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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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와 함께 천둥 번개가 몰아치던 하늘이 일순 조용해지더니 조금 전부터는 부슬부슬 내리던 비도 그쳤다. 나루터에 사람이 없다.
몇 명 돌아다니던 선원들도 묶어둔 배를 확인하고 나자 할 일이 없었는지 곧 나루터에서 사라졌다.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묶어둔 배들이 물결을 따라 조금씩 옆으로 출렁거릴 뿐 나루터는 조용했다.
“영주 기사단이 펜까지 내려왔어.”
남자는 두 척의 뱃머리 사이 후미지고 어둑한 나루터 한 쪽에 서 있었다.
“근경 마을이니 여기서 금방이지.”
“다 같이 굶는 처지에 좀 나눠 먹자는데 토벌은 염병.”
남자의 옆에서 쭈그려 앉아 있던 다른 사내가 바닥에 거하게 침을 뱉어냈다.
“굶어죽기 싫은 건 매한가지인데.”
남자가 체격이 왜소해선지 앉아 있는 다른 사내는 덩치가 남자의 두 배쯤 되 보였고 등에 헝겊으로 둘둘 만 뭔가를 매고 있어 그것 때문에 뒤에서 봤을 때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짐승이 앉아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작은 남자의 입 가장자리가 경련이라도 일어나듯 실룩거렸다.
“그러니 우리 몫은 우리가 챙겨야지.”
“여기는? 진짜 쓸만한 게 있긴 해?”
“물건을 팔고 돌아오는 자들이 꽤 되니 돈푼께나 있는 자들이 있지 않겠어?”
팔짱 낀 손을 풀어 팔을 내리며 남자는 말했다.
“아니어도 이제 와서 어쩌겠어. 있는 대로 바닥까지 긁어 봐야지.”
덩치 큰 사내가 남자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배는?”
“곧 들어올거야.”
마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두 사람은 방금 전 다른 배를 이용해 이 마을에 도착했다. 나머지도 곧 여기로 들어올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윌더른이 지척인데 괜찮을까?”
“전령을 막았으니 여기로 내려온 줄은 모를 거야.”
찜찜한 얼굴로 묻는 소리에 남자가 대꾸했다.
“눈치 채고 달려올 쯤엔 이미 우린 없을 거고.”
남자는 바람이 불어 출렁이고 있는 배를 힐끔 쳐다보았다.
“혹시 모르니 이제 마을에 가서 낌새나 살피자고.”
“그래.”
끄응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두 사람이 배 사이에서 앞으로 나왔다. 그러다 덩치 큰 사내가 갑자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 아니야.”
잠시 있다 곧 대꾸하자 이상하다는 듯 그를 보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남자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다시 뒤를 돌아보다가 이내 그도 남자를 따라갔다. 두 사람의 걸음 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했다.
배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숨죽여 서 있던 엘리어트는 발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옆을 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남자들이 사라진 걸 확인한 뒤 엘리어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니면 도적단이 탄 배가 이제 곧 마을로 들어온다는 뜻이다.
도적단이 마을을 습격할지도 모른다니.. 빨리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퍼득 정신을 차리며 엘리어트는 배옆에서 앞으로 뛰어 나왔다. 그 순간 뭔가가 바람을 가르며 그를 향해 날아왔다. 바람 소리를 듣고 엘리어트가 재빨리 옆으로 비켜나자마자 그의 옆을 지나쳐 뭔가가 배에 꽂혔다. 엘리어트는 바로 옆에 꽂혀 흔들리고 있는 단검을 보았다.
“설마 했는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천천히 남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기척도 감출 줄 알고, 제법이다 꼬맹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남자를 보다가 엘리어트는 옆으로 다시 한 발 비켜났다.
덩치도 커다란 남자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것이 덩치에 비해 몸을 가볍게 움직일 줄 아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맞았는지 엘리어트가 무심코 살짝 움직이자 그 틈을 타 쏜살같이 달려와 남자가 엘리어트를 향해 도끼를 내리 찍었다. 바닥을 굴러 엘리어트가 간신히 옆으로 비켜났다.
큰 소리와 함께 바닥에 박혀 있는 도끼 자루를 보고 엘리어트의 안색이 변했다. 남자가 등에 매고 있던 것은 두 자루의 도끼였다. 그 중 다시 한 자루를 손에 들고 남자는 엘리어트를 향해 달려 들었다. 육중한 도끼가 공중에서 이리 저리 움직였다. 덩치에 맞게 남자는 도끼를 아주 가볍게 다뤘다.
