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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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저녁, 케이그에게 성 안 경비를 맡기고 락터드는 혼자 마굿간에서 말을 끌고 나오고 있었다.
“락터드 경.”
고개를 돌리니 제시 켈리머스가 뒤에서 걸어왔다.
“외출이십니까?”
공손히 그가 말했다. 라곤의 왕실 기사 단원이었던 켈리머스는 룻사에 와서는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잠깐 돌아보려고. 자넨 어딜 나가나?”
“동문 초소에 가는 중입니다. 저녁 회의가 있어서요.”
생각을 떠올리는 얼굴로 켈리머스는 말을 이었다.
“외곽으로 가시는 거면 쳅이라는 선술집에 한 번 들르는 것도 괜찮으실 겁니다. 술맛이 아주 그만이라고 하니까요.”
켈리머스의 눈빛에 곧 고개를 끄덕하며 락터드가 대꾸했다.
“그러겠네.”
성문을 빠져 나온 그는 낮보다 훨씬 한산해진 거리의 기운을 느끼며 말을 달려 곧장 북문으로 향했다.
북문은 수도의 가장 위쪽 경계임과 동시에 룻사의 거의 마지막 경계이기도 했다. 북문 밖으로는 길 하나가 곧게 뻗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열흘을 가면 다른 나라가 나왔다. 하지만 원체 멀어 그리로 왕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북문 밖에 마을이 없긴 해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밖으로 나와 얼마를 올라가 작은 돌산 하나를 넘으면 거기에 작은 빈촌 하나가 있었다.
말을 달려 돌산에 이르자 락터드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룻사는 작지만 부유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런 소문과는 달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빈가는 수도 중심부에서도 종종 있었고 외곽으로 나갈수록 더 심해졌다.
돌산을 너머 그나마 풀이 좀 나 있는 곳에 들어서자 오두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두막 사잇길로 락터드는 걸음을 옮겼다.
초저녁인데도 마을 안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은 있어도 사는 사람이 없는 폐가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걸어가던 그는 마침 제일 가까이 있던 오두막 문이 덜컹 열리는 것을 보았다. 아이 하나가 그 문 안에서 신나서 달려 나오다가 어디에 발이 걸렸는지 그의 앞에서 쿵 하고 넘어졌다.
“어이쿠.”
다가가 락터드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조심해야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하는 그를 아이가 빤히 쳐다봤다.
“엄마~!”
가만히 있다가 아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 아저씨 또 왔어!”
바로 앞에서 귀청이 떨어져라 지르는 소리에 귀에 손을 대며 락터드가 난감히 웃었다. 데비도 그렇고 숲에서 소년을 만났을 때도 그렇고 자신은 처음부터 아이들한테 호감을 얻는 인상은 아닌 것 같았다.
아이의 외침이 닿았는지 오두막 문이 다시 열리고 안에서 여자 하나가 밖을 내다보았다.
“나리.”
락터드를 알아 보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온 여자가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안녕하십니까.”
락터드도 인사를 했다.
“이 저녁에 어쩐 일로..”
허름한 옷차림에 지친 기색이 완연한 젊은 애엄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이는 아직 안 돌아왔는데요.”
“잠깐 둘러보러 온 것 뿐입니다.”
난감한 얼굴로 하는 소리에 신경쓰지 말라는 듯 응수 하고는 아이를 들어 엄마에게 안기며 락터드는 짧게 인사를 했다.
“그럼.”
아이를 받아 들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망설이는 눈으로 쳐다보는 애엄마를 그대로 지나쳐 락터드는 마을의 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에서 애를 안은 채 여자가 여전히 망설이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상주 인구가 오십 명이 조금 넘는, 마을이라고 하기도 뭐한 사람들이 우연히 모여 같이 살게 된 빈촌으로 보였다.
열 채의 오두막을 눈으로 잠깐씩 쳐다보며 걷다가 마을의 끝에 도달하자 락터드는 걸음을 멈추었다. 열흘 전에 그도 우연히 이 마을을 발견했다.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척박한 땅이었다. 땅이 척박해 농사를 짓는데 이용할 수 있는 토지가 별로 없었고 이용할 만한 땅이 없으니 당연히 먹고 살기가 힘든 곳이었다.
돌산을 넘어가면 있는 작은 숲에서 겨울에는 짐승을 잡아 식량을 조달하는 듯 했지만 그것도 녹록치 않은데다가 위험해서 다친 사람도 이미 여럿이라고 한다.
아까 그 젊은 엄마까지 안색이 파리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 걸 봐서 노인과 아이들은 더 안좋을 것이고 이제 곧 춘궁기가 다가옴에 따라 상황은 더 심각해 질 것이다.
