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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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상트.”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알렌 드갈은 마침 막사 한 구석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던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주인의 목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여기 상자도 저쪽 마차에 싣도록 해.”
“네.”
짧게 대답하고 남자가 걸어가 상자를 들어 올렸다.
상자를 어깨에 들쳐 매고 마차로 걸어가는 동안 마차 안에서 나온 기사 한 명이 그를 지나쳐 드갈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기사의 시선이 인부의 뒷모습을 잠깐 따라갔다.
“못 보던 얼굴인데?”
마차쪽에 시선을 둔 채 카빌 드라바가 드갈을 향해 물었다.
“새로 고용했나?”
“한두 달 됐어.”
“막일하게 생긴 얼굴이 아닌데?”
수상한 자는 아니냐는 의문이 섞인 질문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하며 드갈은 이제 막 옆 마을에서 배달된 물품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 서류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나도 그래서 망설였는데, 뭐 일은 곧잘 해.”
서류를 들여다보며 가려웠는지 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여리여리하게 생겨갖고선 힘도 제법이고 말이야.”
카빌은 미심쩍은 눈으로 상자를 어깨에 들쳐 매고 걸어가는 남자를 힐끔 보다가 곧 몸을 돌려 로거 대장이 있는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건이 담긴 나무 상자를 마차 앞에 내려 놓고 상트 헤이스는 고개를 반쯤 돌려 가게 안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무역상 알렌 드갈의 잡화점에서 일한지 두 달. 보름에 한 번씩 로거 리겐과 카빌 드라바라는 기사 두 명이 주인을 찾아왔다. 앙리엥 루더 백작의 기사라고 들었다.
몸을 숙여 앉아 그는 상자에 손을 댔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 가지런히 들어 있는 검고 납작한 사각 돌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날을 예리하게 손질하기 위해 보통 사용하는 도구지만 양이 상당했다.
“이봐.”
날카로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날아왔다. 고개를 드니 아까 마차에서 나왔던 남자가 이쪽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뭐하는 거냐?”
상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한 번 봤습니다. 여간 무거운 게 아니어서.”
마차 앞으로 걸어온 카빌은 실없이 웃으며 대꾸하는 인부의 말에 못마땅한 듯 그를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사내 자식이 정말 마음에 안들 정도로 예쁘장하군. 카빌이 그의 어깨를 밀쳤다.
“저리 꺼져.”
상트가 움찔 한 발 뒤로 물러 났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그는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듯 몸을 돌렸다.
도둑맞은 무기들을 되찾은 뒤 보름이 지났다. 그 일 이후 수도 경비는 더욱 강화 되었지만 도적들에 대한 이렇다 할 단서는 얻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락터드를 보좌하며 케이그는 성 안팎과 외곽 순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외곽 순찰을 하던 중 락터드의 제안으로 술집으로 가고 있었다. 말을 꺼낸 게 뜻밖이긴 했지만 보름 내내 제대로 한 번 쉬지 못한 대장이었기에 한 숨 돌릴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며 케이그는 락터드의 뒤를 따랐다.
술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서 락터드는 안을 둘러 보았다. 뒤를 따라 케이그도 안으로 들어오며 주위를 확인했다. 장사가 잘 되는 곳이었는지 초저녁이었는데 안은 테이블마다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나마 비어 있는 구석자리 자리를 보고는 락터드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문을 받으러 종업원이 테이블로 걸어오자 락터드는 따라와 맞은 편에 앉는 케이그를 향해 물었다.
“한 잔 하겠나?”
그 말에 케이그가 머뭇거리며 공손히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일을 할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고지식하긴.”
비식 웃으며 응수하고는 종업원을 향해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문한 뒤 락터드는 술집 안을 둘러 보았다.
“장사가 잘 되는 집이군.”
“여기 근처에 술집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 말에 케이그가 대꾸했다.
꽉 찬 사람들로 술집 안은 진짜 떠들썩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서의 시끄러운 소리가 유독 커지면서 이쪽까지 들려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조금씩 향하고 있었다.
소리는 술집 가운데 놓여 있는 제일 큰 테이블에서였다. 대 여섯 명의 기사들이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남자가 종업원을 붙잡고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확히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술값이라는 말이 들리는 걸 보아 외상값이라도 받으려는 것 같은데 오히려 종업원은 기가 죽어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고 남자의 목소리만 크게 들렸다.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은 거기에 개의치 않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패악스러워지자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온 다른 종업원을 향해 뭐라고 말하며 남자가 그의 어깨를 밀쳤다. 위협에 겁을 집어 먹은 종업원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루더 백작의 기사들입니다.”
그 쪽을 보며 케이그는 말했다.
