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1-58.
한 동안 넋 놓고 있다가 계속 그러고 있는 것도 엘리어트에게 좋은 꼴 보이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두 달 만에 데이먼은 포도밭으로 갔다. 수확을 끝내고 수확한 포도로 포도주를 만드는 걸 마무리한 뒤 그 때 이후 오두막이나 포도밭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산길을 따라 올라오다 길옆에서부터 시작되는 포도밭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줬는데 의외로 밭이 잘 정리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데이먼은 자리에 섰다. 엘리어트가 산에 갔다 온다고 하는 말을 잠깐 하긴 했지만 며칠 한 것치고는 상당히 깔끔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그렇게 밭을 보고 있다가 오두막 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자 고개를 돌려 데이먼은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지하에서 이어지는 계단을 통해 엘리어트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새 다 정리한 거냐?”
위로 올라오는 엘리어트를 향해 물으며 데이먼은 오두막 안을 쓱 한 번 보았다. 두 달 전에 비해 밭이나 오두막 모두 말끔해져 있었다.
“계속 그냥 둘 수는 없어서요.”
엘리어트가 대답했다.
“그렇구나.”
깨끗이 닦인 채 통들은 계단 옆쪽에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지하로 가져다 놓는 중이었는지 엘리어트가 통을 들어 올리자 데이먼 역시 중간 크기의 통을 들고는 지하 계단을 쪽으로 걸어갔다.
위에 있는 통을 전부 아래로 내려다 놓고 엘리어트는 지하 창고 한 쪽에 크기대로 다시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엘리어트가 그러는 동안 한숨 돌릴 기색으로 데이먼은 계단 한 쪽에 앉고 있었다.
“엘리어트.”
계단에 앉아 통을 쌓아 두고 있는 엘리어트를 보며 데이먼은 입을 열었다.
“수도에 친분 있는 기사들이 좀 있다.”
이대로 마냥 계속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결정을 해야 한다.
“원한다면 편지를 써주마. 그럼 기사 수업을 계속 하는데 문제없을 거다.”
친분있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기사들이 수도에 있었다. 그리고 테이드로 갔던 기사들도 돌아와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켈리머스 정도면 엘리어트를 받아줄 것이고 엘리어트 역시 수업을 받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어떠냐?”
데이먼은 엘리어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말을 듣고 있는 기색이긴 했지만 엘리어트는 대답이 없었다.
“그럴 생각은 없는 거냐?”
이쪽을 향해 엘리어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데이먼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엘리어트가 쉽게 그러겠다고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사실 알고 있었다.
“그럼 어쩔 셈이냐?”
나직히 그는 말했다.
“이대로 포도주나 만들며 지낼 순 없지 않니.”
“... 수도로 가진 않을 거예요.”
오크통을 옆으로 해 쌓아둔 통 위로 올리며 엘리어트는 말했다.
“그럼?”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그를 보다가 문득 그 기색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데이먼은 눈을 크게 떴다.
“엘리어트, 너 설마 아직도 북쪽 지방에 가고 싶은 거냐?”
여전히 대꾸가 없자 데이먼은 다시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그 소식을 듣고, 그가 보기에 엘리어트는 슬퍼하거나 넋이 나가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건 아마 스승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실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크통을 위로 쌓아 올리는 엘리어트를 데이먼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대로 계속 이곳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스승을 사지로 몰았다는 자책과 함께 결론을 내지 못하고 계속 괴로워할지 모른다.
이 자리에 있으면 반대하겠지만 이제 엘리어트를 위해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데이먼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한 번은 자네가 져줘야 할 것 같아.’
잠시 후 천천히 데이먼은 입을 열었다.
“새디 녀석은...”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엘리어트가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네가 전쟁에 나가는 게 이르다고 했지.”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은 끝을 보이고, 그러니 만약 네가 스승이 목숨을 바친 곳이 어떤 곳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데이먼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래 나는 잡지 않으마.”
통을 붙잡고 있는 엘리어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직히 데이먼은 덧붙였다.
“어쩌면 그래야만 하는지도 모르겠으니 이제.”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계단에서 몸을 일으켰다.
“난 나가서 밭이나 확인해야 겠다. 정리 끝나면 돌아가게 나오거라.”
엘리어트가 혼자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그는 계단 위를 올라 갔다.
데이먼이 나가고 자리에 가만히 엘리어트는 서너 칸으로 쌓아둔 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스승의 이름을 귀로 들은 것이 벌써 몇 달 만이었다. 데이먼도 그도 지난 두 달 간 한 번도 그 이름을 꺼낸 적 없었다.
