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명인k 님의 서재입니다.

하트의 반(VAN)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명인k
작품등록일 :
2013.02.04 17:06
최근연재일 :
2019.02.10 23:08
연재수 :
298 회
조회수 :
979,471
추천수 :
28,216
글자수 :
2,269,960

작성
13.11.21 23:42
조회
3,220
추천
96
글자
19쪽

하트의 반(VAN) - 번외. 반 네쉬하트(5)

DUMMY

싸한 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앞으로 빠져나갔다. 짓밟힌 것처럼 가지가 부러진 나무들은 사방에서 온통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나무들을 벌써 며칠이나 보았다. 무슨 힘을 받았는지 뿌리째 뽑혀 땅에 쓰러져 있는 나무 옆에서 뭔가 튀어나와 덤벼들지 않을까 하는 얼굴로 제이버 쿼드린은 앞을 쳐다보았다. 몇 번이나 왔지만 분위기가 으스스한 게 이곳은 올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긴 아주 죽은 곳이군.”

여기로 들어오기 전 지나온 마을 역시 마을 전체가 불에 탄 채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자네가 그랬나?”

농담처럼, 그러나 반쯤은 설마하는 기색으로 그가 옆에 대고 물었다. 주변에 이만한 피해를 입힐 만한 싸움이면 보통 치열한 전투가 아니었을 것이고 그의 옆에 있던 남자는 아마 이 근처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에 참가 했을 것이다.


“글쎄.”

허리를 숙인 채 뭔가를 하고 있던 락터드가 옆에서 그 질문에 대답했다.

“처음 왔을 때 근처 어디 있긴 했지만.”

대꾸하며 그는 곡괭이처럼 생긴 투박한 무언가를 땅에 더욱 깊이 찔러 넣었다.




수도에서 온 기사단과 아스드 소속 병사들을 반으로 나누어 부대는 지금 서로 다른 곳에 있었다. 켈리머스가 이끌고 있는 한 쪽은 어느 산 한 가운데에서 대기, 상트들이 이끌고 있는 남은 병사 반은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서 느리게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지휘관인 락터드는 쿼드린과 대여섯 명의 기사들과 함께 전장을 준비하기 위해 부대에서 빠져 나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것이 오늘로 닷새 째.


애초에 기사단은 랭더발과 테이드, 아스드의 싸움 중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나 랭더발이 그 중재안에 동의하지 않아 결국 전쟁으로 치닫았고 몇 번의 전쟁 뒤 테이드는 기력을 소진, 이제 전쟁은 랭더발과 아스드의 싸움으로 좁혀 들어와 있었다.



어디서 그렇게 모을 수 있었는지 랭더발의 군대는 생각 외로 거대했다. 그만한 병력을 언제 그렇게 모았는지는 몰라도 그래서 자신있게 나섰던 것 같았고 승패는 반으로 갈렸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아스드에 비해 랭더발이 모든 싸움에서 약간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모양새를 띄고 있었다.


몇 번의 싸움 끝에 아스드 쪽에서도 이제 남은 여력이 별로 없었다. 한 번 더 패하게 된다면, 랭더발에게 항복할 수는 없는 아스드 입장에서 결국 혈맹국들이 발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기 전에 끝을 봐야한다고 락터드는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조악한 함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부러진 나무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구덩이를 파며 쿼드린이 말했다. 며칠 동안 그들은 이 근처를 돌아다니며 바닥에 굴을 파고 있었다. 일종의 함정이라고 여길 만한 구덩이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라고 파놓는 것 아닌가.”

구덩이를 파 놓고 그들이 함정이라고 생각하게 해 이 곳에서 방향을 틀게 하는 게 목적이다.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면 어쨌든 이 방향으로 움직이는 건 조심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럴까?”

흙을 구덩이 밖으로 밀어내며 쿼드린이 중얼거렸다.

“자네 생각대로 제대로 움직여 줘야 할텐데 말이야.”

말하며 일을 하는 건 역시 힘이 들었는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며 그는 다시 구덩을 파는데 열중했다.






