장한 걸.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근사한 걸 골랐을 텐데.”


나는 재이에게 레스토랑 주소와 전화번호,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준다. 시간은 6시로 한다.


“호박마차? 이름 참 독특하네. 그럼 내일 거기에서 만나. 나는 과실에 볼일이 있어서 그만 들어가 봐야해. 그럼 안녕.”


재이는 내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놓으며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남겨놓고 안으로 들어간다. 재이의 매력이란 저런 것이다. 상대방을 머뭇거리게 하지 않고 본인 또한 깔끔하다.

재이가 손에 쥐어주고 간 볼펜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지만 새 플라스틱 냄새가 압도적이다. 그리고 플라스틱 표면과 나일론 리본에 묻어있는 재이의 체취와 손에 바르는 로션 냄새를 건져 올린다. 신경이 예민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그 향초를 어쩌면 재이가 보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것은 추측이 아니라, 어쩌면 기대였는지도 모른다. 신 선생님이 모종의 목적을 위해 보낸 것이 아니라 내게 표면적으로나마 약간의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이 보낸 진짜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재이는 이 볼펜처럼, 선물이라면 학교에서 직접 줄 확률이 높다. 만약 어찌어찌 주소를 알아내 집으로 보낸다면 쪽지 정도는 동봉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름만이라도 밝혔을 것이다. 사람의 생김새는 그 사람의 성품을 특징짓지 않지만(사람들은 보통 이 부분에서 실수를 한다), 매우 유동적이긴 해도 각 사람의 고유한 냄새는 성격과 기분을 반영한다. 재이는 선물가게에서 향기가 나는 예쁜 양초를 고를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파라핀을 녹이고 향을 배합해 초를 만들 사람은 아니다.




“산야!”


또 다른 목소리가 경쾌하게 나를 부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쏴아 하고 기포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쾌활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줬던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다. 그 목소리는 숙성한 와인처럼 풍부하고 깊게 변했지만 목소리의 색감은 변하지 않았다. 그 애가 금방이라도 새롭고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이 들뜬 목소리로 ‘산야!’ 하고 불러주면 내 안에서는 이미 즐거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화학반응과도 같은 것이었다.

벤치에서 일어서서 가슴을 펴고 큰 보폭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는, 미류다. 꽃사과나무에서 연보라색 꽃잎들이 나부낀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벌써 붉은 열매가 맺혔다가 떨어진 지 오랜데 꽃잎이 나부끼다니. 이것은 미류가 발산하는 색채들이다. 나는 계단을 내려서지도 못하고 미류에게서 뿜어 나오는 보랏빛 광채를 바라보고만 있다.


“산야 맞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지금껏 모르고 지냈다니.”


미류는 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고 내 얼굴을 살핀다. 어린 아이를 대하듯 내 관자놀이를 두 손으로 감싸고 아무 거리낌 없이 내 이마에 자신의 아마를 댄다.


“많이 컸구나. 전에는 꼬마신사 같았는데 말이야.”


나는 미류가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바쁘게 걷고 있는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몇 번이라고 하면 과장이고, 지난번에 신 선생님의 연구실에 가다가 본 것을 포함해서 두 번 보았다. 미류가 어쩌면 이 학교에 다닐지도 모른다고 느꼈으면서도, 맨 처음 미류를 보았을 때는 얼마나 놀랍고 반갑던지, 나는 그 자리에 화석이 된 듯 굳어버렸다. 미류도 그런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고 말았다. 나는 줄곧 과거를 바라보다가 화석처럼 굳어버렸는데 그는 언제나 현재를 직시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아니, 현재에 발을 디딘 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살펴보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오늘이 처음 미류를 본 그 날이었다면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담담하게 나는 미류와 재회의 인사를 나눈다.


“지난 월요일에 ‘이렐리’ 앞에 서 있던 널 보았을 때 네 생각이 났어. 물론 그게 너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그냥 네가 생각나더라고. 낯이 익은 것 같았고, 학교에서 널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어. 그리고 다음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고 올리비아가 얘기해 주었지. 그제야 그게 너였다는 확신이 생겼어. 너, 분위기 많이 바뀐 거 알지?”


미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한다.


“그래서 저 벤치에 앉아 무작정 날 기다린 거야?”

“응, 인문대 쪽은 아닌 것 같고, 내가 심리학과거든, 공대는 절대로 아닐 것 같고 의대는 더욱 아닐 것이고 미대나 음대 쪽은 할머니 때문에 아닐 것 같았고 체대는, 에이, 절대로 아니지. 그럼 여기밖에 없잖아. 이렇게 기다린 지 아직 사흘밖에 안됐는데 운이 좋다.”


웃고 있는 미류의 입가에는 그리움이 얼음처럼 묻어있다.


“전에는 ‘새들의 정원’ 앞에서도 종종 기다렸는걸.”