지난 번에 윗선에 여기 상황을 보고했다. 하지만 이미 산재한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대부분 여왕과 그리고 알력 다툼에 얽힌 문제였지만) 행정관 및 나머지 사람들이 여기까지 신경을 쓰는 것은 아직 먼 훗날이 될 것처럼 보였다. 신경을 쓴다고 어떻게 해결해 줄지 그것도 좀 의문이었고.
락터드는 이제 슬슬 어둠이 내려 앉는 마을 어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라곤이나 룻사나, 권력과 직위욕에 사로잡힌 귀족과 기사들이 너무 많다. 십 년 동안 전장에서 동료와 그리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기사들을 본 그로서는 그 점이 낯설고 좀 씁쓸했다.
“나리.”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뒤에서 여자의 남편이 그를 향해 뛰어 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아 네.”
머리를 조아리는 그를 향해 락터드 역시 고개를 조금 숙여 보였다. 이 마을에 몇 안되는 젊은이 중 하나로 지난 번에 왔을 때 잠깐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갑자기.”
“그냥 와 봤습니다. 다들 어떤가 해서.”
멋쩍은 듯 웃으며 대꾸 하고는 락터드는 조금 진지해져서 말했다.
“어떻습니까? 저번에 말한 산 너머 땅은.”
지난 번에 왔을 때 남자와 근처에 있는 다른 땅에 대해 잠깐 얘기했다.
“찾아봤지만 별로 적당한 곳은 없습니다. 거기도 여기랑 비슷해서요.”
왜그런지 좀 부끄러워 하는 기색으로 남자가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곤란하게 됐군요.”
사실 이런 곳에 정착했을 정도니 근처는 이미 샅샅이 확인해 봤을 것이다. 진지한 얼굴로 락터드는 중얼거렸다.
“이제 곧 춘궁기로 들어설 텐데, 그 전에 대비책을 찾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굶주림이 더 심해지기 전에 그 전에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어쩔 수 없죠.”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어떻게든 버틸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다 일 납니다. 되는데로 어떻게든 되겠지 할 일도 아니고."
생각에 빠져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는 락터드를 남자가 잠깐 응시했다.
“나리.”
갑자기 남자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 말에 락터드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바쁘실텐데 저희들한테까지 신경을 써 주셔서요.”
“별로 바쁘지 않습니다.”
락터드는 뒷통수에 손을 댔다.
“그리고 해결해 준 것도 없으니 아직 그 말 들을 처지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난감한 듯 말을 하는 락터드를 남자가 존경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딱히 뾰족한 방법을 얘기해 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빈촌까지 걱정해주는 위정자를 본 적 없었다. 애초에 다시 올 거라고도 기대하지 않았고.
“좌우간 더 알아 보죠.”
다시 생각에 잠기며 락터드는 말했다.
“봄이 지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말입니다.”
그의 말에 남자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와 좀 더 얘기를 나누고 밤이 되어 마을에서 나와 락터드는 다시 북문 안으로 들어섰다.
북문을 통과한 뒤 큰 길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 그는 그쪽에 붙어 있는 작은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켈리머스가 말한 선술집이 그 골목 모퉁이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락터드는 출입문 앞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제 갔던 술집보다 훨씬 한산한 선술집이었다. 군데 군데 놓여 있는 테이블 중 두 개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고 술통이 늘어서 있는 데스크 앞 술청 쪽에도 제일 왼쪽 구석에 남자 한 명이 술청에 기대 서 있을 뿐 그 외에는 사람이 없었다.
걸어가 술청 앞에 서서 락터드는 맞은편에 있는 주인을 향해 주문을 했다. 주문을 받고 주인이 술을 따르는 동안 잠시 기다렸다가 곧 내민 잔을 받아 들고는 락터드는 구석으로 걸어갔다.
“어떤가?”
자리에 서서 술잔을 입에 대며 그가 말했다.
“보고 드릴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구석 자리에 혼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제드와 기클쪽에서도 별다른 소식은 아직....”
“그렇군.”
락터드는 잔을 들이켰다. 켈리머스의 말처럼 술맛은 그만이었다.
“그런데 확실친 않습니다만..”
얼굴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듯 남자가 모자를 깊숙이 눌렀다.
“앙리엥 루더 백작 말입니다.”
목소리를 낮추며 상트는 다시 말했다.
“신경을 써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는 덧붙였다.
“추측일 뿐입니다만.”
“알겠네.”
그 대답에 고개를 조금 끄덕해 보이고는 모자를 다시 한 번 눌러 쓰며 상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술집 문을 열고 그가 밖으로 나가자 락터드는 술을 마저 들이키고는 잔을 술청 위에 내려 놓았다. 비어 있는 잔을 잠깐 내려보다가 그도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선술집을 나와 성으로 돌아오자 이미 밤이 깊었다. 그런데 에스터 공작이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늦게 어딜 다녀오나?”
여왕의 제 1 측근인 그가 락터드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외곽을 확인하느라.”