“이 술집을 경계로 바로 백작의 영지라 여기 온 모양입니다.”
종업원의 어깨가 떨리는 것에 맞춰 시비를 거는 목소리는 점점 더 기고만장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락터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쪽을 향해 걸어 가려는데 케이그가 그 옆을 조금 막아섰다. 락터드가 시선을 주자 좀 난감한 얼굴로 케이그는 말했다.
“그냥 두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괜히 건드렸다간... 백작의 세력에 반하기엔 왕실의 힘이 아직 미약합니다.”
말을 하던 케이그는 그러나 이내 걸음을 옮기는 락터드에 멈칫했다.
“대장님.”
“아, 아. 걱정 할 거 없어.”
따라오려는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하고 락터드는 기사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벌벌 떠는 종업원의 모습에 인상을 쓰며 로거 리겐은 한 손으로 그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가만있지 말고 술이나 더 가져오라고.”
그러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잡았다. 멈칫하며 로거는 고개를 돌려 그 손에 달려 있는 몸뚱이를 쳐다보았다.
“여긴 백작의 성이 아니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 행동은 삼가는 게 어떻소?”
예의 바르게 말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서 단호한 힘이 느껴졌다. 남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다 천천히 로거가 손을 놓았다. 종업원이 기침을 몇 번 하고는 질겁을 하며 자리를 빠져 나갔다.
로거 리겐은 끼어든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외곽 순찰을 한다면서 왕성 기사들과 돌아다니는 걸 본 적 있다. 애써 불쾌한 기색을 억누르며 로거는 입을 뗐다.
“경비 대장님이 여기 있는 걸 몰라 뵈었습니다.”
한 쪽 입꼬리를 올려 락터드를 향해 그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와 같이 한 잔 하겠습니까?”
“그러고 싶지만 일하는 중이라 말이오.”
그 말에 로거가 뒤돌아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들었어? 역시 왕성 기사들은 대단해. 일하는 중에는 술도 안 마신다네. 그러니 우리 같은 잔챙이들이 버틸 수가 있나?”
기사 몇 명이 킬킬거렸다. 락터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도 맡은 바 일이 있지 않소? 그럼 본분에나 충실하러 가보는 게 어떻소?”
로거의 표정이 변했다. 그 말에 뒤에 있던 기사들도 그를 쳐다보았다. 좀 전보다는 조용해졌지만 훨씬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루더 백작님의 친위기사요.”
낮지만 위협적인 음성으로 천천히 로거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 점을 무시하고 나에게 명령을 하는 거요?”
“백작의 명성에 해가 되는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오.”
락터드는 대꾸했다.
“이국에서 온 경비대장이 제 소임을 못하고 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그렇소만.”
공손한 어조로 그는 말을 이었다.
“그냥 나가기가 곤란하다면 그렇다면 내기를 해서 정하겠소?”
미소를 지으며 그가 덧붙였다.
“나와 대결해서 진다면,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 말이오.”
대결이란 말에 기사들의 분위기가 더 냉랭해졌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락터드는 태연히 로거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로거는 그 시선을 마주 대하며 가만히 있었다. 표정이 얼음장 같았다. 그러나 곧 천천히 그 역시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웠다.
“좋소.”
로거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지.”
그 말에 로거의 뒤에 있던 기사들의 표정이 불만스러워졌다.
“그런데, 당신은 뭘 걸 건가?”
“뭘 원하오?”
말을 하고 있는 그를 응시하며 락터드가 물었다.
“기사가 결투를 신청했다면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지.”
웃음을 띠며 로거는 말을 이었다.
“서로간의 댓가는 공정해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듣고 있던 케이그의 표정이 변했다. 아무리 백작의 친위 기사였지만 일개 사병이 수비대 대장에게 정도가 지나친 무례였다.
“알겠소.”
그러나 미소를 지으며 락터드가 대꾸하고 있었다.
“그럽시다 그럼.”
여유 있는 그의 태도에 로거의 눈썹이 크게 한 번 꿈틀댔다. 테이블에서 걸어 나와, 곧 그는 락터드와 대 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와 마주 섰다.
술집은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다. 몇 몇 손님들은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듯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긴장되지만 재밌는 일은 놓치기 싫었는지 쥐죽은 듯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었다.
케이그는 검을 쥐어 드는 로거를 쳐다보았다. 영주의 세력은 기사단의 실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거칠고 안하무인인 백작의 기사들 중 제 1 오른팔인 로거 리겐은 그 중에서도 유명했다.
