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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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가 있는 탑 가장자리에 작은 화단이 있다.
“이거 전부 옮기시게요?”
“응.”
작은 화분 일곱 개를 옆에 둔 채 데비는 화단 앞에 앉았다.
“다 옮겨서 어디다 두시게요?”
“방에다 가져다 놓을 거야.”
그 자리에서 데비는 잠시 가만히 꽃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런 옆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열다섯이 된 그녀는 이제 근방에서는 따라올 만한 이가 없을 만큼 미인이었고 그것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로 벌써 7년째네.”
잘 피어난 꽃들을 화분에 옮기며 혼자말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네? 뭐가요?”
천진한 얼굴로 옆에서 레사가 되물었다.
“그런 게 있어.”
“에이, 뭔데요? 아가씨.”
“넌 들어도 모르는 거야.”
옆으로 한 발 바짝 붙어 채근하듯 레사가 다시 묻자 가볍게 대꾸하며 그녀는 옮겨 심은 화분을 옆으로 비켜 냈다.
시장 끝에 있는 포목점에 포도주 몇 병을 배달하고 나온 엘리어트는 받은 돈을 주머니에 넣고 가게로 가고 있었다.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골목을 막 지나는데 골목 저쪽 머리 위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모퉁이 너머로 보이는 작은 지붕 위에 왠 아이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떨어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여 엘리어트가 서둘러 그쪽으로 갔다.
“아이구..!”
아이 울음 소리를 듣고 나왔는지 집 앞에는 이미 얼굴이 하얗게 변한 여자가 지붕 위 처마 끝에 옷이 걸려 대롱 대롱 매달려 있는 꼬마 아이를 보며 안절 부절하고 있었다.
“가만 놀고 있으랬더니 언제..!”
저녁 준비를 하다 나왔는지 하얗게 밀가루가 묻은 손으로 앞치마를 꼭 쥔 채 여자가 위에다 대고 소리쳤다.
“가만 있어, 가만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여자가 집으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다가 엘리어트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엉엉 울면서 매달려 있는 아이는, 가만 보니 그 와중에도 한 손에 바람개비를 꼭 붙들고 있는 게 지붕으로 나와 바람개비를 가지고 놀다가 미끄러진 것 같았다.
여자가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활짝 열어 놓은 문쪽을 보다가 엘리어트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집 근처에 나무들 몇 그루가 서 있다. 지붕에서 대략 성인 보폭 대여섯 발 정도 떨어져 있어 나무에서 지붕으로 건너뛰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잠깐 망설이다가 그가 나무 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지붕으로 나 있는 창으로 얼굴을 내민 여자는 아이가 안 보이자 아래로 떨어진 줄 알고 얼굴이 하얘져 다시 집밖으로 뛰쳐 나왔다. 바닥에 가만히 서서 멀뚱히 이쪽을 보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여자가 그 앞으로 뛰어가 애를 잡았다.
“괜찮아? 안 다쳤어?”
다행히 어디 다치거나 하지는 않아 보여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화가 났는지 여자가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너 이 녀석, 엄마가 장난치지 말고 가만 있으라고 몇 번 말했어?!”
“우왕..! 잘못했어요..!”
울면서 말하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여자도 좀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아이가 다친데 없는지 확인했다.
“근데 어떻게 내려 왔어?”
“형이 내려줬어요.”
“형?”
누가 있었나 싶어 여자는 길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골목 안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그러면 정말 혼날 줄 알아.”
신신당부하며 여자가 다시 훌쩍이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골목을 빠져 나온 엘리어트는 길을 걸어 올라가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그는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부엌 쪽에서 데이먼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포도주 값 받아 왔어요.”
“서랍에 넣어 다오.”
걸어가 그는 가게 한쪽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장의 서랍을 열었다.
“스승님은요?”
포도주 값으로 받은 돈을 그 안에 넣으며 엘리어트가 물었다.
“뒷마당에 있다.”
저녁 준비가 한창이었는지 연이어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날아왔다.
“저녁 거의 됐으니까 가서 데려와라.”
“네.”
대꾸하며 엘리어트는 뒷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뒷마당으로 나오자 마당 맞은편에 있는 나무에 앉아 있는 락터드가 보였다. 엘리어트는 그 쪽으로 걸어갔다.
