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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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건과 몇 마디 더 나누고 페우스 경을 만나러 왔던 그를 그냥 돌려 보낸 뒤 락터드는 방으로 왔다. 그가 돌아오고 나서 잠시 후 오니트 경도 방으로 돌아왔다.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던 그대로요.”
그가 돌아오자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묻는 락터드를 향해 간략히 내용을 전하고는 남작은 말을 이었다.
“테이드나 이스, 랭더발의 영주는 오지 않았소. 다행히 아스드 영주는 참석 했더군.”
트슈레프 경과 몇 마디 나눈 것을 떠올리며 오니트 경은 말했다.
“그도 고심하는 것 같았소. 수도에서 군대가 오면 상황이 더 심각해 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왕이 북쪽 지역으로 군대를 보내겠다는 명을 내린 것은 영주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에 대해 아직은 영주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고 오늘 회의에서는 왕께 고해 그 시기를 조금 늦춰 달라 자는 얘기가 나온 터였다.
그들 중 몇 명은, 왕의 군대가 온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아무리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단기적인 희생을 더 크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트슈레프 영주 역시 다행히 그런 사람 중에 속했다.
“아직까지는 반반이오.”
오니트 남작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중재안으로 페우스 경은 일단 기사단만 보내 상황을 보다가 추후 군대를 파견하는 쪽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그런 의견에 동의하는 영주들이 있는 반면 한꺼번에 병사들을 파견하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소.”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게 글렌 후작이오.”
남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허영심 강한 인간이오.”
말을 하던 그는 다시 뭔가를 생각해 내고는 락터드를 쳐다보았다.
“아, 그런데 엘리어트 말이오.”
남작은 말했다.
“글렌 후작이 그 아이에 대해 알고 있었소?”
아까 들은 얘기를 떠올리며 좀 난감한 기색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자가 무슨 얘길 떠들고 다녔는지 영주들이 그 아이에 대해 묻습디다. 당신이 가르치고 있는 기사 견습생이 있냐면서."
남작은 물었다.
"후작이 어떻게 그 아이를 알고 있는 거요?”
“지난 번 수도에 왔을 때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잠깐 생각하다 남작은 다시 말했다.
“무슨 속셈으로 그런 소릴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소.”
“무슨 뜻이야 있겠습니까. 그냥 하는 소리겠죠.”
락터드가 대꾸했다.
“그래야겠지만 이유 없이 당신 얘기를 꺼낼 리가 없는 자라.”
남작은 말했다.
“괜히 불길하구려.”
염려스러운 얼굴로 덧붙이는 소리에 할 수 없다는 듯 락터드는 그저 미소 지어 보였다.
오전에는 포도나무를 손질하고 오후에 서고에서 책을 읽다 저녁 즈음에 밖으로 나온 엘리어트는 마침 데비가 서고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마구간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양 팔을 걷어 올린 채 커다란 통을 손에 들고 뒤뚱거리며 그녀는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놓치지 않을지 통에 신경을 집중하면서 걸어 나오다가 엘리어트가 걸어가자 인기척에 그녀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엘리어트.”
들고 있는 통을 엘리어트가 건내 받자 그녀는 그것을 그에게 넘겼다.
“고마워.”
“뭐하려고 그래?”
통안에 담긴 물이 찰랑거리며 조금 움직였다.
“화단 청소.”
통을 화단 근처까지 가져가는 그를 따라가며 데비는 자신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화단 옆에 놓여 있는 돌들을 좀 닦아낼 생각으로 물을 떠왔다.
"여기 돌들 다 닦아 낼거야."
데비가 손으로 가리키는 커다란 바위돌들을 보고는 엘리어트는 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이건 청소해도 똑같을 텐데..”
바위돌을 닦아 낸다고 해도 하루면 다시 먼지가 앉을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닦아 낼 때는 깨끗해져서 기분 좋아지거든. 개운하기도 하고.”
싱긋 웃으며 통 안에서 솔을 집어 드는 그녀를 모습을 잘 이해 안 가는 얼굴로 보고 있다가 걸어와 엘리어트는 통 안에 손을 넣었다. 도와주려는지 둥둥 떠다니고 있는 솔을 집어 드는 그를 보고 데비가 살짝 웃었다.
“아저씨, 아직도 안돌아 오셨지?”
화단 앞에 주저 앉아 바로 앞에 놓인 납작하고 하얀 바위에 물을 뿌리고는 그녀가 솔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응.”