눈앞에서 보지 못해서 일까. 스승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아 눈물은 단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줄곧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스승이 그곳으로 가는데 조금이라도 자신이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달 동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눈으로 확인 해야만 했다. 어째서 스승님이 거기로 갈 수 밖에 없었는지, 그런 곳에서 왜.. 그러셔야 했는지. 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승의 죽음을, 인정할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갑자기 코가 매워져 엘리어트는 헛기침을 했다. 몇 번 계속해서 기침을 했지만 매운 기는 가시지 않았고 가슴은 더욱 매여 왔다. 기침 소리가 계속해서 창고 안에 퍼졌다.
레사와 함께 저녁 식사 시간에 쓸 나물 몇 가지를 숲에서 캐오다가 데비는 서고 근처에 누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엘리어트가 서고에 들르는 것은 오랜만이라 그녀는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이거 좀...”
그녀는 레사에게 들고 있던 바구니를 넘기려고 했다.
“아가씨. 저도 두 개나 들고 있단 말이에요.”
불평에 바구니를 넘기지 못하고 데비는 다시 손에 쥐었다. 일단 부엌에 갔다 온 뒤에 서고에 가보야 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샛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부엌에 갔다가 바로 나오려고 했지만 오늘 따라 저녁 준비가 분주해 도와주고 오느라 시간을 지체한 뒤 데비는 서고에 왔다. 그러나 서고문이 이미 잠겨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의아해졌다.
벌써 돌아갔나.. 그녀는 주위를 살펴 보았다. 엘리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겨 있는 문을 손으로 다시 한 번 밀어보다가 아쉬운 김에 서고에나 잠깐 들어 갔다 나오려고 데비는 문 옆에 걸려 있는 작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러다 상자 안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멈칫했다.
벽에 매달린 작은 상자는 서고의 열쇠를 보관하는 것이었으나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그 안에 열쇠가 두 개 다 들어 있던 적은 없었다. 은으로 만든 두 개의 작은 열쇠가 가지런히 거기 놓여 있는 것을 데비는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왜 여기 와 계세요? 남작님이 찾으시는데.”
그녀가 어디 있을 지는 안봐도 뻔했는지 서고 앞으로 쪼르르 달려오며 레사가 말했다. 그러나 대꾸없이 조용히 상자를 들여다 보고 있는 데비의 기색에 의아한 듯 그녀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아무 것도 아냐.”
나직하게 대꾸하며 데비는 곧 상자 뚜껑을 닫았다.
서고에서 나온 엘리어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을을 빠져 나가려다가 시장 입구쪽에 있는 책방이 보이자 그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책방 앞에 좌판을 내놓은 채 그 옆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있는 기스터 할아버지가 보였다.
“할아버지.”
좌판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기스터 영감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엘리어트가 다시 그를 불렀다.
“할아버지.”
“으, 응....??”
기스터 영감이 조금 움찔하며 눈을 떴다. 잠이 덜 깼는지 입맛을 쩝쩝 다시며 그가 앞을 쳐다 보았다.
“엘리어트 아니냐?”
엘리어트는 영감님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죄송해요. 주무시는데...”
“아냐. 나 안 잤어.”
당치도 않다는 듯 기스터 영감이 손을 내저었다.
“왜, 책 필요 허냐?”
입가에 묻은 침을 쓱 닦아 내며 영감이 묻는 소리에 엘리어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엘리어트는 말했다.
“저, 당분간 여기에 못 올 거 같아요. 그래서 인사 드리러..”
기스터 영감이 의아한 눈을 했다.
“어딜.. 가는 게냐? 엘리어트.”
“엘리어트!”
등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버네드가 이쪽을 향해 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아넷한테 들었는데 더 이상 우리 가게에 목재 안 대겠다고 했다면서?”
서고에 들르기 전에 버네드 씨의 제재소에도 갔다 왔다.
“아저씨.”
“대체 어째서냐?”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서는 버네드 씨가 말했다.
“혹시 장작값 때문이냐?”
장작 시세가 요 근래 많이 올랐지만 엘리어트와 거래하는 가격은 그대로였던 걸 생각하며 그는 말했다.
“나도 올려줄 생각은 하고 있었어. 깜박한 거야.”
버네드 씨는 울컥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 때문이냐,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뭐야?”
여전히 화난 얼굴로 버네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뭐 서운하게 한 거라도 있냐? 나 목소리만 크지 나쁜 마음은 없다.”
그의 기세에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곧 엘리어트는 말했다.
“저.. 마을을 떠날 거예요.”
“뭐?”
버네드 씨가 멈칫했다. 기스터 영감도 움찔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오티어로 가려고 해요.”
엘리어트의 눈동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단호했다.
"야, 엘리어트."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깨닫고 버네드 씨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오티어면 북쪽 지방 아니냐? 지금도 아직 시끄럽다고 하던데, 설마 전장에라도 나가겠다는 거냐?”
“뭐, 전장?!”
기스터 영감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말을 막으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안 된다 안 돼, 엘리어트.”
“영감님, 아 좀 가만히 있어 보세요.”
