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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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가메인 공작은 앞을 보고 있었다. 황량한 대지에 돌무더기와 수풀 더미가 간혹 튀어 올라와 있을 뿐 모래 동굴을 통과하기 전보다 앞은 더 황량했다.
그러나 이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헤르스 기사단의 요새를 시작으로 하루 거리로 이어지는 요새 몇 곳을 지나면 라곤과 동쪽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센볼린으로 가게 된다.
물론 가깝다고는 해도 동쪽 국경을 통과해 열흘은 넘게 가야 도착하는데다가 그러기 위해 중간에 넘어야 할 고비가 많아 쉽게 갈 수 있는 땅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이 방향으로의 교역은 아주 미비했고 그런 와중에 네바렌이 센볼린을 시작으로 동쪽 국가들과의 교역의 선봉에 선다면 여러 면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그를 통해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사들 몇 명을 먼저 요새로 보냈습니다.”
대지 한 쪽에 우뚝 서서 한참 동안 앞을 보고 있는 공작에게 다가와 릴이 말했다. 헤르스 기사단이 머무르고 있는 요새는 이 방향에서 이제 대략 천 아드 쯤 떨어져 있다.
“별 문제 없으면 반나절 후면 요새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이제 멀지 않으니 선발대를 보내 이쪽의 도착을 알리고 요새로 들어가도 되는지 상황을 확인할 것이다.
“오히려 일찍 도착한 셈이군.”
끄덕이며 공작이 대꾸했다. 만나기로 한 날짜보다도 빠른데다가 기사들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다가 요새로 이동한다고 하더라도 여유가 있었다.
“기다리다 기사들이 돌아오면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 말에 끄덕이며 릴이 대답했다.
“잠시 대기.”
모래 동굴 밖으로 나와 옷을 털면서 병사들과 용병들이 대열을 다시 정리하는 동안 선두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리자 별로 의문을 가지지도 않고 마치 다들 기다렸다는 듯 그대로 바닥에 자리 잡고 앉기 시작했다.
대열의 끝에 서 있던 키욘 역시 들려온 소리에 마찬가지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겨우 잠깐 쉴 수 있겠네.”
공작새가 깃털을 펴듯 어깨와 가슴을 있는대로 크게 부풀려 올리며 그가 기지개를 쫙 폈다.
“으아이구~~ 나 죽어.”
만 하루를 잠도 못자고 종일 걸었으니 자리에 앉자마자 피로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두어번 연거푸 기지개를 쭉쭉 켜고는 몸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고개도 같이 돌리던 키욘의 눈에 엘리어트가 들어왔다. 엘리어트는 그의 뒷 열에 앉아 있었다.
아까 테이드 난민들이 있던 막사에서 돌아온 뒤 그는 계속 조용했다. 그 침묵이 어쩐지 어둡고 무겁게 느껴졌다. 내키지 않지만 계속 그냥 두기도 뭐해서 키욘은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 기사랑 아는 사이였냐?”
대꾸 없이 가만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엘리어트를 보고 더 할 말이 없었는지 그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금 저러고 있는 것도 그렇고, 무슨 말을 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녀석이 아까 그렇게 갑자기 달려들어서 사실 그도 내심 좀 놀랐었다.
‘나 참...’
대답을 안 하는데 더 캐물을 수도 없어서 그냥 그렇게 엘리어트를 보고 있는데 대열 중간쯤에서 튀어나온 우드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형님.”
옆에 서서 혹시 주의를 받을까 싶어 잠깐 기사들 쪽을 확인하고는 그는 키욘의 근처에 얼른 쪼그려 앉았다.
“왜 또 호들갑이야?”
“내가 이 사람 저 사람 좀 물어 봤는데..”
숨을 좀 고르며 그가 말을 뱉었다.
“그 네쉬하트란 기사 말이오.”
“야.”
한 살 차이에 꼬박 꼬박 형님이라고 부르며 그래도 예의를 지키는 걸 보면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치가 없고 입이 좀 방정이어서 또 쓸데없는 소리할 까봐 우드의 말을 막으려는 듯 그를 부르며 키욘은 엘리어트 쪽을 힐끔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년은 의외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니 글세 들어보라니까.”
그의 시선을 잠깐 따라 가며 괜히 또 덤벼들까봐 영 눈치가 안 보이지는 않았는지 쪼그려 앉은 채 우드는 두어 걸음 엘리어트로부터 떨어졌다.
“내가 애들한테 좀 물어봤는데..”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그 네쉬하트란 기사. 들어보니까 테이드나 아스드 쪽에서는 난리도 아니랍디다.”
지금 이 상단에는 대략 육십 명의 용병들이 고용되어 있었다. 용병들은 대부분 각지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에 소식이라든지 소문에 능통했다.
“무슨 소리야?”