옆쪽의 세워둔 커다란 바위에 손을 대며 엘리어트가 대답했다. 락터드가 수도로 간지 벌써 삼 일 째다.
“아빠도. 이번에는 좀 길어지나봐.”
싹싹 문지르고는 작은 물통에 물을 담아 돌 위에 뿌리자 물이 흙탕물이 되어 떨어지며 바닥을 흘러 갔다.
“며칠 전에 마을 밖에서 병사들 행렬을 봤거든.”
다시 솔을 문지르며 그녀는 말했다.
“테이드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데 그것 때문일까? 설마 여기서 그렇게나 먼데..”
“글세..”
닦고 있던 바위가 거의 그의 머리 높이까지 크기인 것을 보다가 옆면보다 위를 먼저 닦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한 손에 물 한 바가지와 솔을 들고 엘리어트는 그 위로 성큼 올라갔다.
“별 일 없어야 할텐데.”
중얼거리던 데비는 제일 큰 바위 위에 올라가 있는 엘리어트가 위에서 아래로 물을 뿌리는 통에 어깨로 물이 튀자 움찔했다.
“엘리어트.”
눈을 가늘게 뜨고는 데비가 그를 흘겨 보았다.
“미안.”
머뭇하며 사과하는 소리에 짐짓 시치미를 떼며 데비가 옆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좀 더 옆으로 가서 중앙부터 닦아줘. 두 번은 못 한단 말이야. 올라갈 사람 없어서.”
그녀가 시키는데로 한 발 더 물러나 바위돌의 정중앙에서 엘리어트가 다시 솔질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다 쿡 웃고는 데비도 다시 솔질을 시작했다.
며칠 동안 락터드는 페우스 경의 집무실에 있거나 아니면 켈리머스 들과 있었다. 켈리머스와 상트도 테이드로 가는 기사단 일행에 포함되어 있었다. 페우스 경은 기사단들을 차근차근 준비 시키고 있는데 의외로 회의에서는 아직 수도에서 기사단을 보내는 것에 대해 결정을 못하고 있다는 소리가 남작을 통해 들려왔다.
자칫 전쟁이 필요 이상 심각해지는 것을 염려해 아스드 영주를 비롯한 몇 몇 영주국들이 왕께 지금의 결정을 보류해 줄 것을 계속해서 청하고 있다고 했다.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아 여러 가지로 얘기가 길어지는 가운데 연례 회의는 오늘로 벌써 닷새 째 이어지고 있었고 돌아올 때마다 오니트 경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얘기를 나누다 켈리머스 들과 헤어진 뒤 락터드는 그대로 방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중간에 글렌 후작이 복도 한 쪽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예 그와 마주치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별로 당황하지도 않는 기색으로 글렌 후작은 걸어오는 락터드의 앞을 막아 섰다.
“바쁘오?”
미소를 띈 채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럼 잠깐 얘기 해도 되겠군.”
용건이 있음을 명확히 하는 소리에 락터드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대충 짐작했다.
“얘기는 진작 들었지 않소. 페우스 경이 이제 기사단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는 것. 폐하께서 아직 윤허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안색을 보건데 이제 아마 시간 문제 일거요.”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글렌 후작의 앞에서는 기침이 아니라 객혈이라도 참아내려 하는 페우스 경이었으니 글렌 후작이 페우스 경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눈치 하나는 누구보다 빠른 자라 그의 건강에 대해 대충은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그 후임으로 아직도 당신을 생각하고 계시니 원.. 그만한 신뢰를 얻는 비결이 뭔지 이제 궁금하기까지 하구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제 당신이 기사단장이 되는 건 시간문제겠소."
왕의 윤허가 필요한 일이기는 해도 페우스 경이 락터드를 자신의 후임으로 생각하고 왕께 고한다면 왕이 특별히 반대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무리 글렌 후작이라고 해도 결국 거기까지는 손 쓸 수가 없었다.
“아직 특별한 말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락터드가 말했다.
“정말이오?”
입가에 묘한 미소를 흘리며 그가 다시 웃었다.
“뭐 나야 사실 당신이 오는 게 좋을 게 없지만, 어쩌겠소. 페우스 경의 뜻이 그렇다면 따르는 수밖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후작은 말을 이었다.
“그래 지난 7년 동안은 어찌 지냈소? 오스티아 같은 시골에서 심심했을 텐데 만약 수도로 돌아오면 갑자기 정신없겠소.”