그 말에 괜찮다는 듯 고개를 조금 저으며 에스터 공작은 말했다.
“여왕께서 기다리시네.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셔.”
그렇게 말하며 공작은 몸을 돌렸다.
“가세.”
“네.”
대답하며 락터드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작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모종의 밀담은 아니었는지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은 아니었다.
방 한 가운데 놓인 폭이 좁고 길이가 긴 테이블의 왼 쪽에는 반하드 공작과 레긴 백작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여왕에게 순종적이면서도 중도에 속하는 세력이었다. 다른 한 쪽에는 일리아 백작 부인이 앉아 있었는데 베슨의 영주인 그녀는 여왕의 절대적 지지자였다. 자신을 데려온 에스터 공작이 옆을 지나쳐 백작 부인의 옆 자리로 걸어갔다.
락터드가 들어오자 한창 말을 하고 있던 반하드 공작이 말을 멈추었고 그가 말을 멈추자 테이블 끝에 앉아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여왕이 눈을 떴다. 그 눈동자가 락터드를 향하자 여왕을 향해 락터드는 몸을 숙였다.
“폐하.”
여왕이 입을 열었다.
“바쁘네요 항상.”
유쾌한 목소리였다.
“이국까지 와서 그렇게 애를 쓰니 미안하고 고마워요.”
락터드가 다시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여러 사람이 있었으나 기다리고 있던 건 락터드였는지 눈을 감고 있던 아까와 달리 조금 생기를 띄며 여왕은 입을 뗐다.
“락터드 경이 왔으니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다른 얘기를 좀 하죠. 사실 오늘 안건보다 더 하고 싶던 얘기에요.”
방안에 있던 세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 여왕을 보는 동안 락터드는 걸어가 에스터 공작과 좀 떨어진 테이블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내가 왕좌에 앉은 지도 이제 제법 시간이 지났어요.”
목소리가 낭랑하게 방안에 퍼졌다.
“그런데 아직도 이 자리에 앉은 나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좀 있지요. 누군지는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해요.”
반하드 공작과 레긴 백작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이런 내용이 거두절미하고 여왕의 입에서 직접 나올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백작의 세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어요.”
어깨를 으쓱하며 여왕은 말했다.
“본론을 말하자면 설령 그가 내 목에 칼을 들이댈 작정을 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볍게 얘기하는 여왕의 음성과는 달리 신하들의 표정은 난처해 보였다.
“그러니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요. 루더 백작이 칼을 들이대기 전에 나도 준비를 해야지요.”
“백작의 속내가 어떤지 그걸 추측으로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폐하. 물론 그의 세력이 크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꺼내기 난감한 주제에 이마에 맺힌 땀을 좀 닦아내며 반하드 공작이 말을 했다.
“솔직히 나는 그가 어떤 마음인지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어요.”
여왕이 다시 말했다.
“왕실의 기반을 세우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고 루더 백작이 좋은 본보기가 되겠지요.”
여왕의 말뜻을 알아 들은 신하들의 안색이 조금씩 변했다. 방 한 쪽에 서서 락터드는 잠자코 여왕의 말을 듣고 있었다. 피셔드 대공의 말처럼 여왕은 야심가치고는 공정했지만 잔인했다.
“그, 그렇다고 해도 폐하의 신하입니다. 무고한 자를 몰아세우시는 건....”
반하드의 말에 여왕의 표정이 조금 재밌다는 듯 변했다.
“그는 나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지도 보이지도 않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유가 되지 않은가요?”
“억지이십니다.”
더듬거리며 이번에는 레긴 백작이 말을 했다.
“수 백 명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폐하, 백성들의 반감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고 받는 반하드 공작과 레긴 백작의 말을 들으며 여왕의 얼굴이 점차 가면처럼 무표정해졌다.
“좋습니다. 그럼 달리 말하죠.”
감정이 섞이지 않은 음성으로 여왕이 락터드를 불렀다.
“락터드 경.”
모두의 시선이 이번에는 락터드에게 향했다.
“루더 백작이, 만에 하나 반란이라도 주도한다면 당신이 그를 제압할 자신이 있습니까?”
락터드는 여왕을 쳐다보았다.
“네, 폐하.”
담담히 락터드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방 안이 술렁거렸다. 그 대답이 무언가에 대한 신호라도 된 듯 안색이 변해 반하드와 레긴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만족스러운 얼굴이 된 것은 여왕 한 사람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다시 표정이 돌아온 그녀가 예의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들의 의견은 고려하겠어요. 아직은 지켜보죠. 하지만 만약 상황이 조금이라도 바뀐다면 나도 망설이지 않겠다는 걸 알아 두세요.”
여왕은 말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여전히 얼굴이 심란한 반하드 공작과 레긴 백작의 표정을 보며 락터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시작하는 공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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