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번외. 반 네쉬하트(2)
여관 밖으로 나온 남자들은 유곽을 빠져나와 양 옆으로 길게 이어진 농지를 사이에 두고 좁은 논길을 일렬로 서서 달려갔다. 한참을 달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알드린으로 이어지는 국경 근처였다.
“워 워.”
고삐를 옆으로 잡아 당기며 선두에 있던 남자가 멈추자 뒤이어 남자들도 자리에 섰다.
대략 50아드 쯤 떨어진 거리를 유지한 채 남자들을 쫓던 락터드는 그들이 자리에 서는 것을 보고 속력을 늦추었다. 그들은 락터드가 뒤쫓아 오고 있다는 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듯 했다.
근처에 무성히 자라 있는 수풀 더미 사이로 가 말과 함께 몸을 숨긴 채 그는 그대로 앞의 동태를 살폈다.
육안으로 형체만 보일 뿐 인기척을 느끼기엔 먼 거리였지만 그래도 한 번 쯤 뒤를 확인해 볼 만도 한데 누가 따라오고 있을 거란 생각은 못하는지 돌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남자들이었다.
여기서 알드린으로 들어가는 검문소까지 이제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국경을 넘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 자리에서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가만 보니 여관에서 자신과 데이먼을 찾지 못하자 여기까지 내려와 확인해 보고 있는 중인 모양인 듯 했다.
미처 자리에서 멈추지 못한 말이 앞뒤로 조금씩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다가 잠시 후 오스티아 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지 그들은 이제 한 두명씩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번거롭게 하는군.’
우왕좌왕 하는데다 일처리도 어설픈 게 이런 자들의 배후면 누군지는 몰라도 크게 염려스러운 자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잠시 후 좀 떨어진 앞에서 말발굽 소리가 지나가자 조금 더 기다렸다 자리에서 말을 일으켜 세우며 락터드는 수풀 앞으로 나왔다. 방금 전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남자들을 뒤에서 쳐다보다가 보다가 락터드도 곧 다시 말을 달렸다.
국경 근처에 여행자들이 들렀다 쉬어 갈만한 마을은 하나 뿐이다. 유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른, 제법 크고 소란스러운 마을이다.
남자들의 말이 마을 한 쪽에 있는 제일 큰 술집 앞에 묶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락터드는 말에서 내렸다. 입구에서부터 풍겨오는 술집 안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느끼며 그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술집은 제법 컸고 여행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르는 곳이라 그런지 초저녁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사람이 가득했다. 뭐가 신이 났는지 출입문 바로 옆에서 술병을 머리 위로 든 채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사람과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며 락터드는 남자들을 찾았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눈에 들어왔다. 제일 구석에 있는 원형의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남자들은 자기네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근처에 비어 있는 작은 테이블로 걸어가 락터드는 그들과 등을 돌린 채 앉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는 눈이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유곽에서도 당황한 척 얼굴을 반쯤 돌리고 있었으니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데다 그게 아니어도 지금 여기서 말쑥한 옷차림으로 자신들을 쫓아와 있는 게 바로 전 침대 위에 있던 자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안은 소란스럽고 스무 개 남짓한 테이블 간격도 그리 가깝지 않아 옆 테이블에서 무슨 얘길 하는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사람 많은 데서 의뭉스러운 일을 떠벌릴 만큼 완전히 조심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종업원이 가져다 준 식사가 나올 때까지 그들은 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
이 자들이 왜 이 술집에 왔는지, 단순히 요기를 할 생각에 들른 것인지 아니면 혹 여기서 또 누군가 만날 작정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우왕좌왕하는 어설픈 행동이 아무리 봐도 조무래기들이 분명하니 이들을 잡는다고 해도 제대로 배후를 케낼 수는 없을 건 뻔하다. 그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이왕이면 누군가 다른 만날 사람이 있길 바라며 락터드는 종업원이 가져다 준 컵을 들어 올렸다.
대강 식사를 마친 그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 마시는 척하며 옆을 지나가는 남자들과 반대 방향으로 락터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조금 돌렸다. 다행히 더 다리품을 팔 운은 아니었는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남자들은 그대로 술집 입구 오른쪽에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컵을 내려 놓으며 락터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2층 끝에 나 있는 계단으로 올라와 왼쪽으로 이어진 복도를 기척 없이 걸어 열 두 개의 방문을 지나쳐 락터드는 그 중간에 있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조용히 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문 밖으로 둔탁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전부 다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중간 중간 필즈 자작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얼핏 귀에 들어왔다.