“그렇게 심심한 곳은 아닙니다.”
락터드가 대꾸했다.
“그래요?”
뭔가가 생각났는지 그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맞아. 하긴 제자도 키우랴 바쁠 게 영 없진 않았을 모양이오.”
그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제자 말이오. 참 대단하오이다.”
그의 입에서 엘리어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락터드는 그것이 그가 꺼내려는 본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밀러 경을 도와 줬을 때 봤는데 활 솜씨도 보통이 아니고 또 사자를 봐도 겁내지 않는 걸 봐도 그렇고. 당신이 가르치니 역시 다른가 보오.”
후작이 다시 웃었다.
“그 네쉬하트 경이 가르친다고 하니 다른 영주들도 제법 관심을 갖읍디다. 일개 기사 견습생에게 영주들이 관심을 갖는 법은 없는데 당신 제자라고 하니 역시.”
잠자코, 락터드는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반 네쉬하트라는 이름의 명성에 걸맞는 제자이길 다들 기대하는 눈치였소. 특히 북쪽 지방 영주들은 말이오.”
네쉬하트라는 이름은 한 때 북쪽 지방에서는 그 지역 전역을 사로잡은 영웅이자 구원자였다. 그리고 그 명성은 소문에 소문을 더해 만리 떨어진 이곳 수도에서는 더욱 거대하게 퍼져 나가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명성을 불편해하는 락터드의 성격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네쉬하트라는 이름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글렌 후작의 경우에는 그 이름의 위상이 더 이상 드높아지는 걸 경계하기 위해 굳이 입밖에 내지 않는 것뿐이었지만.
물론 이것은 8년 전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직도 북쪽 지방에서는 그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말하는 목소리는 태연하고 한결같았으나 락터드의 귀에는 조금씩 더 의뭉스럽게 들려왔다.
“듣자하니 그 아이는 귀족이 아니라는데, 거기다 부모 형제도 없는 고아라던데 맞소?”
그 새 알아보았는지 엘리어트의 신상에 대해 그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했지만 말이오. 말이 안 되지 않소? 이 라곤의 최고 지휘관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는 당신이 평민에 근본도 모르는 아이를 제자로 키우고 있다니. 그럴 리는 없을 거요.”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글렌 후작은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 때문에 당신이 곤란해질까 염려스러워서 하는 말이오. 기사단장이 된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잘 보여야 될 처지니.”
“후작님께서 저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아마 없으실 겁니다.”
정중했지만 단호하게 락터드는 말했다.
“제가 어떤 자리에 있든 후작님을 대하는 태도는 변함 없을 테니까요.”
“그거야 또 모르지 않소.”
그러나 의외로 집요하게 후작은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내가 지금 한 말이 사실이면, 꽤나 뒷말이 나올 거요.”
락터드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자 악의는 전혀 없다는 듯 후작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대꾸하는 락터드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만약 그럴 상황이 되면 그럼 그 문제는 제가 나중에 걱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락터드는 말했다.
“더 하실 말이 없으시면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테이드에 한 번 보내 보는 게 어떻소?”
몸을 돌리려는 락터드를 향해 후작이 다시 말했다.
“거기서 당신의 제자라는 걸 인정받을 만할 공을 세우면 쓸데없는 얘기는 금방 들어갈 테니 말이오.”
그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그의 뒤에다 대고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후작이 다시 말했다.
"입지를 세우는데 전쟁에 나가는 것 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으니."
고개를 돌려 락터드는 후작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냥 하는 말처럼 들려도 그 안에 숨은 뜻을 알아 채고 잠시 후 그는 말했다.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 시선에 후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그 말이 오히려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는 짧은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만약 페우스 경의 뜻대로 이대로 당신이 기사단을 맡는다면 입장이 곤란할 수도 있겠다 싶어 미리 얘기해 주는 거뿐이오.”
“곤란할 거 없습니다. 아직 그 아이는 기사도 아니고, 후작님께서 걱정하실 만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 아이 출신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란 거요?”
대꾸가 없자 거 보라는 듯 후작이 다시 웃었다.
“여기는 왕궁이고 왕실에는 이 나라 최고의 귀족 혈통만 발을 들이오. 그런 곳에 당신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는 뜻이오. 만약 당신이 기사단장이 되어 그 아이를 왕궁으로 들이면 거기에 대해 해명을 해야만 하겠지. 영주들도 그 아이 존재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오.”
