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빌런 민의연 시점 45 [끝]
모든 일행을 한 곳으로 모으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절멸과 이브가 너무 오래 걸린다고 도와주려 했지만, 의연은 한사코 거절하고 끝까지 혼자서 완수했다.
만능성, 잠운룡, 루시아, 독화향, 독설화, 메리.
모두를 무적공과 욕망공의 곁에 나란히 눕혔다.
"......"
"정신 차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절멸이 일행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의연의 정신이 나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다독였다.
"... 괜찮습니다. 아무렇지... 않아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의연은 누워있는 메리의 곁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 당신은 누구시죠?"
"아까 말했잖아. 너라고."
"저는 당신 같은 '저'는 몰라요."
의연이 절멸의 말을 단칼에 부정했다.
"저는 다른 회차의 '저'보다 많은 편지를 봐왔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에 대한 건 전혀 본 적 없습니다. 당신 같은 존재가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어요. 더군다나 편지에서 실체가 나타나다니.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뭐, 그렇겠지. 난 우체국에 남긴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너도 알잖아. 크리시아 녀석이 이계의 틈새를 옅볼 수 있다는 걸."
"... 당신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의연의 말에 절멸은 그와 마찬가지로 무적공의 옆에 주저앉았다.
남아있던 이브는 둘을 보며 쭈뼛거리며 옆에 조용히 앉았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절멸이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절멸의 짐승.
천아와 민의연이 그 정체를 전혀 모르는 '민의연'.
그는 민의연처럼 상당히 특별한 선택을 하게 된 '민의연'이었다.
"나도 너랑 별다를 건 없었어. 그냥 평범하게 편지를 보며 길을 찾아 나서던 민의연이었지."
굳이 다른 거라면 한 가지.
무적공이라는 존재에게 만능성보다 더 큰 경의와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정도.
"네게 있어서 무적공은 어떤 존재지?"
"무적공은 제 영웅이시죠. 언제나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어요. 예전부터 오늘까지 쭉."
"영웅. 그렇긴 하지. 나는 거기서 끝이 아니야. 내게 그분은 하나뿐인 가족이야. 어머니. 그리고 스승님."
"스승님?"
의연이 무적공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어머니라고 하는 것에는 이상하다고 안 느껴?"
"뭐...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언제나 절 위해 주시는 분이시죠."
"하긴, 지금 네 몸을 보면 스승님이라는 단어완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긴 해."
절멸이 의연의 몸을 쭉 훑어보며 이해했다.
"저도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땐 운룡과 같이 열심히 했어요. 나중에 시간이 없었을 뿐."
"그런 걸 변명이라고 불러. 난 멈추지 않았어. 그분을 따라잡고, 도움이 되기 위해서 끝없이 갈고 닦았어."
이 회차의 민의연이 걷는 길은 자신의 동료가 빛을 발할 길이라면.
절멸의 짐승이 걷는 길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무적공과 그녀의 제자인 자신이 빛을 내는 길이었다.
절멸이 겪게 되는 거의 모든 일과 문제를 무적공과 그의 힘만으로 해결했다.
"나중에는 카린 누나에게도 배우게 됐지."
무적공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그녀의 딸인 카린과도 친해지게 되어 최종적으로 절멸은 무적공과 단절공의 제자가 되었다.
"무적공과 단절공의 제자가 되는 회차라니. 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회차네요."
"그럴지도 모르지."
의연과 절멸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이브가 살짝 끼어들었다.
<무적공이 얼마가 강한지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는 없을 텐데요.>
절멸은 이브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 있던 게 아니니까 문제란 말이지."
<네?>
"그쪽은 이야기해봐야 의미 없으니까 그만하자."
절멸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는지 이브의 질문을 넘어가 버렸다.
"... 그런데 왜 이야기를 못 끝내신 거죠?"
다음으로 의연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가 보기에 절멸은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닌 존재였다.
자신과 같은 '민의연'이라는 게 믿기 힘들 정도로.
신조차 죽였다면, 그를 힘으로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전혀 없다는 거다.
하지만 편지로서 그가 남아있다는 건 분명 끝이 좋지 않았다는 뜻.
"... 내가 걸었던 길은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라는 거지."
복잡한 거미줄처럼 수많은 선택지가 있는 의연의 길과는 다르게 오로지 단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던 절멸의 길은 그가 스스로 보기엔 돌파구가 없는 실패한 길이었다.
"하지만 남겨야 할 게 많은 회차였어."
절멸은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흑철과 찰나를 바라봤다.
"너도 알고 있겠지? 이 세상이 신이라는 것들의 이야기를 만들 도구라는 걸. 결국, 최종적으로는 그 녀석들이랑 싸워야 해."