머리가 아픈 듯 버네드가 그를 향해 크게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려고 애를 쓰며 그는 다시 엘리어트를 쳐다보았다.
“그 뭐냐, 네가 기사 수업을 받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정식으로 서임식을 한 건 아니잖냐?”
버네드는 그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넌 아직 어려. 지금 그런데 가면 개죽음 당할 거야.”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여?”
기스터 영감이 화가 난 듯 그의 앞에서 주먹을 휘둘러 보였다.
“아, 상황을 사실대로 말한 거라구요 영감님.”
버네드가 그를 피해 몸을 사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조심할거에요. 그러지 않도록.”
엘리어트가 목소리에 버네드와 기스터 영감이 그를 보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두 사람을, 엘리어트는 조용히 응시했다.
“할아버지도 버네드 아저씨도, 저 잊지 않을 거예요 정말.”
기스터 영감과 버네드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의외로 그가 고집이 있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아넷 아주머니한테 인사 부탁드려도 되요? 뭐라고 해야 될지 잘 몰라서... 아까는 말을 못했어요.”
곤란한 얼굴로 버네드를 향해 엘리어트가 다시 말했다.
“그런 말을 했다간 난리를 쳤을 거다.”
버네드는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을 긁적였다. 내키지 않는 어조로 그는 말했다.
“꼭 다시 우리 집 들러라, 알았지? 그 때 더 얘기하자.”
잠시 그를 보고 있다가 엘리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을 다물며 그는 여전히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기스터 영감과 골치 아픈 얼굴로 뒷머리에 손을 대며 자신을 보고 있는 버네드 씨를 가만히 마주 대했다.
며칠뒤. 저녁이 다 될 쯤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부엌에서 나온 데이먼은 가게 한 쪽에 서 있는 엘리어트를 보았다. 말없이 엘리어트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자 데이먼은 때가 됐다는 걸 알았다.
“오늘 갈거냐?”
엘리어트는 고개를 끄덕했다.
“네”
말을 꺼낸지 삼일 만이었다. 하지만 사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묻지 않고 벽장 앞으로 걸어가 데이먼은 그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고 와 엘리어트가 서 있는 탁자 앞에 내려 놓았다.
“이거 가져 가라.”
제법 묵직한 꾸러미였다.
“먼 길을 가야될 테니 필요할 거다.”
주머니를 보고 있다가 엘리어트는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잠깐 있다가 나직히 엘리어트가 다시 말했다.
“죄송해요.”
데이먼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뭐가 말이냐?”
대답없이 안색이 어두운 그를 보다가 데이먼은 찡그렸다.
“설마 내 걱정을 하는 거냐?”
그가 투덜거렸다.
“새디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보모들도 아니고 이거야 원..”
푸념하는 투로 말하고는 데이먼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리어트를 가만히 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 엘리어트. 그리고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고. 그래서 말리지 않는 거다.”
나직히 그는 말했다.
“널 말릴 수는 없어도 널 믿는다.”
그는 말을 이었다.
“조심해라. 어디에 있든지.”
데이먼의 말을 들으며 엘리어트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 떴다.
창가에 서서 이제 저녁 해가 지는 밖을 데비는 잠깐 응시하고 있었다. 요즘은 이렇게 지는 해를 보고 있는 게 버릇이 되고 있었다. 석양에 잠긴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을 응시하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조금은 달래졌다.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밖을 보다가 그녀는 문득 성문과 이어지는 다리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어?”
거기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을 보고 데비는 눈을 조금 동그랗게 떴다.
“엘리어트.”
서둘러 성 밖으로 나와 데비는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나 만나러 온 거야?”
“응.”
“왔으면 들어오지. 왜 여기에...”
말을 하던 그녀는 문득 그가 온 게 평소와 다른 용건이 있기 때문일 거란 느낌을 받았다.
“할 말.. 있는 거야?”
조심스럽게 그녀가 물었다.
“..응.”
조용히 엘리어트는 말했다.
“나, 오티어로 가려고 해.”
열쇠가 다시 돌아와 있을 때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걸 그가 직접 말하자 데비는 가슴 한 쪽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으, 응.”
그녀는 숨을 훅하고 들이 마셨다. 애써 밝은 기색으로 그녀는 말했다.
“내일 아침에 가도 되잖아. 오늘 벌써 늦었는데.”
“.....”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작게 데비는 중얼거렸다.
“더이상 가만있을 수가 없는 거구나.”
두 달 동안 엘리어트를 보며 느꼈던 불안한 기분의 정체가 이것이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물었다.
“오티어로 가면, 거기서 계속 있을 거야?”
“모르겠어 그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고.”
스승은 자신이 테이드로 가는 걸 반대했다. 그 말에 거스르지 않기 위해 당장 테이드로 가진 않을 것이다. 일단 오티어가 거기서 어떻게 할 지 다시 생각을 해 볼 것이다.