“스승님.”
얕은 나뭇가지에 다리를 건 채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락터드가 앞으로 걸어오는 엘리어트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아, 왔냐?”
“뭐하세요?”
거꾸로 쳐다보는 시선에 엘리어트가 물었다.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말이야.”
말하기가 힘이 들었는지 그가 조금 끄응거렸다.
“이러고 있으면 가끔 좋은 생각이 날 때가 있거든.”
그 모습을 잠깐 보다가 엘리어트는 말했다.
“저녁 다 됐다고 오시래요.”
“그래.”
나뭇가지를 잡고 한 바퀴 돌려 몸을 바로 하며 락터드는 발을 땅에 내렸다. 숨을 몰아쉬며 잠깐 나무에 기대 있자 머리로 피가 몰려 벌게진 얼굴이 조금씩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심부름 잘 하고 왔냐?”
“네.”
한숨 돌릴 기색으로 서서 락터드는 말했다.
“요즘 너무 심부름만 하던데.”
요 근래 멀리서 들어온 주문이 별로 없어 상대적으로 락터드와 엘리어트가 외부 마을로 나갈 일이 없었다. 대신 마을 안에 있는 상점이나 인가에 간단히 포도주 몇 병씩 배달하는 일이 늘어 그걸 엘리어트가 맡아 하고 있었다.
“데이먼이 삯은 제대로 챙겨주고 있니?”
엘리어트는 끄덕였다.
“늘 정확히 주세요.”
데이먼이 보수를 늦게 주거나 적게 준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엘리어트로서는 크게 상관없었지만 락터드도 그렇고 데이먼도 그렇고 그런 면에서는 철저했다.
“다행이구나.”
요즘 너무 심부름이 잦아 약간 미안한 감이 있었던 락터드는 그 말에 끄덕거렸다. 안색이 다 돌아오자 그는 나무에서 등을 뗐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아까 칼날을 다듬어 놨는데 말이야.”
조금 전에 꺼내어 손을 봐둔 검 두 자루가 나무 밑에 세워져 있다. 저녁 해에 번뜩이는 칼날이 눈이 살짝 부실 정도였다.
“저녁 먹기 전에..”
걸어가 락터드는 세워 두었던 검을 들어 올렸다.
“연습 겸 해서 잠깐 한 번 해볼래?”
들고 있는 검을 그가 좌우로 가볍게 움직여 보였다.
“요즘 좀 소홀하기도 했으니.”
그 모습을 보다 걸어와 엘리어트도 나머지 검을 집어 들었다.
마당 한 가운데서 대 여섯 발작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작년부터 검은 왼 손에서 오른 손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여전히 락터드는 한 손이었고 엘리어트가 그를 이기는 건 몇 번 되지 않았다.
챙-하고 검날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마당 안에 퍼지는 것을 시작으로 곧 두 사람의 검이 연이어 부딪치기 시작했다.
7년의 기간 동안 엘리어트의 검 끝은 이제 웬만한 기사는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빨랐고 정확했으며 빈틈이 없었다. 열 여섯의 엘리어트가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를 봤을 때 전혀 예상도 못할 실력이었다.
연습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움직임이 마당을 왔다 갔다 했다. 공격해 들어갔다 락터드의 검에 막히자 큰 폭으로 뒤로 물러나며 엘리어트는 스승의 검이 움직이는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난 몇 년간 그는 마을에서 열리는 검술대회에 나갔고 여러 사람과 대련해 보았다. 그리고 두 해 연속 소년부 시합에서 우승하고 작년에는 처음으로 성인부 시합에도 나갔다. 그러면서 엘리어트는 스승의 검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알 게 되었다. 평소 스승과의 대련이 손에 익은 그로서는 다른 사람의 검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아직 스승의 실력의 끝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락터드의 검을 따라올 자는 없었다. 그래서 엘리어트는 스승을 존경하면서 동시에 언젠가 그런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이런 연습 시합에서라도 허점을 보일 수는 없었다. 매 순간의 대련에서 스승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엘리어트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락터드의 검이 가슴께로 들어오는 순간 그대로 피해 앞으로 발을 딛으며 엘리어트는 락터드의 어깨 옆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 행동이 제법 빨라 스승이 멈칫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엘리어트는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락터드가 왼팔로 칼의 옆을 막으며 검으로 엘리어트의 검손잡이를 내리쳤다. 순간 가해진 힘에 엘리어트가 손에서 검을 놓쳤다.