대꾸가 없자 후작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기 어려우면 내 말대로 하는 게 가장 적당한 방법일 거라는 걸 당신도 알거요.”
여기까지 얘기하자 그제야 용건이 일단락 됐는지 후작은 락터드의 옆으로 걸어왔다.
“잘 생각해 보시오."
락터드의 곁을 지나치며 그가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당신과 그 소년을 위해 해주는 충고요.”
곧 복도 저쪽으로 사라지는 후작을 고개를 돌려 락터드가 잠시 보았다.
연례 회의 일주일 째. 오늘을 마지막으로 내일이면 락터드는 남작과 함께 윌더른으로 돌아간다.
기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남쪽 성 1층에 있는 기사들의 훈련장이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방에서 락터드는 상트와 몇 몇 기사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래부터 수도에 있진 않았어도 그래도 성안 기사 절반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세월이 지나 이런 곳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젊은 기사들은 그가 모르는 자들이 더 많았다. 상트의 소개로 며칠 전 기사들과 짧게 인사를 하고 그는 기사들과 시간 나는데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와 전장에 나갔던 기사들은 헤이건 로다와처럼 중견 기사가 되어 이제 성 안 일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 만약 북쪽 지방으로 가게 된다면 지금 여기 있는 젊은 기사들이 주로 그리로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는 무엇보다 경험 있는 기사들이 필요했다.
“락터드 경.”
저쪽에서 켈리머스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결정이 됐습니다.”
옆으로 걸어와 그가 말했다.
“기사 팔백이 먼저 테이드로 출발 하는 걸로.”
애초에 페우스 경이 세웠던 계획대로 결정이 났다는 소리에 락터드가 끄덕였다.
“알겠네.”
결정이 났으니 이제 지체할 것 없이 테이드로 떠나게 될 것이다. 일단 결정하면 페우스 경은 실행하는데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어쩌실 겁니까?”
생각에 잠긴 듯한 그를 보며 조금 염려스러운 기색으로 켈리머스가 물었다. 켈리머스들은 그가 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길 내심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에는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 페우스 경은 어디 계신가?”
이윽고 락터드가 물었다.
“아직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끄덕이며 락터드는 몸을 반쯤 틀었다.
“가서 뵈어야 겠네.”
대꾸하며 그가 몸을 돌렸다. 걸어가는 그를 뒤에서 켈리머스가 쳐다보았다. 그의 옆으로 상트와 기사들 몇 명이 걸어왔다. 켈리머스의 어깨를 툭 치며 그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냐는 눈빛을 보내자 잘 모르겠다는 기색으로 켈리머스가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집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있는 안색이 거뭇거뭇해진 그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락터드는 말했다.
“기사단을 맡겠습니다.”
페우스 경이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북쪽 지방에 다녀오는 걸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마주 대하며 락터드는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걸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정이 됐으니 더 이상 저도 망설이고 싶지 않습니다."
"자네까지 나서지 않아도 기사는 있네."
페우스 경이 말했다.
"그 정도 규모의 기사단이면 무엇보다 경험 있는 자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합니다."
공손히 락터드는 그 말에 대꾸했다.
"게다가 지금은 그렇게 해야 뒷말이 나오는 걸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이제와서 바로 기사단장직을 락터드에게 맡긴다는 것에 대해 불만의 소리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락터드는 물론 페우스 경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해결되고 난 뒤, 돌아와 경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저를 기사들과 함께 그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자리에서 꼼짝 않은 채 그대로 락터드는 말 하는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페우스 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왕궁 남쪽 지하에는 지하수를 이용해 만들어 둔 온천탕이 있었다. 글렌 후작이 왕궁에서 종종 찾는 곳이었다.
뿌연 온천수의 김이 서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지하를 후작의 기사가 걸어가 그 한 가운데 섰다.
“그 자가 결국 페우스 경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 같습니다.”
말 하는 목소리가 종유석 동굴 같은 탕 안을 울렸다.
“이번에 북쪽 지방에 갔다 돌아오면 바로 기사단을 맡을 요량인 모양입니다.”
“잘됐군.”
“네?”
탕 한 가운데 누워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고 있던 후작의 대꾸에 남자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회가 생겼지 않은가.”
후작은 말했다.
“이번에 테이드로 가면, 그 자가 거기서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그는 말했다.
“알겠나?”
그제야 알아 듣고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중히 몸을 숙이고는 그가 곧 수증기 사이에서 사라지자 눈을 감으며 후작은 더 깊이 물속에 몸을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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