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1-45.
여관에서 나와 락터드는 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켈리머스와 상트를 만나기로 한 곳은 여관에서 좀 떨어진 시장 끝 어느 후미진 골목으로 듣는 귀와 전하는 입에 대한 걱정이 좀 덜한 한적한 술집이었다.
한참을 걸어 시장을 거의 빠져 나오자 제대로 가고 있는지 좌우를 살피고는 락터드는 길을 건넜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페우스 경이 쓰러지고 난 뒤 벌써 2년이 흘렀다. 그 뒤 겉으로는 내색 없이 굳건했지만 그가 느끼기에 페우스 경의 기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한두 해 정도만 더 기사단을 이끌 생각이었던 것이 벌써 7년이 지났으니 이 만큼 버티고 있는 것도 이미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신의 자리를 아무에게도 넘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7년 전 왕자의 실종 이후 여러 가지 일로 왕실 내에서 페우스 경의 입지가 좁아진 상황에서도 그리고 또한 글렌 후작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의 모함과 시기 어린 시선들을 곁에 두고도 그는 눈 하나 꿈쩍안하고 왕실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 점점 그 끝에 다다르고 있음을 락터드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왕성안에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좀 더 정확히 알기위해 오늘 켈리머스와 상트를 만나자고 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현재 북쪽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두 사람에게 좀 더 자세히 듣고자 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 또한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로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분쟁이 일어난 곳은 북쪽 지방에서도 가장 북쪽 끝인 테이드와 이스로 그곳은 그가 기사로서 마지막으로 전투를 치룬 곳이기도 했다. 수많은 병사와 백성들이 목숨을 잃은 그곳에서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11년간 지루하게 이어오던 북쪽 지방에서의 모든 싸움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그래서 락터드도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런 테이드와 이스에 또 다시 분쟁이 생긴 건 대략 한 달 전. 모든 영주국들이 마찬가지지만 두 영주국은 특히 더 인척관계나 혈맹 관계로 여러 영주국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런 곳에서 분쟁이 커졌다간 자칫 여러 영주국들이 한꺼번에 다시 전쟁에 발을 들이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락터드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직 거기까지는 지나친 생각이다. 북쪽 지방에서 나온 지 8년이 지났으니 필요에 의해서는 혈맹국도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는 그 곳에서 영주국간의 관계가 지금은 어떻게 바뀌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파심에 지나치게 일을 크게 생각할 필요는 아직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새 약속한 장소가 눈 앞에 있는 것을 보고는 생각에서 빠져 나오며 그는 술집을 향해 걸어갔다.
헛간에서 손님들 말을 돌보기를 끝내고 식당에 가서 대충 먹을 걸 좀 받아와 유크는 방으로 돌아왔다. 동생들에게 주니 정신없이 먹어 치우고 배가 불렀는지 방금 전 두 녀석 다 다시 낮잠에 빠져 있었다.
잠들어 있는 어린 동생들을 보다가 방 한 쪽으로 가서 몸을 웅크려 앉으며 유크는 손톱을 질겅거리며 씹었다. 언제까지 여관 뒷방에서 주정뱅이들 뒤치다꺼리를 하거나 여관에서 나오는 잡다한 일만 하며 지낼 수는 없다. 같이 일하는 청년들이 심심할 때마다 시비 거는 걸 받아주는 것도 슬슬 신물이 났다.
뭐라도 해보고 싶었고 그리고 진작부터 그는 용병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사가 더 멋있어 보이지만 귀족이 아닌 자가 기사가 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용병이라도 될 생각이었다.
용병이 되어 귀족에게 고용되거나 아님 전쟁에라도 나가게 되면 돈을 벌 수 있다. 그것도 많은 돈을. 돈을 벌면 동생들을 건사할 수 있고 전쟁터라도 나가서 공을 세우면 명성을 떨치게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시작이라도 해보려면 좌우간 어쨌든 돈이 더 있어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맨날 같이 일하는 청년들에게 얻어 맞으면서도 여관을 빠져 나와 그는 수도 외곽에 있는 술집에 자주 들렀다. 그곳은 용병들이 자주 들르는 술집으로 시장에 있는 여느 술집과 달리 분위기가 음산하고 험악해 싸움도 곧잘 일어나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꼬맹이가 재수 없게 얼씬거린다고 흠씬 맞기만 하고 쫓겨났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고개를 디밀었더니 이제는 마음대로 하라고 주인이 출입은 허락해 주었다. 그 덕에 거기서 용병들을 고용해 일을 맡기는 남자를 통해 간단한 심부름 같은 자질구레한 일을 몇 번 했고 그 덕에 푼 돈이지만 돈을 좀 얻었다.
물론 한 푼도 못 받고 맞기만 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1년을 일 하다보니 돈을 모을 수 있었고 그걸로 몇 달 전에 겨우 겨우 검 한 자루 살 수 있었다.
유크는 방 한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에 세워져 있는 낡은 검이 눈에 들어오자 손을 뻗어 그는 검을 팔에 안았다. 누가 쓰다 헐값에 판 건지 다 낡은 싸구려 검이었지만 검이 손에 들어오자 갑자기 기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은 잘 때 끌어 안고 잘 만큼 그는 행복했다.