랭더발은 아스드와 영주국 서너 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운 나쁘게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영주국이 모두 랭더발의 손을 들어주는 통에 랭더발이 이쪽으로 진격해 오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결국 싸움은 아스드 인근에서 주로 벌어졌고 오늘 지나쳐 온 마을처럼 이미 폐허가 된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니 여세를 몰아 끝장을 보기 위해 랭더발의 다음 목표는 이제 아스드 영주가 있는 이센제가 될 게 분명했다.


그리로 가기 위해 곧 십 만여 병사가 진격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 길로 들어올지 알아내기 위해 락터드는 지금 여기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들어올 길을 유도해 내기 위해 그는 이곳에서 상황을 조절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 됐어.”

손을 털며 구덩 위로 올라와 쿼드린이 락터드를 향해 말했다.

“저쪽은 제대로 하고 있을까?”

살짝 염려되는 기색으로 그는 물었다. 산을 돌아 반대쪽에 이센제와 더 가까운 길로 통하는 마을이 있었다. 거기서 방향을 돌리지 못하면 이쪽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상트나 다른 기사들이 문제없이 처리 할 거야.”

“설마 수레 몇 개 엎어놓고 길을 막았다고 하진 않겠지?”

“그 정도로 무모한 친구는 아닐세.”

미소 지으며 락터드가 대꾸했다.

“그럼 다행이지만 말이야.”

여전히 염려하는 기색으로 쿼드린이 중얼거렸다.


풍문으로라도 그들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랭더발이 듣게 되면 물거품이 되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벌써 일주일 째 켈리머스의 지휘로 병사들은 격전지로 계획해 둔 산 어딘가에 조용히 숨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락터드와 몇 몇 기사들은 나머지를 준비했다.

산 중턱에 먼저 자리 잡은 자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지형을 찾아내 그곳에 병사들을 숨어 있게 했다. 그러기 위해 인근 마을 한 두 개를 희생시켜야 했다. 삶의 터전을 내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다행히 동의를 구할 수 있어 그들 중 뜻이 맞아 이 싸움에 동참하길 원하는 몇 명을 제외하고 마을 주민들은 피신시켜 두었다.


마지막 싸움 후 아직까지 랭더발의 군대가 진격해 오는 기색은 없었다. 눈에 띄어 괜히 덜미를 잡히게 될 수 있으니 병사들의 상태가 어떤지 묻기 위해 켈리머스가 대기하고 있는 곳에 통신용 매도 보낼 수 없었다.


랭더발의 병사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 몰라도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자신들의 위치를 숨기고 싶어하는 건 마찬가지였는지 잿빛 하늘에 며칠째 날짐승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젖은 수풀 더미 위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락터드와 기사들은 다시 이동했다. 으스스한 기색에 몸을 떨며 쿼드린은 머리 위까지 자라 있는 갈대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왔다. 닷새 째 수풀 더미에서 잠을 자다보니 자고 일어나도 잔 것 같지 않은 것처럼 몸이 찌뿌둥했다.

“얘기를 좀 해보게.”

여전히 으스스한 어깨를 손으로 문지르며 쿼드린이 말했다.

“무슨 얘기?”

“이대로 시간을 보내는 게 지루해서 그래. 아 그렇지.”

쿼드린은 물었다.

“몇 년 간 오스티아에 있었다고 했지? 거긴 어떤가?”

길다란 갈대를 밀어내며 락터드는 앞으로 걸었다.

“그야.. 좋은 곳이지.”

“거기선 뭐하며 시간을 보냈나?”

“포도주를 만들어 장사도 하고.”

락터드는 말했다.

“그리고 제자도 키우느라 나름 바빴네.”

“아, 맞다. 그랬지.”

그제야 쿼드린은 생각이 난 듯 했다.

“자네가 제자를 뒀다는 게 뜻밖이었는데, 어떤 아이인가?”

"뭐.. 괜찮은 녀석이야.”

락터드는 미소지었다.

“성실하고, 마음을 헤아릴 줄 알면서 의지가 강한..”

부드러운 눈빛이 되어 그는 말을 이었다.

“실력도 성품도, 좋은 녀석이지.”

