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3 아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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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젠(1)
마차가 드미에 도착한 건 헬렌을 떠난지 정확히 하루 뒤였다. 성주의 딸이 알려준 마을로 가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유모를 만날 수 있었다.
지병이 깊어 쇠약해지긴 했지만 걱정한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집 뒤에 나 있는 뒷마당에서 셰릴은 작게 불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 거에요?”
모닥불 위에 약탕기를 올리고 그 앞에 몸을 숙여 앉아 불을 때고 있는 셰릴을 향해 디에나가 물었다.
“반나절이요.”
“오래 걸리네요.”
“그 정도면 별로 안 걸리는 거에요.”
셰릴은 말했다.
"마침 우리도 휴식이 필요하니까 느긋하게 기다리죠."
여기서 약을 다리는 동안 따라온 호위병들은 두어 명만 남아 집 앞에서 지키고 있고 나머지는 객점에서 잠시 쉬게 했다. 긴 여정은 아니지만 여기서 한 번쯤 휴식을 취해 두어야 오스티아로 무리 없이 돌아갈 수 있다. 지금쯤 말을 교환하거나 식사를 하며 배를 채워두고 있을 것이다.
옆에 앉아 양 팔을 무릎에 얹은 채 디에나는 팔에 턱을 댔다. 그 상태로 눈만 들어 그녀는 옆에 있는 셰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시선을 느꼈는지 약탕기를 보고 있던 셰릴이 물었다.
“생전 알지도 못한 사람 때문에 드미까지 오고..”
디에나는 말했다.
“약간은 오지랖이라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따라온 디에나도 해당되는 얘기죠?”
미소 지으며 셰릴이 응수했다.
“난 심심해서 온 건데요.”
멀뚱히 디에나가 다시 대꾸했다.
약을 달여 유모에게 먹이고 나머지는 챙겨서 선반 위에 올려 두었다. 이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유모를 돌봐주는 이웃 사람이 마침 찾아왔길래 약재 위치를 알려주고 약 달이는 방법을 말해 두었다.
“이제 가는 거죠?”
점심때가 훌쩍 지나 이제 또 둘만 있게 되자 무료해졌는지 디에나가 옆에서 채근하듯 물었다.
“이것만 정리하고요.”
약을 달이는데 필요한 그릇을 약재 옆에 나란히 두며 대꾸하고는 셰릴은 손에 묻은 물기를 행주에 닦아 냈다.
마당 한 쪽에 피워 놓은 모닥불이 제대로 꺼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부엌 한 쪽에 서 있는 디에나를 내버려 둔 채 부엌 뒷문을 열고 그녀는 다시 뒷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한 가운데서 피웠던 장작 앞에 앉아 혹시 모를 불씨가 남았는지 보려고 그녀는 재를 뒤적거렸다. 흰 연기가 뭉클 올라오자 매캐한 연기에 기침을 하며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불쏘시개로 재를 골고루 폈다.
제대로 불씨가 꺼진 걸 확인하고 난뒤 불쏘시개를 한 쪽 옆에 세워 놓으며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려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러는 찰나 집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뒤에 그림자가 하나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낯선 남자 한 명이 거기 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청년을 보고 놀라 셰릴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누구...”
얼결에 입을 떼는데 청년이 비틀거리며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얼마 걷지도 못하고는 곧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갑작스런 일에 굳어져서 셰릴은 쓰러진 남자를 보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남자는 꿈쩍도 않고 있다. 잠시 있다가 조심스럽게 그녀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의 등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길게 찢긴 상처가 나 있다. 정신을 잃었는지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셰릴.”
왜 안오나 싶어 셰릴을 찾아 마당으로 나오다가 마찬가지로 쓰러진 남자를 발견하고는 디에나가 황급히 그녀쪽으로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디에나를 향해 셰릴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누구에요?”
남자를 내려다보며 작게 디에나가 속삭였다.
“왜 여기 쓰러져 있어요?”
“누군진 모르겠지만 쓰러진 건 상처 때문 같아요.”
등에 길게 나있는 상처를 보며 대꾸하다가 고개를 들어 셰릴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조용한 걸 보니 동행은 없는 모양이다.
“일단 안으로 데려가야 겠어요.”
누군진 몰라도 다친 사람을 계속 바닥에 내버려둘 순 없다고 생각하며 셰릴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마당 한 쪽에 있는 작은 헛간이 눈에 들어왔다. 집안에는 약을 먹고 잠이 든 유모가 있기도 했고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셰릴이 남자를 부축해 일으키자 디에나도 반대쪽에서 그의 팔을 잡았다. 양 쪽에서 남자를 부축한 채 두 사람이 힘겹게 헛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헛간으로 들어와 바닥에 깔려 있는 짚더미 위에 남자를 눕히고 나자마자 디에나가 길게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덩치가 산만한데다 정신까지 잃고 있어 무게가 마치 물먹은 곡물 자루 같았다.
힘이 들었는지 한숨을 내쉬는 디에나의 앞에서 몸을 숙여 셰릴은 남자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어깨에서부터 등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누구한테서 도망치다 등 뒤에서 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보이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깊이 찔렸는지 옷 주위로 피가 흥건하다.
“괜찮을까요?”
“모르겠어요.”
이 정도 깊은 상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마당까지 걸어들어 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정신력으로 버텼거나 아니면 어디 멀지 않은 곳에서 다쳤거나..
“밖에 무슨 일 있나 가보고 올께요.”
