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2 이에넨(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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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에넨(8)
행렬은 길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화려한 장미 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제일 앞에서 행렬을 이끌고 있다. 브롤렌을 우회할 생각에 일찍 이에넨을 출발해 그들은 이제 거의 실펜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실펜을 빠져 나가 하루를 더 가면 라제크 근교에 도착한다.
그다지 급할 것도 없어 느긋한 기세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길 옆으로 나있는 숲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행렬이 자리에 섰다. 양쪽에서 마차를 호위하며 가고 있던 기사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데 나무 사이에서 대 여섯 마리의 말들이 연이어 튀어 나왔다.
그대로 행렬의 앞을 막아선 그들을 보고 경계하는 눈초리로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드는 찰나 그 제일 앞에서 말에서 내려서며 엘리어트가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얘길 하는지 마차 안으로 들어간 엘리어트가 나올 때까지 가슈들은 말을 세워둔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엘리어트가 밖으로 나왔다. 이쪽을 향해 그가 걸어오자 가슈들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협정서는요?”
아비크가 물었다.
“전했어.”
엘리어트가 대꾸했다.
“이제 이에넨 영주가 라제크로 가는 건 포기하는 겁니까?”
어떻게 될 지 궁금한 얼굴로 이번에는 가슈가 물었다.
“글쎄.”
엘리어트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길 바라지만 영주가 어떻게 결정할 지는 알 수 없지.”
협정서를 전해 받고 이에넨 영주는 꽤 놀라는 듯 했다.
가메인 공작은 협정서를 보면 그가 마음을 돌릴거라고 했지만 엘리어트가 느끼기에 네바렌에서 자신을 찾아 왔다는 것에 영주는 오히려 당황한 것 같았다.
“어쨌든 우리가 할 일은 끝난 거 맞죠?”
그 점이 마음에 걸려 잠시 생각하는 엘리어트를 향해 결과만이 중요한 레이가 시즈의 옆에서 확인했다.
“왠지 급하게 볼 일 보고 그냥 바지 올린 기분이네요.”
엘리어트가 끄덕이는 것을 보며 일이 뭔가 너무 쉽게 일단락 됐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시즈가 중얼거렸다.
“전할 거 전했음 됐지 뭐.”
처음부터 시간을 맞추는 게 중요했지 싸움이 필요했던 일이 아니다. 끝나고 보니 싱겁다고 느낄수도 있지만, 그러나 보수만 잘 받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레이는 어깨를 피며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좌우간 쓸데없는 데 시간만 들이다 겨우 맞췄네요.”
어쨌든 맡은 끝났다.
“돌아가는 거죠 그럼?”
“그래야지.”
가메인 공작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은 여기까지다.
고개를 돌려 엘리어트는 이에넨 영주가 타고 있는 마차로 시선을 주었다. 영주의 마차는 자리에서 꼼짝도 않는다. 기사들과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쩐지 이대로 이에넨으로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이는 느낌인 건 생각탓일까.
가슈들이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동안 엘리어트는 그대로 잠시 마차를 응시했다.
다시 실펜을 가로질러 브롤렌 가까이 오자 밤이 되었다.
“아직 안 돌아왔는데요.”
어제 밤 매를 날린 숲 근처에서 멈추며 레이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기다릴 거에요?”
엘리어트는 끄덕였다. 협정서를 전하는 일은 끝났지만 미행했던 남자를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럼 우리도 잠깐 쉴까요?"
잘됐다는 듯 레이가 말했다.
숲 한 쪽 공터에 이틀 전과 마찬가지로 모닥불 하나가 피어 올랐다.
다들 모닥불 근처에 둘러 앉아 잠시 쉬고 있는 동안 자리에서 빠져 나와 엘리어트는 좀 떨어진 숲 한 곳에 서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달은 있었지만 구름이 끼었는지 초승달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가 울창해선지 주변은 깜깜했다.
얕게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어둠이 눈에 익자 엘리어트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얕게 흐르고 있는 개울을 발견하고는 엘리어트는 그 앞에 몸을 숙였다. 개울물에 손을 담그자 봄인데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느낌이 전해왔다. 그대로 양 손으로 물을 떠 엘리어트는 입에 댔다.
센볼린에서 네바렌으로 돌아온지 이제 열흘이 좀 넘었다. 그러고 보니 라곤을 돌아다니는 게 오랜만이라는 게 생각났다.
흐르는 물을 그는 잠시 응시했다. 아마 오늘쯤 키욘은 고향에 도착했을 것이다.
“뭐해요? 여기서.”