“자네가 그렇게 가르친 건가?”

“그랬길 바라지.”

좀 웃으며 락터드는 말을 이었다.

“정말 그런지는 이제부터 지켜봐야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갈대 숲 저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갈대 숲 옆을 돌아 조용히 락터드가 먼저 앞으로 나왔다.

작은 들판이었다. 아무도 없다. 저쪽에서 동굴 같은 광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뒤 따라 나온 쿼드린은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락터드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광도 안은 캄캄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걸음을 옮기기 힘들었겠지만 락터드와 쿼드린은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래 안 쓰던 곳이었는지 들어가보니 그리 깊지 않은 광도에 거미줄이 쳐져 손 발에 실타래 같은 것이 걸리는 느낌이 났다.

“숨어 있지 말고 나오시오.”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더 이상 나갈 곳이 없는 걸 확인하고 어느 벽 한 쪽에 대고 락터드가 말했다. 쿼드린 역시 그가 말하는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해치지 않으니.”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광도 밖으로 쿼드린이 나간 뒤에도 잠시 남아 락터드는 광도 안을 보고 있었다. 시커먼 어둠이 광도 안을 집어 삼킬 듯 들어 차 있다.

“어이.”

입구에서 쿼드린이 그를 불렀다.

“뭐해?”

“아.. 가네.”

대꾸하며 락터드는 광도 밖으로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오자 기사들이 붙잡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중년 남자 둘과 청년 둘, 어린 소년 하나가 죄라도 지은 듯 기사들에게 둘러 싸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방금 전 이들이 광도에 숨어 있었다.


“이런 데 사람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들을 보며 쿼드린은 좀 난감한 기색이었다.

“어쩐다.”

중얼거리며 그는 기사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쿼드린이 기사들과 얘기하고 있는 동안 락터드는 그들과 한 발 떨어진 곳에 서서 남자들을 보고 있었다. 미지막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소년은 얼굴은 숯검댕이가 묻어 지저분했고 이 상황이 두려운 것 같아 보였다. 덩치가 작고 비쩍 말라 입고 있는 옷이 헐렁하게 늘어져 있었다.


어떻게 말이 새나갈지 모르니 자신들과 마주친 이들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산을 넘어가 인근에 있는 마을로 보낼 때까지 일단 같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락터드는 소년을 잠시 응시했다. 조금 더 어린 것 같았지만 검은 머리에 유순해 보이는 인상이 엘리어트와 좀 닮아 있었다.

“어디서 왔니?”

소년을 향해 락터드가 물었다.

“... 헤나.”

아스드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로 거긴 이미 몇 번의 싸움으로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나직히 락터드는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테니.”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소리에 소년은 그저 가만히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폐광을 마지막으로 길이 끊긴 것을 확인하고 켈리머스들이 대기하고 있기로 한 산 근처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 다 되서였다.

“겨우 왔군.”

한숨 돌렸다는 듯 쿼드린이 말했다.

“랭더발은 언제쯤 올까?”

“길게 시간을 끌어봤자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할테니 이미 이쪽을 향하고 있을 거야.”

락터드는 말했다.

“오늘 밤 안에 여기 도착한다고 해도 놀랄 게 아니지.”

“그렇군.”

쿼드린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난 산등성이로 가서 망을 보겠네. 수상한 게 있으면 바로 알리지.”

이제 말을 끌고 움직일 수 있어 출발하기 전 묶어 두었던 말을 풀고 쿼드린이 산등성이를 향해 달려갔다.



기사들을 시켜 남자들을 산 너머 마을로 이어진 길로 데려가라고 말한 뒤 락터드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이 끼었는지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싸우는 건 그 같은 노련한 기사들은 가능하지만 일반 병사들에게는 무리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락터드는 고개를 돌렸다.

“응?”

소년이 거기 서 있었다. 락터드는 의아해졌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지 않았니?”

“... 소피보러 갔다가.”

잠깐 소년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남자들이 먼저 가버린 것 같았다. 락터드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방금 출발했으니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다.”

몸을 돌려 그는 기사들이 남자들을 데려간 방향을 쳐다보았다.