남자를 피해 물러나다가 등이 제방에 쿵하고 부딪치자 엘리어트는 자리에 멈춰섰다. 뒤로 물러날 데가 없었다. 얼굴에 긁힌 상처에 피가 베어 나와 한 손로 쓱 문지르며 엘리어트는 도끼 자루를 손에 든 채 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수련할 때도 힘에 부칠 때까지 내몰린 적은 있지만 살의를 가지고 덤비는 상대와 대면하는 건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도끼자루가 내리치는 것을 옆으로 피하자 도끼자루가 그대로 제방 역할을 위해 쌓아둔 포대 자루에 박혔다. 자루가 주욱 찢어지며 안에서 모래가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고양이 새끼처럼 날래긴 하다만은..!”
옆으로 비키는 엘리어트를 향해 다시 도끼를 내두르며 남자가 또 거리를 좁혀 들어 왔다. 도끼날 끝이 엘리어트의 옷자락을 스치며 빗나갔다.
도끼에 찍히지 않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엘리어트는 정신없이 주위를 보았다. 나루터는 저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남자를 이길 수는 없다. 갑자기 엘리어트가 나루터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친다고 생각했는지 도끼를 휘두르며 무자비한 기색으로 남자도 엘리어트를 쫓아왔다.
남자에게 잡힐 듯 말듯한 간격을 두고 달려 나루터 끝까지 뛰어온 엘리어트는 순간적으로 자리에 섰다. 막다른 길에 몰려 엘리어트가 멈췄다고 생각했는지 뒤에서 쫓아오던 남자가 그대로 엘리어트를 향해 도끼를 내리치는 순간 엘리어트가 재빨리 옆으로 비켰다. 달려오던 기세를 멈추지 못하고 몸이 앞으로 쏠린 남자가 무게를 못 이겨 그대로 물속으로 빠졌다.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었다.
“젠장! 야 이...!”
헤엄칠 줄은 몰랐는지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남자가 악다구니를 썼다. 그 모습을 보며 숨을 고르다가 몸을 돌려 엘리어트는 다시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저녁 준비를 마치고 사람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루씰은 다시 밖을 보고 있었다.
“레미가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비는 그치고 이제 바람만 세게 불고 있다.
“버르만이 데리러 갔으니 괜찮을 거다.”
투쓰 영감의 말에 루씰은 아버지를 보았다.
“버르만이요?”
“그래.”
왜 그가 레미를 데리러 갔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더 이상 묻지 않고 루씰은 바람이 불고 있는 밖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다가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영감은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어떻게 생각하니?”
“뭘요?”
“실없는 소리는 좀 해도 나쁜 녀석은 아니야.”
루씰이 여관 일을 도맡아 하고 있어 마음은 놓였지만 이제 서른셋인 딸을 남은 평생 혼자 살게 할 수는 없었다.
“레미도 잘 따르고.”
그제야 루씰은 말뜻을 알아 들었다.
“아버지도 참 별 말을 다하세요.”
루씰로서는 버르만이 하는 말을 여관에 드나드는 다른 장사치들이 하는 소리처럼 다소 짓궂은 농담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게 좀 뜻밖이었다.
“그런 말 괜히 레미한테 하지 마세요. 애 오해해요.”
덧붙이며 그녀는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바람만 불더니 어느새 다시 번개와 천둥이 치며 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 전인데도 이제 하늘은 어두컴컴해 밤이 된 것 같다.
레미가 빨리 집에 돌아오길 바라며 다시 들창을 닫으려는데 식당 쪽이 소란스러워 그녀는 반사적으로 돌아 보았다. 부엌에서 식당으로 이어진 문을 통해 레미와 비슷한 또래 소년이 비에 홀딱 젖은 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전력을 다해 여관으로 뛰어와 안으로 들어온 엘리어트는 식당 입구 근처에 서서 잠시 숨을 헐떡였다.
한시가 급한 일이었지만 어떻게 말 해야할지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엘리어트는 망설였다. 잘못 말을 꺼냈다 정신 나간 꼬마의 헛소리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구한테 해야 믿어줄지 판단이 서지 않아 막막한 얼굴로 그는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여섯 개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청년들이나 중년 남자들이다. 숨을 한 번 더 고르며 엘리어트는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어쨌든 빨리 말을 해야 한다. 모두한테 얘기하면 한 두 사람쯤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수도 있다.
“나루터로...”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이며 엘리어트는 말했다.
“도적단이 들어 올거에요.”