뒤에서 시즈가 그를 향해 다가오며 말을 건냈다.
“아~ 시원하다.”
엎드려서 개울물을 손으로 떠먹으며 그가 크게 말했다.
“레이의 매가 돌아오면 따라갈 거에요?"
숲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들 이미 들었다.
"그래야지."
대꾸하던 엘리어트는 물을 마신 것 만으로는 안되겠는지 이제 개울물을 얼굴에 끼얹는 그를 잠시 보았다. 열 여섯이라고 했나. 그가 처음 용병 생활을 시작할 때와 같은 나이다.
“이 생활한지 얼마나 됐어? 시즈.”
마찬가지로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엘리어트는 물었다.
“2년이요.”
차갑지도 않은 지 양 팔을 걷어 붙인 채 시즈는 본격적으로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씻은지 이틀이 넘었다.
“그 동안 전쟁에 나가본 적 있어?”
엘리어트가 다시 묻자 시즈는 고개를 저었다.
“웬만하면 그런 덴 피해 다녔거든요.”
갑자기 시즈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전쟁터만 빼고 웬만한 힘든 일은 스무 개 이상 맡았고 실패한 적은 한 번 뿐이었어요. 네바렌에서 포상 받은 적도 두 번이고요.”
얕잡아보지 말라는 듯 눈에 힘을 주며 하는 소리를 들으며 엘리어트는 물 묻은 손으로 목뒤를 문질렀다.
“고향이 어디라고 했지?”
그러면서 담담히 물었다.
“체르곳이요.”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다가 갑자기 시즈가 퍼득 생각난 얼굴로 엘리어트를 보았다.
“그런 걸 왜 일일이 궁금해 해요? 혹시 나한테 흑심 있어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보며 시즈가 말했다.
“그런 거면 못 받아 줘요.”
그 말에 잠깐 그를 내려다 보다가 엘리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개울을 벗어나 걸어가는 그를 시즈가 얼른 쫓아갔다.
“왜 말하다 말고 그냥 가요?”
“말하기 싫어졌어.”
시즈가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달은 있지만 숲이 어두워 발 아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걸음이 자연스럽고 어디 나무 뿌리 한 군데 걸리는 법이 없었다.
“농담이지만 혹시나 했어요. 워낙 이상한 녀석들을 겪어 봐서.”
엘리어트의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무심한 투로 시즈는 말했다.
“고향에서 어떤 기사 침실로 끌려 갔다 빠져 나온 적 있거든요.”
말이 뜻하는 바에 엘리어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그 시선에 시즈가 대꾸했다.
“미친 변태 새끼였죠. 그럴거면 남창을 찾지.”
남색을 탐하는 기사나 귀족에게 끌려가는 평민 소년들이 가끔 있다는 것은 엘리어트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빠져 나왔어?”
“침대 맡에 있는 포크로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은 투로 시즈는 말했다.
“가슴 한가운데를 찔렀는데, 죽진 않았지만 그 덕에 도망치게 되서.. 이젠 고향에도 다시 못 돌아가는 신세죠 뭐.”
걷다보니 수풀 저쪽에서 모닥불 주변에 모여 앉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이 이제 눈에 보였다.
“길더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대요.”
예쁘장하게 생긴 걸로는 아는 사람 중에 제일이었으니 오히려 더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 길더 쪽을 보며 시즈는 중얼거렸다.
“하긴 그 실력에 덮치면 진짜 송장 치우지. 으...”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치다가 문득 호기심 어린 얼굴로 엘리어트를 향해 그는 물었다.
“엘리어트는 어쩌다 네바렌까지 왔어요? 오스티아면 여기서 가깝지도 않은데..”
그 말에 엘리어트가 쳐다보자 시즈는 약간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이름 부르라면서요.”
“내가 오스티아 출신인 건 어떻게 알았어?”
“아..”
뒷통수에 손을 대며 시즈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어쨌든 대장에 대해 알아야 우리도 처신이 되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는 시즈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길게 지나갔다.
엘리어트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올려다 보았다. 매 한 마리가 긴 울음 소리를 내며 바로 위를 지나고 있었다.
긴 휘파람 소리와 함께 잠시 후 날아온 매가 레이의 팔에 앉았다.
“이제 돌아온 걸 보니 꽤 멀리까지 간 모양인데요.”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이는 엘리어트를 보았다.
“정말 가볼거에요? 일도 끝난 마당에 굳이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확실히 해둘 건 해둬야지."
레이를 향해 엘리어트는 물었다.
“제대로 찾을 수 있어?”