“가자. 그들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말을 풀러내며 소년을 데려다 주려고 하는데 머리뒤에서 느껴지는 기색에 반사적으로 그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단검이 그의 옆구리를 지나갔다. 단검에 스친 상처를 느끼며 락터드는 앞을 보았다.


소년은, 우발적으로 찔렀는지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소년은 락터드가 쳐다보자 이미 자리에서 얼어 붙고 있었다.


옆구리를 손으로 누르며 락터드는 그 손에 들려 있는 단검을 보았다. 소년이 가지고 있을 만한 검이 아니다. 손잡이에 정교하게 문양이 새겨져 있는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 단검이었다.

왜 자신을 죽이려 했나. 그렇게 생각하면 제일 먼저 짚히는 건 하나였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다면 암살자가 아닌 이런 소년에게 맡긴 검이니, 필시 독이 묻어 있을 것이다.



창백해진 소년의 손에서 단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더 움직이지 않고 돌처럼 굳어져 있는 소년을 내버려 둔 채 락터드는 상처를 내려다 봤다.

이미 후작이 보낸 자객 두 명을 상대했다. 그래도 주의했어야 했지만 우연히 만난데다 엘리어트 또래의 어린 소년이었단 것이 그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중요한 시기에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했다.


고개를 들자 그와 눈이 마주친 소년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제야 도망칠 생각이 났는지 소년은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를 보는 눈빛에 공포와 죄책감이 서려 있다. 갈등했기 때문에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대로 그를 향해 다가가 그는 움찔거리며 도망치려는 소년의 팔을 잡았다.

“누가 시킨거냐?”

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말해다오.”

다그치지 않으려는 듯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모, 몰라...”

소년이 입을 열었다.

“몰라요.”

눈빛이 조금 전 공포심에서 이제 조금씩 차갑게 변하는 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소년을 락터드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독이 묻어 있다면 조금만 스쳐도 효과를 나타낸다. 그 생각이 맞는지 찔린 정도에 비해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누가 그를 사주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굳이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내 말 잘 들어라.”

이제 본격적으로 도망치려는지 다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소년의 팔을 그가 다시 힘주어 잡았다.

“이대로 녀석들에게 가면 안된다.”

무슨 말로 소년을 꼬드겼는지 몰라도 생각대로 순순히 댓가를 받아 내지는 못할 것이다.

“가면 널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오히려 이런 일을 벌이고 흔적을 남길 리 없으니 이대로 그들을 찾아간다면 분명 소년을 죽일 것이다.

“알겠니?”

나직히 말하는 그를 흔들리는 눈동자로 쳐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년이 락터드의 팔을 뿌리쳤다.

“놔요!”


의외로 순순히 락터드는 손을 놓았다. 그 기색에 이번에는 오히려 소년이 멈칫했다.

“내 말 명심해라.”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소년을 향해 락터드가 다시 말했다. 그 말이 제대로 들렸는지 어쨌는지 소년은 도망치듯 그대로 숲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수풀을 비집고 들어가 이윽고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락터드는 상처에 손을 댔다. 마비가 오는 것처럼, 느껴지던 통증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좋은 징조는 아니다.


소년과 같은 자들을 이 전장에 얼마나 심어 두었을까. 전쟁의 승패나 백성들의 안전은 후작은 전혀 관심이 없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이 여기서 사라지는 것 뿐일 것이다.


고개를 돌려 그는 산등성이 쪽을 보았다. 저 산 너머에 켈리머스가 이끄는 아스드의 병사 4만이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랭더발의 군대가 오면 약속한 시간에 맞춰 상트가 나머지 병사 4만을 이끌고 그 뒤를 막을 것이다.


아스드로 이어진 길 하나를 제외하고 저곳은 고립된 지형이다. 그 길은 이미 막아 두었으니 랭더발이 여기 온다면 그렇게 그들을 포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 닷새 전부터 도처에 그들을 위해 함정을 준비해 두었으니 잘만 이용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락터드는 누르고 있던 손을 뗐다. 새어 나오고 있는 피는 조금씩이지만 멎지 않는다.