역시 이 자들은 필즈 자작과 관련되어 알드린 영주가 보낸 자들인 듯 했다. 만에 하나 영주가 페우스 경에게 말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이 자들을 자신과 데이먼쪽에 보낸 거면 필즈 자작 쪽에도 이미 사람이 갔을 수도 있었다.
‘데이먼 쪽에 별 일 없어야 겠군.’
잠깐 그 생각을 하는데 또 다시 얘기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그도 아는 이름이 흘러 나왔다.
글렌 후작의 이름에 락터드는 멈칫했다. 이런데서 들을 줄은 몰랐던 이름이다. 아시오트 글렌 후작. 수도에서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신흥세력 중 한 명으로 여기서 거론되는 것이 뜻밖인 인물이었다.
무슨 얘길 하는 지 자세히 듣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서는데 갑자기 문 너머 목소리가 뚝 끊겼다. 수상한 기척을 눈치 챈 건지 단숨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문에서 떨어진 락터드가 복도 반대쪽 모퉁이 너머로 몸을 숨기는 것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아차..’
그런데 숨어든 곳은 칸막이처럼 벽이 좀 튀어 나와 있던 곳일 뿐 계단으로 이어진 곳이 아니었다. 계단은 아까 락터드가 올라왔던 복도 반대쪽에만 있는 구조다. 복도에서는 이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가만 있다간 그대로 들킬 판이었다.
‘어쩔 수 없군.’
이왕이면 배후를 확인하고 남자들을 잡을 생각이었지만 들키면 일단 때려 눕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방에 있는 남자들을 잡아 입을 열게 만드는 수밖에.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소리 없이 락터드는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갑자기 복도 저쪽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모퉁이에서 나와 락터드는 제일 가까이 있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잠겨 있지 않은 문 뒤에 서서 기척을 감춘 채 락터드는 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죄송합니다.”
당황스런 기색의 여자 목소리와 함께 떨어진 그릇들을 챙기는 건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채 잠시 동안 달그락 거리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곧 발소리가 락터드가 숨어 있는 문 앞을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방금 전 락터드가 있던 모퉁이 쪽을 확인해 보려고 남자가 그리로 걸어가는 듯 했다. 아무도 없는데도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았는지 거기서 잠깐 서 있는 듯 발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혹시 남자가 자신이 숨어 있는 방문을 열어 볼 것에 대비하고 있는데 복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오셨습니까."
발소리가 이쪽에서 서둘러 멀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기다리십니다.”
남자의 기척이 조금씩 멀어지자 문 옆에 몸을 기댄 채 소리없이 락터드는 밖을 보았다. 문틈 사이로 아까 남자가 나왔던 방 안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인상이 매서웠고 눈이 날카롭다. 갑옷을 입고 있지는 않아도 기사이거나 적어도 살의에 익숙한 남자로 보였다.
대하는 태도를 보니 저 자가 남자들의 명령권자일 것이다. 그러니 저 자를 잡아 배후를 확인하는 게 더 확실하다.
문이 닫히자 락터드는 복도로 나왔다. 어디서 온 놈인지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수도에서 기사단장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자신들을 쫓는 건 제법 간이 큰 행동이었고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가 배후에 있을 게 분명했다. 이를 테면, 아까 이름을 들었던 글렌 후작이라든지...
'거기까진 지나친 생각인가..'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우며 락터드는 옆을 보았다. 정리가 끝났는지 양 손에 쟁반을 든 채 여자가 이제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고 몸을 돌리는 게 보였다. 그런데 무심코 쳐다본 거지만 그 얼굴이 익숙해 그의 시선이 잠깐 그녀에게 머물렀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아까 전에 유곽에 자작의 말을 전하러 왔던 여자였다.
락터드가 소리 없이 복도로 나와 그가 있는 건 눈치 채지 못한 건지 그녀는 이쪽은 보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또 보다니. 그냥 우연이 과한 것인가.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러나 만에 하나 우연이 아니라면 역시 데이먼 쪽도 함정일지 모른다는 걸 의심해 봐야한다. 그러나 지금은 먼저..