“할머니의 무용연구소? 말도 안 돼. 나는 거기에 거의 가본 적도 없는데. 올리비아한테서 무용을 배운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우리는 마주보고 웃는다. 그 슬픈 이야기를 하며 이제는 웃을 수 있을 만큼 자란 것이다. 미류의 어머니가 우리에게 심심풀이로, 혹은 놀이의 연장으로 약간의 춤을 가르쳐주었다. 결국에 가서는 무대의상까지 만들어 본격적인 작품 하나가 태어났지만, 그 사실을 아신 할머니가 어찌나 화를 내시던지. ‘나는 이 애의 운명을 니진스키처럼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서. 그때 나는 니진스키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운명을 생각했다. 열두 살짜리 소년에게 있어서 운명이라는 것은, 정신요양원에서 삶을 소진하고 있는 엄마의 금기와도 같은 삶을 상징할 뿐이었다.


“알아.”

“뭘?”

“뭐야, 너, 또 딴 생각하고 있었지?”


미류의 웃음은 신비로운 색채를 띤 채 공기 중으로 스며들어 밀도가 낮은 곳으로 밀려 나간다. 막혔던 가슴이 트이는 것 같다. 미류와 함께 있을 땐 늘 그랬다. 내 안의 뭔가가, 어떤 윤곽선들이 좀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일치하기를 꺼려하는 자의식이 합의를 보는 게 아닐까. 그만큼 미류는 절대적이었으니까.


“비가 올 것 같구나. 하늘이 깜깜하다.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어디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자고.”


미류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른다. 미류의 팔은 무겁고 단단해졌다. 쌍둥이목각인형의 팔처럼 미류의 힘센 팔이 내 어깨에 단단하게 붙는 것 같다. 근섬유조직들이 소매 속에서 촉수를 뻗어 내 목을 휘어 감는다. 꿈만 같다. 이렇게 걷고만 있는데도 미류와 헤어진 뒤의 8년이라는 시간이, 의미조차 모호했던 무표정의 시간들이 모두 보상받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미류의 작은 황록색 경차 안은 우중충한 바깥 공기와 대조되어 생각보다 아늑하다. 미류는 운전석에 앉아있어 내 시야에는 확실히 잡히지 않지만 나는 미류의 실루엣을 볼 수 있다. 마치 잔상처럼, 왼쪽 눈이 ‘본’ 것들을, 그리고 숨결과 체취와 체온과 공기 중에 떠도는 모든 냄새들의 흔적을 감지한다.


“할머니 일은 유감이야.”

“응······”

“엄마 일도.”

“······”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이런 너를 그동안 못 알아보았다니.”


아주 잠깐 견딜 수 없는 짙고 깊은 침묵이 흘렀다. 미류가 휴대폰을 오디오시스템과 연결하자 소박한 칼림바 연주곡이 이내 무거운 침묵을 밀어내고 차 안의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다. 자동차 전체가 공명통이 되어 소리를 집어삼키고 흔들고 내뱉는다. 핸들 위에 놓인 미류의 손가락들이 단아한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나는 칼림바의 음률을 타고 차 안을 둥둥 떠다니는 시간을 응시한다. 그 옛날, 미류는 흰 색 동그라미 두 개와, 그보다 조금 더 큰, 붉은 색 동그라미 한 개가 그려진 칼림바를 가지고 다녔다. 그 동그라미 세 개는 단순하면서도 모든 표정을 담고 있는 사람의, 혹은 동물의 얼굴 모습이었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무표정의 공허한 얼굴 같기도 하고 절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표정을 달리했던 그 얼굴 위에서 미류의 엄지손가락은 능숙하게 연주를 했다.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게······. 그 시절, 미류는 이미 훌륭한 연주가였다.


“이건, 네가 연주한 거로구나.”


미류가 웃으면서 응, 하고 대답한다.


“언젠가는 널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 너는 항상 낯익은 음악 같았거든. 그래서 수많은 낯선 곡들 사이에 끼어있는 단 한 곡의 귀에 익은 음악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네가 아무리 많은 군중 사이에 끼어있어도 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어.”


미류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린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몰랐다니, 한심하지. 네 머리카락이 자랄 수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머리카락에 가려진 네 이마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난 항상 뒤통수와 이마가 훤히 드러날 만큼 짧은 머리에 꼬마신사처럼 차려입은 널 상상했거든. 하지만, 생각해보면 넌 머리 깎는 걸 꽤 싫어했잖아. 미용실에 가면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면서.”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다. 벤치 아래에서 먹이를 쪼아대고 있는 비둘기의 잿빛 깃털 위로 빗방울이 미끄러진다.


“넌 알고 있었니? 그러니까, 우리가 전에 마주친 적이 있다는 걸?”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는 날 바로 알아봤겠지, 그렇지?”

“응.”