이대로 소년을 따라가 이런 짓을 시킨 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낸다면, 운이 좋으면 해독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병사들의 사기 진전을 위해 이 싸움의 선봉에 서야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자리에서 무릎을 굽힌 채 그는 소매 한 쪽을 쭉 찢어 냈다. 옷 안쪽을 풀어 헤치며 천을 길게 늘어뜨려 그것을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묶은 천에 바로 피가 스며 드는 것을 보며 웃옷을 다시 챙겨 입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이아.’

낮에 봤던 폐광 때문일까. 이 순간 갑자기 그녀가 생각났다.



“새디..!”

아까 산등성이로 간다던 쿼드린이 저쪽에서 달려오며 그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말에 올라 말고삐를 옆으로 잡아당기며 락터드는 쿼드린에게 갔다.

“근처에서 이쪽으로 이동하고 있네.”

산등성이까지 올라가자 마자 그는 산아래에서 느리게 이동하고 있는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어.”

긴장된 목소리를 들으며 락터드는 끄덕였다.

“가세.”


어둠속을 두 사람의 말이 빠르게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 숲을 빠져 나오자 넓은 평원이 나왔다. 거기에 4만 병사들이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소리에 뒤에서부터 차례로 고개를 돌려 병사들이 말 위에 있는 두 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을 헤치며 락터드는 그들의 맨 앞으로 나갔다.


쿼드린이 산등성이 위에서 확인하고 온 게 랭더발이 맞다면 그들이 들어 올 수 있는 길은 이 방향뿐. 다행히 준비해 둔대로 움직였는지 잠시 후 저기 멀리서 수백 개의 횃불과 함께 검은 그림자들이 이쪽을 향해 물결처럼 움직여 다가오고 있었다.

“상트들은 약속한 시간에 맞춰 이리로 오고 있을 겁니다.”

옆에서 켈리머스가 그를 향해 말을 했다. 끄덕이며 락터드는 다시 앞을 보았다.


랭더발의 병사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 검은 물결처럼 조금씩 앞으로 나오던 그들은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쪽의 수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갑자기 횃불을 멈추고 있었다.


조금 일찍 위치를 들켰지만 적은 다행히 그들이 준비해 놓은 덫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수적으로 이미 이쪽이 불리하니 어느 한 쪽이 압도적인 싸움은 아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손에서 검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다.

락터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스며 나온다.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기를.


‘엘리어트를 부탁하네 데이먼.’

이제 이쪽을 눈치 채고 그 자리에서 대형을 갖추고 있는 적의 진형을 눈으로 가늠하며 선두에 선 그의 말이 앞발을 번쩍 들어 보이는 것과 동시에 락터드가 소리쳤다.

“진격!”