한 팔에 검을 안고 그는 자고 있는 동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녀석 다 쌔근거리며 잘 자고 있다. ..돈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더 좋은 검을 사고 어디 가서 싸움판에라도 끼어들 수 있다. 혹처럼 달려 있는 동생 둘을 돌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포기할 마음은 없다.
다시 손톱을 씹으며 그는 생각했다. 어제 밤 술집에 갔다가 조세프 밀러 경이 체구가 작고 재빠른 소년 용병을 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래 되지 않은 따끈한 일이었는데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이미 먼저 갔던 소년 하나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조금 무서워져서 관두려고 했지만 보수가 꽤 세다는 것을 다시 상기했다. 이것 저것 가릴 거면 할 일이 없다. 쉽고 편한 일만 찾아서 하다간 스무 살이 되도 여기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유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집에 다시 가서 무슨 일인지 다시 한 번 자세히 알아 보기나 해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자고 있는 동생들이 깨지 않게 조심히 그 사이를 넘어가 유크는 방을 나갔다.
여관 밖으로 나와 엘리어트는 길을 따라 걸으며 복잡한 시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큰 길을 사이에 두고 길 양쪽으로 끝없이 가게가 이어졌다. 가게 밖으로 나와 있는 가판대들과 그 사이에서 흥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딪치지 않게 주의하며 그는 그 사이를 걸어갔다.
천천히 걸어가긴 했지만 한참 지나간 것 같은데 시장은 아직도 끝이 없었다. 진기한 물건들과 시끄러운 사람들을 구경하며 엘리어트는 발이 닿는데로 계속 시장을 걸어 갔다. 그러다가 길이 네 갈래로 나뉘어 지는 곳에 도착했다.
그 한 쪽에 커다란 대장간이 눈에 보였다. 엘리어트는 그 쪽으로 걸어갔다. 대장간 치고는 규모가 상당했다. 가게 몇 개는 합쳐 놓은 듯한 크기에 안에는 돌화덕이 열 개도 넘게 보였다.
각각의 돌화덕 앞에 서서 대장장이들이 쇠를 집어 넣고 달구고 있었다. 달구어진 쇠를 꺼내 편평한 돌판 위에 내려 놓고는 그것을 망치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땅-땅- 소리와 함께 한참을 두드린 뒤 달구어 진 쇠를 그 옆에 있는 물에 집어 넣었다. 넣자 마자 치익-소리와 함께 쇠가 식었다. 그 작업을 반복하는 것을 엘리어트는 가만히 보았다.
대장간에 대장장이들 여덟 명이 동시에 철제 기구를 연마하고 있어 쇠를 내리치는 소리가 쟁쟁할 정도로 귀를 울렸기 때문에 일부로 서서 오래 구경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그 소리가 그렇게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검을 만드는 건 예전에 다른 마을에서도 잠깐 본 적 있었지만 이렇게 여러 명의 대장장이들이 동시에 만드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손끝에서 검이 만들어지는 걸 보는 건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참 말귀 못 알아듣네. 넋 놓고 있지 말라니까.”
그러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유크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저런 거 처음 보냐? 촌뜨기 진짜..”
“저렇게 여러 개를 만드는 걸 보는 건 처음이야.”
옆으로 걸어오며 말하는 그를 보다가 곧 엘리어트가 입을 뗐다.
“하긴, 이런 커다란 대장간은 수도에나 있겠지.”
예의 뻐기는 투로 말하는 그를 엘리어트는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냐? 너.”
조용히 묻는 소리에 유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같이 일하는 청년들이 생트집을 잡을 때도 있었지만 사실 그에 못지않게 유크도 자주 일하는 곳에서 몰래 빠져 나오곤 했다.
“난 말이지 이래뵈도 용병이 돼서 언젠가 저런 검을 가지고 전쟁에 나갈 사람이야.”
별로 괜찮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을 하고 있는 엘리어트의 옆에서 유크는 말했다.
“그러니 그러려면 여관 구석에 박혀 있지 말고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를 해야되지 않겠어?”
그도 대장장이들 쪽을 쳐다 보았다.
“지금은 싸구려 검 한 자루 뿐이지만.. 두고 봐. 꼭 그러고 말테니까.”
다짐하듯 말하는 걸 듣고 있다가 엘리어트는 물었다.
“... 전쟁에 나가서 어쩌게?”
“어쩌긴. 일을 맡으면 돈을 벌잖아.”
별 건 다 묻는다는 듯 그를 향해 유크가 대꾸했다.
“공을 세우면 명예도 얻을 수 있고.”
“목숨을 거는 일인데?”
“그야 알아서 조심하면 되지.”
걱정도 팔자라는 듯 대꾸하는 그를 엘리어트는 가만히 보았다.
“그것보다, 야 촌뜨기. 너 혹시 검 좀 다룰 줄 알아?”
말하던 유크가 궁금한 얼굴로 갑자기 그를 향해 물었다.
“조금.”
“그래?”
자신이 묻긴 했지만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유크는 엘리어트를 새삼 쳐다보았다. 촌뜨기이긴 해도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서 잠깐 말이나 섞어 봤는데 검을 다룰 줄 안다면 좀 써먹을 수 있으려나.
“그럼..”
그러지 않아도 혼자가기 꺼려졌는데 우연치 않게 잘 된 건지도 모른다.
“너 나랑 같이 뭐 좀 해볼래?”
눈을 빛내며 유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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