“내가 이렇게 근육질의 키 큰 사나이가 됐는데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곱슬머리도 여전하고, 꼿꼿하게 앞만 보고 걷는 걸음걸이도 똑같잖아.”

“내가 그렇게 걸어? 뭐야, 그런데 왜 아는 척도 안 한 거지?”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미류가 쓸쓸하게 웃자 기분이 이상해진다. 나는 조금 나무라는 의미로 말한 건데. 어떻게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가버린 거니, 하는. 아니, 아니다. 나는 미류를 나무랄 자격이 없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너무한 걸······. 내가 말이야.”


나는 미류를 보지 않고도 알아볼 수 있다. 미류가 다가오는 걸 보기도 전에 내 감각들은 미류가 오고 있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미류는 몸을 뒤로 틀어 뒷좌석으로 던져놓았던 가방을 집어 올린다. 가방에서 꺼낸 것은 그리움이 물씬 묻어있는 바로 그 칼림바였다.


“아직 가지고 있었구나······!”


나는 칼림바를 쓰다듬어본다. 세 개의 동그라미는, 그것이 과거에 천의 얼굴을 지녔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의 지워져버렸다. 오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물건을 만지고 있는 사람처럼 내 가슴은 뛴다. 미류가 내 등을 토닥인다.


“정말 만나고 싶었어. 잘 지내고 있는지, 정말 궁금했어.”


등줄기에서 싹이 돋고 꽃이 핀다. 이 세상에는 그야말로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가지각색의 삶을 누리고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70억에 가까운 가지각색의 사람들 중에 단 한사람만이 어떤 사람의 겨드랑이에 날개를 돋게 하고 등에서 꽃이 피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태원에 가자! ‘이렐리’에. 올리비아는 요즘 바리스타와 요리사 자격증을 딴다는 구실로 가게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알지? 거기가 바로 올리비아의 카페야. 예전에 사귀던 아저씨 기억나? 아프리카 쪽으로 무역을 하던. 이 칼림바도 그 아저씨가 준 거잖아. 그런데 올리비아가 결혼은 안 한다고 해서 그 아저씨는 떠났거든. 뭐, 올리비아의 못 말리는 바람기 때문에 몇 번 헤어졌다 만났다 했지만, 바보 같은 올리비아는 그 아저씨가 진짜 떠난 뒤에야 엄청 후회하다가 결국은 옷가게를 집어치우고 그 카페를 차린 거야. 뭔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일을 하고 싶다면서 말이지. 그건 벌써 몇 년 전 얘기고, 지금은 골프 선수와 사귀는 중이야. 여전히 결혼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니까, 나중에 골프샵을 차린다고 할까봐 걱정이야. 어쨌든 거기에서 우리, 재회를 자축하는 파티를 열자.”


나는 칼림바를 손에 든 채 유리창에 부딪혀 취한 듯 흘러내리는 빗물을 잠자코 바라볼 뿐이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 것 같은데 그 어떤 것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창밖의 빗물은 음악이 되어, 미류의 칼림바 연주곡에 섞여 투명하게 흔들린다. 아직도 등줄기에 매달린 꽃이 간지럽다. 나는 시간 속에 조용히 떠 있는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며 진흙 색에 가까운 답답함을 느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진짜 미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우면서도 통제가 가능한 익숙한 것들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두렵다.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류의 웃음이 따스한 색감의 램프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밝히고 있는데 진흙탕 속에 빠진 것 같은 이 답답함은 무엇일까? 이젠 더 이상 꼬마가 아니기 때문일까? 내 관자놀이를 만지고 이마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는 미류의 손은 감정이 앞서는 아이의 서툴고 얄팍한 손이 아니라 세심하고 강한 어른의 손이었다. 나는 그 강하고 부드러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 미류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그에게 달려가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였을까? 단지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 때문에? 냄새의 미립자들처럼 우정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는 것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거긴 너무 멀고······ 아무래도 오늘은 좀 그래······. 미안, 다음에 갈게.”

“선약이 있는 거구나?”

“그런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미류는,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 그만 내가 처한 상황을 잊었다고, 파티라니, 당치도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그 미안하다는 말에 나는 갑자기 어색함을 느낀다. 나라는 아이는 이렇게 예민하고 소심하다. 미류는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했지만 나는 심보가 틀어진 어린아이처럼 다음 지하철역에서 내려달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동차로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며. 미류는 그렇게 해줬다. 나는 전혀 성장하지 않은 아이 같지만 미류는 어른스러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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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재회 (1) +11 16.01.26 429 12 21쪽
4 기억의 원소 #1 +10 16.01.25 535 11 4쪽
3 3. 새들의 군무 (3) +16 16.01.25 405 11 17쪽
2 2. 새들의 군무 (2) +8 16.01.25 759 12 20쪽
1 1. 새들의 군무 (1) +14 16.01.25 1,345 1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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