그가 적들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함성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뒤이어 그를 따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하트의 반(VAN)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9 하트의 반(VAN) - 2-4 재회(4) +34 14.01.09 3,892 131 15쪽
98 하트의 반(VAN) - 2-4 재회(3) +34 14.01.08 4,447 125 19쪽
97 하트의 반(VAN) - 2-4 재회(2) +14 14.01.07 3,631 119 9쪽
96 하트의 반(VAN) - 2-4 재회(1) +15 14.01.06 3,466 125 11쪽
95 하트의 반(VAN) - 2-3 아젠(6) +13 14.01.05 3,754 118 19쪽
94 하트의 반(VAN) - 2-3 아젠(5) +8 14.01.02 3,301 121 14쪽
93 하트의 반(VAN) - 2-3 아젠(4) +12 14.01.01 3,305 124 14쪽
92 하트의 반(VAN) - 2-3 아젠(3) +6 13.12.31 3,007 120 17쪽
91 하트의 반(VAN) - 2-3 아젠(2) +19 13.12.29 3,693 115 16쪽
90 하트의 반(VAN) - 2-3 아젠(1) +12 13.12.26 3,767 119 12쪽
89 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10) +5 13.12.25 4,489 132 20쪽
88 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9) +11 13.12.24 4,122 129 11쪽
87 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8) +12 13.12.22 3,892 115 13쪽
86 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7) +7 13.12.20 4,357 124 20쪽
85 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6) +3 13.12.19 4,086 124 19쪽
84 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5) +8 13.12.15 4,221 126 17쪽
83 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4) +1 13.12.12 3,849 130 12쪽
82 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3) +1 13.12.10 4,050 124 18쪽
81 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2) +5 13.12.08 4,211 126 11쪽
80 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1) +10 13.12.05 4,355 120 20쪽
79 하트의 반(VAN) - 2-1 헬렌(4) +9 13.12.03 4,320 118 15쪽
78 하트의 반(VAN) - 2-1 헬렌(3) +3 13.12.01 3,578 118 20쪽
77 하트의 반(VAN) - 2-1 헬렌(2) +12 13.11.28 3,831 111 17쪽
76 하트의 반(VAN) - 2-1 헬렌(1) +3 13.11.26 4,018 120 9쪽
75 하트의 반(VAN) - 2-0 엘소(2) +8 13.11.26 4,066 137 11쪽
74 하트의 반(VAN) - 2-0 엘소(1) +15 13.11.24 4,194 140 14쪽
» 하트의 반(VAN) - 번외. 반 네쉬하트(5) +10 13.11.21 3,221 96 19쪽
72 하트의 반(VAN) - 번외. 반 네쉬하트(4) +9 13.11.20 3,186 91 26쪽
71 하트의 반(VAN) - 번외. 반 네쉬하트(3) +3 13.11.17 2,961 92 18쪽
70 하트의 반(VAN) - 번외. 반 네쉬하트(2) +3 13.11.15 3,407 97 14쪽
69 하트의 반(VAN) - 번외. 반 네쉬하트(1) +11 13.11.11 4,060 101 14쪽
68 하트의 반(VAN) - 1-67. +19 13.09.18 5,305 162 16쪽
67 하트의 반(VAN) - 1-66. +11 13.09.17 6,936 154 22쪽
66 하트의 반(VAN) - 1-65. +4 13.09.16 4,120 154 10쪽
65 하트의 반(VAN) - 1-64. +3 13.09.14 5,764 157 13쪽
64 하트의 반(VAN) - 1-63. +2 13.09.12 4,048 138 10쪽
63 하트의 반(VAN) - 1-62. +16 13.09.09 6,178 155 15쪽
62 하트의 반(VAN) - 1-61. +7 13.09.06 4,360 157 14쪽
61 하트의 반(VAN) - 1-60. +2 13.09.04 4,286 170 17쪽
60 하트의 반(VAN) - 1-59. +17 13.09.02 7,252 160 23쪽
59 하트의 반(VAN) - 1-58. +21 13.08.30 4,646 158 21쪽
58 하트의 반(VAN) - 1-57. +9 13.08.28 4,058 150 12쪽
57 하트의 반(VAN) - 1-56. +33 13.08.26 4,737 153 17쪽
