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원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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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독 탓인지 너는 잠에서 완전히 깨는 것이 힘겹다. 혼미한 정신은 차츰 맑아지고 있지만 몸이 천 근 만 근 무겁다. 굴참나무 위에 앉아 있다가 잠깐 잠이 든 것일까? 아니면 고향집 옛 마루에 누워있는 것일까?
아니면 병원일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동안 싸리비로 마당을 쓰는 소리가 들려온다. 낯설면서도 친근한 소리. 여기가 바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집, 성기게 엮은 대나무 울타리 안에서 소곤소곤 세상을 익혀가던 그 집인 걸까. 꿈결인 듯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냇물 밑바닥을 도르르 구르는 돌멩이 소리 같기도 하고 예배당 종소리 같기도 한. 그 웃음소리는 극심한 두통을 겪을 때처럼 네 의지를 벗어나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 너를 흔들어 깨운다. 피부를 쓰다듬어 소름을 소르르 돋게 하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훑고 점막상피 깊숙이 붙어있던 오염물을 씻어내고 뇌와 심장과 눈동자를 헹구어준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네 몸을 일으켜 세워 너를 뒷마당으로 밀어낸다.
마당을 쓰는 소리는 환청이었나 보다. 뒷마당엔 아무도 없다. 너는 놀라지 않는다. 너에게 환청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겪는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정갈하게 비질이 된 노란 마당에 정오의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모든 것이 그대로이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억 밖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풍경. 너는 단단하게 다져진 노란 흙을 밟고 마당을 둘러본다. 새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냇가로 내려가는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목조로 된 하늘색 곡식창고가 있다. 최근에 덧칠한 것처럼 색깔이 말끔하고 화사하다. 오른쪽에는 닭들이 낮잠을 즐기고 있는 널찍한 닭장이 있고, 그 옆에 키 작은 앵두나무와 능금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린 채소 싹들이 빼꼼히 올라오고 있는 작은 텃밭도 있고, 텃밭 옆에는 돼지우리와 외양간이 반듯하게 서 있다. 돼지들은 납작한 코를 처박고 꿀꿀거리고 있지만 소들은 들에 나갔는지 외양간은 텅 비어있다.
너는 심호흡을 한다. 오랜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어, 바로 엊그제까지도 이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유년의 성에 흡수되고 있다. 뒷마당에서 오른쪽으로 반 바퀴 돌아 이제 앞마당까지 왔다. 수돗가 옆 울타리 아래에서는 가지각색의 봄꽃들이 떼 지어 피어있고, 아! 바로 그곳에 마당 안의 그 무엇보다 생기발랄한 두 아이가 앉아있다.
너는 두 아이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저 아이들은 분명 어릴 적의 네가 맞지만 너와 동일 인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외모는 물론이고 내면의 눈까지도 저 아이들은 네가 아니다. 한때 너였던 아이들. 저 아이들이 뿜어내는 눈부신 광채를 너는 잃어버린 지 오래다.
봄 햇살이 내려와 앉은 아이들의 양 갈래 머리 위로 봄나비들이 폴폴 날아다닌다. 단이의 이마에 있던 붉은 자국은 이미 사라지고 청이의 몸을 뒤덮었던 푸른 반점은 옅어졌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청이와 단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붉은 색 리본을 달거나 분홍 양말을 신거나 붉은 색 계통의 옷을 입고 때로는 폭넓은 푸른색 계통의 무엇인가를 몸에 장식함으로써 구별되고 있다. 오늘 단이는 빨간색 머리끈과 분홍색 바지를, 청이는 깊은 하늘처럼 파란 머리핀을 새까만 머리에 꽂고 있다.
초록색 풀물이 든 아이들의 작은 손가락은 막 돋아나기 시작한 고로쇠나무의 어린 잎사귀 같다. 두 뺨은 복숭아 같고 머리카락은 물결처럼 반짝인다. 아이들이 길어 올리는 생기는 나뭇잎들이 내뿜는 수증기처럼 주위를 뽀얗게 감싼다. 마치 여름날의 포플러나무처럼. 아이들은 해당화 나무 곁에 자리를 깔고 쪼그리고 앉아 마당에 분분하게 떨어진 귀룽나무의 작은 꽃잎들을 주워 밥을 짓고 풀잎으로 반찬을 만들어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목각인형들에게 밥을 먹인다.
“아, 해봐.”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저 두 개의 인형은 아버지가 먼 나라에서 가져다주신 것이다. 너는 또다시 거역할 수 없는 기억의 앙금과 맞닥뜨린 것이다. 아무렴, 너는 잊지 않았다. 소금 냄새가 나는 아버지의 이마와 산처럼 둥근 구릿빛 어깨를.