엘리어트 쪽을 잠깐 다시 보다가 궁금하기는 했는지 키욘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때 상황이..”
어느 지점에서부터 얘기를 해야 하는지 가늠이 안 되는 듯 눈을 굴리며 우드는 말했다.
“전쟁에서 이기긴 했지만 막판에 흐름이 테이드 쪽에 꽤 불리 했대요. 아스드가 다른 영주국이 끼어드는 걸 막다보니까 테이드와 아스드 둘 다 꽤 수세에 몰렸다고 하더라고.”
키욘이 관심을 갖는 것 같자 그제야 흥이 났는지 우드의 목소리가 좀 커졌다.
“전쟁이 원체 치열해지다보니 마을 사람들이건 용병이건 병사건, 다들 이러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하고 있는데 수도에서 온 기사 중에 그 사람, 그 네쉬하트라는 기사가..”
말을 빨리 하는 통에 숨이 찼는지 우드가 침을 길게 한 번 꿀꺽 삼켰다.
“그 기사가 마을에 찾아와서는 사람들한테 양해를 구하면서 더 이상 희생을 키우지 않기 위해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었다네.”
“별로 나쁜 말 한 건 아니네.”
전쟁이 어디를 휩쓸어도 거기 속한 지역의 백성들은 희생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곳에 찾아와 동의와 양해를 구하는 자는(만일 그게 진심이라면) 그다지 나쁜 기사라고 보긴 어려웠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다시 침을 삼키며 우드는 말을 계속했다.
“어쩌고저쩌고 해서 전쟁에서 이긴 거야 다 아는 얘기니까 그 부분은 건너뛰고..”
우드의 말을 들으며 키욘은 다시 엘리어트 쪽을 힐끔 보았다. 우드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을 텐데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리어트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이기고 나자 그렇게 돕겠다고 하던 기사가 소리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답디다.”
“그래?”
"그렇대요."
우드가 끄덕거렸다.
“그 기사가 선동하는 통에 덩달아 전쟁터로 따라 나서거나 아니면 자기 마을을 전장으로 내준 마을도 꽤 되는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많지도 않고 전장이 된 마을이야 당연히 쑥대밭 되고..”
말하다 갑자기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결국 테이드에서도 구제 못해준다고 하는 통에 마을을 떠나거나, 그 할멈처럼 정신 놓은 사람도 여럿 되고.. 들어보니까 살아 남은 사람들도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게 된 것 같더라고. 하긴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그 기사는 왜 사라졌대?”
그 부분의 말이 길어지는 걸 막으며 키욘은 물었다.
“죽은 건 아니고?”
“모르겠어요.”
우드는 으쓱했다.
“죽었단 말도 있고 수도로 돌아가는 일행 중에 섞여 있는 걸 봤다는 자도 있고.. 어떻게 됐는지 확실히는 모르는 것 같더라고. 그래도 뭐가 됐든 남은 사람들 뒤처리는 할 수 있게 해주고 죽든지 떠나든지 했어야지, 원.”
조금은 억지스러운 말과 함께 우드는 아까 갔다 왔던 막사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들처럼 좌우간 살 길이 막막해서 테이드나 아스드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 엄청나답니다.”
거기까지 하고 나자 이제 할 말은 거의 했는지 입을 다물며 우드는 엘리어트 쪽을 다시 보았다.
“봤지? 네가 그 기사랑 아는 사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나 틀린 말 한 거 하나도 없다. 그것 말고도 또...”
“그 정도 얘기했으면 됐어.”
가만있는 엘리어트를 향해 기세등등하게 따지려는 그를 말리며 키욘은 엘리어트 쪽을 다시 보았다.
들어보니 그 네쉬하트라는 기사, 갑자기 사라진 게 문제지 하는 행동이 나빴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만일 뒤처리 없이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수도로 그냥 돌아간거라면 원망을 들어도 싸지만 그게 아니라면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삶이 비참해진 사람들은 누구라도 원망하고 미워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희생양으로 네쉬하트라는 기사가 선택된 것처럼 보였다.
키욘은 다시 엘리어트 쪽을 보았다. 뭐가 됐든 좌우간 그 기사와 소년은 아는 사이가 분명하다. 그것도 아마 꽤 가까운 사이였던 듯 했다.
“키욘 드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기사 한 명이 그를 향해 뛰어왔다.
“왜요?”
고개를 들며 시큰둥하게 키욘이 대꾸했다.
“릴 님께서 찾으신다.”
기사가 말했다.
“나를?”
“선두로 가봐.”
질문에는 대꾸도 없이 바로 다시 몸을 돌리는 기사를 의아한 듯 키욘이 쳐다보았다.
“왜 찾아?”
옆에서 우드도 어리둥절 물었다.
“모르지 나도.”