56 하트의 반(VAN) - 1-55. +13 13.08.23 5,020 168 16쪽
55 하트의 반(VAN) - 1-54. +10 13.08.21 7,901 168 19쪽
54 하트의 반(VAN) - 1-53. +7 13.08.19 5,245 160 11쪽
53 하트의 반(VAN) - 1-52. +5 13.08.16 6,038 157 10쪽
52 하트의 반(VAN) - 1-51. +5 13.08.15 5,375 165 16쪽
51 하트의 반(VAN) - 1-50. +16 13.08.12 6,527 179 15쪽
50 하트의 반(VAN) - 1-49. +7 13.08.10 6,228 168 18쪽
49 하트의 반(VAN) - 1-48. +4 13.08.08 5,734 165 22쪽
48 하트의 반(VAN) - 1-47. +15 13.08.06 5,212 161 16쪽
47 하트의 반(VAN) - 1-46. +8 13.08.05 4,830 168 12쪽
46 하트의 반(VAN) - 1-45. +7 13.08.02 5,132 172 11쪽
45 하트의 반(VAN) - 1-44. +6 13.08.01 4,774 166 9쪽
44 하트의 반(VAN) - 1-43. +9 13.07.29 5,468 169 15쪽
43 하트의 반(VAN) - 1-42. +8 13.07.25 5,012 179 12쪽
42 하트의 반(VAN) - 1-41. +11 13.07.22 4,801 171 16쪽
41 하트의 반(VAN) - 1-40. +6 13.07.18 5,175 180 18쪽
40 하트의 반(VAN) - 1-39. +4 13.07.15 4,726 186 22쪽
39 하트의 반(VAN) - 1-38. +9 13.07.11 6,738 166 13쪽
38 하트의 반(VAN) - 1-37. +13 13.07.08 5,223 165 19쪽
37 하트의 반(VAN) - 1-36. +2 13.07.05 6,458 170 24쪽
36 하트의 반(VAN) - 1-35. +6 13.07.01 6,039 164 17쪽
35 하트의 반(VAN) - 1-34. +25 13.06.13 5,892 181 11쪽
34 하트의 반(VAN) - 1-33. +5 13.06.10 8,205 191 21쪽
33 하트의 반(VAN) - 1-32. +9 13.06.06 6,924 166 17쪽
32 하트의 반(VAN) - 1-31. +3 13.06.03 6,940 178 17쪽
31 하트의 반(VAN) - 1-30. +13 13.05.31 8,834 188 26쪽
30 하트의 반(VAN) - 1-29. +17 13.05.27 7,425 196 19쪽
29 하트의 반(VAN) - 1-28. +7 13.05.23 7,359 181 12쪽
28 하트의 반(VAN) - 1-27. +10 13.05.20 8,232 176 19쪽
27 하트의 반(VAN) - 1-26. +3 13.05.16 8,543 181 13쪽
26 하트의 반(VAN) - 1-25. +3 13.05.14 8,319 184 27쪽
25 하트의 반(VAN) - 1-24. +15 13.05.09 8,367 232 24쪽
24 하트의 반(VAN) - 1-23. +7 13.05.03 10,464 289 25쪽
23 하트의 반(VAN) - 1-22. +9 13.04.29 9,083 201 21쪽
22 하트의 반(VAN) - 1-21. +1 13.04.25 8,406 209 12쪽
21 하트의 반(VAN) - 1-20. +9 13.04.21 9,478 215 21쪽
20 하트의 반(VAN) - 1-19. +29 13.04.07 9,109 242 19쪽
19 하트의 반(VAN) - 1-18. +10 13.04.04 8,447 220 24쪽
18 하트의 반(VAN) - 1-17. +7 13.04.02 8,157 209 21쪽
17 하트의 반(VAN) - 1-16. +7 13.03.28 9,018 197 15쪽
16 하트의 반(VAN) - 1-15. +6 13.03.25 10,205 200 15쪽
15 하트의 반(VAN) - 1-14. +6 13.03.21 8,954 223 24쪽
14 하트의 반(VAN) - 1-13. +7 13.03.17 9,494 228 12쪽
13 하트의 반(VAN) - 1-12. +8 13.03.11 9,217 222 16쪽
12 하트의 반(VAN) - 1-11. +6 13.03.07 9,541 230 16쪽
11 하트의 반(VAN) - 1-10. +6 13.03.04 10,136 251 18쪽
10 하트의 반(VAN) - 1-9. +2 13.02.28 10,106 235 19쪽
9 하트의 반(VAN) - 1-8. +6 13.02.26 10,644 256 14쪽
8 하트의 반(VAN) - 1-7. +6 13.02.25 11,241 271 15쪽
7 하트의 반(VAN) - 1-6. +19 13.02.21 11,296 282 16쪽
6 하트의 반(VAN) - 1-5. +14 13.02.19 13,169 277 20쪽
5 하트의 반(VAN) - 1-4. +13 13.02.17 14,299 330 15쪽
4 하트의 반(VAN) - 1-3. +9 13.02.17 15,196 327 13쪽
3 하트의 반(VAN) - 1-2. +15 13.02.11 16,470 350 13쪽
2 하트의 반(VAN) - 1-1. +15 13.02.10 21,873 403 12쪽
1 하트의 반(VAN) - 0. +15 13.02.04 29,030 440 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