"... 저는 싸우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이야기를 끝내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 지금도?"
의연은 절멸의 말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아니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이곳으로 왔을 리 없으니까."
"......"
"내가 남기고 싶었던 건 힘이다. 너나 다른 회차의 '내'가 걷는 길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힘 말이야."
신을 죽이고 악마를 죽이고 세상을 완전히 끝내버릴 힘.
절멸이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기에 얻을 수 있었던 힘.
"그리고 세상을 끝내며 알게 된 모든 신의 진명이다."
"힘과 진명. 이해했어요."
"하지만 편지로는 진명은 남길 수 있을지 몰라도 힘을 남기진 못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절멸의 짐승'이라는 나 자체를 남겼다."
열심히 설명을 듣고 이해하던 의연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순간 사고가 멈췄다.
"갑자기 잘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절멸이 자신을 가리켰다.
"나라는 존재는 정확하게는 '민의연의 영혼의 한 조각'이다."
"예? 한 조각이요?"
"너도 알고 있겠지? '민의연'은 죽으면 이계의 틈새로 가 편지를 쓰고 중간계에 처음 온 날로 되돌아간다."
"네. 기억을 잃기 때문에 편지로서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남기게 되죠."
"기억만으론 안 돼. 힘이 없는 상태에서 신의 진명만 알아봤자 표적이 될 뿐이야. 그렇기에 나는, 특별한 방법으로 영혼을 쪼개 편지에 담았다. 그 한 조각이 나. 그리고 나의 다음 회차부터는 전부 '영혼 한 조각이 모자란 민의연'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당신이 저의 일부라는 건가요?"
"그래. 너는 나의 대부분이라는 거지."
"그럼... 다시 하나로 합쳐질 수도 있는 건가요?"
의연의 물음에 절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그게 바로 내가 지금 이런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유야. 절멸의 짐승이 가지고 있던 힘과 기억을 모두 '민의연'에게 돌려주는 거지."
"그럼 다음 회차가 시작하자마자 나타나서 합쳐지면 되는 거 아닌가요? 신을 죽이는 힘을 가지고 시작하는 거잖아요."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니까 그렇지."
절멸의 짐승이 굳이 '신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원할 때' 나타나는 것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다른 평범한 편지들과 달라.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힘은 소모되고 다시 늘어나진 않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평범한 편지가 아니라 영혼의 조각이다. 한 번 합쳐지면 그걸로 끝. 내 힘을 이은 '민의연'이 죽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냥 평범한 '민의연'이 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절멸은 정말로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 확실한 회차를 원했다.
자신의 힘이 없더라도 신과 대적하게 될 정도로 이야기가 진행된 후.
'민의연'이 신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원할 때 나타나게 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편지가 된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나타나 본 적이 없다 보니 이번에도 늦어버렸지만 말이야."
절멸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
"이제 끝내자. 이 회차에서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신들이 계속 방해만 할 뿐이야."
"그렇... 네요."
의연은 잡고 있던 메리의 손을 놓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이브. 머리에 있는 왕관 내놔."
절멸이 곁에서 자신과 의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 왕관은 어째서.>
"왜라니. 그걸 매개로 의연과 불사의 계약을 맺은 거 아니었나? 연결된 기운이 느껴지는데."
<아. 그래서 아담은 제게 이걸.>
죽지 않고 봉인만 당한 아담과 의연의 계약은 아직도 유효한 상태였다.
죽이기 위해선 계약을 파기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던 아담이 이브에게 계약 때 이용했던 왕관을 미리 맡겨둔 것이었다.
이브가 절멸에게 아담이 맡긴 죄악의 왕관을 넘겼다.
"이걸 부수면 너 죽어."
"네."
"준비됐겠지?"
"... 네."
의연의 말에 절멸이 흑철을 뽑아들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들고 있던 죄악의 왕관을 살짝 위로 던지고는 흑철로 왕관을 반으로 쪼갰다.
카앙!
큰 쇳소리와 함께 왕관이 반으로 쪼개지더니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며 의연의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 지금까지 고생했어."
절멸의 말과 함께 의연의 가슴에서 아담의 심장이 사라졌다.
가슴 한쪽이 텅 비는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꼈다.
육체의 동력이 사라진 의연의 눈에서 생기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의연에겐 많이 익숙한 죽음의 감각.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되살아 날 방법이 전혀 없는 첫 죽음.
의연의 육체가 메리의 옆으로 쓰러졌다.
"다시... 나는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걸까."
절멸은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했는지 빛을 내며 사라졌다.
<제발... 제발 아담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이브는 의연을 보며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민의연의 회차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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