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장(?)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나는 홀로 서 있었다.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앞에서 새하얀 공간보다 더욱 빛나는 섬광과 함께 한 노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이미 누군지 알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남지 않아 결국 바닥에 철퍼덕하고 주저앉았다.
노인은 그런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인상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디어 '이야기'의 끝에 도달했구나."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지만 이미 내가 모르는 사이 몇 번이나 내가 들었을 말을 하는 노인을 보며 참아왔던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직 끝은 아닐 텐데요."
눈앞의 존재는 나의 대답에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직 완전히 끝이 난건 아니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그것만 끝을 낸다면 너의 길고 긴 이야기가 끝이 나는 거니까."
눈앞의 존재는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이야기는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구나. 어땠지?"
그의 질문에 나는 마주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바닥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야 물론. 이번 이야기는 망작이었네요."
그는 나의 대답에도 한결같은 미소로 물었다.
"망작이라...... 네가 원하던 아무도 죽지 않는 이야기가 완성된 거 아니었니?"
"그렇죠.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아무도 죽지만 않았죠."
바닥에 떨구어져 있던 시선을 다시 들어 그를 바라보며 회상했다.
" '전능공'은 저를 이곳에 보내기 위해 능력을 무리하게 쓰다 결국에 감정을 잃었어요."
불가능이 없는 무엇이든 가능한 황금빛 머리칼에 항상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응원해주었던 화사한 미남인 그는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되었다.
" '추락천사'는 저를 돕기 위해 타천을 해버렸죠."
자신의 신에게 선택받는 영광을 얻고 '주인공'의 옆에 서고자 노력했던 그녀는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신앙을 저버리고 말았다.
" '무적공'은 저를 지키다가 이 세상에서의 기억을 전부 잃어버렸어요."
무능했던 나를 아무 대가 없이 수없이 지켜주었던 그분은 이제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도 구해내지 못 한 사람이 있습니다."
도달하지 못한 그곳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나는 아직도 구해내지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그의 질문을 질문으로 되물었다.
"과연 이게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는 나의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물론 너의 이 이야기도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있지. 분명히 '전능공'은 감정을 잃었지만, 너와의 추억이 없어진 건 아니야. 성격이 좀 바뀌었을 뿐이지. 바로 너처럼. 그리고 '추락천사'는 타천했을 뿐 사는 데 아무 문제 없잖아? 오히려 너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을 거야. 그리고 '무적공'은 기억을 잃었지만, 그 기억을 다시 쌓을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전부 살아있지. 추억이란 건 다시 쌓아나가면 되는 거야."
그는 나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야기'가 끝난다고 하더라도 구해낼 수 있지. '이야기'의 끝이 너의 삶의 끝이 아니잖아?"
대답을 마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머리를 툭툭 치고는 자신의 답에 스스로 만족스러워했다.
"그렇군요. 당신도 제 이야기가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음, 그들도 너의 이야기를 만족한다고 말을 하지 않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물음에 긍정했다.
"이만큼 완벽한 이야기는 앞으로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를 따라온 게 자랑스럽다고까지 하더군요."
나는 천천히 바닥을 손으로 짚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전신에 힘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그럼 이제 '이야기'의 끝을 볼 거니?"
그가 나에게 확실한 답을 듣고 싶은지 다시 한번 물어보았고.
나는 그런 그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잠시 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건 제가 바라던 해피 엔딩이 아니에요."
스르릉.
허리춤에 꽂혀있던 검을 천천히 뽑았다.
눈앞의 존재는 그런 나를 보며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는 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 '저'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이야기'는 끝내지 않겠어요."
나의 말에 그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후회하지 않는 거니?"
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니까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미 몇 번이나 해왔던 일이다.
"다음의 "제"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슈칵!
나의 목덜미에 놓인 검이 빠르게 목을 훑고 지나갔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정신이 어두워졌고 그렇게 나는 끝이 났다.
****
"네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도 아니지."
자신의 목을 그어 생을 마감한 그를 보며 말했다.
"너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끝나지 않았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야."
새하얗던 주변 배경이 검게 변하며 쓰러져있던 시체도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아, 이번엔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 정말 기대되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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