상관으로 모신지 대여섯 달이 지났고 락터드 경의 리더쉽은 충분히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그의 검 실력은 본 적이 없었다. 여차하면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허리에 찬 검에 한 손을 올린 채 케이그는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자리에 서서 수비대장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 것과 동시에 달려가 로거는 남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검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연이어 검이 서너 번 부딪치는 소리를 내고는 곧 다시 팽팽히 맞섰다.
밀리지 않는 기색을 느끼며 로거는 칼날 너머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힘으로 자신과 대등한 자는 그리 많지 않은데 만만치가 않았다.
락터드가 뒤로 힘을 빼는 것을 느끼며 로거는 다시 검을 그에게 휘둘렀다. 양 옆으로 들어오는 검날을 수비 대장이 다시 막아 냈다. 그리고 다시 정면에서 두 개의 검이 맞부딪치며 멈췄다.
양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로거가 검을 밀어부쳤다. 기세에 밀려 이번에는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 같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덤벼들며 로거는 그의 목을 향해 칼을 내리 쳤다. 그 순간, 일순 락터드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로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몸을 숙여 어느새 가슴께로 돌진해 온 그가 자신의 목에 칼끝을 들이대고 있었다.
로거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반 발만 더 나갔으면 그 칼이 목을 관통했을 것이다. 몸을 움직이기엔 무게 중심이 너무 앞으로 쏠려 있었다. 더구나 남자의 눈빛이 좀 전과는 달리 조금만 움직임을 보인다면 주저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많은 움직임을 이용할 수 없는 이 작은 공간 안에서, 반격의 기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천천히 로거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숨을 죽인 채 결투를 보고 있던 술집의 손님들은 너무 갑작스럽게 난 승부에 어리둥절해져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뭐야...?”
“끝이야?”
로거의 손에서 칼이 떨어지자 그제야 락터드는 그의 목을 겨누고 있던 손을 내렸다.
“약속 지키시오.”
락터드는 말했다.
“기사의 예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소.”
로거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주워들기 위해 몸을 숙였다. 케이그는 굴욕감에 안색이 변하고 있는 그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을 일으킨 로거는 잠시 꿈쩍도 않고 있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대단하군.”
정말, 보통이 아닌 놈이다.
“약속은 지키지.”
그의 말에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투덜대기 시작했다. 로거는 락터드를 쳐다 보았다.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그 땐 오늘 같진 않을 거요.”
“언제든 상대해 드리겠소.”
미소를 지으며 락터드가 응했다. 로거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이를 악물며 그가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일어나!”
백작의 기사들이 인상을 쓴 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로거가 문쪽으로 걸음을 떼자 뒤를 따라 걸어가던 그들 중 몇 몇이 케이그의 옆을 지나치며 혼자말로 욕찌기를 내뱉었다.
가게 문이 덜컹소리를 내며 닫혔다. 로거 리겐의 일당들이 완전히 가게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락터드는 다시 케이그의 옆으로 걸어갔다.
“별 일 없을 거랬잖아?”
거 보라는 듯 하는 말에 케이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별 일입니다.”
그는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술집 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마주치기 쉽지 않은데 우연치고는 기분 나쁘네요.”
“일부러 여기 온 거니 우연이라고 할 순 없지.”
기사들이 나간 밖으로 시선을 주며 락터드가 말했다.
“네?”
의아한 얼굴로 케이그가 반문했다.
“수도에서 가장 세력이 큰 귀족 중 하나가 루더 백작이지. 그는 선왕의 인척일 뿐 아니라 재력이나 인맥도 상당하다고 들었네.”
알고 있는 얘기라 새삼스럽지 않다는 얼굴로 케이그가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폐하의 세력보다 오히려 루더 백작을 조심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도 지난 몇 달 동안 그와 마주치기가 쉽지 않더군. 하지만 영주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으면 그의 기사들을 보면 되지.”
락터드는 기사들이 몰려 나가는 바람에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술집 출입문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떤 자인지, 이제 좀 알게 된 것 같네.”
케이그 역시 락터드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술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던 기사 중 한 명이 로거의 옆에서 기분 나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정말 그냥 갑니까? 로거. 왕실 기사 놈한테 창피나 당하고....”
“입 닥쳐, 카빌.”
무시무시한 어조로 로거가 대꾸했다.
“내 손으로 죽여 버릴 테니까, 곧.”
이를 갈며 말하는 로거의 기색에 카빌은 사악한 웃음을 띄며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로거는 목덜미를 한 번 문질렀다. 여왕이 이국의 기사를 경비대장으로 삼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코웃음을 쳤는데 조금 과소평가 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그 땐 오늘의 모욕은 반드시 되갚을 것이다. 반드시.
이를 가는 그를 선두로 기사들은 곧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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