식당 안이 그리 소란스럽지 않아 그가 말을 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그쪽을 향했다.
“빨리 여기서 피해야 되요.”
다시 말하고 엘리어트는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후,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웃었다.
“꼬맹아 지금 무슨 소릴 하냐?”
“누가 온다고?”
엘리어트와 제일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이가 야유하듯 말했다.
“그런 장난 함부로 하는 거 아냐. 큰일난다?”
“장난 아니에요.”
엘리어트는 말했다.
“정말이에요.”
진지한 기색에 남자들이 다시 피식 거렸다.
“펜에서, 기사단을 피해 에보니로 내려온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엘리어트는 말을 이었다.
“배를 이용해서 좀 있으면 나루터로 들어올 거라고요.”
하는 소리가 제법 구체적이라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웃음이 살짝 멎었다.
“꼬맹아 그 말 진짜냐?”
엘리어트가 말하는 폼새가 영 거짓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는지 잠시 있다가 남자들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으로 걸어왔다.
“누구한테 그렇게 들었니?”
“나루터에 있던 남자한테요.”
엘리어트가 대답했다.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지만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남자들이 몇 마디 쑥덕거렸다.
“가보자 그럼.”
확인해 봐서 나쁠 거 없다고 생각했는지 남자들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정말 네 말이 맞는지.”
끄덕이며 엘리어트가 두 사람을 따라 나갔다.
부엌에서 식당으로 나와 엘리어트가 하는 말을 듣던 투스 영감은 남자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소년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세 사람이 밖으로 나가면서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문을 그는 잠시 응시했다
다시 나루터로 와 아까 남자가 물에 빠졌던 곳까지 뛰어 왔으나 남자는 이미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조용했다.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온데간대 없다.
“에이 뭐야..”
뒤에서 남자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이 되었다.
“너 이 녀석, 사람 놀리냐?”
“여기 있었어요 방금 전까지.”
“야, 임마.”
화를 내려는 남자 옆에서 다른 남자가 그를 말렸다.
“됐어. 잘못 들었든 어쨌든 얘도 걱정 되서 한 소린데.”
엘리어트를 향해 남자는 말했다.
“걱정 말고 가도 되겠다 이제.”
“하지만..!”
그러나 말문이 막혀 엘리어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더 뭐라고 해야할 지 할 말이 없다.
“걱정 마라 꼬맹아. 이런 날씨엔 도적들도 움직이기 싫을 거야.”
엘리어트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다시 말했다.
“가자고.”
옆에서 다른 청년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괜히 여기까지 왔네 비 다 맞고.”
투덜거리는 청년을 따라 다른 남자도 왔던 길로 가기 위해 다시 몸을 틀었다. 뒤에 남은 엘리어트는 두 사람을 보다가 나루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묶여 있는 배들만 흔들거리고 있다.
엘리어트는 아까 남자들을 떠올렸다. 어디로 갔을까. 배가 들어오길 기다린다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여관에서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을까? 근처 여관은 두 군데로 아까 소란을 피웠으니 투스에 있었다면 자신을 알아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도적단이 나루터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여관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우르릉거리는 낮은 천둥이 울리나 싶더니 얼굴로 물이 툭툭 떨어졌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다시 소나기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빗속에 서 있다가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한 번 훔쳐내며 엘리어트는 다시 여관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엘리어트보다 한 발 앞서 식당으로 돌아온 남자들이 안심하라는 듯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하고 나자 바로 엘리어트가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피해야 되요.”
아까보다 굳어진 얼굴로 엘리어트는 목소리를 높였다.
“도적단이 탄 배가 곧 들어올 거에요”
“야, 너 진짜 혼난다?”
이제 슬슬 짜증이 났는지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적당히 안 할래?”
“하지만 정말이에요.”
엘리어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정말 이제 금방...”
그러나 누구 하나 귀담아 듣지 않은 채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는 관심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막막해져서 엘리어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얘야.”
그러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정말이냐?”
엘리어트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투스 영감이 옆에 서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와 말을 하는 엘리어트를 투스 영감은 아까부터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몇 번이나 나루터를 왔다 갔다 해서 비에 홀딱 젖은 채 옷은 흙탕물이 튀어 엉망으로 지저분해져 있다. 거짓말이나 장난을 치려고 저렇게까지 할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하더냐?”
영감은 물었다.
“뭐라고 들었는지 전부 말해다오.”
진지하게 묻는 그를 엘리어트는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나무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시끄럽게 울렸다.
“갑니다 가.”