“제일 아끼는 녀석이에요. 그 정도는 문제없이 안내해요.”
무시 말라는 듯 레이가 대답했다.
“여기서부턴 너흰 따라오지 않아도 돼.”
한 쪽에 매어둔 말에 오르며 엘리어트가 말했다. 그의 가까이 다가온 아비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또 혼자 가려고요?”
“뒤치다꺼리 할 마음 없는 사람들한테 이런 일까지 하게 할 순 없잖아.”
담담히 하는 소리에 아비크는 어깨를 한 번 움츠러 뜨렸다.
“말 한 마디에 되게 뒤끝 있네요.”
“쉬다 네바렌으로 돌아가."
가슈와 나머지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엘리어트는 말했다.
"이번 일에 대한 보수는 차질없이 지급 될거야.”
고삐를 잡아 당겨 엘리어트는 말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다들 수고했어.”
매가 길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매를 따라 엘리어트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 남은 가슈들은 그를 잠깐 보고 있었다.
“저렇게 보내도 되요?”
좀 찜찜한 기색으로 길더가 말했다.
“어쩌겠어. 혼자 가겠다는데.”
같이 엘리어트가 사라진 쪽을 보고 있다가 이내 레이는 중얼거렸다.
“어차피 우리도 곧 갈 길 갈텐데.”
그렇게 말하는 레이의 옆에서 나머지 사람들 역시 다들 석연치 않은 얼굴로 엘리어트가 사라진 쪽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매를 따라 엘리어트는 말을 달렸다. 바람에 그의 머리가 가볍게 흩날렸다.
레이의 말대로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에넨 영주도 그렇고 마주친 남자도 그렇고 석연치 않은 기분이 반복되고 있으니 어느 하나라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고삐를 당겨 엘리어트는 더 속력을 높였다.
“어떻게 할래?”
엘리어트가 사라진 뒤 레이는 가슈를 향해 물었다. 모닥불 옆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가슈가 고개를 들었다.
“뭘?”
잠깐 그는 엘리어트를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가서 확인해 보자고 해도 다들 별 말 없이 따라갔을 텐데.. 자신을 과신하는 남자는 아니다. 그럴 성격이 아니란 건 알겠다. 하지만 매번 혼자 움직이려는 게 역시 좀 이상한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다 같이 돌아가 돈을 챙길건지 아님 여기서 우리도 그만 헤어질 건지 말이야.”
혼자 움직이겠다고 하는 건 아까 말 한대로-아비크에 대한 약간의 뒤끝섞인 농담을 뺀다면, 역시 자신들에게 수고를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아선가. 그런 배려를 할 줄 안다면 역시 기사가 아니어선가.
“나야 특별히 볼 일 없어.”
생각에서 빠져 나오며 고개를 돌려 가슈는 아비크를 향해 물었다.
“아비크 넌?”
“나도 그렇지 뭐..”
무심히 아비크가 대꾸했다.
“예정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비크는 나무 아래 앉아 잠깐 얘길 나누고 있는 시즈와 길더를 향해 소리쳤다.
“어이, 너희들은?”
“우리도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해.”
이쪽을 쳐다보며 시즈가 길게 대답했다.
“그럼, 일단 어디 가서 좀 쉴까?”
레이는 근처에 뭐가 있는지 잠시 생각했다.
“통행증도 있겠다, 이 근처면 실펜의 브레엔 마을이 가까운데.”
그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오늘 밤은 쉬어야 하니까 거기로 가볼래?”
잘 됐다는 듯 시즈가 주먹을 불끈 움켜 쥐어 보였다.
“가서 오늘 밤에 왕창 퍼마시고 놀자.”
아비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돈 없어.”
“치사하게 왜 그래?”
“열 여섯 밖에 안 된 놈이 술 퍼마실 생각부터 하냐? 내 앞에선 어림없어.”
퉁명스러운 아비크의 태도에 시즈가 투덜댔다.
“사람패고 영주한테 뻔질나게 잡혀 가면서 충고는...”
“뭐라고?”
아비크가 인상을 쓰자 시즈가 얼른 길더의 뒤로 숨었다.
“이리 안 나와?”
“나가면 때릴 거잖아.”
항의하듯 시즈가 소리쳤다.
“그만들 해.”
기가 막힌 얼굴을 하는 아비크를 보고 길더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일단 마을로 갈까?”
시끄러운 세 사람을 보며 레이는 말했다.
“피곤하니까 가서 오늘은 푹 좀 쉬자.”
“그러자 그럼.”
동감이라는 기색으로 가슈도 다시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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