챙그랑 소리를 내며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멈칫하며 떨어진 검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엘리어트는 스승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암묵적으로 락터드는 한 손으로만 엘리어트를 상대해 왔다. 때문에 다른 손을 쓸 거라는 건 염두해 두지 않고 있었다. 기습적으로 양 손을 쓴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를 잠깐 보다가 허리를 숙여 엘리어트는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스승님도 치사할 때가 있으시네요.”
그러면서 엘리어트가 중얼거렸다.
“약 올랐다 이거냐? 하지만 애초부터 다른 손을 안 쓴다고 말한 적은 없지 않니.”
비식 웃으며 락터드는 응수했다.
“그러니까 방심하지 말고. 어디, 다시 덤벼 봐라.”
검을 앞으로 내세우는 락터드를 보며 엘리어트도 다시 검을 내세웠다.
“식사 하랬더니 뭣들 하고 있는 거야?”
그러고 있는데 안채 들창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식어빠진 저녁 먹고 싶으면 계속 하던가.”
“아, 지금 가.”
안에서 밖에다 대고 말하는 소리에 서둘러 대꾸하며 락터드는 손을 내렸다.
“이 정도 하고 들어가자.”
마찬가지로 엘리어트도 검을 쥔 손을 내렸다.
“안에다 들여다 놓고 갈게요.”
“그럴래?”
엘리어트가 손을 내밀자 락터드는 들고 있던 검을 그에게 넘겼다. 엘리어트가 헛간 쪽으로 몸을 돌리고 락터드는 안채 쪽으로 몸을 틀었다.
“실력이 좋아졌구만, 지난 번보다 더.”
검을 가져다 놓기 위해 헛간 쪽으로 가는 엘리어트를 들창을 통해 보며 데이먼이 말했다. 엘리어트가 주로 숲에서 수업을 하니 락터드와 겨루는 걸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웬만한 기사 한 둘쯤은 이제 문제 없겠어.”
엘리어트가 열려진 헛간 문 옆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여는 게 보였다.
“재능은 타고 났으니까.”
안으로 들어오며 동감이라는 듯 락터드가 대꾸했다.
“거기다 스승도 보통은 아니었지.”
덧붙이는 소리에 락터드가 눈을 크게 떴다.
“웬일인가? 그런 말을.”
“이만큼 가르쳤으면 할 때 됐지.”
무뚝뚝하게 응수하며 데이먼은 부엌으로 몸을 돌렸다.
“눈치가 좀 없고 가끔 덤벙대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야.”
“그런 건 가르치지 않았으니 괜찮을 걸세.”
넉살 좋게 대꾸하며 락터드도 그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어트는 가게에서 나왔다. 평소에는 늦게라도 성에 가서 책을 읽었지만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시장을 통해 길을 걸어갔다. 술집들을 제외하고 시장에 있는 가게들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다. 간간히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가게를 지나 엘리어트는 길 아래로 내려갔다.
“소문 들었수?”
시장 한 가운데 있는 윌더른에서 제일 큰 술집 문 밖에 테이블 서너 개가 나와 있었는데 그 중 한 테이블에 남자들 둘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소문?”
“북쪽 지방 말이야. 거기 어디서 전쟁이 났다는구만.”
얘기하는 소리가 제법 커 걸어가는 엘리어트한테까지 들려왔다.
“전쟁이? 어휴, 한 동안 조용하더니.”
진저리치며 남자가 술병을 입에 댔다.
“그러게 말이야 한 8 년 조용했나?”
“그런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여기까진 상관없겠지?”
“그렇겠지. 우리 영주님이 함부로 그런 데 나서실 분은 아니니까.”
“하긴 그렇지.”
다행이라는 듯 끄덕거리는 남자들의 옆을 지나쳐 엘리어트는 그대로 시장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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