안에서 길게 목소리가 날아오고 잠깐 있다가 문이 열렸다. 투스 옆에 있는 여관 노이의 주인 남자가 문을 열고는 밖에 서 있는 투스 영감을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웬 일이슈? 이 시간에.”
저녁 시간 다 돼서 여기나 투스나 한창 바쁠 때였다.
“지금 바로 여관 사람들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가게.”
“뭔 소리여? 갑자기.”
“도적단이 오고 있어.”
뜬금없는 소리에 남자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영감. 갑자기 돌았소?”
“옆 마을에 도적이 들었단 얘기는 들었지?”
영감은 말했다.
“거기서 여기까지 먼 거리가 아니니 기사들에게 쫓기면서 이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네.”
영감은 말을 이었다.
“아직 괜찮지만 곧 들이 닥칠 거야.”
얼떨떨한 얼굴로 영감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곧 그가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지금.”
“오늘밤 손해가 나면 여관을 팔아서라도 책임은 내가 지겠네.”
영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니 내 말 대로 해주게, 노이.”
남자는 영감을 다시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전히 이 영감이 노망이 났는지 의심하는 눈빛이었지만 방금 한 얘기가 그래도 조금은 귀에 걸렸는지 아까보다는 기색이 좀 진지해져 있었다.
“아, 참나..”
한참을 생각하다가 잠시 후 남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남자는 영감과 그 옆에 서 있는 엘리어트를 다시 찬찬히 보았다. 정말 노망이 났을지도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 사십 년 간 장사해 온 늙은이였다. 그냥 무시하기 어려운 마을의 어른이기도 했고, 또 지금까지 그의 의견에 따르면서 몇 번은 위험을 피할 수 있기도 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지만.
아직도 석연치 않은 기색으로 머리를 부비적 거리다가 못 마땅한 듯 이내 남자는 말했다.
“아니면 나중에 정말 나한테 여관 넘기게 될 줄 아슈.”
영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서 뒷집 사람들도 같이 데려가게.”
여전히 반신반의한 얼굴로 찡그리며 끄덕이고는 남자가 문을 닫았다.
“투스에 있는 사람들은요?”
남자가 말한대로 해줄 것 같자 조금 안도하며 엘리어트가 말했다.
“다시 얘기해 보고 안 갈 사람은 남아 있으라고 할 수 밖에 없지.”
여기야 영감이 직접 얘기해서 그래도 남자가 받아들인 것 같지만 투스에서는 엘리어트가 말한 것 때문에 이미 다시 설득하기가 어려웠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는 법이니.”
영감은 말을 이었다.
“서두르자꾸나. 시간이 없으니.”
끄덕이며 영감을 따라 엘리어트는 서둘러 다시 투스로 걸음을 뗐다.
다시 여관에 와서 얘기해 보았으나 역시 곧이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영감까지 나서서인지 몇 몇 사람들이 조금 전보다는 더 귀담아 듣는 기색이었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다들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영감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나서기는 했다. 잠시 후 여관 사람들과 그리고 손님들 일부가 여관 밖으로 나왔다.
"영감님. 만약에 아니면 단단히 책임져야 할 거요."
"알겠소."
으름장놓듯 말하는 손님을 향해 대꾸하며 영감은 마을쪽으로 이어진 길을 쳐다보았다.
나루터 근처에는 투스와 노이, 두 개의 여관과 여관 뒤쪽으로 집이 몇 채 있다. 길을 따라 올라가 여기서 10리그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루씰과 여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영감이 설득해서 따라 나온 여관 손님들은 곧 다리가 있는 쪽으로 발을 뗐다.
비를 맞으며 한 두 걸음쯤 걸어가다가 엘리어트는 뒤를 돌아 보았다. 여관에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다. 그들은 여관을 나간 사람들이 곧 머쓱한 얼굴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여관 안에서 웃고 떠들고 있다.
도적단이 온다면 마을로 들어간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관에 있다가는 바로 당할 것이다. 엘리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엘리어트가 입을 떼자 옆에서 걷던 영감이 쳐다봤다.
“왜 그러니?”
망설이다가 엘리어트는 말했다.
“가서 한 번 더 얘기해 보고 올게요.”
“소용없을 거다.”
“그래도요.”
결심을 굳히며 엘리어트는 자리에 섰다.
“먼저 가세요. 금방 따라 갈게요.”
몸을 돌려 엘리어트가 여관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얘야..”
말리려고 손을 뻗던 영감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엘리어트의 뒷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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