남자들이 있는 방앞으로 가 락터드는 문에 손을 댔다. 기다리던 사람이 온 것 같으니 더 숨어 있을 이유도 없고 함정이든 아니든 데이먼이 준 시간을 넘기지 않으려면 이제 에머리로 가봐야 했으니 꾸물거릴 필요가 없었다. 잠겨 있지 않은 문을 그가 벌컥 열었다.
락터드가 안으로 들어가자 안색이 바뀌며 남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 놈이냐?"
그 중 아까 여관에서 남자들을 이끌던 자가 그를 향해 고함쳤다.
"내가 할 소리 같은데."
락터드가 응수했다.
"너희들이 누구 수하인지 들어야겠다."
말하는 동안 검을 뽑아 주위를 둘러싸는 남자들에게는 아랑곳 하지 않으며 락터드는 가장 나중에 도착한 남자를 보고 있엇다.
"어째서 나와 내 동료를 따라왔는지도."
그의 시선이 꽂혀 있던 남자는 락터드가 들어왔을 때부터 전혀 동요가 없었다. 척봐도 보통 놈은 아니다. 이 방에서 제대로 상대할만한 자가 있다면 아마 이 자뿐.
락터드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동안 나머지 남자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락터드와 헤어져 에머리로 온 데이먼이 필즈 자작을 만난 것은 저녁이 다 돼서 였다. 여자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데이먼이 에머리로 들어서자마자 자작은 마을 어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작이 안내한 외딴 인가로 들어온 뒤 데이먼은 미행을 당한 일과 락터드가 지금 그들을 쫓아갔다는 말을 그에게 전했다.
“여기도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누가 배후인지 아직 몰라도 수도의 칙사를 뒤쫓아 올 정도니 필즈 자작의 움직임은 아마 파악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데이먼이 말했다.
“차라리 오스티아로 들어가는 게 나을 지도 모릅니다.”
오스티아 영주는 현재 인척 싸움에 휘말려 자영국을 비우고 있다. 영주가 없으니 일단 알드린 영주와 연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그게 아니어도 알드린 영주 역시 자영국이 아닌 곳에서는 함부로 움직이기는 어려울테니 피해있으려면 차라리 그곳이 나았다.
“그러고 싶지 않소.”
난감한 얼굴로 필즈 자작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영주국 일로 공연히 오스티아 영주님께 누를 끼칠 수는 없으니..”
그는 말했다.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 이곳에서 해결을 봐야지.”
좋게 말했으나 뜻은 확고했다. 사실 그것도 맞는 말이라 더 권하지 않고 데이먼은 어떻게 할지 잠시 생각했다.
“알드린 영주가 수도에 있는 세력과 결탁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서신이 한 장 있소.”
끄덕이며 자작은 말했다.
“수도의 누군가에게 매달 비단과 금괴를 보내겠다는 확인서 같은 거였소.”
“누구에게 인지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문서 전체를 읽지 못해 누구에게 보내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소.”
자작은 말을 이었다.
“좌우간 그 일로 작년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세를 걷고 있으니..”
안색이 어두워지며 중얼거리는 자작의 옆에서 데이먼은 잠시 생각했다. 락터드가 돌아와 야 자세한 사항을 정할 수 있지만 어쨌든 다음에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서신은 어디다 두셨습니까?”
“성에 있소.”
“빼앗길 위험은 없습니까?”
“아무도 모르는 성벽 귀퉁이에 보관해 두었소. 그걸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나 말고 없을 거요.”
대답 하는 소리에 데이먼은 끄덕였다.
“그럼 일단 그곳으로 가서 문서를 찾고 내용이 확실하면 수도에 연통을 해 기사단을 보내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알드린 영주를 잡으면 배후는 그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데이먼은 오두막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저녁이 되어 이제 날이 어둑해지고 있다. 락터드가 혼자 남자들을 따라 간지도 이미 반나절이 지났다. 밤이 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찾으러 간다는 말에 락터드는 농담으로 응수했지만 데이먼은 진심이었다.
여간해서 그가 못 돌아올 리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러나 기사에게 있어 죽음이란 건 인생의 동반자처럼 늘 가까이 있으면서 훨씬 더 작은 일로도 닥쳐오곤 했다.
서신을 찾아야 했으니 어차피 가만 있을 시간도 없다. 말한대로 움직일 거란 걸 락터드도 알고 있을테니 지금부터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라고 데이먼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두막 밖에서 길게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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