대꾸하며 키욘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성큼 걸어가는 키욘을 잠깐 보다가 이제 자리에 엘리어트와 둘만 남게 된 것을 깨닫고 우드도 서둘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엘리어트를 보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그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줄지어 앉아 있는 용병들 틈에서 엘리어트는 가만히 몸을 웅크린 채 대열 한참동안 가만히 있었다. 방금 전 우드가 한 말이 그대로 엘리어트의 머리속을 맴돌았다.
아까 막사에서 남자가 했던 말, 그리고 노파가 자신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말들도 줄곧 엘리어트의 머리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에서, 스승을 따르려던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진 그로 인해 절망으로 떨어졌다. 그를 믿고 움직였던 많은 사람들은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비참한 생활로 근근히 버텨가야만 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를 사람들은 증오했다.
네쉬하트라는 이름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스승은 여기서 배신자이자 무책임한 인간으로 낙인 찍혀 있다. 죽음으로.. 영웅이자 존경하던 스승의 이름은 바닥까지 떨어졌고 사람들은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엘리어트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스승님...”
그의 입에서 희미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언제 또 이동할지 기다리고 있는 행렬은 제일 앞에 있는 오십 여명의 기사들을 선두로 그 뒤에 보병 이백, 그리고 중간 중간 고용되어진 용병들 육십 여명이 차례대로 앉아 있었다.
“이제 도착하면 당분간 걷는 건 그만 하겠지?”
“가봐야 알지 그야.”
옆에 앉은 남자의 말에 퉁명스럽게 남자가 대꾸했다.
“도착하자 마자 또 바로 돌아온다고 할지도 모르고.”
“하긴.”
등을 기울이며 손을 뒤로해 남자가 바닥을 짚었다.
“뭐가 됐든 빨리 끝내고 돈이나 받으면 원이 없겠네.”
그렇게 탄식하듯 말하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기색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는 아까 모래 동굴에 갔다 왔다고 알려진 용병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 용병이야 관심 없었지만 모래 동굴 일로 키욘과 함께 그가 공작에게 포상을 받게 될 거라는 말이 돌아 용병들 몇은 소년을 좀 부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무릎에 묻고 있는 엘리어트를 보다가 문득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그는 옆에 앉아 있던 남자를 툭툭 쳤다.
“저 자식, 우는 거 아냐?”
그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엘리어트 쪽을 보았다. 그도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가 본데?”
“포상도 받겠다 웃어도 시원찮을 판에 왜 울어? 야, 꼬마야.”
크게 그를 불렀으나 엘리어트는 미동도 없었다. 남자들은 이상하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굳이 더 이상 말을 걸 마음은 없었는지 입을 다물며 별 일도 다 있다는 듯 그를 다시 보았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과 수군거리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은 채, 스승의 부고를 들은 뒤 그 날 처음으로 엘리어트는 울었다.
요새로 갔던 기사들이 돌아온 건 정오가 지나 해가 머리 위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때였다.
“좀 이상합니다.”
요새로 갔던 기사 라드 이슨과 케이츠 헤먼이 돌아와 공작과 릴, 그리고 기사들에게 보고했다.
“무슨 소린가?”
“센볼린의 기가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이슨의 말에 가메인은 잠시 그를 보았다.
“정말인가?”
요새에 자국을 상징하는 깃발에 내려와 있는 일은 없었다. 폭풍우가 불더라도 기는 항상 자리를 지켰다.
“가까이 가서 살펴볼까 하다가..”
이슨은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 보는 눈이 어디 있을지 몰라 접근하진 않았습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은 첫 번째, 센볼린 깃발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요새 초소에 보초병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다 경력이 십 년도 넘은 서른 초반의 기사들이었다. 매의 눈은 아니더라도 요새 가장자리에 있는 보초병의 미세한 움직임 정도는 몇 십 아드 밖에서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한 곳에서도 움직임은 없었다.
움직임이 없다고 해도 그렇다고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또 아니어서 혹시 어디서 이쪽을 주시하는 시선에 붙잡히는 것을 조심하기 위해 두 사람 다 함부로 요새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요새 안에 헤르스 기사단이 아닌 다른 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로 보아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이슨이 덧붙이고는 입을 다물자 갑자기 잠깐 정적이 돌았다.
“주변은 확인했나?”
곧 공작이 물었다. 이슨이 끄덕였다.
“전투나 싸움이 있었다든지, 주위에 그런 흔적은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 요새를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이면 두 사람이 노출되는 건 상단이 있다는 걸 들키는 것과 같았다.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요새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하고 돌아왔지만 주변은 비교적 면밀히 보았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만일 요새 안에 헤르스 기사단이 아닌 누군가가 있다면, 적어도 전투를 벌여 요새를 탈취한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주변이 너무 깨끗했다.
“어떻게 할까요?”
마지막으로 그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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