비슷하게 생각을 했는지 옆에서 디에나가 말했다.
“디에나 잠깐..”
남자를 보건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면 어쩔까 싶어 말리려는데 그녀는 이미 헛간 밖으로 뛰어 나가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며 그녀는 다시 쓰러진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에서 가져온 깨끗한 천으로 상처를 닦아낸 뒤 지혈과 소독 효과가 있는 풀가루를 상처에 바르고 그녀는 붕대를 꺼냈다. 어깨와 등을 가로질러 붕대를 감아 꽉 묶었다.
몸을 뒤적거리는데도 남자는 깨어날 생각을 안했다. 미약하지만 다행히 호흡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상태가 괜찮아질지는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누굴까. 이런 한적한 곳에 이런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니.
셰릴은 청년의 옷차림을 훑어 보았다. 피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옷차림은 평범해 보인다.
‘누구한테 알려야 하나..’
자신들도 이제 가야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남자를 그냥 둘 수는 없으니 누구에게라도 알리고 그를 맡겨야 한다. 어떻게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디에나일 거라고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녀는 그러나 디에나보다 큰 그림자 세 개가 거기 있는 것을 보고는 흠짓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보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헛간 문 앞에 서 있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곧 그들이 저벅저벅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경계심으로 안색이 굳어지며 그녀는 더 뒤로 물러났다. 남자들의 손에는 도끼자루와 검이 들려 있다.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척 봐도 그냥 놀러온 옆집 사람들은 아니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는 동안 다가온 남자 중 한 명이 헛간 바닥에 누워 있는 청년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때?”
그 뒤를 따라 걸어오던 남자가 그를 향해 물었다.
“숨은 붙어 있습니다 두목.”
남자가 대답했다.
두목이라고 불린 남자가 누워 있는 청년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등에 묶여 있는 붕대를 보고 고개를 들어 남자는 셰릴을 쳐다보았다. 아들을 치료해 준 게 셰릴이라는 것을 그도 알아챈 듯했다.
“셰릴. 큰 일났어요.”
그러고 있는데 들려온 디에나의 목소리에 셰릴은 가슴 한 쪽이 서늘해졌다.
"밖에 호위병들이 쓰러져.."
말하며 헛간 안으로 들어서다가 디에나 역시 칼을 들고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잠깐 얼어 붙어 있다가 그녀가 셰릴의 옆으로 뛰어갔다.
“뭐에요? 이 사람들..”
그녀의 팔을 꼭 잡으며 경계 어린 눈으로 남자들을 보는 디에나의 옆에서 입을 다문 채 셰릴은 남자들을 주시했다.
“아가씨들이 이랬나?”
누워 있는 청년을 내내 내려다 보고 있던 남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대꾸가 없자 남자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그 시선에, 곧 셰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척봐도 도적떼다. 괜히 거슬릴 필요는 없다.
“살 수 있겠나?”
남자가 다시 물었다.
“밤은 지나야 알 수 있어요.”
최대한 침착하게 그녀는 대답했다.
“비에타 기사단이 바로 쫓아올 겁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두목.”
남자의 옆에 서 있던 체격이 건장한 사내가 말했다.
“어쩔꺼요?”
두목이라고 불린 남자는 쓰러져 있는 청년을 다시 내려다 보았다. 변변찮은 아들놈이지만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 의사를 찾을 수도 없다.
“아가씨들.”
잠시 후 셰릴과 디에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가 말했다.
“우리랑 같이 가야 겠다.”
목소리가 확고했다.
“내 아들을 살려놔야 겠어.”
그 입에서 나온 말에 셰릴은 눈 앞이 아득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들은 말로 미루건데 이 자들은 지금 기사단에게 쫓기는 것 같다. 소리도 없이 마을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이런 자들에게 끌려 갔다가는 십중팔구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할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와 심장이 동시에 두방망이질 치는 것 같은 와중에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를 쓰며 셰릴은 천천히 입을 뗐다.
“치료해 주면...”
옆에서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디에나의 손을 그녀 역시 꽉 움켜 쥐었다.
“우릴 살려 줄 건가요?”
그냥 놔두고 가달라고 간청해 봤자 어차피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 정도 말은 해봐야 했다.
“내 아들을 살려 놓으면 목숨은 보장하지.”
곧장 남자가 대꾸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들도 같은 처지가 될 거야.”
소리 없이 셰릴은 숨을 한 번 들이 마셨다.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알겠어요.”
정신을 바짝 차리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만 따라 가게 해주세요.”
그 말에 뒤에서 디에나가 그녀를 보았다.
“싫어요. 셰릴 혼자...”
“아무 말 마요 디에나.”
셰릴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지금은 제발.”
“그런 말은 할 거 없어 아가씨들.”
여자들의 대화를 들으며 두목이 다시 말했다.
“누구 하나 두고 갔다가 일 키울 생각 없으니까.”
“시간 없습니다 두목.”
옆에서 키가 작은 남자가 다시 말했다.
“데려가.”
그 말에 남자들 둘이 쓰러져 있던 청년을 양 쪽에서 일으켜 세웠다. 아들을 부축해 남자들이 밖으로 나가자 두목은 다시 셰릴과 디에나 쪽을 보았다.
“아가씨들도 이제 가시지.”
그가 말했다.
“여기서 칼부림 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말하고는 두 사람이 나오길 기다리 듯 그가 옆으로 비켜 섰다. 그 모습에 깊이 숨을 들이 마시며 셰릴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디에나의 팔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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