아버지는 뱃사람이었다. 고향집은 바다로부터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그 바다는 선박들이 드나드는 항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배가 육지에 도착한 날, 밤새도록 달리는 기차 안에서 휴일의 첫 밤을 보내고 다시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오면 눌렸던 피곤이 육체 밖으로 슬금슬금 기어 나와 아버지를 쓰러뜨렸다. 할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안쓰러워 선착지에서 하루 정도 쉬고 오지 그러냐고 하셨지만, 수많은 밤을 배 안에서 보냈는데 하룻밤쯤 더 기차 안에서 보낸다고 해서 그리 달라질 것도 없다고, 집에 오는 여정이 쉬는 것이라고 말하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곤 하셨다.
‘이 꼬마 천사들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햇빛에 그을려 껍질이 벗겨진 어깨를 보여주면서 ‘껍질이 벗겨진다는 건 살아있는 증거다’라고 하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잠든 뒷모습만 있어주면 아이들은 날아갈 듯 가볍고 밝은 시선으로 모든 식물들과 새들 속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동안만큼은 비밀스러운 공간들은 별로 의미가 없는 장소가 되어버리곤 했다.
집에 머무르는 동안 아버지는 배와 바다, 물고기들, 낯선 나라와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목각인형을 가지고 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파도와 싸워야 했는지, 석양에 비친 돌고래 떼의 움직임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바다 한 가운데서 보는 밤하늘이 얼마나 아름답고 두려운지를. 망망대해와 우주는 별로 큰 차이가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도 하셨다. 그래서 바다를 떠다니는 것은 해선이라 부르고 우주를 떠다니는 것은 우주선이라 부르는 거라고. 그렇게 우주와도 같은 바다에서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별처럼 반짝이게 만들어 밤하늘에 빛나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또 한밤중, 아이티Haiti 섬의 부두voodoo교의 성소에서 행해지는 의식을 밤처럼 깜깜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주었고 라틴아메리카의 춤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아이들은 그 모든 이야기를 눈을 반짝이며 가슴으로 들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그곳이 현실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석양에 비친 돌고래 떼의 환상적인 움직임에 감탄하기도 하고, 로아Loa에 바쳐질 산 재물이 되어, 성스러운 북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공포에 질려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언젠가 바다 건너 그 먼 나라에 ‘너희들을’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하시고는 다시 바다로 떠나셨다. 꿈을 꾸는 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목각인형의 신비로운 눈빛은 아버지와의 약속이었다. 아이들이 밥을 먹이고 있는 저 목각인형들은 그렇게 여기에 존재하게된 것이다. 아무렴, 네가 한시라도 잊은 적이 있었던가.
“연못이 깊어지려해.”
너의 기억의 파장 때문인가, 갑자기 단이의 얼굴이 침통해진다.
“그 연못 말고 다른 연못을 생각해. 노을이 비친 연못, 아니, 냇가를 생각해, 호수를, 바다를 상상해봐. 아버지가 다시 오시는 날을 그려봐. 다음엔 모래소리가 들리는 마라카스를 가지고 오신다고 했어.”
청이가 다급하게 말해보지만 단이는 고개를 젓는다.
“연못이 깊어진다.”
그렇게 말하고는 담장에 기대 자라고 있는 가시투성이 해당화덩굴 속으로 쏙 들어간다. 덩굴가지들이 열려있던 입구를 막아버린다. 웅크리고 앉은 단이의 흰 얼굴에 약간의 햇살이 초록색과 분홍색 물결무늬를 새겨놓는다. 색채와 향기의 옷을 입은 단이는 해당화나무의 분신 같다. 마치 물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점조성이 강한 어떤 낯선 물질로 뒤엉킨 하나의 생명체, 하나의 점액질로 된 해당화나무가 된다.
해당화덩굴을 빤히 보던 청이는 목각인형들을 바로 세워놓고 마당 구석에 있는 가래나무로 향한다. 매끈한 수피에 찰싹 달라붙어 양 발을 나무에 가볍게 디디고 폴짝폴짝, 잘도 올라간다. 저렇게 올라가려면 몸이 가벼워야한다. 연약한 팔의 힘이 몸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만큼. 나무 위에 앉아 청이는, 단이가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해당화덩굴처럼, 가래나무가 몸을 흔들어 청이를 감싸자 청이는 그냥 많은 나뭇가지들 중 하나가 되고 새들이 날아와 어깨와 머리와 무릎 위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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