“그렇구나..”
말문이 막힌 얼굴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엘리어트. 잠깐만..”
그러다 그녀는 엘리어트를 향해 급히 말했다.
“잠깐 여기 있어봐.”
몸을 돌려 갑자기 다리 위를 뛰어가는 그녀를 뒤에서 엘리어트가 가만히 보았다.
“알았지? 아직 가면 안 돼.”
길게 말을 남기며 그녀가 급하게 성으로 다시 뛰어 들어 갔다.
잠시 후, 다시 성문 밖으로 뛰어 나와서는 그가 아직 자리에 있는 걸 보고는 다행이라는 듯 크게 숨을 들이 마시며 데비가 그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면서 엘리어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거..”
엘리어트는 그녀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바닥 위에 은으로 된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작은 은열쇠가 그 중간에 걸려 있다. 아직도 조금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는 말했다.
“부적이야.”
지난 7년간 그가 항상 지니고 다녔던 이스릴 성의 서고 열쇠. 닦았는지 깨끗하게 반짝거렸다.
“가지고 있으면 돌아와서 반드시 다시 서고문을 열게 해 줄 거야.”
그 열쇠를 엘리어트는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서둘러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데비는 애써 밝게 말했다.
“아저씨, 십 년도 넘게 그 곳에 계셨다고 했는데....”
생각을 떠올리는 얼굴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십 년이면.. 그 정도 지나면 난 스물 다섯이네. 어른이 되 있겠구나.”
신기하다는 듯 데비는 덧붙였다.
“엘리어트는 스물 여섯이야. 상상이 잘 안 가. 어떤 모습일지.”
엘리어트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보자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떠난다고 해도 그 모습을 볼 수는 있겠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데비는 엘리어트를 다시 응시했다.
“엘리어트.”
그녀는 물었다.
“언젠가 돌아올 거지?”
밝은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나는 십 년 정도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입을 다문 채 엘리어트는 데비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이상은 곤란해.”
난감하다는 투로 데비는 말했다.
“그 이후에 만나면 못 알아 볼 수도 있잖아. 엘리어트가 이상하게 변했을 수도 있고 내가 뚱뚱하고 못생겨져 있을 수도 있고..”
그녀는 웃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 돌아오면, 최소한 그러기 전에..”
말을 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어느새 바로 앞으로 걸어와 고개를 숙여 엘리어트가 자신에게 입맞춤 하고 있었다.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왔다.
잠시 후 고개를 들고는 엘리어트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잘 있어.”
그녀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나직히 그는 말했다.
“데비.”
7년전 그 숲에서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데비의 맑은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뒤로 하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발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자 움켜 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한 발 뒤로 물러나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는 데비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더욱 주먹을 꽉 움켜 쥐며 엘리어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성큼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하고 있다가 그제야 데비는 고개를 돌렸다. 성에서 이어진 길 저쪽으로 엘리어트가 멀어져 가고 있다.
“엘리어트..”
이윽고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에 조금씩 눈물이 고였다.
긴 말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 뒤로 창과 방패를 든 보병단이 말꽁무니를 따라 걷고 있었다. 행렬은 대륙의 북동쪽, 카데라에서 접경지역인 발디스로 가는 길을 따라 며칠에 이르는 행보를 하고 있었다.
“저녁까지 이센으로 이동한다.”
행렬의 맨 앞에서 말에 타고 있던 남자가 뒤돌아 소리쳤다.
“이동한다.”
중간 중간 말을 타고 있던 기사들이 남자의 말을 전달 받아 행렬의 가장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며 말을 전했다.
지휘관들이 앞에서 멈춰 서자 따라서 멈춰서는 길가에 선 채 잠깐 쉬다가 선두에 선 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멈춰 서 있던 보병들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줄창 걷기만 하다간 길에서 죽겠네, 젠장.”
중간에서 창을 든 채 걷고 있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소년을 향해 말을 건냈다.
“안 그러냐? 꼬마야.”
“... 네.”
그의 말에 조용히 대꾸하고는 소년은 곧 입을 다물고는 걷기를 계속했다. 재미없다는 얼굴이 되어 남자가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투덜댔다.
들고 있던 방패가 흘러내리려 하자 다시 한 번 들쳐 매며 엘리어트는 앞으로 이어져 있는 행렬을 쳐다보았다. 남자의 말대로 꽤 오랫동안 행군을 계속했다. 입고 있는 옷이나 신발도 흙먼지로 엉망이 된지 이미 오래였다.
“좀 더 빨리 움직여.”
말을 탄 기사들이 왔다 갔다하며 보병들과 용병들을 재촉하자 엘리어트는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걸을 때마다 목에 걸린 목걸이 끝에서 은열쇠가 조금씩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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